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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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우를 태운 비행기는 30시간 가까이 하늘을 날아 상파울루에 도착했다.
한 번의 환승을 거치는 장거리 비행은 사람을 녹초로 만든다.
그러나 최치우의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다.
난생 처음 퍼스트 클래스에 탑승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무제한 한도의 블랙 카드가 있다.
컨디션 유지를 위해 퍼스트 클래스 티켓을 사는 건 낭비가 아닌 투자다.
프라이버시와 호텔급 서비스, 작은 침대 수준의 안락한 좌석이 제공되는 퍼스트 클래스는 비행 피로를 상당히 완화시켜 줬다.
하지만 진짜 여정인 지금부터 시작된다.
상파울루와 리우데자네이루는 브라질을 대표하는 대도시다.
원인 불명의 대형 폭파 사고로 광산이 무너진 마을은 한참 떨어진 곳에 있다.
상파울루에 내려 차를 타고 10시간은 더 이동해야 한다.
브라질은 땅덩이도 넓지만, 지방으로 갈수록 도로 정비가 엉망이다.
그렇기에 똑같은 거리라도 훨씬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이다.
명실상부 선진국 대열에 오른 한국과 비교하면 모든 게 불편할 수밖에 없다.
상파울루와 리우를 벗어나는 순간, 브라질은 남미의 야생적인 얼굴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방방곡곡 공사와 개발이 한창이고, 경찰의 손길이 닿지 않는 지역은 치안도 불안정하다.
낭만을 찾아 배낭을 메고 돌아다니다간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
상파울루와 리우의 치안도 좋지 않은 편이기에 드넓은 지방으로 움직일수록 위험도는 급증한다.
그러나 최치우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이 지구에서 그를 물리적 위험에 처하게 만들 대상은 흔치 않다.
자연 재해, 아니면 미사일 같은 폭격 무기가 아닌 이상 최치우의 안전을 위협하긴 힘들다.
6클래스를 넘어 자연의 이치를 깨달은 마법과 착실하게 다져진 금강나한권을 익힌 최치우는 무적(無敵)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여기서부턴 완전 야생이란 말이지.”
짐을 찾아 공항 입국 게이트 밖으로 나온 최치우가 미소를 지었다.
환생 이후 처음으로 정글에 나온 기분이었다.
한국에서, 그리고 도쿄대에서도 위기의 순간이 있었지만 브라질과는 비교할 수 없다.
과연 어떤 사건이 기다리고 있을지, 그 끝에 전설의 금속 미쓰릴이 자신을 반겨줄지 기대감이 점점 커졌다.
그는 퍼스트 클래스를 타고 온 승객답지 않게 짐이 단촐했다.
여행객들처럼 캐리어를 끌지도 않았다.
옷가지와 담요, 비상식량을 넣은 배낭 하나가 전부였다.
들고 있는 짐만 보면 저가 항공을 타고 환승에 환승을 거쳐 브라질에 도착한 대학생 같았다.
“일단 부딪쳐 보자.”
최치우는 배낭여행자보다 더 대책이 없었다.
그가 아는 거라곤 무너진 광산 마을의 지명과 대략적인 위치가 전부다.
어차피 한국에서 자세한 조사를 할 수도 없었다.
맨몸으로 부딪치며 하나둘 알아가는 게 최선이다.
무제한 한도의 블랙 카드도 브라질의 외딴 시골로 내려가면 무용지물일 수 있다.
그나마 두둑한 현금을 챙겨온 게 유일한 준비였다.
하지만 최치우는 책상 앞에 앉아 계획만 세우는 유형이 아니었다.
시행착오를 겪으며 뭐든 해보는 스타일이다.
매번 아예 새로운 차원에서 태어나는데 고작 30시간 거리의 외국에 왔다고 주눅이 들 리 없다.
어쩌면 최치우가 브라질에 적응하는 게 아니라 브라질이 최치우에 적응해야 할지도 모른다.
올림푸스를 세우고 처음 도전하는 것이기에 최치우는 한층 의욕적이었다.
공항 밖으로 나서는 그의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
최치우는 자신이 가진 무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는 적지 않은 비용을 지불하고 차와 운전기사를 고용했다.
상파울루에 있는 현지 에이전시를 이용해 소개를 받았다.
돈을 아끼는 것보다 시간을 아끼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
길이 없는 오프로드를 주파할 수 있는 지프 차량과 짧은 영어를 쓰는 베테랑 운전기사.
이만하면 상파울루에서 10시간을 달려 광산 지대로 가기에 충분했다.
“써, 위 고?(Sir, We go?)
운전기사인 베네투는 구릿빛 피부가 인상적인 중년 남자였다.
그는 독특한 발음으로 영어를 구사했다.
하지만 의사소통을 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최치우는 의자를 잔뜩 눕혀 편하게 앉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렛츠 고!”
쿠쿠쿠쿵!
지프가 거친 엔진음을 토해내며 도로 위로 올라섰다.
아직까지는 잘 닦인 포장도로지만, 상파울루를 벗어나면 금방 우둘투둘한 비포장도로가 나타날 것이다.
최치우는 느긋한 마음을 먹었다.
베네투가 선택한 브라질 노래가 귀를 간지럽혔다.
그렇게 두 사람을 태운 지프차가 지도 밖으로 행군하기 시작했다.
