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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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는 끝났다.
당연히 100% 완벽한 준비는 있을 수 없다.
부족한 부분은 현장에서 부딪치며 채워가는 게 최선이다.
올림푸스는 공식적으로 아프리카 법인을 출범시켰다.
20대 중후반의 나이에 불과한 이시환이 아프리카 법인의 본부장이 됐다.
이런 인사 발령도 일반적인 기업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언론과 사람들은 역시 창의적인 기업은 뭔가 달라도 다르다고 칭송했다.
하지만 그만큼 이시환이 느끼는 부담은 컸다.
그에게는 본부장 발령이 엄청난 기회이자 동시에 운명이 걸린 위기였다.
만약 아프리카 법인이 곤경에 처하면 모든 사람들이 이시환 탓을 할 것이다.
이미 전설적인 입지를 쌓은 최치우를 탓할 사람은 드물다.
결국 본부장으로 임명된 이시환이 가장 먼저 책임을 져야 한다.
아무리 최치우와 친한 사이라고 해도 비즈니스의 세계는 냉정하다.
특히 올림푸스는 상장을 하며 주주들이 생겼다.
그들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라도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이시환도 남아공이 자신의 사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시환은 유쾌하고 긍정적인 성격을 타고났다.
그는 부담감에 질식하는 대신, 잘됐을 때를 상상하며 기운을 냈다.
아프리카 법인이 자리를 잡으면 이시환은 단숨에 주목받는 젊은 경영자로 등극하게 된다.
평범한 학부생에서 세계적인 관심을 받는 인재로 급부상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시환 혼자 신생 법인을 감당하는 건 무리다.
한국에서는 임동혁이 두 팔을 걷어붙이고 광산 개발팀을 구성해 줬다.
국내 최고의 전문가들을 스카웃해서 아프리카 법인을 세팅한 셈이다.
하지만 남아공 현지에서는 어리고 경력도 짧은 이시환이 조직을 장악해야 한다.
만약 그가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별수 없는 일이다.
최치우는 이시환에게 시험 무대를 깔아줬고, 부디 기대 이상의 모습을 보여주길 바랐다.
시험대에 오른 건 이시환 혼자만이 아니었다.
헤라클래스의 리더가 된 리키는 목숨을 걸어야 했다.
특수부대 출신의 용병들로 구성 된 헤라클래스는 리키를 제외하면 전부 외국인이다.
그렇기에 통솔이 더더욱 어렵다.
게다가 올림푸스가 개발권을 따낸 광산 지역 근방의 반군과 게릴라들을 상대해야 한다.
까딱하면 모두 죽어나갈지 모른다.
하지만 시련을 견뎌내고 강력한 외인부대가 된다면 어마어마한 보상을 안겨줄 작정이었다.
헤라클래스의 독자적 무력이 완성 단계에 이르면 아프리카 전역을 휩쓰는 것도 가능하다.
이시환과 리키.
두 사람에게 부여한 임무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아프리카를 포함해 올림푸스의 미래 일부를 둘에게 맡긴 셈이다.
물론 최치우가 두 사람만 믿고 아프리카를 나 몰라라 방치하진 않을 것이다.
그는 최대한 자주 남아공에 방문하며 광산 개발과 헤라클래스 활동을 도울 계획을 세웠다.
아니나 다를까.
최치우는 이시환과 리키가 남아공으로 떠나고 일주일 만에 비행기에 올라탔다.
직접 현장을 점검하고, 첫 디딤돌이 되어주기 위해서였다.
“고객님, 혹시 불편하신 점은 없으십니까?”
퍼스트 클래스 좌석에 앉아 있으니 전용 승무원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단아한 인상의 승무원은 어디를 가도 시선을 끌 것 같았다.
최치우와 가끔 만나는 걸그룹 트웬티즈의 나윤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미모였다.
“위스키 어떤 게 있나요? 잠이 안 와서.”
“블렌디드 위스키로는 발렌타인 21년, 몰트 위스키로는 맥켈란 18년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승무원은 마치 TV 아나운서처럼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최치우의 물음에 대답했다.
말을 하면서도 항상 눈웃음을 머금고 있는 게 무척 매력적이었다.
어차피 이 비행기의 퍼스트 클래스에 탑승한 사람은 최치우 혼자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괜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맥켈란으로 주세요.”
“간단한 안주는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뭐가 좋을까요?”
