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
<아프리카>
세계적인 부호들이 프로메테우스를 구입하기 위해 줄을 섰다.
올림푸스 직원들은 구매 의사를 밝힌 고객들을 신중하게 분류했다.
사회적인 영향력과 지명도를 고려해 1차 판매 대상을 만든 것이다.
100만 달러, 우리 돈 12억 원짜리 해독제를 처음으로 구입 할 50명이 누구인지 전 세계 언론에서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구매자 리스트는 극비다.
거액을 내고 해독제를 구입한 게 알려지면 오히려 신변이 더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역시 중동과 아프리카에서도 P-1을 사려는 사람들이 많군요.”
최치우는 정리된 리스트를 보며 의미심장한 말을 뱉었다.
최종적으로 명단을 검수한 백승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대표님. 100만 달러 이상의 거액을 제시한 사람들은 대부분 중동과 아프리카 출신이었습니다. 하지만 신원이 불확실하고, 불법적인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아 배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백승수의 태도는 깍듯했다.
사석에서는 최치우가 백승수를 선배라고 부른다.
하지만 회사를 비롯한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대표와 직원 사이를 철저히 지키고 있다.
함께 회의에 참석한 이시환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중동이나 아프리카에서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중독을 비롯한 암살 위협에 많이 노출되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P-1에 대해 지속적인 수요가 있을 것으로 예상 됩니다.”
이시환은 평소와 달리 딱딱한 어조로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최치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의 말을 들었다.
“현재 P-1의 초도물량 50개는 유럽과 미국, 동아시아 지역 위주로 판매가 결정됐습니다. 내년까지 판매가 예정된 300개는 모두 100만 달러라는 동일한 가격으로 소화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 이후 추가적으로 P-1을 생산하게 되면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 판매를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가격이 유지될 수 있을 듯합니다.”
이시환의 분석은 최치우의 생각과 일치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백승수와 이시환을 믿고 더 많은 자율권을 줘도 될 것 같았다.
“300개가 다 팔리고 나면, P-1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 겁니다. 그 이후 가격 유지를 위해 중동, 아프리카의 거물들과도 거래를 터야겠죠. 하지만 불법적인 일, 예를 들면 무기 거래나 밀수를 주로 하는 사람들과는 거래하지 않는 게 원칙입니다. 약값을 유지하기 위해 올림푸스의 브랜드 가치를 포기할 순 없으니까요.”
“명심하겠습니다, 대표님.”
“더욱 깐깐하게 배경 조사와 필터링을 거치겠습니다.”
최치우는 두 사람이 차례로 대답하는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기분을 진즉 알았다면 이전 차원에서도 동료들을 만들었을 것이다.
이제라도 동료를, 그리고 자기 사람을 키우는 즐거움을 알게 돼 다행이었다.
“우선 1차 물량은 전부 배정이 됐고, 한 번에 꽤 많은 현금이 들어오니 세무적으로 문제없도록 신경을 씁시다. 이왕 낼 세금이면, 조금 억울하다 싶을 정도로 더 신고하고 나중에 말 안 나오는 게 장기적으로 이득입니다.”
다들 올림푸스가 눈앞의 작은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회사가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세금 신고 역시 우직하게, 있는 그대로 오픈하라는 게 최치우의 방침이다.
정부에서 주기적으로 세무조사 카드를 들고 나오면 기업들은 꼼짝도 못 한다.
최치우는 올림푸스를 그런 기업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경우에 따라서 정부와 맞서 목소리를 높일 필요도 있다.
그때 힘과 명분을 얻으려면 작은 먼지도 묻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물론 대기업에서 후계자 수업을 받은 임동혁은 세금 내는 걸 엄청 아까워했다.
그러나 올림푸스의 소유권은 물론, 경영권 역시 최치우에게 있다.
언제나 최종 결정은 최치우의 몫이기에 임동혁도 군소리를 길게 하지는 않았다.
“사실 내 1차적인 목표는 이미 이뤘습니다.”
최치우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는 최초 물량을 구입할 50명의 명단을 상세히 살펴봤다.
그중에는 뉴욕에서 만났던 에릭 한센이 소유한 자회사의 CEO도 포함돼 있었다.
에릭 한센 대신 P-1을 구입한 게 분명했다.
세상의 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오만하게 구는 사람일수록 누구보다 자기 목숨을 소중히 여긴다.
결정적인 순간, 생명을 구할 기회를 주는 P-1을 에릭 한센이 눈독 들이지 않을 리 없다.
‘자존심 때문에 직접 구입하긴 힘들었겠지. 다음에 만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군.’
