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왕관의 무게>
일반적인 제약회사에서 신약을 개발하는 데 짧게는 3년, 길게는 10년 이상을 투자한다.
개발 과정의 어려움도 있지만, 임상 실험에 돌입하기까지 넘어야 할 과제가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테스트 과정에서 약간의 위험성만 보여도 임상 실험을 할 수 없다.
실험 대상자인 사람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제약회사의 주가는 지하까지 떨어질 것이다.
그렇기에 임상 실험 전 단계에서 심혈에 심혈을 기울이느라 속도가 느려지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올림푸스는 처한 상황이 달랐다.
부작용을 걱정할 필요 없는 완벽한 임상 실험 대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다름 아닌 최치우였다.
호령독삼을 복용하고 만독불침의 경지를 이룬 최치우는 전세계 모든 제약회사가 탐낼 실험체다.
아무리 위험한 약을 실험해도 부작용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만독불침이라도 독을 먹으면 일시적으로 타격을 입는다.
하지만 혈도를 타고 흐르는 더욱 강한 독기(毒氣)가 외부에서 침입한 독을 잡아먹는다.
그렇기에 금방 해독이 되고 멀쩡해지는 것이다.
만독불침은 곧 이독제독(以毒制毒)이 궁극에 이른 경지라고 생각하면 된다.
최치우는 스스로를 실험 대상으로 삼아 테스트 기간을 획기적으로 단축시킬 작정이었다.
물론 임상 실험 이전에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은 남아 있다.
허철후의 제조법을 토대로 대량생산이 가능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또 해독제의 변질을 막는 유통기한 파악 등 당면한 테스트 과제들이 적지 않다.
그런 부분은 기존이 제약회사와 MOU를 체결하고 진행하면 된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임상 실험 돌입의 안전성이다.
MOU를 맺은 제약회사에서 이전 단계까지 완료하면 올림푸스는 최치우를 믿고 곧바로 임상 실험에 들어갈 것이다.
“대단한 자기희생이죠? 대표가 직접 실험체가 되겠다고 나서는 회사라니.”
최치우가 웃음기 어린 얼굴로 농담을 던졌다.
그가 실험체가 될 거라는 사실은 올림푸스 내부에서도 극비 사항이다.
만독불침이라는 걸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이시환과 백승수도 모르는 일이다.
허철후를 제외하면 임동혁과 김도현 교수만 어렴풋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두 사람도 만독불침이 무엇인지는 상상하지 못한다.
다만 독도 개발에서부터 최치우의 기이한 능력을 경험했기에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어도 그저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게 말입니다. 뉴스에 나면 오너 리스크로 올림푸스 기업 가치가 휘청거리겠습니다. 최치우 대표, 해독제 개발 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스스로 임상 실험 대상이 되다.”
임동혁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지구에서 최치우에 대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임동혁이다.
그는 최치우가 인정한 진짜 미친놈답게 임상 실험 계획을 만류하지 않았다.
위험하다며 걱정하는 척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웃으며 박수를 쳤다.
때로는 둘도 없는 친구, 때로는 살벌한 앙숙처럼 변하는 올림푸스의 대표와 이사는 함께 강남에 나왔다.
두 사람은 강남 수입차 거리의 전시장 VIP룸에서 딜러를 기다리고 있었다.
최치우도 편하고 빠른 이동을 위해 차가 필요해졌고, 임동혁이 예전부터 공언했듯 자동차를 고르러 따라 나선 것이다.
사실 최치우는 차에 큰 관심이 없었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자동차를 취미로 두는 것과는 딴판이다.
최치우는 이전 차원에서 전설적인 명마(名馬)를 여럿 소유했었다.
피가 흐르고 근육이 박동치는 명마에 비해 기계 덩어리인 차는 크게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기계화 군단의 엔지니어로 전투 로봇을 조종한 적도 있었다.
고도의 전투 로봇과 호흡하던 최치우에게 현대의 자동차는 아무리 빠르고 좋아도 너무 단순한 기계였다.
그런 최치우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임동혁은 자기가 더 신이 났다.
그는 재벌 2세답게 여러 대의 슈퍼카를 차고에 세워뒀다.
한때는 슈퍼카를 타고 위험한 레이스를 즐기기도 했었다.
하지만 인천공항 고속도로에서 폭주족으로 경찰에 입건된 이후 아버지인 한영 그룹 회장에게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았다.
