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
<귀족>
뉴욕은 세계의 수도다.
미국의 수도는 워싱턴 D.C지만 세계의 수도는 뉴욕이다.
그 누구도 여기에 토를 달지 않는다.
실제로 세계의 금융, 문화, 예술, 학문 등 거의 모든 부분에 있어 뉴욕이 중심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미국이 인종의 용광로라는 말도 뉴욕에 와봐야 이해할 수 있다.
미국 남부와 서부는 여전히 백인들의 땅이다.
흑인과 히스패닉은 주류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동부에서도 뉴욕에는 백인만큼 많은 수의 흑인, 동양인, 히스패닉들이 단단히 자리를 잡고 있다.
심지어 어둠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만약 뉴욕에서 중국인이나 흑인을 잘못 건드리면 곧장 차이나타운과 할렘의 갱스터들이 출동할지 모른다.
적어도 일반 시민들 기준에서 뉴욕은 여러 인종이 뒤섞여 비교적 평등하게 살아가는 도시다.
그러나 상류층으로 올라갈수록 이야기는 달라진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낄 수 없는 이너서클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뉴욕의 상층부를 지배하는 이너서클은 여전히 백인들 위주로 돌아간다.
간혹 동양인과 인도인도 섞여 있지만, 압도적 주류가 백인임을 부정하긴 어렵다.
최치우는 바로 그 이너서클의 파티에 참석했다.
놀랍게도 여기선 임동혁조차 주류가 아니었다.
한국의 10대 재벌 후계자면 세계 어디서도 빠지지 않는 부호이자 거물이다.
그렇지만 극소수의 최상류층이 모인 뉴욕의 파티에서는 주목을 받기 어려운 것이다.
임동혁은 센트럴파크와 타임스퀘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마천루 스카이 라운지에서 평소처럼 위스키를 홀짝였다.
그는 최치우 옆에 서서 몇몇 사람을 가리켰다.
“저기 저 사람은 위버의 공동 창업자입니다. 자기 재산이 2조 정도 된다고 합니다.”
“2조면 대충 20억 달러? 재밌네요.”
최치우는 한 손에 샴페인 잔을 든 채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봤다.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잘나가는 그룹이 모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을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어디서든 배움의 기회를 찾으려는 최치우에게 이곳은 흥미로운 샘플이 넘치는 공간이다.
“저 사람은 에어비투비를 만든 3인방 중 한 명입니다. 최 대표님도 에어비투비, 알고 있으십니까?”
“물론이죠. 이용해 본 적은 없지만.”
과연 임동혁이 어마어마한 파티라고 말할 만 했다.
라이브 밴드의 재즈 연주를 배경삼아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떠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죄다 국제적 거물이었다.
이들은 단지 초고층 빌딩에서 뉴욕을 내려다보고 있는 게 아니다.
실제 영향력으로 뉴욕을 비롯한 세계를 발밑에 두고 있었다.
“헤이, 동혁!”
그때 누군가 두 사람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정확히는 임동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반가운 기색을 표했다.
동시에 등을 돌린 최치우와 임동혁은 하얀 피부에 짧고 곱슬거리는 금발을 한 전형적 외모의 백인 청년을 보게 됐다.
그가 바로 임동혁을 이 파티에 초대한 장본인, 도미너스 펀드의 CEO 마이클 캐릭이다.
임동혁은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마이클을 껴안았다.
“마이클! 이게 얼마만입니까!”
“그러게 말이에요. 뉴욕까지 와줘서 고마워요, 동혁.”
둘은 유창한 영어로 대화를 나눴다.
마이클이 외국인들은 발음하기 어려운 임동혁의 이름을 정확히 아는 게 이채로웠다.
청바지에 폴로셔츠를 입은 마이클의 외모는 평범한 백인 대학생이나 직장인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가 이끄는 도미너스 펀드는 공격적인 투자로 악명이 높은 금융계의 하이에나다.
순진해 보이는 외모로 마이클 캐릭을 판단하면 큰 코 다치기 십상이다.
최치우는 일시에 그의 진면목을 파악했다.
‘서글서글한 인상이지만, 보통내기가 아니다. 날카로운 기운을 내면으로 갈무리했어. 무공을 익혔다면 고수 반열이야.’
마이클에 대한 평가를 내린 찰나, 임동혁이 최치우를 소개했다.
