소설리스트

7번째 환생-92화 (92/243)

# 92

<아픈 손가락>

에릭 한센은 어린 시절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었다.

그러나 생계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한센 가문은 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부터 일찍 이민을 와 자리를 잡은 신흥 로열패밀리다.

게다가 노르웨이 본국에도 막강한 재력가들이 한센 가문과 핏줄로 연결돼 있다.

미국에 있는 에릭의 친척들은 부모 잃은 남매를 방치하지 않았다.

그의 고모, 이모, 사촌 형제들은 에릭이 부모의 유산을 무사히 상속받을 수 있도록 후견인 노릇을 해줬다.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상속 재산을 노린 싸움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굳이 에릭의 재산을 탐내지 않아도 될 만큼 한센 가문 전체가 부유했기 때문이다.

부모를 잃은 에릭은 감정 표현을 극도로 절제하게 됐고, 천재적인 능력을 보이며 하버드에 조기 입학한다.

그는 성년이 되자마자 부모의 재산을 상속받아 금융 투자에 뛰어들었다.

이후로는 모두가 아는 대로 기업 인수 합병의 역사를 새로 썼다.

에릭은 세계적인 금융 위기가 터졌을 때 헐값에 나온 매물들을 무작정 사들였고, 피도 눈물도 없는 구조 조정을 감행해 불황을 견뎌냈다.

이후 경기가 회복되면 헐값에 사서 억지로 버틴 기업을 몇 배 비싼 가격으로 되팔았다.

말은 쉽지만 과감한 결단력과 구조 조정 능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패가망신하기 딱 좋은 투자 방법이다.

그러나 에릭은 경기 회복 싸이클을 완벽하게 예측하며 승승장구했다.

물론 M&A 과정에서 살인적 구조 조정에 내몰리는 직원들의 삶은 파탄이 났지만, 에릭 한센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때문에 월가에서는 에릭을 천재 투자자로 추앙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 악마 경영자로 비난하는 목소리 역시 잦아들지 않고 있다.

최치우는 에릭 한센이 건드리는 M&A마다 성공시킨 비결이 따로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무리 대단한 천재라도 자칫하면 모든 걸 잃는 투자에서 100% 성공할 수는 없다.

그런데 에릭의 초창기 투자 패턴은 과감해도 너무 과감했다.

마치 누가 불황에 사기 좋은 기업을 알려주고, 언제쯤 경기가 회복되는지 예지라도 해준 것 같았다.

아직은 가설에 불과하지만, 아마 네오메이슨이 에릭에게 도움을 줬을 것이다.

한센 가문 전체가 네오메이슨의 멤버일 확률도 높다.

그들은 천재적 지력과 사이코패스 같은 냉정함을 지닌 에릭을 얼굴로 내세웠다.

어쩌면 에릭이 부모를 잃었기에 더욱 조종하기 쉽다고 여겼을지 모른다.

아무튼 에릭 한센은 유태인 못지않은 돈을 주무르는 거물이 됐다.

그는 일관되게 돈만 좇는다.

전기차 회사를 인수했지만, 전기차 기술 발전이나 친환경 등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다.

직원들의 미래 역시 안중에 두지 않는다.

오직 이슈를 만들어 시가총액을 높이고, 구조 조정을 통해 비용을 줄인다.

그렇게 한껏 몸값을 부풀려 회사를 매각하면 그만이다.

탐욕의 결정체인 에릭 한센의 실상을 아는 사람들은 그를 비난하고 저주한다.

하지만 대중은 복잡한 진실에 관심이 없고, 에릭을 욕하는 사람들도 감히 그에게 덤비지 못한다.

“우선은 포커페이스 뒤에 숨겨진 민낯을 봐야겠지.”

최치우는 텅 빈 올림푸스 여의도 사무실에 서 있었다.

일요일 저녁이기에 당직을 서는 직원들도 모두 퇴근했다.

혼자 한강과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며 생각을 정리하기 딱 좋았다.

“원래부터 냉혈한이었는지, 아니면 부모를 잃고 감정을 상실한 건지 몰라도……. 유일한 직계 가족인 여동생을 각별히 여기는 건 분명해.”

어나니머스가 에릭의 감정까지 조사해 주진 않았다.

그러나 데이터를 유심히 관찰하면 숨어 있는 감정을 파악할 수 있다.

에릭과 달리 그의 여동생은 공부나 경영에 재능이 없었다.

대학교 역시 기부입학이라는 편법을 이용해 주립대 졸업장을 땄다.

이후 소소하게 시작한 사업은 모두 실패했다.