그 이후 자동차에 시들해졌는데, 최치우라는 새로운 대상이 나타난 것이다.
임동혁은 벌써 최치우와 함께 슈퍼카를 타고 도로를 질주하는 상상을 했다.
그러나 최치우는 임동혁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않았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브랜드의 대표 모델 카달로그입니다.”
VIP룸 문이 열리고, 딜러가 들어왔다.
그가 건넨 카달로그 안에는 최소 3억 이상의 슈퍼카들이 개성을 뽐내고 있었다.
하지만 최치우는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불편한 스포츠카에는 큰 관심이 없는데.”
“타보면 생각이 달라질 겁니다.”
최치우의 시큰둥한 반응에 안달이 난 임동혁이 마치 딜러가 된 것처럼 설득했다.
그러나 최치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편하고 무난한 차였으면 좋겠습니다. 이동할 때 편리한.”
“올림푸스 이미지가 있는데 대표님이 벤츠나 아우디 같은 평범한 차를 타서야 되겠습니까? 페라리나 람보르기니는 타야 됩니다.”
“그게 대체 무슨 논리인지 모르겠군요. 아무튼 편한 차가 아니면 안 살 겁니다. 사실 이렇게 나와서 차를 고르는 시간도 좀 아깝습니다.”
“그럼 다 사는 건 어떻습니까. 사실 페라리 한 대, 람보르기니 한 대, 그리고 편한 차든 뭐든 다 살 수도 있습니다. 블랙 카드를 써도 되고, 그게 없어도 우리 이미 1,000억 넘게 벌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다 삽시다.”
임동혁은 오기가 발동한 것 같았다.
예상과 달리 최치우가 심드렁하게 나오자 괜히 약이 오른 것이다.
하지만 최치우는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오늘 계약은 힘들겠습니다.”
그는 먼저 딜러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한 다음 임동혁을 노려봤다.
“이사님이 차를 골라준다고 했으니 뭐든 편한 걸로 가져오세요. 아니면 시환이 형에게 부탁해서 아무거나 살 겁니다. 아무거나.”
“아, 아, 알겠습니다. 내가 다음 주에 우리 최 대표님 취향에 딱 맞는, 아주 죽도록 편한 놈으로 골라서 가겠습니다.”
임동혁은 졌다는 듯 두 손을 들었다.
하지만 그가 순순히 물러설 인간이 아니다.
최치우는 해독제 프로젝트로 머릿속이 가득 차 있어서 임동혁의 미친놈스러운 면모를 간과하고 말았다.
그렇게 강남에서의 에피소드는 일단락되는 듯했다.
***
“이게… 대체 뭡니까?”
최치우가 인상을 찡그렸다.
사실 일반적인 범주에서 인상을 쓸 상황은 전혀 아니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황홀한 표정을 짓거나 침을 질질 흘릴 것이다.
실제로 최치우의 옆에 나란히 선 이시환과 백승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우와… 치우야, 아, 아니지. 최 대표님. 이거 롤스로이스 맞죠?”
이시환은 회사에서 철저히 지키던 존칭마저 잠시 망각했다.
백승수도 평소답지 않게 안경을 치켜 올리며 관심을 보였다.
“이건 레이스로군요. 한국 판매 가격 4억에서 5억 사이, 엔진은 6,600cc에 무려 624마력. 직접 운전을 즐기는 오너드라이버를 위해 롤스로이스에서 개발한 명차. 우리 대표님과 아주 잘 어울립니다.”
백승수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차의 스펙을 줄줄 읊었다.
알고 보니 그는 공대생답게 내로라하는 자동차 오타쿠였다.
임동혁은 이시환과 백승수가 자신의 선택을 알아주자 신이 났다.
“역시 우리 올림푸스의 직원답습니다. 롤스로이스 레이스의 진가를 알아보고.”
“설마 이걸 타고 다니라는 겁니까?”
최치우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임동혁의 말을 잘랐다.
그는 이시환이나 백승수와 달리 시종일관 차분한 모습이었다.
오히려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임동혁은 그러거나 말거나 잔뜩 열을 올리며 롤스로이스 찬가를 불렀다.
“물론 내 취향은 페라리나 람보 쪽입니다만, 곧 죽어도 편안한 차를 타야겠다는 최 대표님을 배려해서 딱 맞는 놈으로 골라왔습니다. 어때요?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쓸데없이 크고 비싼 차를 말한 게 아니었습니다.”
