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
<성인과 상인>
아프리카 출장 일정 자체는 그리 길지 않았다.
비행기로 이동하는 시간만 편도로 이틀 가까이 걸리기에 더욱 긴 출장으로 느껴질 뿐이었다.
남아공에서 사흘 가량 머문 최치우와 임동혁은 서울로 돌아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프리카 출장은 두 사람의 시야를 넓혔다.
특히 임동혁은 느낀 바가 많았다.
그가 지금까지 생각해 왔던 수출 시장은 미국과 중국, 그리고 떠오르는 동남아 정도였다.
하지만 아프리카라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닌 대륙이 버젓이 존재하고 있었다.
머리로 아는 것과 눈으로 보고 느끼는 것은 천지차이다.
백문이불여일견이라는 옛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세계지도에도 제대로 표현되지 않은 어마어마한 크기의 아프리카 대륙.
그 넓은 땅 곳곳에 여러 문제들이 산재해 있었다.
문제가 있다는 것은 해결책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해결책은 곧 사업이고, 돈이다.
대기업의 후계자로 성장한 임동혁은 아프리카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
왜 최치우가 아프리카를 올림푸스의 전진기지로 삼으려는지 이해한 것이다.
사람은 억지로 움직일 수 없다.
당장은 내키지 않아도 일을 할 수 있지만, 스스로 동기를 찾지 못하면 금방 퍼지고 만다.
임동혁은 아프리카에서 기회를 찾겠다는 동기를 부여받았다.
남아공만 해도 투자할 수 있는 거리가 넘쳐났다.
케이프타운과 요하네스버그를 중심으로 조성되는 인프라 사업권을 조금만 따내도 거액의 글로벌 계약이다.
예전의 임동혁은 사업에 재미를 느끼지 못했었다.
그랬기에 도박이나 파이트 클럽처럼 말초적인 자극을 주는 게임에 빠졌던 것이다.
하지만 최치우를 만나고 그는 완전히 달라졌다.
차원이 다른 비전을 제시하는 최치우 곁에서 사업으로 세상을 바꾸는 재미를 깨달았다.
사업가로 다시 눈뜬 임동혁은 거대한 아프리카를 발판으로 세계를 정복하는 꿈을 꿨다.
최치우의 비전에 동화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남아공의 마음을 사야 한다.
그는 진심을 다해 남아공 난민 수용소 지원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한영 그룹이 선봉에 섰고, 협력사들을 적절히 동원해 식수 지원 펀드를 만들었다.
임동혁이 기업의 지원금을 조성하는 동안, 최치우는 정부를 설득했다.
당연히 유영조 대통령을 직접 만나진 않았다.
사실 최치우는 일국의 대통령에게 미팅을 제안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
그러나 굳이 이런 문제로 대통령과 대면할 필요는 없었다.
외교안보특보이자 정권의 실세인 홍석진에게 연락을 했고, 외교부 차관과 약속을 잡았다.
부처의 실무를 담당하는 최고 권력자는 차관이다.
장관부터는 정치적인 자리이고, 실무적인 결정은 차관급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최치우는 외교부 차관에게 남아공 난민 수용소 지원 계획을 밝혔다.
올림푸스에서 P-2를 배포해 식수 오염으로 인한 사망자를 줄이고, 여러 기업과 함께 마련한 자금으로 깨끗한 물을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에 한국 정부가 가세해 힘을 보태고, 이를 사회적 문제로 띄워달라는 요청을 했다.
국민들의 관심이 높아지면 여러 기업이 참여하게 될 것이고, 프로젝트를 주도하는 올림푸스 역시 더 많은 찬사를 받게 된다.
한국 정부 입장에서도 긍정적으로 검토할 여지가 충분했다.
약간의 예산과 인력을 투입해서 훨씬 큰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국내에도 어려운 사람이 많은데 해외를 돕는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그렇지만 국제사회에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올림푸스가 판을 깔아주면 한국 정부는 함께 생색만 내면 된다.
결국 차관을 통해 올라간 보고서에는 외교부 장관의 직인이 찍혔다.
아마 외교안보특보와 대통령에게도 분명히 보고가 됐을 것이다.
최치우는 두 사람을 만나 협력하기로 약속했지만, 정부의 권력에 기대지 않았다.
일방적인 부탁을 하면 나중에 빚을 갚아야 한다.
그러나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제안을 하면 빚이 아닌 신뢰를 쌓을 수 있다.