“캐비어를 곁들인 연어 샐러드를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탁월하네요. 그렇게 부탁합니다.”
무표정하던 최치우가 미소를 지었다.
고개를 숙인 승무원이 뒷모습을 보이며 술과 안주를 준비하러 걸어갔다.
완벽하게 독립된 퍼스트 클래스 좌석 옆으로 살짝 바라본 그녀의 뒷모습도 더 없이 완벽했다.
“이거 무림에 있을 때 버릇이 나오면 안 되는데.”
최치우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절세신룡 이태민은 천하제일검이었고, 따르는 여인들이 장강의 물결처럼 넘쳐났다.
무림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오봉(五鳳)이나 천하삼미(天下三美) 중 이태민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여인이 드물었다.
물론 무림에서는 영웅호색이 자랑거리다.
하지만 현대에서는 자칫 이상한 이미지로 낙인찍히기 쉽다.
“여긴 무림이 아니니까, 조심해야지.”
최치우는 올림푸스의 대표로서 브랜드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각별히 조심할 생각이었다.
여자를 안 만나겠다는 건 절대 아니다.
뛰어난 남자는 여자들이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다.
다만 말이 흘러나가지 않도록 조심해서 잘 만나겠다는 뜻이다.
“한국에서 밥이나 먹자고 할까.”
최치우가 가벼운 생각으로 시간을 보내는 사이, 그녀가 다시 돌아왔다.
먼저 전용 글라스에 위스키를 따른 그녀의 하얀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이윽고 테이블 위로 그럴듯한 술상이 차려졌다.
“편안한 시간 보내십시오, 고객님. 티슈는 접시 아래에 있습니다.”
그녀는 최치우가 뭐라 말을 걸 틈도 없이 자리로 돌아갔다.
그런데 이상한 게 있었다.
굳이 뻔히 보이는 티슈의 위치를 강조해서 알려준 것이다.
최치우는 캐비어와 연어가 담긴 접시 밑에서 티슈 한 장을 뺐다.
“역시.”
티슈를 확인한 최치우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하얀 티슈 위에는 볼펜으로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사극 속 여자주인공을 닮은 승무원이 먼저 번호를 적어 마음을 표시한 것이다.
사실 객실 승무원이 먼저 번호를 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규정에도 어긋나고, 굳이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남자들이 수작을 부린다.
그러나 퍼스트 클래스에 탄 사람이 다름 아닌 최치우다.
올림푸스의 대표이자 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20대 남자다.
언제 다시 올 줄 모르는 기회이기에 그녀도 용기를 낸 것 같았다.
최치우는 티슈에 적힌 번호를 저장했다.
남아공 일정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가면 분명 그녀를 만나게 될 것이다.
완벽하게 다듬어진 모습을 보여준 승무원의 또 다른 면모를 확인하게 될 것 같아 벌써 짜릿했다.
‘사실 이러고 노닥거릴 때가 아니지만.’
최치우는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잠깐 달콤한 여흥을 즐겼으나 눈앞에 닥친 현실의 문제들은 만만하지 않았다.
청와대 안뜰에서 대통령을 만나고 돌아온 다음, 최치우는 네오메이슨의 실체를 파헤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프리메이슨이나 일루미나티는 온갖 음모론이 떠돌 정도로 노출돼 있다.
반면 네오메이슨은 검색을 해도 나오는 게 아예 없었다.
프리메이슨을 몰락시킨 일루미나티의 후예답게 훨씬 더 은밀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어쩌면 활동을 시작한 역사가 짧기에 진면목이 덜 드러났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간단하게 알아낼 수 있는 조직은 절대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아무래도 돈을 꽤나 써야 할 것 같았다.
‘갈수록 정보의 중요성은 커지겠지.’
아는 것이 힘이다.
정글 같은 비즈니스의 세계에서 정보의 가치는 돈으로 따질 수 없다.
만약 네오메이슨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다면, 미리 대비를 하는 것도 가능하다.
‘돈과 힘, 그리고 정보. 이렇게 삼위일체를 이뤄야만 세상의 정점에 설 수 있어.’
최치우는 올림푸스를 통해 돈을 벌고 있다.
또한 헤라클래스를 창설해 무력을 키울 예정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어떤 방식으로 정보를 얻을지 기약이 없다.
적어도 필요한 정보를 구해주는 믿을만한 거래처라도 만들어야 했다.
