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번째 환생-57화 (57/243)

# 57

***

최치우는 펜타곤과 협상을 하면서 한국 정부와는 소통하지 않았었다.

자칫 말이 흘러나가면 협상 자체가 무위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국 정부에서는 충분히 섭섭해할 수도 있다.

펜타곤은 단순한 기관이 아니다.

한국의 동맹국이자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의 국방부다.

물론 한국의 민간 기업이 미국 국방부와 기술 제휴를 맺은 건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한국 정부가 소외 되어 무능론이 불거질 여지가 다분하다.

벌써 몇몇 비판적 언론에서는 정부와 올림푸스를 비교하며 외교 무능론을 언급하고 있었다.

실제로도 심각하다면 심각한 문제다.

미국과의 외교는 한국 정부의 최우선 과제 중 하나다.

그런데 한국 정부 모르게 비밀리에 협상이 타결됐기에 외교안보 분야의 몇몇 인사들은 사표를 써야 할지도 모른다.

‘아군을 늘리고 적군을 줄인다. 앞으로는 현명한 싸움을 하겠어.’

최치우는 쓸데없이 적을 만드는 게 무의미한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전 차원에서는 거의 모두를 적군으로 만들기 일쑤였다.

세상과 맞서 싸우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지금도 얼마든 세상과 맞붙을 자신이 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선 더 현명하게, 더욱 냉정하게 싸워야 한다.

한순간 뜨겁게 불타오르고 사라지는 것은 지겹다.

이제 최치우는 영원히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악명이 아닌 선망과 존경의 대상이 되는 삶을 살아보려 마음을 먹었다.

똑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울렸다.

그는 꽤 넓은 방 안에 혼자 앉아 있었다.

이곳은 다름 아닌 청와대의 비공식 안가(安家)다.

대통령과 정부 요인의 은밀하고 중요한 만남을 위해 청와대 경호실은 여러 채의 안가를 운영할 수밖에 없다.

최치우는 아무나 발을 들일 수 없는 안가에 초대받는 손님이다.

비공식적 대우지만, 일국의 장관과 비슷한 위치로 인정을 받은 것이다.

덜컥!

문이 열리고, 회색 정장을 입은 대통령이 들어왔다.

사뭇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국민훈장을 수여받을 때와는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그때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공식 석상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최치우는 지금 대통령과 같은 방 안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뒤이어 청와대 외교안보특보가 들어섰다.

백발이 성성한 외교안보특보는 외교부 장관보다 더욱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허허, 이런 자리에서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대통령은 직접 방문을 닫았다.

경호원들은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안가의 안팎에서 철통같이 보안을 지키지만, 회동이 이뤄지는 방으로는 발을 들이지 않는다.

이곳은 그야말로 철저하게 비밀이 보장된 역사 이면의 장소다.

최치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에게 목례를 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통령님. 그리고 처음 뵈겠습니다, 특보님.”

외교안보특보는 곧 80을 앞둔 노인이지만 눈빛이 형형했다.

그는 시퍼런 안광을 뿜어내며 최치우를 똑바로 쳐다봤다.

“올림푸스의 최 대표, 미국 국방부와 단독으로 협상을 체결한 간 큰 인물이 바로 자네로구만.”

언론사 오너 출신의 홍석진 외교안보특보는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단순히 외교안보만 관할하는 특보가 아니다.

온화한 인품으로 명성이 자자한 유영조 대통령의 비수(匕首) 노릇을 자처하는 정권의 실세다.

최치우는 홍석진 특보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덩달아 흥분할 필요도 없었다.

애송이들이나 쉽게 화를 내는 법.

최치우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올림푸스와 펜타곤의 기술 제휴 덕분에 일본과 중국이 잔뜩 긴장했다고 들었습니다. 특보님께 좋은 선물을 드릴 수 있어 영광입니다.”

미국 국방부가 한국 민간 기업과 제휴를 맺었으니 당연히 주변국이 긴장할 수밖에 없다.

중국은 중국대로, 일본은 일본대로 한국의 또 다른 저력을 확인한 셈이다.

최치우는 자신이 상의 없이 협상을 했지만, 결과적으로 한국 정부에 커다란 선물을 줬음을 떳떳하게 드러냈다.

“그것은… 크흠.”

경계심을 잔뜩 품고 온 홍석진은 일순 말문이 막혔다.