훗날 정권이 바뀌고, 상황이 변해도 부담스러울 일이 없다.
최치우는 인맥보다 실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동안 쌓아둔 결과물을 바탕으로 남아공 지원 프로젝트는 생각보다 빨리 추진됐다.
P-1 역시 전 세계의 거물들에게 초도물량 50개를 완판하고, 추가적인 생산에 들어갔다.
올림푸스는 첫 번째 프로젝트로 세계적인 신소재 회사가 됐고, 두 번째 프로젝트로 세계적인 제약 회사 반열에 올랐다.
완전히 다른 두 영역에서 독보적인 성과를 거둔 올림푸스의 기업 가치는 천정부지로 치솟는 중이었다.
거래조차 되고 있지 않지만, 올림푸스의 지분은 전 세계에서 손꼽을 정도로 비싼 비상장 주식임이 확실했다.
그런 와중에 최치우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아프리카 지원을 현실로 이뤄내고 있었다.
그의 보폭에 한계 따위는 없는 것 같았다.
***
“대표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백승수가 사뭇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공적인 업무를 볼 때는 다들 최치우에게 깍듯하게 말을 높이지만, 오늘은 유별났다.
뭔가 각오를 단단히 한 것 같았다.
백승수 혼자만이 아니었다.
바로 옆에 나란히 선 이시환도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최치우는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궁금해졌다.
“대표실로 들어가죠.”
넓게 탁 트인 사무실에서 보고서를 읽고 있던 최치우가 몸을 일으켰다.
대표실에 들어온 최치우는 문을 닫고 블라인드를 내렸다.
백승수와 이시환이 마음 놓고 중요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환경을 만들어준 것이다.
“편하게 말해보세요. 무슨 이야기인지 궁금하군요.”
“남아공 난민 수용소를 지원하는 문제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백승수가 안건을 꺼냈다.
최치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겠다는 뜻을 내비췄다.
곧이어 이시환이 설명을 덧붙였다.
“생각보다 많은 예산이 들어갈 것 같습니다. 프로메테우스, P-1의 초도 물량이 완판됐지만 5천만 달러입니다. 우리 돈으로 600억 원 정도인데 그간의 투자 비용과 고정비, 세금 등을 제하면 약 200억 원 가량의 순이익이 남습니다.”
P-1의 판매로 인한 순익은 예상보다 크지 않았다.
초도 물량의 수가 너무 적었고, 그동안의 비용과 세금을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30%가 넘는 이익률은 엄청나게 높은 편이다.
게다가 P-1의 판매로 인한 수익은 처음부터 작은 목표였다.
신약 개발 성공으로 거둔 올림푸스의 기업 가치 증가분은 수천억을 넘어 조 단위를 넘볼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비싼 지분이라도 팔지 않으면 현금이 안 된다.
미쓰릴 발굴과 P-1의 초기 판매로 올림푸스가 손에 쥔 현금은 1,000억 이상.
분명 큰돈이지만, 글로벌 비즈니스의 세계에서는 소액 취급을 받아도 할 말이 없다.
“우리의 기업 가치가 몇 조 이상으로 평가 받는다는 사실을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표님, 현재 현금 유동성을 고려하면 남아공에 투입되는 비용이 너무 많습니다.”
백승수와 이시환은 올림푸스의 살림을 챙기며 브레인 역할을 하고 있다.
최치우는 큰 그림을 그리고, 남들이 상상하지 못하는 비전으로 사람들을 이끌어낸다.
그 과정에서 꼭 처리해야 하는 필수적 업무들은 두 사람이 커버하고 있었다.
올림푸스의 허리나 마찬가지인 두 명의 염려를 최치우도 가볍게 들을 수 없었다.
“우리가 직접 남아공에 쓰는 예산이 어느 정도로 집계됩니까?”
진지한 표정을 지은 최치우가 질문을 던졌다.
학교 후배가 아닌, 기업의 오너이자 CEO로서 핵심 직원들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백승수는 미리 준비한 듯 곧장 대답했다.
“P-1의 약효와 부작용을 모두 다운그레이드시킨 P-2를 개발하고 생산하는 제반 비용이 생각 이상으로 많이 들어갑니다. 게다가 남아공 난민 수용소의 인원 역시 당초 예상보다 훨씬 많습니다. 식수 오염으로 인한 사상자를 가시적으로 낮추고,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최소 500억 원의 비용이 소요될 것으로 측정됩니다.”