한 단계 다른 레벨에서 세상을 상대로 싸움을 준비하려니 생각할 게 부쩍 많아졌다.
‘대통령은 네오메이슨에 대해 알고 있는 걸 대부분 말해줬어. 우리나라 국정원이 가진 정보도 그와 비슷한 수준이겠지. 가장 확실한 건 CIA와 거래를 트는 건데…….’
최치우가 미국 최대의 국제적 정보 조직 CIA를 떠올렸다.
그들 중 일부도 네오메이슨일지 모른다.
하지만 CIA에 정보가 없으면 지구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는 말이 있다.
최치우는 무슨 대가를 치르고라도 CIA로부터 정보를 사겠다고 결심했다.
덜커덩-!
그때 비행기가 난기류를 만났는지 살짝 흔들렸다.
이렇게 거대한 비행기도 여러 번 흔들리며 하늘을 가로지른다.
이제 막 천외천의 세계로 발을 딛은 올림푸스 앞에 난관이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최치우는 남아공에 도착하자마자 할 일들을 정리하며 남은 위스키를 단숨에 마셨다.
너무 무거울 필요도, 또 너무 가벼울 필요도 없다.
자신의 페이스대로 뚜벅뚜벅 걷다 보면 정상에 서 있을 것이다.
최치우는 자신을 믿고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잠시나마 여유를 즐겼다.
***
“좀 어때요?”
묵묵히 현장을 확인한 최치우가 대뜸 질문을 던졌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쉽게 대답하기 힘든 말이었다.
아프리카 법인의 본부장이 된 이시환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여러 시행착오가 있지만, 일일이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다음 달에는 첫 번째 광산에서 채굴 작업이 시작될 예정입니다. 예정이 어긋나지 않도록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대표님.”
흠잡을 데 없는 답이었다.
과연 이시환의 성격처럼 시원시원했다.
낯선 아프리카 땅에서 어려움이 많을 텐데 그는 핑계를 대지 않았다.
무조건 올림푸스의 계획대로 광산 개발을 시작하겠다고 자신했다.
최치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첫 번째 광산에서는 백금을 채굴하게 되죠?”
“그렇습니다. 매장량이 상당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본사의 지원이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내가 떠나기 전에 말해주세요. 최대한 서포트해 줄 테니까.”
“감사합니다, 대표님!”
이시환이 한층 더 깍듯하게 대답했다.
그의 뒤로 서 있는 아프리카 법인의 실무 팀장들도 긴장한 표정이었다.
임동혁은 한국 대기업에서 과장이나 차장, 부장급의 베테랑들을 대거 스카웃했다.
획기적인 대우를 받고 남아공으로 온 그들이 일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본사 대표 최치우를 만난 것이다.
나이는 어리지만 살아 있는 전설을 만난 탓에 한국식으로 군기가 바짝 들어 보였다.
최치우는 남아공 현지 사무실 등을 체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하면 준비 상태는 만족스럽다.
첫 번째 광산에서 백금을 채굴하며 성과를 거두면 차차 두 번째, 세 번째 광산도 개발해 나갈 것이다.
외부에서 방해만 하지 않으면 남아공 광산 개발은 황금 알을 낳는 거위나 마찬가지다.
20개의 광산 중 절반만 채굴에 성공해도 올림푸스에게 막대한 수익을 안겨줄 게 분명했다.
미쓰릴이나 프로메테우스는 현금보다 회사 가치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남아공의 광산은 캐시 카우로 실질적인 돈을 벌어다 줄 보물단지다.
확인을 마친 최치우는 리키를 찾았다.
“리키.”
“예, 싸부!”
남아공의 팀장들 틈에 섞여 있던 리키가 우렁찬 목소리를 토해냈다.
최치우는 그를 바라보며 눈동자에 힘을 담았다.
“헤라클래스의 역할이 예상보다 더 중요해질 것 같군요. 그동안 리키가 어떻게 팀을 만들고 키웠는지 확인하러 갑시다.”
“예, 써!”
최치우는 네오메이슨이라는 거대한 세력이 그림자 아래에 있음을 알게 됐다.
불확실한 적이 생긴 만큼 최후의 수단인 무력을 빨리 확충할 필요성이 느껴졌다.
리키는 만반의 준비를 했는지 신나는 얼굴로 앞장섰다.
남아공에서 최치우의 시계는 평소보다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