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
***
최치우는 유은서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브라질로 떠나기 전, 둘은 비밀스러운 밤을 보내며 몸과 마음이 더 가까워졌다.
그리고 일주일 가까이 연락이 닿지 않았으니 서로 보고픈 마음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상파울루에서는 와이파이를 잡아 연락을 할 수 있었지만, 광산 지대는 완벽한 오지였다.
게다가 최치우는 한번 몰입하면 무서운 집중력을 발휘한다.
오직 앞만 보고 달려드는 게 그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아무리 소중한 사람이라고 해도 미쓰릴을 찾겠다는 목표 앞에서는 뒷전이 된다.
최치우는 7번째 환생을 경험하며 많이 달라지고 있지만, 영혼의 본질적 부분까지 변하진 않았다.
그를 사랑하는 여자들은 언제나 마음 졸이고 기다려야 하는 운명을 감내할 수밖에 없다.
최치우도 그런 사실을 알기에 유은서에게 깊이 다가서지 못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녀가 먼저 다가오며 깊은 관계가 됐지만, 최치우는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사람이다.
지금 유은서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지만 선택의 순간이 오면 단호해질 게 분명했다.
“아- 정말 꿈만 같아.”
유은서가 달콤한 숨을 내쉬며 최치우의 목을 끌어안았다.
원래 뭐든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는 일사천리다.
밖에는 태양이 환하게 떠 있었지만, 최치우와 유은서는 그 나이대의 여느 커플들처럼 뜨거운 사랑을 나눴다.
최치우의 몸은 무공으로 단련되어 일반인의 한계를 훌쩍 넘어섰다.
그래서일까.
붉게 달아오른 유은서의 얼굴은 무척 행복해 보였다.
아직 21살에 불과한 어린 나이지만, 그녀도 여자는 여자였다.
최치우는 유은서의 새하얀 볼을 어루만지며 입을 열었다.
“학교는 좀 어때?”
“너가 휴학하니 재미가 없어. 시환이 오빠도 4학년이라 그런지 조용해.”
“그래? 조만간 시환이 형도 만나야겠네.”
최치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시환은 졸업반답게 진로를 고민하며 이것저것 준비를 열심히 하는 모양이다.
물론 최치우에겐 별도의 계획이 있었다.
그는 미래 에너지 탐사대 멤버 중에서 이시환과 대학원생 백승수를 올림푸스로 데려올 작정이었다.
두 사람의 동의가 필요하지만, 개인적 친분을 떠나 업계 최고의 조건을 제시할 예정이기에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치우야.”
“응?”
그때 유은서가 최치우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다른 말없이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무엇을 더 원하는 것일까.
오랜만에 다시 만난 남자친구를 바라보는 유은서의 눈빛이 촉촉했다.
최치우는 그녀가 보내는 사인을 놓치지 않았다.
현대에서는 첫 번째 여자 친구지만, 7번의 환생과 8개의 다른 차원을 거치며 만난 여자들이 적지 않다.
그렇기에 나이에 비해 여자를 대하는 태도나 센스가 뛰어났다.
딱히 또래들처럼 이성 관계에 목숨을 걸지 않을 뿐, 작정하면 누구의 마음도 사로잡을 자신이 있었다.
스윽-
고개를 내민 최치우가 유은서의 분홍빛 입술을 덮었다.
방금 전 사랑을 나눈 열기가 채 식지 않았지만 또다시 방 안의 온도가 높아질 것 같았다.
우웅! 우우웅!
입술을 포갠 두 사람이 서로를 안으려는 찰나, 스마트폰이 진동음을 토해냈다.
침대 옆 탁자에 폰을 올려둔 최치우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유은서에게서 떨어졌다.
“잠깐만, 중요한 전화일지 몰라서.”
“으응, 괜찮아.”
유은서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최치우의 목을 놔줬다.
최치우는 팔을 뻗어 스마트폰을 들었다.
액정 화면에는 임동혁 본부장이란 여섯 글자가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최치우는 통화 버튼을 누르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본부장님, 급한 일 아니면 나중에…….”
“최치우 씨!”
그런데 예삿일은 아닌 모양이다.
임동혁이 최치우의 말을 중간에서 끊었다.
그는 잔뜩 상기된 음성으로 다급히 말을 계속했다.
“미국에서 콜이 왔습니다.”
“미국 어디서요?”
“펜타곤과 나사, 양측 모두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일이 빨리 풀리고 있었다.