“쓸데없다니, 듣는 롤스로이스 서운하겠습니다.”
임동혁은 마치 자동차가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역정을 냈다.
그는 짐짓 서운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최 대표님을 위해 직접 고른 레이스로 말할 것 같으면… 영국 장인들이 한 땀, 한 땀 자수를 놓은 가죽과…….”
“그만, 그만. 알겠습니다. 차를 반품 할 수도 없고, 타야죠.”
“바로 그겁니다! 세계에서 가장 특별한 기업으로 성장할 올림푸스의 대표라면 레이스 정도는 타 줘야 되는 겁니다.”
기어코 자신의 뜻을 관철시킨 임동혁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최치우는 한숨을 쉬며 자동차 키를 건네받았다.
“자동차 구매 비용은 한 번에 정산하죠.”
“우리 대표님 편하신 대로 하십시오. 난 언제든지 괜찮습니다.”
이미 1,000억 가까운 자산 가치를 확보한 최치우는 5억 원에 달하는 금액을 일시불로 지불할 능력이 충분하다.
다만 필요를 못 느끼는 일에 돈을 펑펑 쓰지 않을 따름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동혁 덕에 페라리나 람보르기니도 한 수 아래로 내려다보는 롤스로이스를 타게 됐다.
다소 억지스럽게 차를 받았지만, 못 탈 이유도 없다.
굳이 나서서 살 이유는 없지만, 인수한 차를 일부러 반품할 이유도 더더욱 없다.
누군가에게는 드림카인 롤스로이스지만, 최치우에게는 타면 타고 말면 마는 그냥 자동차일 뿐이기 때문이다.
찰칵- 지이잉!
최치우가 자동차 키 버튼을 누르자 본넷에서 여신 조각상이 튀어나왔다.
롤스로이스를 상징하는 환희의 여신이 자동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우오오- 대박!”
“역시 롤스로이스!”
이시환과 백승수가 다시 한번 탄성을 터트렸다.
최치우도 우아하게 솟구친 환희의 여신 조각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자동차 본넷 앞에 우뚝 선 여신상이 행운을 가져다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최치우는 세계의 비밀 아래 잠들어 있던 미쓰릴을 발굴했고, 대량 살상 무기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는 연구를 가동시켰다.
뿐만 아니라 지금은 전무후무한 해독제를 개발하고 있다.
롤스로이스가 아닌 그보다 더한 것이라도 당당하게 누릴 자격이 충분했다.
하지만 최치우의 관심은 더 높은 곳에 있었다.
그는 부와 명예를 즐길 수 있지만, 그 달콤함에 취해 정신을 놓을 리는 없다.
유혹에 무너지기엔 수많은 차원을 거치며 보고 들은 게 너무 많다.
“기분은 이만큼 냈으면 됐고, 다 같이 밥 먹은 다음에 회의합시다. 오늘 밤을 새더라도 MOU 체결할 제약회사 리스트 검토하겠습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워커홀릭 본능이 나왔다.
싸움이 주요 수단인 차원에서 최치우는 쉬지 않고 싸웠다.
싸우고 또 싸워서 최강의 자리에 올랐다.
반면 현대의 지구는 전문 분야에서 일을 잘하는 게 주요 수단인 차원이다.
그렇기에 최강의 남자가 되기 위해서는 누구보다 자기 일을 잘하는 게 중요하다.
첫 차가 나왔으면 시승을 하는 게 보통 사람들의 심리다.
그러나 최치우는 주차장 구석에 롤스로이스를 세워두고 사무실로 올라갔다.
한영 그룹의 본사를 빌려 쓰는 올림푸스 사무실도 조만간 이사를 가야 한다.
할 일이 태산 같지만 즐거울 따름이다.
이시환과 백승수도 표정이 어둡지 않았다.
그들 역시 단순히 월급을 받기 위해서만이 아닌, 각자의 웅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 올림푸스에 왔기 때문이다.
물론 임동혁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틱틱거리고 있었다.
미쓰릴을 찾고 펜타곤과 손을 잡으며 왕관을 쓴 올림푸스는 그 무게를 충실히 감당하는 중이었다.
더 밝게 빛나는 왕관을 쓰기 위해 땀을 흘리는 올림푸스의 내일은 반드시 오늘보다 창대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