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
<대한민국 남자>
새해가 밝았다.
12월 31일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종로 보신각에 모여 타종 행사를 즐긴다.
그보다 더 많은 숫자는 전국 각지에서 해돋이를 보기 위해 바닷가로 달려간다.
지난해가 가고, 새로운 해가 온다는 것은 그만큼 의미 있는 일이다.
상장이라는 거대한 벽을 순조롭게 넘은 최치우는 올림푸스 식구들과 함께 새해 기념 MT를 왔다.
남해안에 위치한 최고급 리조트의 풀빌라 건물 여러 채를 통째로 빌린 것이다.
남해한 풀빌라에서는 차가운 한겨울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실내 온수 수영을 즐기며 최고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조금씩 늘어나 70명이 된 올림푸스 직원을 모두 데려와 2박을 보내는 데 들어간 비용만 1억 원이다.
그렇지만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올림푸스의 주가는 상장 이후 시가총액 30억 달러 선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게다가 곧 P-1의 2차 물량 판매도 시작된다.
이러한 성공 뒤에는 올림푸스를 자기 회사처럼 여기며 열정을 불태운 직원들의 노력이 있다.
최치우는 혼자 잘나서 단기간에 올림푸스를 글로벌 기업으로 키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과거 다른 차원이었다면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에서 그는 운명을 함께 하는 동료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직원들이 올림푸스에 인생을 걸면, 그는 반드시 직원들의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겠다고 다짐했다.
이틀의 신년회 MT는 아주 약소한 보답에 불과하다.
최치우는 새해로 넘어가는 자정, 배불리 바비큐를 먹고 기분 좋게 취한 전 직원 앞에서 깜짝 발표를 했다.
“올림푸스 남아공 법인이 출범하기 전, 한국에서 먼저 고생한 여러분들께는 스톡옵션을 드리겠습니다.”
뉴욕 증시를 뜨겁게 달군 올림푸스의 주식을 직원들에게 나눠주겠다는 뜻이다.
일시적인 보너스보다 훨씬 더 강렬하고, 의미 있는 나눔이었다.
올림푸스가 계속 승승장구해서 주가가 오를수록 직원들이 행사할 수 있는 스톡옵션의 가치도 올라간다.
최치우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올림푸스가 운명 공동체임을 드러낸 것이다.
당연히 직원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와아아-!”
“대표님, 새해 선물 감사합니다!”
“역시 우리 대표님 짱이에요!”
평소에는 직원들은 최치우를 조금 어려워한다.
나이는 어려도 워낙 입지전적인 커리어를 쌓으며 국제적 유명 인사가 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적당히 술도 마셨고, 분위기도 풀어졌다.
그래서인지 비교적 젊은 여직원들이 앞장서 환호성을 지르며 최치우의 이름을 연호했다.
70명이 한자리에 모이고도 남을 정도로 넓은 거실이 함성과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최치우는 무럭무럭 뿜어지는 밝은 에너지를 잠시 만끽했다.
누군가를 기쁘게 하고, 그들이 만들어낸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건 즐거운 일이다.
남을 괴롭혀서 울리는 것보다 백 배, 천 배 더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최치우가 손을 들었다.
그의 손짓을 본 직원들은 거짓말처럼 소리를 죽였다.
아무리 마음껏 풀어진 때라고 해도 대표의 권위가 칼같이 살아 있는 것이다.
최치우는 리더십을 세우기 위해 억지로 수를 쓰지 않는다.
다만 압도적인 능력으로 스스로를 증명하고, 넘치는 보상을 함께 나눌 뿐이다.
가장 어렵지만 가장 정도에 가까운 방법으로 권위를 쌓은 그는 올림푸스의 절대자였다.
“한국 본사에서 아프리카 법인으로 지원하는 직원에게는 두 배의 스톡옵션을 드릴 겁니다. 어려운 길이겠지만, 도전하는 사람들에게 더 큰 기회가 열린다는 걸 명심했으면 좋겠습니다.”
최치우는 아프리카 법인의 설립을 가시화했다.
이시환이 본부장으로 내정됐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졌다.
이시환과 리키, 그리고 임동혁 등은 국제적인 인재들을 스카웃하며 법인 설립에 속도를 내고 있다.
하지만 한국 본사에서 올림푸스의 문화를 경험한 직원들이 합류한다면 더 큰 힘이 될 것이다.
