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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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 본부는 뉴욕 이스트 강변에 우뚝 서 있다.
그 이름도 유명한 록펠러 가문의 존 D. 록펠러 주니어가 거금을 쾌척해 세계의 정부라 불리는 UN 본부가 뉴욕에 세워진 것이다.
최치우는 몸에 딱 맞는 정장을 빼입고 UN 본부로 들어섰다.
그는 격식을 갖추면서도 너무 답답하거나 화려해 보이지 않는 정장을 선택했다.
한국에서 유명 연예인의 코디를 책임지는 스타일리스트에게 코칭을 받은 것이다.
2박 3일 내내 외부로 보이는 무엇 하나 사소하게 여기지 않았다.
기업가 포럼이 열리는 세미나실로 들어선 최치우는 지정 된 좌석에 앉았다.
올해 초청을 받은 50인의 CEO들 자리에는 각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이 자체로 가문의 영광이다.
최치우의 어머니도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어머니는 최치우가 대통령에게 훈장을 받을 때보다 더한 영광으로 생각했다.
보통 사람일수록 UN이 엄청난 권위를 가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최치우는 달랐다.
그는 50인에 선정되어 초청을 받은 것 자체에는 큰 감흥이 없었다.
다만 UN과 뉴욕에서 누구를 만날지,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고민할 따름이었다.
‘저기 있군.’
자리에 앉아 주위를 살핀 최치우가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건너편 의자에 에릭 한센이 앉아 있었다.
최치우의 예상대로 에릭도 UN의 초대를 받은 것이다.
찌릿-
마침 에릭 한센 또한 최치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UN 본부의 세미나실에서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쳤다.
남들은 모르는 전류가 허공에서 튀고 있었다.
‘그때는 파티에 들린 동양인 게스트였지만, 여기선 UN에게 인정받은 50인으로 같이 앉아 있지.’
최치우는 에릭을 마주본 채 여유롭게 웃었다.
반면 에릭은 살얼음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처척- 처억!
그때였다.
누군가 중요한 사람이 들어오는지 주위에서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기업가 50인이 아닌 사람들은 뒤쪽의 의자에 앉아 있는데, 그들이 일제히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최치우는 고개를 돌려 누가 들어오는지 확인했다.
‘UN 사무총장이다.’
세계 대통령으로도 불리는 UN의 사무총장이 세미나실로 들어왔다.
실권은 크게 없지만, 그래도 무시할 수 없는 세계적인 유력인사다.
UN의 힘이 명분에 있다면, 사무총장은 그 명분을 만들 수 있는 당사자다.
“반갑습니다. 이렇게 자리를 빛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얼마 전 새롭게 취임한 요아힘 마빈 사무총장은 50인의 기업가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곧 최치우에게도 차례가 돌아올 것 같았다.
스윽-
최치우는 미리 자리에서 일어나 요아힘 사무총장을 기다렸다.
“반가습니다. 올림푸스, 아주 인상적이어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멀리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요아힘 총장은 최치우를 보고 곧바로 올림푸스를 언급했다.
실무진이 아닌 사무총장이 직접 특정 회사를 언급하는 건 이례적인 케이스다.
그만큼 올림푸스를 특별히 봤다는 뜻이다.
최치우도 예상 못 한 일이었다.
“감사합니다. 많이 배우고 가겠습니다.”
“우리 UN이 여기 모인 분들에게 많이 배워야 합니다.”
요아힘 사무총장은 세간의 평가대로 겸손한 태도가 몸에 배인 듯했다.
너무 유약하고 온화한 타입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최치우가 느끼기엔 아니었다.
UN 내부의 정치와 암투 또한 장난이 아니다.
이곳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는 건 내공이 어마어마하다는 뜻이다.
한국의 유영조 대통령처럼 외유내강 스타일인 게 분명해 보였다.
‘덕분에 뉴스 기사는 많이 나오겠어.’
최치우는 처음 만난 요아힘 사무총장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가 특별히 올림푸스를 언급한 내용이 기사화되지 않을 리 없다.
국내외 여러 언론에서 요아힘 사무총장의 멘트를 중요하게 다룰 것이다.
올림푸스와 최치우는 몇십 억 광고보다 더 값비싼 홍보 효과를 얻은 셈이다.
그것만으로도 UN에 온 본전은 뽑고도 남았다.
다시 자리에 앉은 최치우는 단상을 주시했다.
사무총장의 환영사와 함께 세미나가 시작된다.
50인 중 대표 연설을 맡은 사람은 우뱅의 CEO다.
스마트폰으로 개인택시를 부르는 서비스를 만들어 전 세계 교통망을 장악한 인물이었다.
