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
쐐애애액-!
사람의 몸이 아닌 화살이 쏘아진 것 같았다.
쏜살같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임동혁은 그림자가 코끝을 스친 다음에야 겨우 스마트폰 버튼을 눌렀다.
“6초 32……?”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최치우가 100미터를 지나치고, 잠시 뒤 버튼을 눌렀는데 스톱워치에는 6초 32이라는 숫자가 떠올랐다.
인간의 한계는 9초다.
그나마 9초대의 기록도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컨디션이 좋은 날 가까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그 누구도 9초의 벽을 깰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아시아 최고 기록은 10초대에 불과하다.
육상계에서는 동양인은 10초의 벽을 넘을 수 없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다.
그런데 6초 32는 뭐란 말인가.
임동혁은 김도현 교수와 더불어 최치우의 진면목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기 어려웠다.
“6초? 또 실수를 했군. 다시 잽시다, 이사님.”
최치우는 대수롭지 않은 듯 출발점으로 돌아갔다.
여유롭게 걸어가는 모습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6초 32의 기록으로 100미터를 주파하고도 숨을 헐떡거리지 않는 것이다.
“다, 다시 뛴다는 말입니까?”
“뭔가 잘못된 거 같아서요.”
최치우의 말을 들은 임동혁은 안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스마트폰 시계가 순간적으로 오류를 일으켰던 것 같다.
사람이 100미터를 6초대에 주파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최치우도 잘못된 것을 느끼고 다시 시간을 재려는 게 분명했다.
임동혁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스톱워치를 초기화시켰다.
그사이 출발점에 다다른 최치우는 가볍게 몸을 풀고 있었다.
‘자연스레 발현되는 내공을 억제하고, 단련된 육체의 힘만으로 달린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한 호흡 더 느리게 뛰면 되겠어.’
설상가상 그는 천천히 뛸 생각을 했다.
내공을 쓰지 않아도 금강나한권을 수련한 몸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했다.
“시작합니다.”
최치우가 임동혁에게 신호를 줬다.
곧이어 그의 발이 땅을 거세게 박찼다.
파바박!
땅을 박차며 달리는 최치우의 모습은 육상 선수의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철저하게 훈련을 받은 육상 선수와 다르게 순수한 육체의 힘으로 몸을 밀어내는 것이기에 그들과 폼이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속도는 여전히 무시무시했다.
삑-
임동혁이 타이밍을 맞춰 버튼을 눌렀다.
그의 시선은 화면에 떠오른 숫자를 좇고 있었다.
“9초 98…….”
“딱 좋군요. 이 정도면 올림픽에서 메달은 충분히 따겠죠, 동양인 최초로.”
최치우는 기록이 마음에 든 듯 미소를 지었다.
종전보다 3초가량 더 늦게 달리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물론 임동혁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육상 선수도 아닌 사람이 어떻게 10초의 벽을 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최치우가 파이트 클럽에서 리키를 쓰러트린, 비공식 한국 최강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육상은 또 다른 분야다.
최강의 싸움꾼이 S대 학부생 시절 독도 개발 프로젝트를 이끌고, 올림푸스라는 시가총액 30억 달러 글로벌 기업을 설립한 걸로도 모자라 100미터 달리기 신기록을 세운다.
영화 주인공도 이렇게 만들면 사기라고 욕을 먹을 것 같았다.
그런데 하나같이 자신의 눈으로 봤으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마음을 다소 가라앉힌 임동혁이 최치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최 대표님이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달리기까지 이렇게 잘할 줄은 몰랐습니다.”
“이걸로 고민 하나는 해결됐습니다.”
“무슨 고민입니까? 갑자기 사람 불러서 달리기 보여주는 거랑 관련 있는 고민이 대체…….”
“아까 말했잖아요. 동양인에 대한 편견을 깨고, 100미터 달리기로 올림픽 메달을 따겠다고.”
“갑자기 올림픽에는 왜 꽂힌 겁니까. 그럴 거면 차라리 UFC 챔피언이 되는 게 어떻습니까? 파이트 클럽에서 보니 최 대표님을 이길 사람이 없을 것 같습니다만.”
임동혁은 살짝 빈정이 상한 말투였다.
최치우가 자신을 불러 기이한 능력을 보여주며 장난을 치는 것처럼 느꼈기 때문이다.