최치우는 강요 대신 선택의 기회를 열어줬다.
직원들은 사뭇 진지해진 표정으로 최치우의 이야기를 되뇌고 있었다.
다들 최치우의 스타일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위험을 무릅쓰고 아프리카 법인으로 자원한다면, 최치우는 무조건 그 직원에게 엄청난 혜택과 기회를 줄 것이다.
20대 중후반에 불과한 이시환을 본부장으로 발탁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누구보다 이 원칙에 충실한 회사가 바로 올림푸스다.
몇몇 직원들은 도전 의식을 느끼는 듯 눈동자에 힘이 들어갔다.
아마 며칠 내로 대표 면담을 신청할지 모른다.
최치우는 미소를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지난 1년, 우리는 세상을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1년 동안 더 많은 일을 해낼 겁니다. 올림푸스는 현실에 안주하는 회사가 아닙니다. 이곳에 몸담고 있는 한, 매일이 도전이고 위기일 겁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약속하겠습니다. 가장 위험한 곳에 제가 먼저 서 있겠습니다. 가장 힘든 도전을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최치우는 올림푸스를 세우고, 지난 2년 가까이 삶으로 자신의 말을 증명해 왔다.
그렇기에 똑같은 말을 해도 사람들의 가슴을 울릴 수 있는 것이다.
“식상하지만, 새해 기념으로 건배를 같이하죠. 올림푸스를 위하여!”
“위하여-!”
현재를 즐기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누구에게든 한 번의 기회와 한 번의 성공은 허락되니까.
그러나 성공의 기쁨이 절정에 이른 순간, 내일의 도전을 준비하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그들이 바로 세계를, 미래를 바꾸는 법이다.
최치우는 올림푸스 주식이 상장될 때 어머니의 집밥을 먹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던 것처럼, 신년회에서도 다시 위험한 도전을 이야기했다.
멈추지 않고 도전에 뛰어드는 최치우의 DNA가 올림푸스 직원들에게 완전히 이식된다면, 세상 그 누구도 이들을 막지 못할 것이다.
***
헤라클래스의 진용이 갖춰지고 있었다.
리키는 남아공 현지로 날아가 직접 테스트를 진행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특수부대 출신의 용병들이지만, 리키는 그들을 휘어잡고도 남을 사람이다.
최치우를 제외하면 맨몸 격투로 리키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전 세계에 거의 없을 것이다.
그는 타고난 신체 능력과 운동 센스의 소유자였고, 금강나한권 초식을 배우며 육체에 대한 깨달음도 얻었다.
덕분에 총기를 다루는 기술도 하루가 무섭게 스펀지처럼 흡수했다.
리키는 태생적으로 강한 상대와 부딪치는 걸 좋아하고, 두려움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
거기에 무(武)에 있어서는 최고의 자질을 가졌으니 리키 말고 다른 사람을 헤라클래스 리더로 생각하기 어려웠다.
최치우는 남아공으로 날아간 리키가 공포의 외인부대를 만들 거라 믿었다.
물론 최종 결재는 최치우가 해야 한다.
그렇지만 리키가 고른 부대원들은 웬만하면 다 인정해 줄 계획이었다.
상장 작업이 무사히 끝난 덕분에 헤라클래스 멤버가 될 용병들에게 두둑한 연봉도 보장해 줄 수 있다.
그런데 헤라클래스만 사람을 뽑고 있는 건 아니었다.
임동혁은 나름대로 광산 개발 경험이 있는 국내외 인재들을 모으고 있었다.
아프리카 진출의 양대 축은 남아공 광산 개발과 헤라클래스 창설이다.
임동혁과 리키의 주도 아래 양 날개를 멋지게 다듬어지고 있는 중이다.
반면 이제 23살이 된 최치우에게는 아주 중요한 과제가 따로 남아 있었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군대 문제다.
그는 부정한 방법으로 병역을 기피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차원을 넘나들며 목숨을 걸어본 경험을 숱하게 쌓은 최치우가 병역을 겁낼 리 없다.
다만 올림푸스가 세계로 날개를 펼치려는 이때, 어떤 식으로 병역의 의무를 감당하는 게 좋을지 고민이 되는 건 사실이다.
사실 합법적이면서 무척 손쉬운 방법이 있다.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거나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따면 된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지만, 최치우가 마음만 먹으면 누워서 떡 먹기다.
