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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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당문의 해독제는 약이 아니다.
만드는 재료부터 약초보다는 독초가 더 많이 섞여 있었다.
해독을 위해 쓰일 뿐, 실제로는 몸 내부를 마비시키는 독약에 가깝다.
혈도를 일시적으로 닫고, 기의 흐름을 차단하는 게 쉬울 리 없다.
순간적으로 온몸의 기를 마비시킬 정도의 독성을 지녀야 한다.
그러면서 큰 부작용을 남기지 않아야 하니, 독의 종주 사천당문이 아니면 누구도 만들 수 없는 것이다.
최치우는 이전 차원에서 얻어낸 제조법을 현대에 맞게 적용하려 했다.
무림에서 구할 수 있었던 재료를 100% 똑같이 사용하긴 어렵다.
무림과 현대의 환경이 다르기에 몇몇 약초와 독초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독초는 구할 수 있지만 가격이 너무 비싸고 수량이 적어 쓰기 힘들었다.
그렇기에 산신령 허철후의 도움이 필요했다.
허철후는 최치우로부터 사천당문의 해독제 제조법을 받았다.
그는 먼저 제조법에 나열 된 약초와 독초들 중에서 구할 수 없는 것들을 제외시켰다.
다음 순서는 제외시킨 약초와 독초의 대안을 찾는 것이다.
허철후는 이미 대안을 찾는 작업에 돌입했다.
최대한 비슷한 성질의 약초와 독초를 찾기 시작했고, 이왕이면 가격이 저렴하고 구하기 쉬운 것을 우선순위에 올렸다.
여러 차례 시행착오를 거쳐야겠지만,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완벽한 제조법이 있고, 대안을 찾아낼 최고의 약초꾼 허철후가 전력을 다하는 중이다.
성공적인 샘플이 나오기만 하면 전세계 해독제의 패러다임이 바뀌게 될 것이다.
최치우는 해독제 개발이 시간문제라 믿었다.
근거 없는 오만함은 아니다.
이미 과거에 경험한 것을 현대에 재현하기만 하면 된다.
아니나 다를까.
허철후는 최치우와 인천에서 만난 지 2주 만에 다시 연락을 해왔다.
자존심 높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허철후가 그냥 전화를 걸 일은 없다.
어느 정도 눈에 보이는 성과가 있다는 뜻이다.
최치우는 이시환을 데리고 인천으로 움직였다.
임동혁은 제약 관련 법안과 규제를 검토했고, 백승수는 각 국의 해독제 유형을 분석하고 있었다.
다들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미쓰릴을 발굴하고, 펜타곤과 기술 제휴를 성공시킨 영광에 취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최치우가 그렇게 물렁한 분위기를 용납할 리 없고, 임동혁도 아랫사람들이 보기엔 결코 만만한 인물이 아니다.
새롭게 올림푸스에 합류한 다른 직원들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었다.
최치우는 가치를 증명하는 직원에겐 최고의 대우를 약속했지만, 함께할 이유가 없는 사람과는 오래 일하지 않겠다고 선포했다.
서로 맞지 않으면 일찍 헤어지는 게 피차 이득이다.
그렇기에 직원들은 나름대로 눈에 불을 켤 수밖에 없었다.
뜨뜻미지근하게 자리나 보전하려는 사람은 올림푸스와 어울리지 않는다.
하늘을 뚫어라 날아가는 로켓에 올라타려면 인생을 걸 각오가 돼 있어야 한다.
물론 그만큼의 보상이 주어져야 하는 것도 당연한 이야기다.
그런 측면에서 이시환은 동기부여로 펄펄 끓고 있었다.
보통 직원이 아닌 핵심 멤버 대우를 받지만, 아직까지는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 적이 없다.
때문에 하루 빨리 최치우와 임동혁에게 스스로의 능력을 보여주려 했다.
“이런 곳에 우리나라 최고의 약초꾼이 있다는 말인가요?”
허철후의 거처 가까이 도착한 이시환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최치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맞아. 그리고 우리끼리 있을 땐 말 편하게 해, 시환이 형.”
“그래? 나야 좋지!”
이시환이 환하게 웃었다.
회사에서는 깍듯하게 공과 사를 지키는 게 맞지만, 굳이 밖에서도 격식을 차릴 필요는 없었다.
업무 시간이라 해도 둘이 있을 때는 편한 형동생이고 싶었다.
말을 놓는다고 해서 이시환이 실수를 할 사람도 아니다.
최치우는 기분 좋게 웃으며 허철후가 머물고 있는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어르신, 저 왔습니다.”