“몰랐습니까? 군대 때문인데.”
“군대? 아!”
임동혁은 그제야 최치우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동시에 방금 전까지 툴툴거린 게 부끄러워졌다.
“임 이사님, 생각보다 눈치가 많이 없으시군요. 실망입니다.”
최치우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임동혁을 놀렸다.
임동혁은 살짝 붉어진 얼굴로 화제를 바꿨다.
“또 난리가 나겠습니다, 올림푸스의 대표가 육상 국가 대표가 되면. 내가 겪고 있는 상황이지만, 정말 말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내가 말이 되는 일만 하는 사람이라면 지금의 올림푸스는 없었겠죠.”
“하긴… 이렇게 한마디도 안 지는 것도 말이 안 됩니다. 그래서 다음 올림픽에 출전할 겁니까? 진짜로?”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 그 전에 청와대 통해서 육상 국가 대표 감독을 먼저 만나볼 생각입니다.”
최치우는 아무렇지 않게 청와대를 언급했다.
그가 연락을 하면 청와대 문은 언제든 열린다.
23살의 최치우는 처음 환생했을 때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레벨이 다른 사람이 돼 있었다.
“내가 메달을 따면 동양인에 대한 편견도 깨지겠지만, 우리나라 육상계와 유망주들이 조금 더 편한 환경에서 운동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생각입니다. 관심이 모이면 돈도 돌게 돼 있으니까.”
김연아의 등장으로 피겨계가 살아나며 유망주들이 줄을 이었고, 박지성은 한국 유소년 축구의 풍토 자체를 바꿔놓았다.
마찬가지로 최치우의 깜짝 등장은 척박한 비인기 종목인 육상에 가뭄의 단비가 될 것이다.
당장은 아니지만, 최치우는 대한민국 남자로서 거쳐야 할 과정을 누구보다 화려하게 통과할 것 같았다.
그와 함께하는 임동혁은 아드레날린이 마를 날이 없었다.
***
최치우는 유영조 대통령의 비공식적인 초청을 받았다.
원래 최치우와 청와대 사이에는 별도의 핫라인이 존재하고 있다.
정권 실세인 외교안보특보 홍석진의 비서가 핫라인 역할을 수행한다.
최치우는 늘 그렇듯 홍석진의 비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는 아마 문화체육관광부의 고위직을 만나게 될 거라고 예상했었다.
그런데 대뜸 홍석진이 직접 전화를 걸어왔고, 대통령이 은밀하게 최치우를 만나려 한다는 말을 들었다.
최치우로선 사양할 이유가 없는 일이다.
공식적으로 정치권과 너무 가깝게 지내는 모습을 보여주는 건 위험하다.
괜히 정치적 시비에 휘말릴 수 있고, 이미지에 금이 갈 여지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공식 만남이면 큰 부담이 없다.
만남 자체가 공개되지 않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움직이면 되는 것이다.
최치우가 육상 국가 대표 감독을 소개받길 원한다는 사실은 이미 전해졌다.
그 정도쯤은 대통령이나 홍석진 특보가 나설 필요도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최치우의 부탁은 해결된 것이나 다름없다.
대통령에게는 다른 용무가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면 1분 1초를 쪼개서 쓰는 바쁜 대통령이 굳이 최치우를 은밀히 청와대로 부를 리 없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최치우는 절차를 거쳐 청와대 안뜰에 다다랐다.
비공식 방문이기에 검문과 보안 절차도 그리 까다롭지 않았다.
오늘 최치우가 대통령을 만난 사실 자체가 기록에 남아서는 안 된다.
그래서 청와대에 근무하는 직원들 중 최소한의 인원만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하늘 참 좋구나.”
최치우는 잘 꾸며진 청와대 안뜰과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3월이 되면서 겨울의 추위가 조금씩 가시고 있었다.
특히 오늘은 봄기운이 물씬 피어나는 날씨로 안뜰에 앉아 있으니 무척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외부에 공개되지 않는 청와대 안뜰이라 더욱 특별한 느낌을 받게 되는지도 모른다.
곧이어 다른 직원이 따뜻한 차를 내왔다.
방금 우려낸 듯 깊은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최 대표님.”
최치우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려는 찰나, 중후한 목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돌린 최치우는 익숙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온화한 인상의 유영조 대통령이 경호원도 대동하지 않은 채 성큼성큼 걸어왔다.
