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번째 환생-61화 (61/243)

# 61

***

최치우와 에릭 한센이 나란히 서 있었다.

이전까지 최치우를 둘러싸고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은 자연스레 거리를 뒀다.

에릭이 최치우와 단 둘이 대화하고 싶은 티를 팍팍 냈기 때문이다.

콧대 높은 뉴욕의 최상류층 멤버들도 에릭에게는 한 수 접어주고 있었다.

통유리 너머 뉴욕 전경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등 뒤로 따가운 시선이 꽂혔다.

다들 에릭과 최치우가 무슨 말을 할지 호기심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나 용기 있게 끼어들 사람은 없었다.

괜히 에릭에게 잘못 보였다간 무슨 곤경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금속을 발견했다면서요.”

에릭은 레드 와인을 조금씩 마시며 입을 열었다.

새하얀 피부와 붉게 물든 입술이 극명한 대비를 이뤄 마치 뱀파이어 같았다.

최치우는 그의 옆얼굴을 주시하며 천천히 대답했다.

“정확히 말하면 존재하지 않던 금속이 아니죠. 그저 알려지지 않던 금속일 뿐입니다.”

“아, 그게 맞군요. 존재하지만 알려지지 않은 것들.”

에릭은 최치우의 지적을 듣고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또 한 번 와인으로 입술을 적신 그는 곧바로 다음 질문을 던졌다.

“올림푸스는 어떤 목적으로 세워진 회사입니까?”

“우리 회사에 관심이 많은 것 같군요.”

“물론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당신과 시간을 보내고 있잖아요.”

에릭은 올림푸스에 대한 흥미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관심을 가지는 걸 최치우에게 주는 특혜처럼 여겼다.

다른 사람이라면 에릭과의 독대를 엄청난 기회라고 생각할 것이다.

말 한마디로 수백억에서 수천억을 투자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치우는 이제까지 에릭이 숱하게 만났던 기업인들과는 본질 자체가 다른 인물이다.

최치우는 뉴욕의 젊은 지배자로 불리는 에릭 한센이 딱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에게서 풍기는 음흉한 향기가 본능적으로 거슬렸기 때문이다.

“새로움을 찾아내서 인류의 미래를 밝히는 게 올림푸스의 설립 목적입니다.”

“매출과 수익, 회계 구조 등에 대한 계획이나 목표는 없고요?”

“돈 많이 벌어야죠. 많이 벌 겁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익이 곧 세계의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움직일 계획입니다.”

에릭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에게 있어선 최치우의 이야기가 이상론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뭔가 답답한 듯 단숨에 와인잔을 비운 에릭이 살짝 목소리를 높였다.

“세계의 이익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어요. 인간은 그저 자기 자신을 위해 움직이는 동물이고, 그 과정에서 세계는 알아서 발전하는 겁니다. 지금까지의 역사가 그래온 것처럼.”

“역사 속에서 큰 그림을 그리며 미래를 내다본 사람들이 있었기에 오늘이 존재하는 겁니다.”

“아아- 아무튼 그 이야기는 됐고. 지금 한창 분위기 좋을 때 기업 공개를 해요. 뉴욕 증시에 상장하면 펜타곤 효과로 엄청난 수익을 거둘 수 있을 테니. 오랜만에 발견한 재밌는 회사인데, 너무 뭘 모르는 거 같아 조언해 주는 겁니다.”

“조언은 고맙습니다만, 당분간은 상장할 생각이 없습니다.”

최치우의 말투에 단호함이 묻어나왔다.

그는 올림푸스의 앞날에 대해 분명한 비전을 갖고 있었다.

에릭은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으며 두 눈을 크게 떴다.

“대체 왜……?”

“새로운 도전, 새로운 프로젝트에 착수할 돈은 이미 충분합니다. 돈이 돈을 버는 세상이지만, 올림푸스는 세상을 바꾼 만큼의 대가를 받으며 성장할 겁니다.”

단순히 돈을 많이 버는 게 목적이었다면 얼마든지 방법이 있다.

하지만 최치우가 추구하는 가치는 그보다 훨씬 크고 깊었다.

물론 보통 사람이 이해하기 쉬운 영역은 아니었다.

“펜타곤에서 받은 돈이 얼마였더라, 1억 달러? 그게 대단한 돈 같지만 맨해튼의 아파트 펜트하우스 하나가 천만 달러 정도 합니다. 고작 아파트 10채 값에 지나지 않는 돈이란 말입니다, 1억 달러는.”

