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
<사천당문의 해독제>
무림의 이름 없는 낭인으로 환생해서 천하제일검 절세신룡이 되기까지, 최치우는 온갖 경험을 다 할 수밖에 없었다.
강호는 절대 낭만스러운 곳이 아니었다.
정정당당하게 칼을 겨루는 비무는 가뭄에 콩 나듯 있는 이벤트였다.
상대를 죽이기 위해, 또는 살아남기 위해 비겁한 수를 밥 먹듯 쓰는 게 강호무림의 본모습이다.
특히 정파무림과 마교의 전쟁이 발발하면서 이전에 없던 암수가 버젓이 쓰이기 시작했다.
난세(亂世)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난세를 반기는 이들도 존재했다.
사천당문은 무림에 찾아온 난세를 가장 적극적으로 이용한 세력이었다.
그들은 남부럽지 않은 힘을 가졌지만 언제나 오대세가에 들지 못했었다.
검도창(劍刀槍)이 아닌 독과 암기를 주로 쓰는 게 정파무림의 위상에 걸맞지 않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교와의 전쟁 이후 모든 게 달라졌다.
멸문지화의 위기에 몰린 무림문파와 세가들은 이것저것 가리지 않았다.
도의나 체면을 따질 여유가 사라진 것이다.
그들은 강력한 독과 암기를 지닌 사천당문에 손을 내밀었고, 자연스레 당문의 입지는 오대세가를 능가하게 됐다.
덕분에 무림에서는 피바람이 끊이지 않았다.
마교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금기시되던 독과 암기의 사용이 완전히 풀린 탓이다.
무림에서 이태민이란 이름으로 활동했던 최치우도 사천당문 때문에 여러 번 곤경에 처했었다.
만독불침을 이루기 전에는 늘 당문에서 만든 절독을 조심해야 했다.
무색무취의 독에 중독되면 허무하게 목숨을 잃을지 모른다.
결국 참다못한 이태민은 사천으로 쳐들어갔다.
당문의 가주를 만나 결판을 짓기 위해서였다.
차원은 다르지만, 이태민이 당문의 대문을 열어 젖히고 사자후를 토해낸 것은 여전히 무림의 전설로 남아 있다.
“마교보다 당문의 독이 더 거슬린다. 사천당문은 이 자리에서 해독제를 내놓던가, 아니면 예전처럼 독을 봉인하라!”
천하제일검 이태민의 호령은 당문의 자존심을 긁었다.
이미 재미를 본 그들이 예전처럼 독을 꽁꽁 봉인할 리 없었다.
그렇다고 정파의 희망으로 떠오른 이태민과 죽기 살기로 싸우기도 힘들다.
잠시 고심하던 당문의 가주는 이태민에게 비무를 제안했다.
비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시험에 가까웠다.
당문의 가주들만 익힐 수 있는 최고 절기인 만천화우(滿天花雨)를 막아내면 대대로 내려오는 해독제와 제조법을 조건 없이 내어준다.
대신 만천화우를 파훼하지 못하면 절세신룡 이태민은 앞으로 당문의 일에 개입하지 않는다.
복잡하게 머리 굴릴 필요 없는 제안이었고, 이태민은 시험을 수락했다.
갑작스러운 비무에 사천당문의 모든 식솔들이 숨을 죽였다.
만천화우는 사천당문 최후의 절기다.
만약 이태민에 의해 만천화우가 파훼되면 사천당문의 현판이 땅에 떨어지는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가주에게도 믿는 구석은 있었다.
한 번에 수백 개의 암기를 흩뿌리는 만천화우는 펼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렇기에 웬만해서는 한 사람에게 집중해서 펼치기 힘든 무공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충분한 시간과 여유가 주어지면, 단언하건데 천하제일검이나 천마라고 해도 만천화우를 파훼하긴 힘들 거라 자신했다.
당문의 가주는 이태민이 죽지는 않겠지만 피를 철철 흘리며 무릎을 꿇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 되면 사천당문의 자존심은 하늘을 찌르게 되고, 무림에서의 영향력 또한 더 없이 강해져 오대세가를 발아래 둘 수 있다.
정파무림의 소중한 자산인 이태민은 정성스레 치료해서 회복시키면 된다.
‘감히 본가의 터전에서 오만방자하게 목소리를 높인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당문의 가주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곧이어 그가 전력을 다해 만천화우를 펼쳤다.
하늘 위로 각양각색 수백 개의 암기가 떠올랐고, 꽃비가 내리는 암기의 폭풍이 이태민에게 몰아쳤다.
채채채채챙-!
빽백하게 뒤덮인 암기의 빗속에서 이태민이 어떻게 대처하는지 누구도 볼 수 없었다.
그저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만이 쉴 새 없이 울리며 고막을 때릴 뿐이었다.
솨아아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영원 같던 찰나가 저물고, 하늘을 가득 채웠던 암기의 꽃이 모조리 땅에 떨어졌다.
“……!”
자존심 높은 사천당문의 식솔들은 모두 말을 잃었다.