허철후를 부르는 최치우의 말투는 사뭇 공손했다.
그는 약초로 일가를 이룬 허철후를 진심으로 존중하고 있었다.
덕분에 만독불침까지 이뤘으니 고마운 마음을 갖는 게 마땅하다.
최치우는 은혜와 원수 모두 절대 잊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들어오게나.”
마치 2주 전처럼 허철후의 목소리가 울렸다.
문을 열고 거처로 들어선 최치우는 이시환부터 소개했다.
“어르신, 이쪽은 이시환이라고 합니다. 올림푸스의 새로운 직원이고, 사적으로는 제 대학 선배입니다.”
“그런가? 인상이 밝고 동공이 맑은 게 기운이 좋구만. 우리 최 대표에게 큰 힘이 되어주게.”
허철후가 이시환을 바라보며 덕담을 했다.
아무렇게나 막 던진 말은 아니었다.
평생 산을 타며 공력을 쌓은 허철후는 관상에 대해서도 일가견이 있었다.
이시환은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하며 분위기를 밝게 만들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도 치우, 우리 최 대표님에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산신령 어르신.”
“벌써 내 별명도 아는가?”
“직접 뵙고 나니 별명이 아주 잘 어울리십니다. 하하하!”
“허허허, 거참 능글맞은 친구로고.”
허철후는 싫지 않은 기색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최치우는 둘의 모습을 지켜보며 뿌듯함을 느꼈다.
바로 이런 게 이시환이 가진 특별한 능력이다.
처음 만난 사람을 무장해제 시키고, 좋은 인상을 남기는 건 결코 사소한 능력이 아니다.
7번의 환생을 거듭한 최치우도, 세상 부러울 게 없는 임동혁도 가지지 못한 재능인 것이다.
최치우의 기대대로 이시환은 올림푸스의 선봉대 역할을 톡톡히 해낼 것 같았다.
“오랜만에 웃었으니 자네들을 인천까지 부른 이유를 말해야겠지.”
허철후는 재촉하지 않아도 알아서 본론을 꺼낼 태세였다.
그와 최치우는 시간낭비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래서 만만치 않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잘 통하는지 모른다.
“자네가 구해준 제조법은 나로서는 생각도 못 해본 것이었네. 그런 식으로 약초와 독초를 배합할 수 있다니……. 게다가 이름만 들었지 평생 한 번도 못 본 풀이 섞여 있고 말이네.”
사천당문의 해독제 제조법은 세간의 상식을 뛰어넘은 파격을 담고 있다.
아무나 만들 수 있다면 결코 당문의 비기(秘技)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현대에서 구할 수 없는 재료도 있어 허철후를 충격에 빠트렸다.
산신령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그가 한 번도 못 본 약초와 독초의 이름을 최치우가 알고 있다는 게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일까.
허철후는 더욱 의욕적으로 사천당문의 제조법을 재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산신령의 의욕을 자극하기 힘들다.
호령독삼을 구해 만독불침에 도전하는 것, 그리고 전무후무한 제조법으로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해독제를 만드는 것.
최치우는 매번 극한의 난도를 지닌 미션을 들고 찾아왔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산신령 허철후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다.
“무척 어려운 일이라는 점, 잘 알고 있습니다.”
최치우가 입을 열었다.
전 차원을 통틀어 독을 가장 잘 다루는 사천당문의 해독제다.
제조법이 있지만, 재료를 바꿔 현대에 적합하게 만드는 일을 아무나 할 수 없다.
아니, 산신령 허철후가 못 하면 그 누구도 못 한다고 봐야 한다.
최치우는 허철후에게 압박을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올림푸스의 자금은 넉넉하고, 해독제 프로젝트에 얼마의 시간과 돈이 들어도 상관없다.
만약 예상보다 기간이 늘어나면 다른 프로젝트를 동시에 추진해도 된다.
최치우는 기대감을 갖고 인천에 왔지만, 허철후가 어떤 대답을 해도 실망하지 않으려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허철후는 과연 산신령이라는 별명이 아깝지 않은 기인이었다.
그가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처음에는 난공불락의 요새를 만난 기분이었지만… 자네 보기에 부끄럽지 않을 것 같네.”
“그 말씀은…….”
“나도 확신을 할 수는 없지. 아직 사람에게 시험을 해보지 못했으니. 허나 자네가 준 제조법에서 구할 수 없는 약초와 독초를 적절하게 대체해 봤다네.”
사천당문의 해독제는 강력한 마비약이다.