최치우도 조금은 놀랐다.
500억은 그의 계산을 뛰어넘는 비용이었다.
물론 500억이라는 숫자 앞에 위축될 만큼 최치우의 그릇이 작지는 않았다.
다만 예상 외로 프로젝트의 사이즈가 커졌다면, 그에 걸맞은 대책을 세워야 한다.
변수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그때마다 완벽한 정답을 제시하는 것.
그게 바로 리더의 역할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현금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군요.”
최치우는 어려운 문제를 짧게 요약했다.
복잡한 사안일수록 단순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어렵게 생각하면 해결책은 보이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큰마음 먹고 직언을 결심한 백승수와 이시환은 하고픈 말이 남아 있는 눈치였다.
이번에는 이시환이 다시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P-2를 대량 생산해서 남아공 난민 수용소에 지원하는 프로젝트……. 대폭 축소할 수는 없는 것인가요, 대표님.”
“이렇게 회사의 예산을 투자하는 이유를 느끼지 못하고 있군요.”
백승수와 이시환은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최치우의 말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두 사람은 왜 최치우가 수백억 원을 남아공에 투자하려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말이 투자지 100% 기부나 다름없다.
P-2를 배포하고, 깨끗한 식수를 지원해도 올림푸스에게 돌아오는 것은 찬사밖에 없다.
브랜드 이미지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그러기엔 너무 큰 비용이 들어간다.
아무리 기업 가치가 높아졌어도 현금 유동성을 확보하는 건 중요한 문제다.
최치우는 백승수와 이시환을 다시 봤다.
최근 팀장이라는 직함을 달게 된 두 사람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올림푸스를 자기 회사처럼 여기고 있었다.
그렇기에 진심으로 회사의 앞날을 걱정하는 것이다.
“백 팀장님과 이 팀장님이 어떤 마음으로 보고를 하는지 확실히 알겠습니다. 어쩌면 다른 직원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군요.”
두 사람이 동요할 정도면 다른 직원들도 비슷한 고민을 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최치우의 확신이 흔들릴 일은 없다.
그는 잠시 고개를 끄덕인 다음 더욱 강하게 눈에 힘을 줬다.
최치우의 검은 눈동자 위로 칼날이 스며든 것 같았다.
“남아공을 지원하는 것, 이건 기부가 아닌 투자입니다. 나와 함께 아프리카 출장을 다녀온 임동혁 이사님이 두말 안 하고 기금을 조성하는 데 집중하는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
백승수와 이시환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미친놈 같지만, 아니 미친놈이 맞지만 한영 그룹의 후계자답게 각성한 임동혁이 순순히 일을 추진하고 있었다.
원래 최치우의 말이라면 뭐든 믿고 따르는 임동혁이다.
하지만 아프리카 출장 전후로 태도가 달라졌음은 부인하기 힘들다.
과연 그는 아프리카에서 무엇을 보고 돌아온 것일까.
두 사람의 생각이 거기에 닿았을 즘, 최치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500억? 아니 1,000억을 투자해도 상관없습니다. 남아공에서만 1조, 10조의 가치를 얻어낼 테니까.”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백승수와 이시환은 마치 최치우에게 혼이 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결코 불쾌한 느낌은 아니었다.
오히려 불안과 고민을 말끔히 해소해 주는, 가뭄의 단비와 같은 음성이었다.
“남아공에 돌아가 P-2와 식수 지원 체결식을 하는 날, 우리는 이제껏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계약을 따내게 될 겁니다.”
최치우의 입에서 상상하기 힘든 계약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가 남아공 정부로부터 무엇을 얻어낼지, 어떤 방식으로 아프리카 남부에 교두보를 마련할지 짐작조차 하기 힘들었다.
최치우는 당장 필요한 현실적인 해결책을 마련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올림푸스의 기업 가치는 계속 올라갈 게 확실하니 지분을 파는 건 손해를 보는 일입니다. 대신 지분을 담보로 은행 대출을 받도록 하죠. 급한 현금 유동성은 어느 정도 해결될 겁니다.”
절대 풀리지 않는 매듭을 단칼에 잘라낸 알렉산더 대왕처럼 최치우는 어려운 문제를 간단하게 만들었다.
잠시 후, 용기를 낸 백승수가 마지막 질문을 덧붙였다.
“대표님, 남아공에서 어떤 계약을 따낼 계획인지 지금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최치우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우리 올림푸스는 남아공의 광산을 얻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