“누구는 1억 달러로 아파트를 사겠지만, 난 1억 달러로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만들 수 있습니다. 같은 돈이라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는 법이죠.”

최치우는 가벼운 설전에서 에릭을 완전히 압도했다.

에릭 한센은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둔 이후 최치우 같은 사람을 처음 만났다.

모두 그의 재력과 수완 앞에 무릎을 꿇었고, 말 한마디도 조심했었다.

돈으로 안 되는 일은 없다는 게 에릭의 신조였다.

그러나 최치우는 억만금을 보여줘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것 같았다.

“전기차와 우주 로켓에 투자하는 건 돈보다 더 큰 가치를 위해서가 아닙니까? 아니면 그것도 더 많은 투자금을 끌어들이기 위한 쇼는 아니겠죠.”

최치우가 마지막 카운터펀치를 먹였다.

에릭은 전기차와 우주 로켓 사업에 투자하며 세계의 찬사를 받았다.

아직까지 수익이 나지 않지만, 미래를 위한 도전을 지속해 왔다.

덕분에 그는 잔인한 기업 사냥꾼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이미지를 세탁하고, 거액의 투자금을 유치하기 위한 쇼일지 모른다.

최치우는 에릭 한센과 잠깐 대화를 나누며 그의 본질을 간파했다.

‘제국의 황제와 닮았어.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 다른 모든 사람들을 파멸시켜도 웃을 수 있는 하이 엘프, 아니 인간.’

첫 번째 차원인 링스 월드의 황제를 다시 보는 기분이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그는 하이 엘프고 에릭은 인간이라는 것뿐이다.

최치우는 하이 엘프 제국을 몰락시키며 멸망의 인도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덕분에 끝없는 환생을 반복하게 됐다.

그래서일까.

에릭 한센의 첫인상이 유독 안 좋았던 이유는 전생의 악연을 떠올리게 만들어서일지도.

“겨우 첫 번째 프로젝트, 그것도 고작 1억 달러짜리 성공으로 너무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네요. 오늘 일,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겁니다.”

에릭은 차가운 눈빛으로 최치우를 노려봤다.

최치우는 화를 내지 않고 미소를 머금었다.

“다음 만남을 기대하겠습니다.”

그는 먼저 등을 돌리고 나왔다.

에릭처럼 천문학적 거금을 굴리는 인물과 틀어졌으니 귀찮은 일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굳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에게 억지로 잘 보일 필요는 없다.

최치우는 이제껏 어느 차원의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지 않았다.

“어땠습니까?”

그때 임동혁이 다가왔다.

그는 최치우와 에릭 한센이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가장 궁금해하는 사람이었다.

에릭에게 잘 보이면 거액의 투자 또는 사업에 도움이 될 사람들을 소개받는 건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치우는 임동혁의 기대와 다른 대답을 했다.

“돈은 잘 벌지 몰라도 딱히 흥미가 가는 사람은 아니더군요.”

“그 말은?”

“다음에 볼 땐 에릭이 나를 어려워하게 될 겁니다.”

“아이고.”

임동혁은 이마를 짚었다.

그가 기대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결과가 주어졌다.

그러나 금방 표정을 풀었다.

임동혁은 에릭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잘 알지만, 최치우는 더 대단한 괴물이라고 믿었다.

남들은 미쳤다고 할지 모르지만, 정말 다음에는 에릭도 최치우를 어려워하게 될 것 같았다.

뉴욕의 화려한 파티, 그리고 이너 서클에 속한 최상류층과의 만남은 최치우에게 또 하나의 동기를 부여했다.

세상을 전부 가졌다고 착각하는 그들에게 다른 방식의 성공으로 크게 한 방 먹여주고 싶었다.

‘귀족들 쓸어버리는 건 또 내 전공이지.’

최치우는 어깨에 힘을 풀고 미소를 지었다.

얼굴은 웃지만 피는 뜨겁게 끓고 있었다.

올림푸스의 두 번째 프로젝트에 대한 열망 또한 덩달아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최치우의 생각대로 해독제를 만들 수 있다면, 뉴욕의 아파트를 운운하던 에릭의 큰 코가 납작해질 것이다.

***

최치우는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길을 나섰다.

여전히 인터뷰 요청은 쏟아졌고, 언론과 대중의 관심은 뜨거웠다.

정부에서도 전략적으로 올림푸스의 성과를 밀어주며 홍보에 힘을 썼다.

올림푸스가 펜타곤과 기술 제휴를 맺은 것을 현 정부의 외교 안보 성과로 인식시키기 위해서다.