그만큼 대단한 면면의 주인공들만 UN의 공식 초청을 받았다.
최치우는 각자의 영역에서 세상을 좌우하고 있는 이들과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길 원했다.
오늘 밤, 초청을 받은 기업가 50인 외에는 누구도 참석할 수 없는 비공개 파티가 열린다.
진짜 게임은 그때 벌어질 것이다.
최치우는 곧 다가올 밤을 기다리며 요아힘 사무총장의 환영사를 들었다.
시시껄렁한 귀빈이 아닌, UN 사무총장이 최치우를 포함한 50인을 환영하고 있다.
명실상부 천외천의 세계에 발을 들인 것이다.
요아힘 총장의 연설은 유려했고, 흠 잡을 구석이 없었다.
이윽고 우뱅의 창업자가 단상 위로 올라가 자신이 어떻게 70조 원 가치의 회사를 만들었는지 이야기했다.
연설을 들으며 UN의 밤을 준비하는 최치우의 표정은 차분했다.
하지만 속 깊은 곳에서는 심장이 뜨겁게 뛰고 있었다.
같이 앉은 50인 대부분이 시가총액 10조 원 이상의 회사를 소유하고 있다.
또한 대다수가 서양의 문화권에서 혜택을 받으며 자랐다.
최치우는 UN 덕분에 생각보다 일찍 맹수들이 가득한 정글에 뛰어든 기분이었다.
‘이 느낌… 아주 좋아.’
다른 차원에서 전투를 나가기 전, 칼을 갈며 만끽했던 야생의 기운이 혈도를 타고 흘렀다.
최치우의 영혼에 각인 된 전사의 본능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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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의 기업가 포럼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첫 째는 세계 최고의 기업가들을 초청해 이야기를 듣고, UN과 함께 국제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을 찾는 것이다.
또 다른 의미는 초청을 받은 기업가들이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는 것이다.
UN을 매개로 세계 최고의 CEO들이 자연스레 친해질 수 있다면, 그로인한 부가가치는 엄청날 게 분명하다.
오전과 오후에 걸쳐 진행되는 세미나는 첫 째 의미에 충실한 행사다.
반면 저녁을 먹은 후 비공개로 진행되는 파티는 두 번째 의미를 충족시키기 위해 UN에서 특별히 공을 들였다.
최치우는 드디어 본게임이 시작됐다고 판단했다.
파티가 열리는 연회장 안으로는 기업가 50인과 소수의 UN 관계자, 그리고 신분이 확실한 스텝 직원들만 들어올 수 있다.
이 안에서 벌어진 일은 외부로 유출되지 않는다.
실제로 UN의 기업가 포럼 파티에서 구두로 체결되는 계약과 업무 협약이 어마어마하다는 추측성 보도가 나올 정도였다.
어쨌든 흔치 않은 기회인 건 확실하다.
각자의 영역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50명의 CEO가 한 자리에 모이긴 매우 힘들다.
더구나 비공개 회동이란 기회는 더욱 귀하다.
2시간에서 3시간 정도 진행되는 파티를 무가치하게 흘려보낼 수도 있다.
하지만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빅딜을 성사시킬 수 있는 시간이다.
최치우는 당연히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는 UN 파티에서 새로운 거래를 트거나 계약을 맺을 생각은 없었다.
천상계의 괴물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걸로 충분하다.
그러면서 기대 이상의 기회가 주어지면 확실하게 낚아챌 작정이었다.
물론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었다.
‘에릭 한센.’
파티가 막 시작됐고, 은은한 클래식 음악이 연회장의 공기를 녹였다.
50인의 CEO 중에는 서로 친분이 있는 이들도 있었다.
그렇게 몇몇 소그룹이 형성되고, 다소 어색한 분위기에서 조금씩 대화를 트고 있었다.
그러나 최치우는 샴페인 잔도 들지 않은 채 에릭부터 찾았다.
에릭 한센은 세미나에서 연설을 한 우뱅의 CEO를 비롯해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아는 사람들과 함께 서 있었다.
50인의 CEO 중에서도 꼭대기에 서 있는,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하고 있는 포식자들이다.
우뱅의 CEO 역시 세미나에서는 공존과 세계의 연결 등 따뜻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하지만 우뱅은 무분별한 서비스 확장으로 각 국의 운송 회사와 운전기사들을 벼랑 끝에 내몰고 있다.
저벅저벅-
최치우는 망설임 없이 에릭 한센의 무리로 걸어갔다.
그의 걸음이 향하는 방향은 명백했다.
최치우가 점점 가까워질 때마다 연회장의 공기가 무거워지고 있었다.