누구 하나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없었다.
직접 만천화우를 펼친 당문의 가주는 창백해진 안색으로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그는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있는 힘껏 내공을 운용해 당문 최후의 절기를 펼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을 가득 채운 꽃비는 이태민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이태민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사나운 눈빛을 뿌리고 있었다.
한 자루 검으로 수백 개의 암기 폭풍을 찢어발긴 것이다.
“어때? 당문의 가주라면 약속은 지키겠지?”
이태민이 씨익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역시 만천화우를 막아내느라 막대한 내력을 소모했지만, 여전히 검을 휘두를 힘은 남아 있었다.
반면 당문의 가주는 탈진하기 직전의 상태였다.
여기서 사천당문의 식솔들을 모조리 동원하면 이태민을 쓰러트릴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래봐야 당문이 얻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명분과 명예를 잃고, 애꿎은 식솔들의 목숨도 숱하게 잃게 될 것이다.
종내에는 정파무림에서 퇴출당해 사파로 낙인찍힐 게 뻔하다.
가주는 끝내 고개를 떨궜다.
수모를 감내하고 약속을 지키는 수밖에 없다.
당문의 독을 다시 봉인할 수는 없으니 가문의 비법인 해독제 제조법을 알려줘야만 했다.
“가주전으로 들어오시오, 절세신룡.”
“역시, 당문의 명성이 헛되지 않았군.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 만천화우는 까다로웠어.”
“크흠.”
이태민의 위로는 당문의 자존심을 더욱 후벼 팔 따름이었다.
그러나 패자는 말이 없다.
절세신룡 이태민은 사천당문의 본가에서 만천화우를 파훼하고, 그 대가로 현존하는 최고의 해독제와 제조법을 얻게 됐다.
그는 머지않아 만독불침을 이루며 해독제가 필요 없게 됐지만, 단신으로 사천당문을 제압한 일화는 무림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회자 될 전설로 남았다.
***
‘인생에서 버릴 경험은 하나도 없어, 단 하나도.’
최치우는 무림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절세신룡 이태민으로 살아가던 시절, 사천당문의 해독제 제조법을 얻었던 게 단서가 됐다.
이제껏 최치우가 살았던 모든 차원을 통틀어 독과 약초를 다루는데 사천당문보다 뛰어난 곳은 없었다.
그들의 비밀스러운 해독제 제조법은 어디에서나 통할 것이다.
게다가 산신령 허철후라는 믿음직한 조력자도 구했다.
현대에서도 충분히 사천당문의 해독제를 재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전부 모였습니다.”
그때 이시환의 목소리가 최치우의 상념을 깨웠다.
인천에서 허철후를 만나고 돌아온 최치우는 회의를 소집했다.
올림푸스에 합류한 이시환과 백승수도 함께 자리했다.
두 명은 사적으로는 최치우의 대학교와 미래 에너지 탐사대 선배다.
하지만 회사 안에서는 철저하게 서열을 지키며 공사를 구분했다.
쾌활한 성격의 이시환도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사내에서는 무조건 존댓말을 썼다.
최치우는 회의실 원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임동혁과 이시환, 백승수.
3명에 불과하지만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일당백의 용사들이다.
각자의 캐릭터와 장점도 뚜렷하게 다르다.
임동혁은 재력과 배경을 바탕으로 엄청난 인맥을 보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의 과감한 성격과 대기업을 운영해 본 경험은 올림푸스에 꼭 필요하다.
이시환은 쾌활한 행동파로 어려운 일에 앞장서는 걸 마다하지 않는다.
올림푸스가 불가능해 보이는 프로젝트를 수행할 때, 이시환은 언제나 선봉에 설 것이다.
백승수는 전형적인 학구파로 누구보다 성실하게 연구와 조사를 진행할 사람이다.
개성 넘치는 올림푸스 멤버들을 뒤에서 묵묵히 지원하며 무게중심을 잡을 것 같았다.
이 자리에 없는 김도현 교수까지, 최치우가 구상한 올림푸스의 정예 멤버들은 억만금과도 바꿀 수 없다.
올림푸스는 또 다른 직원들을 뽑으며 회사의 기틀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최치우가 올림푸스를 설립한 창업 정신을 공유하며 험로를 개척할 동지는 극소수일 수밖에 없다.
오늘 회의에 참석한 세 사람은 직원이 아닌 동지인 것이다.
최치우는 다른 차원에서 헌터 길드를 만들었던 기분을 느꼈다.
그때도 시작은 미약했지만 끝은 창대했었다.
올림푸스는 이미 성공적으로 첫발을 내딛으며 세상의 주목을 받았기에 더더욱 위대한 결과를 함께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모이니 조금 낯설긴 한데, 그래도 회의를 시작해 보죠.”
최치우는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지웠다.
일을 할 때는 누구보다 철저하게 집중해야 한다.
회의 주제는 다름 아닌 올림푸스의 두 번째 프로젝트였다.