최치우는 맨해튼에서 1억 달러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던 에릭 한센의 얼굴을 떠올렸다.
물론 그는 대단한 기업가다.
공격적인 인수 합병과 타고난 감각으로 자신의 제국을 건설했다.
하지만 올림푸스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충격을 세계에 선보이며 성장하고 있다.
세상의 정점에서 건방을 떨고 있는 사람들의 목을 옥죄며 무럭무럭 자랄 것이다.
최치우는 즐거운 마음으로 회의를 마무리했다.
언젠가는 이 회의에서 세계의 앞날과 인류의 미래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바람이 허황된 꿈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
“그거 알고 있습니까? 대표님과 트웬티즈의 이나윤, 사귄다는 소문이 도는 거.”
인천공항 퍼스트 클래스 라운지에서 임동혁이 씨익 웃으며 말을 꺼냈다.
그 어느 곳보다 완벽하게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는 곳이 바로 퍼스트 클래스 라운지다.
그렇기에 임동혁도 남들이 들으면 안 되는 농담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최치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증권가 찌라시가 도는 모양이군요.”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진만 안 찍히면 적당히 뒷소문만 무성하다 잠잠해질 겁니다. 그런 찌라시가 하루에도 몇 개씩 생기는 편이니까.”
“사귀는 건 아니지만, 헛소문도 아닙니다. 이사님도 그걸 아니까 놀리는 거겠지만.”
“역시! 그날 파티에서 먼저 사라지더니……. 돈은 내가 쓰고, 재미는 우리 최 대표님이 다 봤습니다.”
“부러우면 연애하세요. 아니, 재벌가니까 정략결혼 같은 거라도. 축의금 많이 내겠습니다.”
최치우는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시니컬한 말로 반격했다.
괜히 최치우를 놀리려다 본전도 못 건진 임동혁은 눈을 찡그리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아, 확실히 퍼스트 클래스 담당하는 승무원들은 클래스가 다릅니다. 이 참에 비행기에서 연애나 시작해 볼까…….”
“승무원들도 한영 그룹 후계자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서 피하지 않을까요?”
“어떤 소문 말입니까?”
“재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망나니라던가, 뭐 그런.”
또 한 방을 더 먹은 임동혁이 입을 꾹 닫았다.
말만 걸면 최치우에게 맥없이 당하면서 참 끈질긴 편이었다.
아마 비행기에 타면 다시 농담을 하다가 면박을 들을 게 뻔했다.
최치우는 임동혁을 괜히 데리고 나왔는지 고민했다.
사실 혼자 출장을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임동혁이 부득불 함께 가겠다고 우겨서 이렇게 된 것이다.
올림푸스는 P-1의 초도 물량 50개를 전 세계의 구매자들에게 전달하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치우는 아프리카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현재에 만족하고 머무르는 순간, 현상 유지가 아닌 퇴보를 하게 돼 있다.
미래를 바라보지 않는 사람과 기업은 무조건 뒷걸음질 치는 법이다.
그는 프로메테우스의 성공에 마냥 도취되지 않았다.
P-1으로 번 돈을 이용해 분쟁 지역의 식수 오염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약속도 기억하고 있었다.
바로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프리카로 날아가려는 것이다.
‘단순히 자선사업을 하려는 것만은 아니지.’
최치우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하지만, 때때로 번뜩이는 그의 날카로운 안광은 한 자루 칼 같았다.
심후한 내공과 7번의 환생, 수백 년의 경험이 축적 돼 있기에 마음만 먹으면 눈빛으로 사람을 쓰러트리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임동혁은 아직 모르고 있다.
최치우가 왜 아프리카로 가는지.
물론 P-2를 개발해서 식수 오염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돕는 게 가장 큰 이유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최치우는 P-1으로 거액을 벌 뿐 아니라 전 세계 거물들의 생명 줄을 휘어잡았다.
P-2로는 마치 노벨 평화상을 노리는 듯 구호 활동을 하며 올림푸스의 브랜드 이미지를 높이는 동시에 아프리카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이다.
지구에 남은 마지막 미지의 영역, 기회의 땅 아프리카.
최치우는 검은 대륙이 자신과 올림푸스를 세계의 정점으로 끌어올려 줄 발판이 되리라 생각했다.
이미 유럽과 미국, 또 유태계 출신 백인들의 보이지 않는 이너 써클이 세계를 꽉 움켜쥐고 있다.
맨해튼에서 거들먹거리던 에릭 한센의 자신감에는 분명한 근거가 있었다.
올림푸스와 함께 성공할수록, 더 높이 올라가면 갈수록 단단한 유리 천장을 느끼게 될 터였다.