100미터 달리기의 경우 최치우가 내공을 발휘해 경공을 쓰면 세계신기록은 경신하고도 남는다.
마의 벽인 8초를 넘는 건 물론이고, 전력을 다할 경우 100미터는 3초면 주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적당히 속도만 조절해도 아시안게임 금메달이나 올림픽 동메달은 우습다.
실제로 최치우는 운동을 통해 합법적으로 병역 특례 혜택을 받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과도한 주목을 받겠지만, 올림푸스의 대표로서 압도적인 브랜드 파워를 갖게 되는 과정으로 생각하면 나쁠 것도 없다.
그가 결심을 굳히면 사람들은 역사상 전무후무한 문무겸비(文武兼備)형 캐릭터를 보게 될지 모른다.
“뭔가 의미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나 하나 특혜를 보고 끝나는 게 아니라 보다 많은 기여를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만약 누가 언제든 금메달을 딸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면 최치우처럼 깊은 고민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냥 금메달을 따고, 인기와 특혜를 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최치우는 7번의 환생을 거치며 얻은 초인적인 능력을 떳떳하게 사용하고 싶었다.
이왕이면 자신만 메달을 따는 게 아니라 한국 체육계에 도움을 주려는 것이다.
그래야만 국위선양이라는 낯간지러운 단어 앞에서 당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확실히 신기한 차원이야. 별 고민을 다 하게 되는군.”
현대의 지구에서 병역 의무가 살아 있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환생했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고민이다.
물론 최치우는 이마저도 즐기고 있었다.
다른 차원에서는 죽이지 못하면 죽는, 적자생존의 삶이 강제됐었다.
그렇기에 병역 문제 같은 걸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무조건 죽기 아니면 살기로 때로는 몬스터와, 때로는 다른 나라의 병사들과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반면 현대 사회는 복잡하게 고도화됐기에 처음으로 이런 고민도 해보게 됐다.
“어떤 종목을 선택할지, 어떻게 의미를 남길지… 거기서부터 다시 생각해 보자.”
최치우는 혼잣말을 계속하며 머릿속을 정리했다.
아프리카 진출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꽉 차 있었지만, 마냥 피할 수는 없는 문제였다.
그의 선택에 따라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의 역사가 바뀔지 모른다.
아직은 아무도 모르지만, 최치우는 태풍을 일으킬 나비효과를 구상하고 있었다.
***
“대표님, 진짜 바쁜 시간에 이러고 있어도 되는 겁니까?”
임동혁이 불만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그가 최치우에게 툴툴거리는 건 꽤 오랜만이었다.
하지만 상황을 놓고 보면 십중팔구 임동혁 편을 들어줄 것이다.
둘은 아무도 없는 넓은 운동장에 서 있었다.
최치우가 운동장 하나를 통째로 빌린 것이다.
그러고는 100미터 달리기를 하는 임시 트랙 출발점에 섰다.
임동혁은 도착지에 서서 스마트폰을 들고 있었다.
최치우가 임동혁에게 달리기 기록을 재라고 시켰기 때문이다.
평소 최치우의 말이라면 껌뻑 죽는 임동혁이지만, 오늘은 내키지 않는 모습이었다.
요즘 그는 남아공에 투입할 광산 개발팀을 만드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런데 갑자기 불려 나와 달리기 기록을 재라니 황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최치우는 장난기 하나 없이 진지한 표정이었다.
“간단히 조사를 해봤습니다. 인종의 한계로 인해 동양인이 절대로 백인과 흑인들을 이길 수 없는 종목이 육상이라더군요. 특히 단거리 달리기는 인종의 차이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이참에 편견을 깨보려 합니다. 누구 하나라도 편견을 부수면, 훗날 역사는 인종의 한계 따위를 함부로 거론하지 못하겠죠.”
언뜻 알아듣기 어려운 말이었다.
임동혁도 100미터 저편에서 최치우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최치우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이왕 운동으로 병역 특혜를 받을 거라면, 동양인은 육체 능력으로 서양인을 이길 수 없다는 뿌리 깊은 편견을 깨트리기로.
이것도 변방의 바람으로 세계를 뒤덮는 일에 포함될 수 있다.
그로인해 한국에서 육상 붐이 일어나 유망주들이 혜택을 본다면 나름 커다란 기여를 하는 셈이다.
“자, 갑니다.”
최치우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임동혁은 저도 모르게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잴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