한영 그룹 후계자인 임동혁의 네트워크와 추진력은 기대 이상이었다.
최치우는 눈을 번쩍 뜨면서 대답했다.
“오늘 저녁에 만나죠. 김 교수님께도 연락을 부탁합니다.”
“장소는 광화문 시즌스 호텔로 합니다.”
“알겠습니다.”
임동혁은 시즌스 호텔의 프레지던트 스위트룸을 비밀 집무실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최치우도 몇 번 방문해서 익숙했다.
전화를 끊은 최치우는 온몸에 피가 쫙 도는 기분이 들었다.
유은서와 사랑을 나눌 때보다 심장이 더 거세게 뛰었다.
“왜 그래? 좋은 일이야?”
“응, 완전 좋은 일!”
최치우는 궁금해하는 그녀에게 환한 미소를 보여줬다.
그의 심장은 이미 광화문 시즌스 호텔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마냥 서두를 필요는 없다.
저녁까지는 시간이 남았다.
최치우는 다시 유은서의 작은 어깨를 끌어안았다.
“저녁은 같이 못 먹겠다.”
“괜찮아, 난 지금 이 순간이면 충분해.”
달콤한 말이 오가며 서로가 서로를 놓아주지 않았다.
펜타곤과 나사의 러브콜을 받은 최치우는 가벼운 마음으로 진짜 사랑을 나눴다.
***
경복궁과 광화문 광장, 그리고 저 너머 서울시청까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요충지.
최치우는 최고의 입지를 자랑하는 프레지던트 스위트룸의 전면 유리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왜 임동혁이 비싼 돈을 내고 이곳을 집처럼 사용하는지 알 것 같았다.
여기 있으면 마치 서울을 발아래 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강의 때문에 조금 늦었어요.”
그때 스위트룸 문이 열리고, 마지막 손님인 김도현 교수가 들어왔다.
김도현 교수는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한 기색이 역력했다.
여간해선 차분함을 잃지 않는 사람이지만, 펜타곤과 나사의 응답은 그마저 흥분시키기 충분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늘 그렇듯 한 손에 위스키 잔을 든 임동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는 최치우가 도착했을 때부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신의 능력으로 펜타곤, 그리고 나사의 회신을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미쓰릴이라는 새로운 금속의 특성이 전무후무하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그러나 연락책으로서 임동혁의 네트워크가 큰 역할을 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최치우는 임동혁을 바라보며 가볍게 한마디 툭 던졌다.
“본부장님과 함께 일하는 보람이 있긴 하군요.”
“뭡니까? 그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아리까리한 이야기는.”
“칭찬입니다, 칭찬.”
이제 두 사람이 투닥거리는 것도 자연스러워 보였다.
독도 해저 자원 개발을 함께하면서 제법 신뢰가 쌓인 탓이다.
“자, 그럼 일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임동혁이 위스키 잔을 바(bar)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는 김도현 교수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최치우도 함께 브리핑을 받기 위해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던 터였다.
둘의 시선이 임동혁에게 고정됐다.
임동혁은 칭찬을 바라는 어린아이처럼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우리 그룹의 네트워크를 통해 비공식적으로 펜타곤, 나사의 고위층에게 정보를 전달했습니다. 물론 미쓰릴의 기본적인 특성 정도만 제한적으로 언급하는데 그쳤습니다.”
“쉽게 믿지는 않았을 텐데, 본부장님 덕입니다.”
최치우는 이전과 달리 진지하게 임동혁의 공을 인정했다.
미쓰릴은 이 세계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금속이다.
그렇기에 펜타곤과 나사에서 이야기만 듣고 쉽게 믿을 리 없다.
하지만 한영 그룹이 보증을 선 덕분에 신뢰도가 높아졌을 것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국제적인 대기업의 후계자가 근거 없는 헛소리를 할 가능성은 극히 낮기 때문이다.
“최치우 씨에게 칭찬을 듣는 거, 마치 우리 영감한테 칭찬받는 기분입니다.”
임동혁은 입이 귀에 걸렸다.
그는 엄하기로 유명한 한영 그룹의 회장, 바로 자신의 아버지에게 칭찬을 받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최치우를 중요한, 또 어렵고 대단한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최치우는 피식 웃으며 핵심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펜타곤과 나사는 어떻게 움직일 예정인가요?”
“한국으로 사람을 보낼 겁니다. 물론 모든 게 비밀리에 진행될 예정입니다.”