수준 높은 연주자들의 클래식 음악이 울리고 있지만, 마치 액션 영화의 긴장감 넘치는 사운드 효과가 환청처럼 퍼졌다.
몇 걸음 떼지도 않았는데 연회장 안 모든 사람들이 최치우를 주시했다.
“에릭.”
그에게 다다른 최치우가 입을 열었다.
에릭도 한 걸음 앞으로 나오며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이에요, 치우 최. 이곳에서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의외네요.”
에릭은 뱀처럼 커다란 눈동자를 번뜩이며 말했다.
너 따위가 UN의 기업가 포럼에 초대를 받아서 놀랍다는 뉘앙스였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매는 차갑다.
새하얀 피부 덕분에 마치 뱀파이어를 대면하는 느낌이었다.
최치우는 동요하지 않았다.
노르웨이 이민자 출신의 전설적인 스타 경영자, 에릭 한센.
하지만 실상은 약탈적 M&A를 일삼으며 수많은 투자자들을 기만하는 월스트릿의 괴물이다.
최치우는 당장에라도 무공이나 마법을 발휘해 그를 무릎 꿇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에릭 한센의 방식으로, 그의 무기인 경영으로 완전히 박살을 낼 것이다.
그래야만 떳떳하게 현대 사회에서 최강이 됐다고 자부할 수 있다.
“하나만 물어보죠.”
최치우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프로메테우스, 샀죠?”
“…….”
예상외의 기습이었을까.
에릭 한센은 최치우의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아주 잠깐이나마 그의 얼굴에 낭패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역시, 샀다.’
최치우는 확신할 수 있었다.
우회 경로를 통해 에릭 한센이 프로메테우스, 즉 P-1을 구입한 것이다.
만일의 경우 목숨을 구해주는 신개념 해독제를 그가 사지 않을 리 없었다.
가진 게 많은 사람일수록 자기 목숨을 끔찍이 여기는 법이다.
최치우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계속했다.
“샀군요. 하긴, 아무리 부자라도 죽으면 끝이니까. 다음에 P-1이 또 필요하면 직접 연락해요. 에릭에게는 특별히 하나 정도 내줄 수 있습니다.”
명백한 농락이다.
거기에 에릭은 반응하고 있었다.
흔들리지 않는 얼음성에 균열이 간 것이다.
새하얗기만 하던 에릭의 얼굴에 붉은색 기운이 감돌았다.
억누르고 있지만, 그가 엄청나게 흥분한 것이다.
“콧대가 너무 높아졌네요, 치우 최. 고작 30억 달러짜리 회사를 가진 주제에…….”
이렇게 대놓고 도발을 하는 것도 에릭답지 않았다.
최치우는 가볍게 웃으며 반격을 가했다.
그는 오직 에릭만 들을 수 있게 목소리를 낮췄다.
“너, 네오메이슨이지?”
최치우의 말투가 달라졌다.
영어를 쓰고 있지만, 단어 선택부터 음성까지 모든 게 변했다.
최치우의 입에서 나온 네오메이슨이라는 단어가 에릭의 정곡을 찔렀다.
“치우 최, 감히 그 이름을…….”
“이제야 이해가 되는군. 네오메이슨이 키워줬으니 그렇게 빨리, 그렇게 쉽게 성공할 수 있었겠지. 남이 준 힘으로 세상을 움직인다고? 난 내 힘으로 금방 거기까지 올라갈 테니 기다리고 있어. 아니, 기다리라고 전해. 니 뒤에 있는 네오메이슨인지 뭔지 하는 놈들에게.”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붉어지던 에릭의 얼굴이 다시 백지장처럼 하얗게 돌아왔다.
에릭은 먹이를 집어삼키기 직전의 독사처럼 최치우를 노려봤다.
그도 최치우처럼 목소리를 한껏 낮춘 채 입술만 달싹였다.
“겁도 없이 내뱉은 그 말, 책임져야 될 거에요. 올림푸스 따위… 내 손으로 찢어버리겠어요.”
“행운을 빌어주지.”
이것으로 확인은 끝났다.
최치우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등을 돌렸다.
에릭 한센과 짧게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다들 궁금해 미칠 지경일 것이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최치우는 지나간 1분 동안 자신이 얻은 것을 계산했다.
‘에릭도 치부를 건드리면 흥분한다. 약점이 있다는 뜻, 그리고 네오메이슨의 일원임이 분명해졌어.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했다.
최치우는 오랜 인내 끝에 적을 알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아냈다.
UN에서 기대 이상의 수확을 거둔 셈이다.
격동의 시계가 최치우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