“임동혁 본부장님, 아니 올림푸스의 직책대로 이사님이라고 하죠. 임 이사님이 첫 번째 프로젝트의 진행 상황을 간단히 정리해 주면 좋겠습니다.”
최치우의 지목을 받은 임동혁은 기다렸다는 듯 말을 쏟아냈다.
“펜타곤과는 세부 계약까지 마무리됐습니다. 지속적으로 보고서를 받고, 필요시 우리가 펜타곤을 방문해 신기술 개발 과정을 체크할 수 있도록 기술 제휴를 매듭지었습니다. 그리고 1억 달러 역시 올림푸스의 법인 계좌로 이체가 완료됐습니다.”
확실히 미국 국방부답게 일 처리가 빠르고 정확했다.
보장된 돈을 다 받았고, 기술 제휴도 매끄럽게 이어질 것처럼 보였다.
현재 단계에서 더 이상 펜타곤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펜타곤에서 미쓰릴을 이용해 특별한 성과를 낼 때까지는 큰 이슈가 없겠군요. 그럼 가벼운 마음으로 두 번째 프로젝트에 집중할 수 있겠습니다.”
임동혁과 이시환, 백승수는 기대감을 숨기지 못했다.
다들 최치우가 구상하는 두 번째 프로젝트에 대해 약간의 언질은 받았다.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접하진 못했다.
오늘 회의에서 드디어 그 실체가 공개되는 것이다.
최치우는 3명의 얼굴을 돌아보며 말을 이어갔다.
“미리 말한 것처럼 우리의 두 번째 프로젝트는 해독제입니다. 제약회사도 아닌데 무슨 해독제냐고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올림푸스는 세상을 바꾸는 회사입니다. 그렇죠?”
처음에는 두 번째 프로젝트를 미심쩍게 여기던 임동혁도 고개를 끄덕였다.
최치우가 이 정도로 뚝심 있게 밀어붙이는 걸 보면 분명한 로드맵이 있을 거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전세계의 부호들은 언제 어디서 독에 당할지 모릅니다. 그리고 가난한 국가의 사람들은 오염된 물로 인해 매일 중독의 위험을 감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들 해독제는 부호들에게 아주 비싼 값으로 팔리고, 가난한 지역에는 무상으로 제공될 겁니다.”
최치우는 벌써부터 두 번째 프로젝트의 결과물이 어떤 식으로 세상을 바꿀지 상상하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될 수만 있다면 정말 엄청난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역시 현실성이다.
최치우는 기대와 의문을 동시에 품은 올림푸스 멤버들에게 설명을 계속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해독제는 독성을 중화시키는 약입니다. 근본적인 치료를 가능케 하는 약은 만들기도 어렵고, 만들어봤자 특정한 독에만 해독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적인 제약회사들도 획기적인 해독제를 만들지 못하는…….”
백승수가 말끝을 흐렸다.
자연스레 의견을 이야기 했는데, 본의 아니게 초를 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치우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백승수의 말을 받았다.
“맞습니다. 그래서 우린 전혀 다른 차원의 해독제를 만들 겁니다. 정확히 말하면, 독을 중화시키는 게 아니라 독성이 퍼지는 걸 억제하는 약입니다.”
“억제요?”
완전히 다른 개념에 세 사람의 동공이 커졌다.
최치우는 사천당문의 해독제를 떠올리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들 지적한 것처럼 우리가 제약회사나 병원은 아닌 게 맞습니다. 현대의학은 놀라울 정도로 발달했죠. 그렇기에 급성 중독을 억제하고, 병원까지 갈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생존율은 엄청나게 높아질 겁니다.”
사천당문의 해독제는 혈도를 일시적으로 마비시켜 독 기운이 돌아다니지 못하게 만드는 약이었다.
아무리 위험한 극독이라도 전신으로 퍼지지 않으면 해결책이 생긴다.
운기조식에 들어가 강력한 내공으로 독성을 태워 버리면 되기 때문이다.
보통 독은 온몸을 헤집고 돌아다니며 손을 쓸 수 없게 만든다.
사천당문의 해독제는 그러한 독의 특성을 제어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최치우가 구상한 해독제의 원리도 마찬가지다.
현대인들은 독 기운을 태우는 내공은 없지만, 한층 발달한 의학을 가지고 있다.
독이 온몸에 퍼지지 않은 상태에서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면 최소한의 피해로 치료를 할 수 있다.
해독제에 대한 개념을 바꾼 그의 아이디어는 임동혁과 이시환, 백승수에게 충격을 안겨줬다.
게다가 최치우는 이미 해독제를 만드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 산신령 허철후가 바쁘게 움직이는 중이다.
두 번째 프로젝트가 성공하면 에릭 한센 같은 거물들은 너도 나도 해독제를 구입할 게 뻔했다.
중독의 위험으로부터 목숨을 구할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최치우는 에릭을 다시 만나길 고대했다.
그의 품에 올림푸스의 해독제가 들어 있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에릭도 올림푸스가 단순한 돈벌이를 넘어 세상을 바꾸는 기업이란 걸 인정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보여주지.’
최치우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 세계의 정점으로 나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