“오랜만에 다시 뵙습니다.”
“허허, 나는 최 대표님 얼굴을 TV에서 워낙 자주 봐서 오랜만 같지가 않네요.”
유영조 대통령이 악수를 청하며 덕담을 했다.
그냥 하는 말은 아니었다.
최치우는 대통령 못지않게 TV 뉴스를 자주 장식하는 인물이다.
프로메테우스 개발과 남아공 지원 및 광산 획득, 그리고 뉴욕 증시 상장 등 굵직한 글로벌 뉴스를 1년에 몇 차례나 만들었는지 일일이 거론하기도 힘들다.
“어떻게 만날 때마다 매번 괄목상대할 수가 있는지, 최 대표님을 보면 참 신기해요. 우리 청와대 수석들도 최 대표님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하는지 모릅니다.”
유영조 대통령이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의 말은 한 치의 과장도 없는 사실이었다.
최치우는 독도 해저 자원 개발로 훈장을 받으며 유영조 대통령을 처음 만났었다.
그때는 전도유망한 대학생에 불과했다.
두 번째 만남은 외부의 안가에서 이뤄졌고, 홍석진 특보도 배석했었다.
당시에도 펜타곤과 기술 제휴를 맺은 루키였지만, 지금의 위상과는 비교하기 힘들다.
시가총액 3조 원이 넘는 글로벌 기업의 오너.
실제 지분을 50% 이상 가진 자산가.
아프리카라는 새로운 시장의 가능성을 대한민국에게 활짝 열어준 장본인.
최치우는 사실상 재벌 총수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위치에 올라섰다.
회사와 자산의 규모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 오너들보다 적을지 몰라도 전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그들을 능가했다.
그렇기에 최치우와 세 번째 만남을 가진 유영조 대통령이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21세기 이후 대한민국에는 자수성가한 부자들이 사라지고 있다.
재벌과 대기업 역시 대부분 상속을 받은 2세, 3세들이다.
그런데 모처럼 바닥에서부터 자수성가해서 글로벌 기업을 키운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아주 젊은, 아니 어린 최치우가 당사자이니 대통령이 각별히 여기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이제 시작이니까요.”
최치우는 대통령의 칭찬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솔직한 심정을 토로했다.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올림푸스는 막 첫걸음을 뗐다는 포부를 밝혔다.
유영조 대통령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인자하게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보자마자 반가워서 말이 너무 길었네요. 향이 좋은 차를 내왔으니 천천히 들어요.”
“감사합니다.”
최치우는 마시려다 말고 내려놓았던 찻잔을 손에 잡았다.
그윽한 향이 코끝을 타고 단전까지 내려갔다.
무림에서 천하제일검으로 살아갈 때, 그는 이따금 최상품의 용정차를 즐겼었다.
청와대에서 대통령이 내준 차를 마시니 무당파 장문인과 차를 마시던 옛날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유 대통령… 무당파 장문인이던 태극도인과 풍기는 분위기가 비슷하긴 해.’
어느 차원을 가나 묘하게 닮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유영조 대통령은 무림의 태산북두였던 태극도인을 연상시켰다.
달그락-
그때 찻잔을 내려놓은 대통령이 먼저 질문을 던졌다.
“사실 오늘은 내가 묻고 싶은 것도 있고, 또 최 대표님 이야기도 듣고 싶어 시간을 뺏게 되었어요. 먼저 육상 국가 대표 감독님을 소개해 달라는 이유부터 들어볼까요?”
이제부터 서로의 본론을 주고받을 차례다.
최치우는 대통령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대답했다.
“이상하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만, 어차피 곧 알게 되실 테니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허허, 그렇게 말하니 긴장이 되는군요.”
“100미터 달리기 국가 대표가 되어 올림픽에 출전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감독님을 소개받으려는 것입니다.”
“…….”
어지간해선 당황하지 않는 대통령이지만, 순간적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만큼 상상을 초월하는 황당한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올림픽… 이란 말이지요?”
“네, 대통령님. 진지하게 드리는 말씀입니다.”
최치우는 흔들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한민국 남자로서 큰 산을 넘기 위해 거쳐야 할 과정이다.
그는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대통령에게 결정타를 날렸다.
“실례가 안 된다면, 이 자리에서 보여 드릴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