그의 입장에선 손자뻘인 최치우가 이토록 당당하면서 능수능란한 태도를 보일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것도 청와대 안가에서 대통령과 외교안보특보를 코앞에 두고서 말이다.

“허허, 허허허. 우리 특보님을 당황하게 만들다니 역시 인물입니다.”

유영조 대통령은 둘의 짧은 설전을 지켜보다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청와대에서 두려움의 대상인 홍석진이 21살 청년에게 한 방 먹은 게 재밌는 모양이다.

“대통령님까지, 크흐음.”

홍석진은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러나 마냥 싫지 않은 얼굴이었다.

자신의 생각보다 최치우가 더 걸출한 인물이란 걸 확인한 탓이다.

한 바탕 짧고 굵은 탐색전이 끝나고, 유영조 대통령이 본격적으로 대화를 이끌었다.

“최 대표님, 사실 훈장을 수여할 때만 해도 자세히 알지는 못했습니다. 이번에 해수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독도 해저 자원 개발에서도 김도현 교수님과 함께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면서요?”

“최선을 다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최치우는 억지로 겸손한 척하지 않았다.

독도 개발에서 그가 세운 공은 실무진 모두 인정하는 바이다.

괜히 겸손하게 사양하는 건 최치우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또 독자적으로 회사를 세워 펜타곤과 제휴를 맺고…….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인재가 등장한 것 같아 아주 흡족합니다.”

유영조 대통령은 의례적인 덕담을 이어갔다.

대통령의 24시간은 1분 1초 단위로 돌아간다.

안가에서의 비밀스러운 회동도 길어야 20분 안에 끝내야 한다.

최치우는 곧 대통령이 진짜 속내를 밝힐 거라 예상했다.

계속 좋은 말만 주고받기엔 시간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최 대표님, 오늘 김도현 교수님의 소개로 이 자리를 청한 건 부탁을 하고 싶어서입니다.”

순간 장내의 공기가 변했다.

유영조 대통령은 한참 어린 최치우에게 내내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그의 인자한 말투는 여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호한 강단이 말끝에서 묻어나왔다.

일국의 대통령은 온화하기만 해서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최치우는 서로 다른 차원에서 황제나 왕들을 여럿 만났다.

심지어 제국을 몰락시키며 하이 엘프 황제를 죽이기도 했었다.

좋은 왕이건 나쁜 황제건 그들 카리스마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유영조 대통령 역시 은은하지만 묵직한 카리스마의 소유자였다.

“다음에도 타국과 협상을 맺을 때, 우리 정부에게… 아니, 나와 여기 있는 홍 특보님에게는 귀띔을 해주면 좋겠습니다. 세계적으로 뻗어나가는 올림푸스의 행보에 정부가 걸림돌이 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약속합니다.”

말 그대로 부탁이었다.

유영조 대통령은 자신을 낮추고 정중하게 부탁을 했다.

힘이나 권위를 앞세웠다면 최치우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얼마든지 한국 정부와 맞서 싸울 의지와 능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왕이면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했는데, 대통령이 먼저 한 수 접으니 자못 인상적이었다.

최치우는 유영조 대통령으로부터 유능제강(柔能制剛)의 묘를 배운 기분이었다.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이긴다는 게 이런 거로군. 역시 세상은 넓고, 배움은 끝이 없다.’

7번째 환생을 거쳤지만 최치우는 계속해서 업그레이드되는 중이다.

“약속하겠습니다. 대신 저도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허허, 당연히 나만 부탁을 할 수는 없겠지요. 들어봅시다.”

“올림푸스는 세계를 무대로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을 찾아다닐 겁니다. 그 과정에서 트러블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 한국 정부가 올림푸스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기를 바랍니다.”

올림푸스는 국제적 명성을 얻었고, 최치우의 행보는 주시의 대상이 될 것이다.

미쓰릴을 얻을 때처럼 편하고 자유롭게 활동하긴 어렵다.

어쩌면 그는 세계 곳곳에서 사고를 일으킬지 모른다.

그때를 대비해 대통령의 약속을 받아두려는 것이다.

서로 약속을 주고받아야 신뢰가 더욱 강해진다.

조건 없는 도움보다는 정확한 거래가 관계를 더욱 튼튼하게 만든다.

최치우는 비즈니스뿐 아니라 인생의 원칙을 꿰뚫고 있었다.