“마이클, 이쪽은 내가 말한 우리 올림푸스의 최치우 대표님입니다. 최 대표님, 여긴 도미너스 펀드의 마이클 캐릭입니다. 뉴욕에서 MBA 과정을 같이 들으며 알게 된 오랜 친구라 할 수 있습니다.”
“와우, 펜타곤과의 제휴를 이끌어낸 젊은 CEO? 만나서 영광입니다. 마이클 캐릭이라고 해요.”
마이클은 과장된 몸짓으로 최치우를 치켜세웠다.
올림푸스의 성과는 국제 뉴스를 탔고, 미국에도 알려져 있었다.
펜타곤이 외국의 신생 기업에 문호를 개방했다는 소식 자체가 이례적이었기 때문이다.
“반갑습니다. 최치우입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편하게 이름을 불러도 될까요?”
“그럼요.”
“쿨!”
마이클이 환하게 웃었다.
서양에서 성 대신 이름을 부르는 건 가까운 사이일 때나 가능하다.
마이클은 만난 지 1분도 안 되어 서로 이름을 부르게 유도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사교력도 그의 능력 중 하나였다.
두둥-!
그때였다.
라이브 밴드의 드러머가 유독 크게 베이스를 밟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밴드로 향했다.
“저스틴 팀버?”
“오, 정말 저스틴이네. 오랜만이군.”
파티 참석자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앨범을 냈다 하면 무조건 빌보드 차트 1위를 찍는 세계적인 가수 저스틴 팀버가 마이크를 잡고 있었다.
그런데 다들 놀라지 않고 당연하다는 태도였다.
소규모 파티에 세계 최고의 가수를 부르는 게 일상적인 사람들다웠다.
저스틴 팀버가 노래를 시작하자 조명이 화려하게 바뀌었다.
“어때요? 재밌지 않나요?”
마이클이 리듬에 몸을 맞추며 물었다.
최치우는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뉴욕을 꼭대기에서 내려 보는 펜트하우스, 캐비어와 트러플을 아끼지 않고 사용한 음식과 비싼 샴페인, 파티의 흥을 돋우고 있는 빅토리아 시크릿 모델들, 기꺼이 마이크를 잡는 저스틴 팀버, 그리고 선택 받은 특별한 사람이라는 자부심까지, 흠잡을 곳 없는 파티이긴 합니다.”
“세계를 움직이는 사람들이니, 스트레스를 풀 때는 확실해야죠.”
마이클도 은근한 자부심을 감추지 않았다.
최치우는 가볍게 웃었다.
그는 이전 차원에서도 오늘과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링스 월드와 아슬란 대륙에서는 귀족과 왕족들이 이런 파티를 주최했다.
그들은 실제로 세상을 한 손에 넣고 주무르며 특권을 즐겼다.
무림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의 혈족은 끼리끼리 연합을 만들어 남들이 넘볼 수 없는 모임을 만들었다.
그러나 세상이 위기에 처했을 때 그들은 뒤로 숨기 바빴다.
최치우는 링스 월드에서 향락에 빠진 하이 엘프의 제국을 멸망시켰고, 아슬란 대륙에서는 귀족들 대신 마법의 정수를 지키며 왕국을 지켰다.
무림에서도 천마와 마교를 상대로 싸운 건 미천한 신분의 낭인무사로 환생한 최치우였다.
‘현대의 귀족들은 다를까?’
최치우는 뉴욕에 모인 최상류층 이너서클 멤버들을 현대의 귀족이라 생각했다.
물론 자수성가로 엄청난 부를 이룬 CEO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부모 잘 만난 게 전부인 귀족들과 다르다.
하지만 특권을 당연시하고, 다른 사람들과 선을 긋는 순간 점점 변하게 된다.
막대한 권력과 부를 자신만을 위해 휘두르며 망가지는 건 시간문제다.
서로 다른 차원에서 그런 모습을 너무 많이 봐왔기에 최치우의 입에서 냉소적인 말이 흘러나왔다.
“위버는 택시 운전자들의 일자리를 빼앗았고, 에어비투비는 전통적인 숙박업계를 몰락시키고 있죠. 동시에 여행객의 안전사고도 끊임없이 일어나는 중이고. 세계를 움직이며 엄청난 돈을 버는 것은 존경스럽지만, 위버나 에어비투비의 등장이 이 세계에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는지 모르겠습니다.”
최치우는 솔직한 감상을 여과 없이 말했다.
국제적 거물들의 비위를 맞추며 아부를 떨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마이클이 눈을 번뜩였다.