하지만 에릭은 여동생이 원하는 사업이라면 무조건 투자를 해줬다.

결국 그의 여동생은 에릭의 든든한 후원을 받아 패션 사업에 정착했다.

에릭의 인맥으로 헐리웃 배우와 셀렙들이 옷을 입어주고 홍보해 준 결과였다.

나름 준 명품으로 성공을 거뒀지만, 그래봐야 에릭 입장에서는 세발의 피다.

딱히 이익은 안 나는데 신경 써야 할 일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릭이 여동생의 사업을 계속 후원한다는 건 가족의 정 때문일 것이다.

최치우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에릭의 약점이 여동생이라고 확신했다.

우웅- 우우웅-

그때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울렸다.

최치우는 여의도 전경을 내려다보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최 대표님, 저 국제일보의 김태형 기자입니다.”

“김 기자님. 지금 해외이신 거죠?”

“네, 아직 귀국 전입니다. 런던에 도착해서 바로 전화드렸습니다. 대표님께서 궁금해하실 거 같아…….”

“감사합니다. 이 보답은 오래오래 하겠습니다.”

“하하하! 아닙니다. 저는 대표님을 도울 수 있어 영광입니다.”

국제일보는 국내 유수의 언론 중에서 외국 뉴스를 가장 많이 다루는 신문이다.

그래서 다수의 기자들이 해외에 특파원으로 진출해 있다.

최치우는 국제일보에서도 알아주는 특종 메이커인 김태형 기자와 심상치 않은 대화를 이어갔다.

“대표님께서 주신 정보를 바탕으로 파보니 수상한 점이 여럿 나왔습니다. 퍼즐을 조금 더 맞춰야겠지만, 조세회피처를 이용한 건 확실합니다.”

김태형 기자의 입에서 최치우가 기다리던 말이 나왔다.

최치우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잡았다!’

하지만 겨우 이 정도로 기뻐하기엔 이르다.

최치우는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김 기자님, 올림푸스가 국제일보에 광고를 좀 넣어야겠습니다. 기자님 때문이라고 광고국에 잘 말해둘 테니 생색 많이 내세요.”

“앗,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어야죠. 오래 가려면 기브 엔 테이크가 확실해야 합니다.”

“역시 대표님은 다르십니다. 최대한 빨리 조사를 마무리 짓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어떤 언론에 터트리면 좋을지, 그것도 고민해 주세요.”

“네!”

김태형 기자는 마치 최치우의 부하 직원이라도 된 것처럼 충실히 대답했다.

최치우가 그에게 제공한 혜택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전화를 끊은 최치우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기대해, 에릭.”

남아공에서 레드 엑스를 몰살시키고 돌아온 최치우는 곧바로 더 큰 싸움을 시작했다.

곧 소리 없는 총격이 에릭 한센을 향해 쏘아질 것 같았다.

***

뉴욕 타임즈와 워싱턴 포스트에서 미끼를 물었다.

국제일보의 김태형은 특종을 기꺼이 양보했다.

애초부터 최치우가 건네준 정보가 없었다면 파고들기 힘든 사건이었다.

더구나 최치우는 김태형이 국제일보의 유럽 담당 편집장으로 승진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약속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김태형은 특종을 넘기며 뉴욕 타임즈와 워싱턴 포스트의 기자들에게도 빚을 지웠다.

요목조목 따져도 김태형 입장에서는 톡톡히 남는 장사였다.

최치우도 흐뭇하게 사건의 추이를 지켜봤다.

뉴욕 타임즈와 워싱턴 포스트는 서로 경쟁하듯 1면 톱기사로 특종을 다뤘다.

헤드라인도 섹시했다.

<1% 슈퍼 리치의 탐욕, 그 끝은 어디인가?>

금융 재벌로 유명한 에릭 한센의 여동생 델피 한센은 물려도 단단히 물렸다.

그녀는 조세피난처인 버진 아일랜드에 유령 회사를 세워 거액을 탈세하고, 회사의 공금을 사적으로 횡령했다.

델피 한센이 돈이 없어서 탈세와 횡령을 했을 리 없다.

그러나 세계적인 거부들도 세금 내는 걸 무지하게 아까워한다.

오죽하면 프랑스 최고의 재벌은 국적을 세금이 적은 벨기에로 바꾸겠다고 공언할 정도다.

델피 역시 간단하지만 치명적인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상상하기 힘든 수준의 사치를 즐기다 보면 때때로 현금이 부족해질 수도 있다.

그때 누군가 조세피난처를 통한 탈세와 횡령 방법을 알려줬을 것이고, 경영 능력이 떨어지는 델피가 단독으로 저지른 범행 같았다.