최치우 입장에서도 딱히 나쁠 게 없었다.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와 홍보는 기업에게 큰 힘이 된다.

정치와 너무 가까워질 필요는 없지만,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은 모두 동원하는 게 좋다.

이름값을 약간 빌려주고 정부 권력을 아군으로 만드는 건 남는 장사다.

물론 그는 정부와 대통령을 100% 신뢰하진 않았다.

직접 만난 대통령은 좋은 사람 같았다.

대외적으로 비치는 이미지도 훌륭한 편이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면 정치인은 언제든 얼굴색을 싹 바꿀 수 있다.

최치우는 21살이지만, 이전 차원에서 누구보다 많은 수의 정치인들을 경험해 봤다.

그렇기에 정치인과는 믿음이 아닌 이익으로 거래를 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만나러 가는 사람은 조건 없이 신뢰할 수 있는 사이다.

최치우에게 만독불침이라는 경지를 선물해 준 기인, 산신령 허철후이기 때문이다.

최치우와 허철후는 서로가 서로에게 더 없이 소중한 발판이 됐었다.

허철후는 마음의 상처를 입고 세상을 떠나 있었다.

그런데 최치우를 만나 다시 심신을 수습하고 자기 삶의 의미를 되찾았다.

최치우도 허철후 덕분에 호령독삼이라는 천고의 독초이자 약초를 얻었고, 만독불침이라는 지고지순한 경지를 이루며 임독양맥까지 한 번에 뚫어냈다.

그러한 과정에서 허철후는 최치우가 가진 엄청난 능력의 일부분을 목격하고 말았다.

원래 비밀을 공유하면 더욱 가까워지는 법이다.

만난 시간은 길지 않지만,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기인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두 사람은 서로를 깊이 이해하게 됐다.

최치우는 거듭 사례금을 고사한 허철후에게 기어이 정착금을 안겨줬고, 허철후는 심산유곡을 떠돌며 세상으로 돌아오기 위한 준비를 했다.

그리고 드디어 때가 된 것이다.

꽤 오래 자신을 갈고 닦으며 준비를 마친 허철후는 팔도강산의 심마니와 땅꾼들을 호령하던 산신령의 위용을 되찾았다.

최치우는 그의 연락을 받고 세상에 없던 해독제를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구상했다.

제약회사도 아닌 올림푸스에서 독보적 해독제를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아니,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상식의 한계를 초월한 최치우와 허철후가 손을 잡으면 못 할 것도 없다.

최치우는 분명한 비전을 갖고 있었고, 허철후는 그를 뒷받침할 경험과 능력의 소유자다.

그렇기에 미국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최치우는 곧바로 인천으로 향한 것이다.

허철후는 지리산이나 설악산이 아닌 인천 차이나타운 근처에 거처를 마련하고 있었다.

똑똑-

“어르신.”

최치우는 허름한 쪽방의 문을 두드렸다.

곧이어 안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울렸다.

“자네 왔는가? 얼른 들어오게.”

망설이지 않고 문을 연 최치우는 환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허철후는 형형한 안광과 맑은 낯빛으로 최치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처는 허름하고 초라하지만, 허철후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전보다 훨씬 밝았다.

길고 긴 은거를 깨트린 그가 산신령의 본모습을 회복한 게 분명했다.

“오랜만에 보니 이리 반가울 수가 없네.”

“저도 그렇습니다.”

“내 예상대로 자네 아주 대단한 사람이 됐더구만. 하긴, 호령독삼을 다스린 사람이 뭔들 못하겠는가.”

허철후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최치우가 이룩한 혁혁한 성과에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술을 물로 만들고, 호령독삼의 기운을 모조리 흡수한 걸 먼저 봤기 때문이다.

허철후의 시각에서 최치우는 하늘이 내린 인물이다.

그러니 올림푸스를 세우고, 펜타곤과 기술 제휴를 맺었다한들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실 허철후의 관심은 다른데 있었다.

최치우에게 다시 연락을 했던 날, 그는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만독불침을 이룬 최치우만이 할 수 있는 제안이었다.

“그런데 말이네……. 역사에 길이 남을 해독제를 만들자는 이야기는 진심인가?”

허철후가 참지 못하고 곧장 본론을 꺼냈다.

오랜 세월 세상을 등지고 있었으니 그만큼 하고픈 일이 많을 것이다.

특히 최치우의 제안은 산신령 허철후의 심장을 뛰게 만들기 충분했다.

최치우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검은 눈동자로 허철후를 쳐다보며 말했다.

“진심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만들어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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