순박하던 표정 위로 서늘한 눈빛이 떠올랐다.
금융계의 하이에나라 불리는 도미너스 펀드의 CEO다운 모습이었다.
“재밌네요, 치우. 여기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혁신으로 세상을 바꾼 세력이 권력을 누리고, 어느 순간 고인 물이 된다면……. 그들 역시 머지않아 그저 그런 기득권이 될 뿐이겠죠.”
“그 이야기, 위버의 창업자 앞에서도 똑같이 할 수 있겠어요?”
“얼마든지.”
최치우는 미소를 지었다.
그는 현대사회의 신생 귀족들을 두려워하지도, 경배하지도 않았다.
있는 그대로 그들의 성과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빈틈을 주시할 뿐이다.
누구든 수 조의 자산을 쌓은 거물들 앞에서는 주눅이 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몇 번의 환생을 거치며 제국을 몰락시켜본 최치우는 달랐다.
마이클은 그에게 흥미를 느꼈고, 앞장서서 최치우와 임동혁을 여러 사람들에게 소개시켰다.
최치우는 능숙한 태도로 뉴욕의 거물들을 상대했다.
굳이 먼저 적의를 보이지 않았지만, 마이클에게 말했던 것처럼 자신의 생각을 숨기지도 않았다.
그렇게 당당하면서 자연스러운 모습이 자부심으로 가득한 뉴욕의 거물들을 매료시켰다.
이제껏 그들이 만난 성공한 동양인은 지나치게 겸손하거나 혹은 지나치게 권위적이었다.
최치우처럼 여유롭고 나이스하면서 동시에 자기주장을 정확하게 밝히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는 하루에 수천억 원을 움직이는 국제적인 거물들, 돈이 많다고 해서 아무나 끼워주지 않는 백인 최상류층 이너서클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저 아시안 누구야?”
“어떻게 여기에 초대받은 거지?”
최치우는 연이어 거물들과 대화를 나누며 알게 모르게 파티의 중심이 됐다.
그러자 곱지 않은 눈길로 그를 쳐다보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날고 기는 사람들이 모인 파티에서 듣도 보도 못한 동양인이 주목을 받으니 심기가 불편한 것이다.
“저 사람 몰라? 올림푸스 CEO잖아.”
“올림푸스? 왓?”
“펜타곤과 민간으로 계약한 최초의 한국인. 뉴스를 좀 챙겨봐, 듀드.”
대놓고 최치우를 시기하는 사람들은 트렌드에 뒤떨어진 취급을 받았다.
밤이 깊어갈수록 최치우의 이름과 경력은 뉴욕의 먹이사슬 꼭대기에 스며들 듯 퍼져 나갔다.
물론 최치우는 뉴욕의 맹수들에게 인정받는 걸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 막 올림푸스로 첫발을 뗐다.
하지만 꿈의 크기는 세계의 수도 뉴욕을 집어삼키고도 남았다.
머지않아 최치우는 뉴욕이 아닌, 올림푸스가 있는 곳을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고 싶었다.
“반갑습니다. 너무 인기가 많아서 말을 걸기도 힘드네, 이거 참.”
그때였다.
누군가 최치우의 등 뒤에서 그림자처럼 스윽 다가왔다.
그가 나타나자 주위의 사람들이 눈을 크게 떴다.
다들 살짝 긴장한 것도 같았다.
최치우는 고개를 돌려 새롭게 끼어든 사람을 쳐다봤다.
“에릭 한센?”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모르는 사람이 없는 월드 스타, 노르웨이 이민자 출신의 살아 있는 전설.
분명 방금 전까진 에릭 한센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마 늦게 도착해 분위기를 살피다가 최치우에게 다가온 모양이었다.
“날 아는군요. 하긴 나도 그쪽을 아니까. 펜타곤의 문을 연, 치우 최.”
에릭 한센이 입꼬리 한 쪽을 말아 올리며 손을 내밀었다.
최치우는 그와 악수를 했다.
마치 얼음장처럼 손이 차가웠다.
현대사회의 신(新) 귀족들이 모인 뉴욕이 펜트하우스에서도 에릭 한센은 모두 한 수 접어주는 남자다.
눈독을 들인 기업은 반드시 빼앗거나 망가트리는 헌터, 동시에 우주선 개발과 전기차에 막대한 돈을 투자하는 돈키호테.
최치우는 뉴욕에서 만만찮은 라이벌이 될 에릭 한센과 조우했다.
서로를 마주보는 두 사람 사이로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