에릭이 직접 맡았다면 이토록 허술하게 구멍이 숭숭 날 리 없다.

아마 에릭도 여동생의 일탈을 뉴스로 접하고 적잖이 당황했을 것이다.

그렇게 신경을 많이 써줬는데 이런 사고를 칠 거라고 예상이나 했겠는가.

이제는 에릭 한센이 나서도 쉽게 수습하기 힘들다.

뉴욕 타임즈와 워싱턴 포스트 1면에 기사가 난 이상 미국 검찰도 수사를 할 수밖에 없다.

언론은 1%의 탐욕으로 초점을 맞췄고, 여론 또한 불처럼 타올랐다.

인맥과 돈으로 무마하기엔 사건이 너무 커졌다.

델피 한센 때문에 에릭 한센의 이름도 덩달아 거론되며 한센 가문이 주목을 받았다.

최치우는 단순히 에릭의 여동생은 건드려 소소한 복수 따위나 하려는 게 아니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에릭이 어떻게 나올지, 또 그의 뒤에 있는 한센 가문과 네오 메이슨은 어떻게 나올지 확인하려는 것이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절대적인 전략대로 적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최치우는 대표실에 앉아 임동혁에게 질문을 던졌다.

미국의 패션 사업가인 델피 한센의 탈세와 횡령을 터트린 장본인이 최치우란 걸 아는 사람은 극소수다.

보통 사람들은 상상조차 못 할 것이다.

임동혁은 진지한 얼굴로 곧 벌어질 일들을 예견했다.

“미국 법원이 중형을 선고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가뜩이나 월가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있는데, 위험한 타이밍에 델피 한센이 본보기로 걸렸습니다.”

“얼마나 나올까요?”

“5년 이상 부를 것으로 봅니다.”

미국 법은 확실히 무섭다.

우리나라 같으면 재벌이 탈세나 횡령을 해도 웬만하면 집행유예로 풀려난다.

성범죄나 살인의 형량도 크게 높지 않다.

그러나 미국에서 큰 죄를 지으면 평생 감옥에서 썩어야 한다.

대신 미국은 보석 제도가 성행하고 있다.

최치우는 델피 한센이 1년 정도 형을 살고 보석으로 나올 거라 예상했다.

“보석으로 풀려나도 평생 상류층으로 살아온 철없는 아가씨가 감옥 생활에 적응할 수 있을까요?”

“힘들 겁니다. 아주 많이.”

“그걸 지켜보는 에릭의 마음도 힘들어지겠군요.”

이럴 때 보면 최치우 역시 찬바람 풀풀 날리는 냉혈한 같았다.

그는 한번 적으로 인식한 사람에게는 감정을 두지 않는다.

전쟁터에서 내가 먼저 칼을 거두면 적의 칼에 등을 찔리게 마련이다.

최치우는 인간의 잔인한 본능을 누구보다 깊이 경험해 봤다.

“어쨌든 델피 한센의 패션 회사는 무너지게 생겼고, 가문의 명예에도 먹칠을 했는데……. 이걸 어떻게 수습하려나.”

마음 같아선 당장 뉴욕으로 날아가 에릭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가 뉴욕 타임즈 기사를 보며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프로메테우스를 구입했냐고 물어볼 때보다 10배는 더 짜릿할 것 같았다.

짝!

최치우는 손뼉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른 에릭에게 알려줘야겠습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이거 내 작품이라고 말해줘야죠. 그래야 에릭이 제대로 반응하지 않겠어요?”

임동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재계 최악의 망나니로 유명했던 임동혁이지만, 최치우 앞에서는 명함도 내밀기 힘들었다.

“그거 압니까? 뭔가에 한번 꽂힌 대표님은 진짜 미친놈 같다는 거.”

“칭찬으로 듣죠.”

“당연히 칭찬입니다.”

내내 무표정하던 임동혁이 미소를 지었다.

그가 처음 최치우에게 끌렸던 것도 광기(狂氣)를 알아봤기 때문이다.

천방지축의 망나니 임동혁이 인정하는 유일한 남자 최치우는 한 걸음 더 과감하게 나아갔다.

“만약 에릭이 흔들리면…….”

“흔들리면?”

“이 기회에 그가 가장 신경 쓰는 사업을 공격합시다.”

최치우는 빈틈이 보이면 놓치지 않고 물어 뜨는 맹수를 닮았다.

델피 한센의 일로 에릭이 작은 틈이라도 노출한다면, 그는 뼈아픈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

최치우는 단순한 반격이 아닌, 올림푸스의 영향력을 한층 키울 작정을 했다.

판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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