유영조 대통령은 이채를 띤 눈빛으로 최치우를 쳐다봤다.

익히 알고 있었지만, 대화를 나눌수록 최치우가 도저히 21살로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 대표님, 오늘 우리는 서로 한 가지 약속을 한 겁니다. 계약보다 무거운 약속을.”

최치우는 미소를 지었다.

이로서 또 하나의 문제를 해결했다.

한국 정부와의 오해를 방지하고, 대통령을 우군으로 만들었다.

미쓰릴로 날개를 펼친 올림푸스는 더 높이 날아갈 일만 남았다.

최치우와 올림푸스의 날개는 언젠가 현대라는 차원, 지구라는 행성을 뒤덮을 것 같았다.

***

“많이 기다렸지? 진짜 빨리 온다고 왔는데, 회의가 길어지는 바람에.”

최치우가 미안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에는 유은서가 먼저 도착해 혼자 앉아 있었다.

유은서는 30분 가까이 늦은 최치우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괜찮아. 너가 얼마나 바쁜지 잘 알고 있는데, 나라도 이해해 줘야지.”

그녀는 최치우가 현대의 지구라는 차원에서 처음으로 몸과 마음을 나눈 여자다.

유은서에게도 최치우는 진정한 의미의 첫 번째 남자친구였다.

둘은 그만큼 서로를 아끼고 특별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최치우가 브라질에서 미쓰릴을 찾아온 이후 바빠도 너무 바빠졌다.

펜타곤과 나사를 연달아 만난 그는 쉴 틈 없이 미국에 다녀왔다.

귀국해서는 기자회견을 통해 펜타곤과의 제휴를 밝혔고, 중요한 일들을 처리하며 올림푸스의 기틀을 다지는데 집중했다.

올림푸스는 시작부터 1,200억 원 가량의 수익을 올리며 전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 기업이다.

주먹구구로 운영할 수는 없다.

이시환과 백승수를 얻었고, 쓸데없이 조직을 비대화시킬 생각은 없었지만 최소한의 실무진은 갖출 필요가 있었다.

그렇기에 유은서와 데이트를 하는 건 자꾸 뒤로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최치우는 요즘 어머니가 걱정할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는 얼른 음식을 시키고 유은서를 마주봤다.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를 짓고 있지만, 서운함을 느끼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최치우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당분간 올림푸스의 전열을 다듬고, 머지않아 두 번째 프로젝트를 추진할 계획이다.

앞으로 지금보다 더 바빠질 수 있기에 시간을 내겠다는 약속을 섣불리 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유은서가 먼저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

“치우야, 나 사실 너한테 말 못 한 게 있어.”

“어떤 거?”

“다음 학기에 교환학생 신청했는데 원하는 학교로 붙었어. 1년 정도 미국에 있을 거 같아. 미리 말 못 해서 미안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하지만 유은서는 오래 고민하고 결정을 내린 것 같았다.

“사실… 너가 너무 바빠지고, 또 대단한 사람이 되면서 고민을 많이 했어. 내가 발목 잡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었고, 스스로 멋진 사람이 되어서 너한테 부끄럽지 않을 때 다시 웃으며 인사할게.”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유은서는 애써 울지 않고 마음에 담아둔 말을 꺼냈다.

최치우는 새하얀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힘들게 해서 내가 미안하지.”

그는 유은서가 마음고생을 하는 걸 모르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한계를 돌파하며 세상을 바꾸는 운명을 타고나면, 멋지고 존경스러운 남자는 될 수 있어도 결코 좋은 남자나 착한 남자는 될 수 없다.

최치우는 한 걸음 더 성장하기 위해 용기를 낸 유은서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도 사람인데 왜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 않겠는가.

그러나 슬픔 대신 기쁜 마음으로 7번째 환생에서 처음 만난 연인과의 이별 만찬을 나눠야 될 것 같았다.

“미국 가서도 항상 조심하고. 알지?”

“응, 너 소식은 뉴스로 챙겨 볼게. 미국 올 일 있으면 연락해.”

구구절절 많은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눈빛으로 대화를 나누며 서로를 축복했다.

연애로부터 자유로워진 최치우는 영화 속 아이언맨 토니 스타크를 능가하고도 남는 삶을 살게 될 것 같았다.

올림푸스와 함께 화려하게 국제무대에 데뷔한 그의 전성기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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