당연히 함부로 임상 실험을 해볼 수 없었다.
하지만 허철후가 대충 아무 재료나 찾아서 해독제를 재현했다고 말하진 않을 것이다.
나름대로 각고의 노력 끝에 산신령이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을 만한 결과를 가져온 게 분명했다.
최치우는 허철후의 손을 덥석 잡았다.
“어르신, 역시 이번에도 해내실 줄 알았습니다.”
“정말로 해낸 것인지는 시험을 해봐야 알겠지만… 제조법에 들어간 약초와 독초의 성분을 최대한 가깝게 따라가려 노력했네. 대신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재료의 가격이 올라갈 수밖에 없었지.”
“그렇군요. 수급에는 문제가 없습니까?”
“구하기 어렵거나 희소한 재료는 아니네. 간단하게 설명을 하자면 말일세.”
허철후가 잠시 말을 끊고 목을 축였다.
생수 한 컵을 벌컥벌컥 들이마신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강력한 마비 효과를 내는 귀망초는 유엽초와 작약근으로 대신했네. 심장에 무리를 덜 주는 것들이지. 또 기혈의 흐름을 끊는데 쓰이는 듯한 납성골역초는 가격은 비싸되 구하기 쉬운 녹용으로 대체하면 될 것 같네. 여기 보면…….”
그는 수십 차례 썼다 지운 흔적이 남아 있는 종이를 보여줬다.
최치우가 건네준 제조법을 두고 얼마나 깊이 고민했는지 알 수 있었다.
밤을 지새우며 머리를 쥐어짜낸 결과, 지금처럼 신나게 설명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최치우는 솔직히 말해 허철후가 언급한 약초를 전부 알지 못했다.
그러나 허철후의 선택을 신뢰하고 있었다.
산신령 허철후를 믿지 못한다면 처음부터 시작할 수 없었던 프로젝트다.
“어르신이 새로 만든 제조법대로 해독제를 완성시키겠습니다. 그리고 몇 번의 테스트와 임상 실험을 거쳐야겠죠.”
“그때까지 잠도 제대로 못 자겠구만.”
“최대한 빨리 성공 여부를 알려 드릴 테니 푹 쉬고 계세요.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내가 무슨 고생인가. 혹여나 이 해독제가 세상을 이롭게 한다면 그저 영광인 게지.”
허철후는 해독제의 특허나 수익 등에 어떤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애시당초 세상에 대한 죄책감으로 은거했던 사람이다.
물론 최치우는 그에게 거액의 보답을 할 계획이지만, 아마 허철후는 돈을 받지 않거나 좋은 일에 기부할 확률이 높았다.
‘아무리 그래도 거처는 다른 곳으로 옮겨 드려야겠어. 약초를 연구하기 좋은 장소로.’
최치우는 결심을 굳히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차피 당장 말해봐야 허철후는 듣지도 않을 것이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설득하며 허철후에게 좋은 환경을 제공해 줄 작정이었다.
“다시 뵐 때는 해독제를 들고 오겠습니다.”
“그럼세. 꼭 그래야지.”
짧고 굵은 만남이 끝났다.
이시환도 최치우를 따라 일어나 허리를 꾸벅 숙였다.
“자주 인사드리겠습니다, 어르신.”
“그래, 밝은 친구. 자네도 잘 가게.”
훈훈한 공기가 좁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서로가 서로를 믿는다는 것, 신뢰라는 단어가 만들어낸 분위기다.
최치우는 신뢰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인지, 동료의 존재가 얼마나 든든한지 현대에서 처음 배웠다.
허철후를 만나고 이시환과 함께 돌아오는 길, 최치우는 세상 그 누구도 부럽지 않았다.
머지않아 현대의 지구, 그것도 대한민국에서 사천당문의 해독제가 부활하게 될 것 같았다.
무림을 독으로 호령한 당문의 해독제는 지구의 부호들에게는 값비싼 필수품이 되고, 가난한 분쟁 지역 주민들에게는 생명의 동아줄로 여겨질 것이다.
신들의 세계라는 뜻을 가진 올림푸스는 또 한 번 인간계를 들썩이게 할 준비가 됐다.
최치우는 무림과 아슬란 대륙뿐 아니라 자신이 경험한 모든 차원의 지식을 아낌없이 퍼부어 현대의 인류를 인도하고 있었다.
뉴욕에서 세상을 발아래 내려다보는 오만한 거물들도 곧 최치우 앞에서 머리를 숙이게 될지 모른다.
아니, 최치우는 반드시 그렇게 만들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