그 강고한 벽을 깨부수기 위해서는 차원이 다른 게임을 해야 한다.
‘벽을 깨는 건 내 전공이야.’
최치우는 두렵지 않았다.
하이 엘프가 지배하던 링스 월드를 멸망시켰고, 숱한 왕족과 귀족들을 무릎 꿇게 만든 과거의 기억이 생생하다.
어디 그뿐인가.
콧대 높은 정파무림은 무명의 낭인 이태민에게 천하제일검이라는 칭호를 선사했고, C급 헌터에서 인류 최초로 트리플 S 클래스를 갱신하기도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모든 차원 중 가장 복잡한 곳이 현대의 지구지만, 그는 자신을 믿었다.
이번 출장을 단순한 외유로 생각하는 임동혁은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최치우는 아프리카에서 써나갈 새로운 역사를 남몰래 그리고 있었다.
***
“여긴 꼭 유럽 같습니다. 아프리카가 아니라.”
임동혁의 감상은 보편적이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을 방문한 사람들은 대부분 유럽과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아프리카에서 백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며, 동시에 가장 부요한 도시가 바로 케이프타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남아공에서도 요하네스버그 등 다른 도시는 사정이 다르다.
치안도 불안정하고, 인프라도 낙후돼 있다.
그나마 남아공이나 케냐는 아프리카에서 수위를 다투는 국가다.
검은 대륙의 영토 대부분은 미개척지로 남아 있다.
최치우는 임동혁을 바라보며 새로운 화두를 던졌다.
“이사님은 아프리카가 얼마나 큰 대륙인지 모를 겁니다.”
“최 대표님, 나를 너무 물로 보는 거 아닙니까? 아프리카 엄청 큰 걸 누가 모른다고…….”
“대충 얼마 정도 클 거 같아요?”
“음… 그건……. 정확히는 몰라도, 꽤 큰 건 알고 있습니다. 이래봬도 비행기 탈 때마다 세계지도를 봅니다.”
“이사님이 보는 세계지도가 엄청나게 왜곡됐다는 건 모르겠죠.”
최치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는 지금 아프리카를 운명의 땅으로 정한 이유를 알려주려는 것이다.
물론 임동혁은 세계지도가 왜곡됐다는 말을 선뜻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보는 세계지도는 서양, 특히 유럽의 관점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유럽 대륙은 실제보다 크게, 반대로 아프리카는 실제보다 훨씬 작게 표현돼 있죠.”
임동혁은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최치우가 틀린 소리를 할 리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12억 인구가 살고 있는 중국 대륙, 그리고 유럽 대륙 전체와 미국까지 모두 합해도 아프리카의 면적이 더 넓습니다. 그만큼 어마어마한, 미지와 기회의 땅에 온 겁니다.”
임동혁의 눈동자가 커졌다.
중국과 유럽에 미국의 면적을 합해도 아프리카만 못하다는 사실은 처음 듣는 사람에겐 충격적일 수밖에 없다.
아주 오래 전부터 세계의 중심은 유럽이었고, 지금은 미국과 패권을 나누고 있다.
그렇기에 에릭 한센과 같은 유럽계, 또는 유태계 미국인들이 금융을 비롯한 경제의 맥을 꽉 잡고 있는 것이다.
최치우는 그들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에서 새로운 판을 짜야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현재의 성공에 만족하면 올림푸스도 언젠가 초거대 글로벌 기업에 인수당하는 신세로 전락할지 모른다.
그에게 있어 아프리카는 자신의 제국을 건설할 개척지인 셈이다.
최치우는 세계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우선 인프라가 잘 갖춰진 남아공이 출발점입니다. 여기서 P-2로 식수 오염을 해결할 수 있는 지역을 찾아봅시다.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사고, 하나씩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만들어야죠.”
“설마 거기까지 생각하고 프로메테우스를 개발할 때부터 분쟁 지역의 식수 오염 문제를 염두에 뒀던 겁니까?”
“당연한 걸 물으시는군요.”
“최 대표님, 당신은 정말…….”
날 때부터 대기업의 후계자였던 임동혁은 뭘 해도 스케일이 큰 편이다.
하지만 최치우가 그리는 큰 그림은 너무도 엄청나서 쫓아가기 버거웠다.
‘현대의 지구는 내가 환생한 모든 차원 중에서 가장 복잡하고 거대한 세계지만, 여기서도 반드시 정점에 서고 말겠어.’
최치우의 강인한 영혼이 본연의 힘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 덕분에 검은 대륙 아프리카가 빛을 볼 날도 머지않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