“펜타곤과 나사는 독립적 기관이니 각기 다른 사람이 오겠군요. 그리고 우리 정부에 어디까지 공개를 하느냐도 문제인데.”
“역시.”
임동혁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최치우가 단번에 가장 예민한 포인트를 지적했기 때문이다.
펜타곤과 나사 모두 미국 정부 기관이지만, 서로 완전히 독립돼 있다.
제시하는 조건이 비슷할 경우 어느 쪽 손을 들어줄지 고민해야 한다.
게다가 우리 정부와의 관계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 국방부 및 항공우주국과의 접촉은 단순한 일이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한국의 국가 안보 문제로 비화될 수도 있다.
“어려운 문제지만 복잡하게 생각하지 맙시다. 이럴수록 심플한 게 정답입니다.”
최치우는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임동혁과 김도현은 최치우의 생각을 듣기 위해 기다렸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지만, 올림푸스의 최종 결정권은 최치우에게 있다.
이제는 가장 어린 최치우가 리더십을 발휘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우선 펜타곤이든 만나보고 결정하죠. 필요하다면 미쓰릴을 나눌 수도 있으니까.”
이 세상에서 오직 최치우만이 미쓰릴을 정제할 수 있다.
어쩌면 펜타곤과 나사를 모두 올림푸스의 첫 번째 협력사로 만들지 모른다.
“치우 군, 우리 정부와의 문제는 어떻게 풀어나갈 생각인가요?”
김도현 교수는 아무래도 한국 정부를 우선시했다.
최치우는 그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먼저 호들갑 떨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우선 펜타곤과 나사를 만나보고, 윤곽을 그린 다음 우리 정부와 접촉하겠습니다. 독도 개발로 쌓은 신뢰가 있으니 어렵지 않을 겁니다.”
최치우는 가급적 대한민국에 득이 되는 방향을 선택하고 싶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라는 이유만으로 호구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정부가 정당하고 합리적인 대가를 지불한다면, 그리고 미쓰릴을 이용해 어떤 프로젝트를 추진할지 청사진을 제시한다면 협상에 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최치우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면 한국 정부의 눈치를 보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 세상 누구의 눈치도 볼 생각이 없었다.
“조금 염려는 되지만, 올림푸스는 온전히 치우 군의 회사이니 결정을 따라야지요. 필요한 부분, 특히 우리 정부와의 관계에서 내가 많이 도울게요.”
“감사합니다, 교수님.”
최치우는 진심을 담아 김도현 교수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는 제자인 최치우의 리더십을 인정해줬다.
자신의 의견을 말하면서도 최치우를 존중하고, 동시에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움직인다.
100점짜리 멘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임동혁은 훈훈한 사제지간이 못 마땅한 듯 다시 위스키 잔을 들었다.
“쳇, 나한테는 늘 구박만 하는 최치우 씨가 김 교수님께는 아주 깍듯합니다.”
“동업자랑 선생님이 어떻게 같겠어요?”
최치우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표정으로 임동혁의 말을 잘랐다.
한영 그룹의 후계자를 이리 막 대할 수 있는 사람 역시 최치우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곧장 본론을 꺼냈다.
“펜타곤과 나사에서 온다는 사람들, 일정은 어떻게 잡을 건가요?”
“우리가 답을 주면 곧바로 움직일 겁니다. 미쓰릴의 특성을 듣고 몸이 달았으니.”
“그럼 가능한 빨리 진행하죠.”
“알겠습니다.”
임동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추진력이라면 며칠 안에 펜타곤과 나사에서 파견된 사람을 만나게 될 것 같았다.
최치우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펜타곤의 위세가 아무리 대단해도, 나사가 인류의 정점에 있어도 결국 최치우 앞에선 을이 될 수밖에 없다.
미쓰릴의 특성을 확인하면 그들은 어떻게든 최치우에게 잘 보이려 애를 쓸 게 분명하다.
만약 힘이나 권력으로 미쓰릴을 탈취하려 든다면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얼른 한국에서 봅시다. 펜타곤, 나사.’
최치우는 세계 최강의 무력 기관과 최고의 우주 기관을 동시에 한국으로 불러들인 셈이다.
더 놀라운 점은 이게 올림푸스의 첫 번째 프로젝트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이제 막 자신의 레이스에 뛰어든 최치우는 시작부터 월드 클래스임을 입증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