최치우는 한껏 젖힌 의자에 기대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최대한 체력을 비축하려는 것이다.
덜커덩- 쿠웅!
지프는 오프로드로 진입한 듯 이따금 비명을 토했다.
그래도 능숙한 드라이버인 베네투가 차를 몰아 다행이었다.
어설픈 운전 실력으로는 언제든 차가 구덩이에 빠질 위험이 높았다.
최치우는 가끔 실눈을 뜨고 창밖을 쳐다봤다.
상파울루를 벗어난 지 몇 시간, 창밖의 풍경은 이질적으로 달라지고 있었다.
마치 다른 나라로 이동한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도시적인 풍경은 온데간데없다.
마구잡이로 진행되는 공사 현장이 눈을 어지럽히더니, 한참 지나자 그마저 사라졌다.
삭막한 광야와 허허벌판이 창밖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러다 뜬금없이 울창한 밀림이 툭 튀어나와 진흙길을 가로질러야 할 때도 있었다.
만약 자동차만 빌려 최치우 혼자 운전을 했다면 고생 깨나 했을 것 같았다.
“써.”
그때 베네투가 최치우를 불렀다.
상파울루에서 출발한 이후 처음으로 최치우에게 말을 건 것이다.
최치우는 6시간 넘도록 쉬지 않고 운전대를 잡은 베네투를 쳐다봤다.
잠시 휴식을 취하자는 말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베네투의 얼굴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디스 이즈 댄저러스 에어리어. 베리 댄저러스.”
그는 매우 위험한 구역에 들어왔다고 주의를 줬다.
최치우는 의자를 당겨 90도로 만들었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지프차는 울창한 숲길을 헤쳐 나가고 있었다.
브라질 특유의 밀림 지대이기에 차가 움직이는 속도가 느렸다.
베네투의 경고 때문일까.
어딘지 음산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댄저러스?”
“예스, 써. 갱스터, 유 노?”
완벽하지 않은 문장이지만, 베네투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브라질 곳곳에는 치안이 불안정해 무장 강도들이 출몰하는 우범지대가 존재한다.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브라질 지방의 치안 상태는 마약 카르텔이 난립하는 멕시코에 비견 될 정도다.
현재 지프차가 지나고 있는 밀림도 그러한 우범지대에 속하는 것 같았다.
최치우는 감각을 날카롭게 다듬으며 기를 모았다.
단전에 옹골차게 자리 잡은 내공이 든든했다.
한국보다 자연의 힘이 강성한 지역이라 마나도 더욱 생생하게 느껴졌다.
‘문제없어.’
이만하면 물불 안 가리는 브라질 갱스터들을 만나도 걱정할 필요 없다.
최치우는 맥시코 마약 카르텔과 일전을 벌여도 모조리 소탕할 자신이 있었다.
현대 사회의 잣대로 평가할 수 없는 단 한 사람.
그게 바로 최치우다.
하지만 운전기사인 베네투는 다르다.
지난 몇 시간 동안 노련한 모습을 보여주던 그는 잔뜩 움츠러든 모습이었다.
혹시라도 밀림에서 갱스터들이 튀어나올까봐 사방을 살피기 바빴다.
그가 이처럼 겁을 먹으면서도 운전대를 잡은 이유는 하나였다.
에이전시를 통해 평소보다 훨씬 많은 페이를 받았기 때문이다.
두 아이의 아빠인 베네투는 생활비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나섰다.
그는 믿지도 않는 온갖 신의 이름을 부르며 조심스레 엑셀을 밟았다.
츠츳, 츠츠츳!
그런데 어디선가 들려오는 미세한 소리가 최치우의 신경을 긁었다.
밀림의 동물들이 내는 소리는 아닌 것 같았다.
나뭇잎이 부딪치며 자연적으로 발생되는 소리도 아니다.
어딘지 모르게 이질적인 소리가 조금씩,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물론 베네투는 이상한 기색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귀찮게 됐군.’
최치우는 감을 잡았다.
베네투가 말한 갱스터, 무장 강도들이 다가오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들을 물리치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괜히 얽혔다가 일이 복잡해지면 시간을 낭비하게 될지 모른다.
무너진 광산에서 미쓰릴의 존재를 찾기에도 부족한 일정이다.
소모적인 전투로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최치우는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충돌하기 전에 모두 정리한다.’
그는 베네투를 쳐다보고 지시를 내렸다.
“베네투, 고 패스트. 오케이?”
“오케이, 써.”
그는 무조건 빨리 달리라고 말했다.
밀림에서 속도를 내면 차량이 진흙에 빠질 확률이 올라간다.
게다가 소음으로 인해 갱스터들의 주의를 끌기도 쉽다.
베테랑 드라이버인 베네투가 그런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그는 확신에 찬 최치우의 눈빛에 압도당했다.
낯선 동양인 고객의 말을 무조건 들어야 될 것 같았다.
부와아앙- 크르릉!
지프가 비명 같은 엔진 소리를 토해내며 속도를 높였다.
그러자 어렴풋이 들리던 갱스터들의 인기척도 덩달아 커졌다.
지프를 놓치지 않기 위해 서둘러 포위망을 좁히는 것이다.
최치우는 조수석에 앉아 창문을 내리고 정신을 집중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갱스터들이 다가오기 전에 처리해야 한다.
만약 총기로 무장한 갱스터들과 마주치면 무공을 쓸 수밖에 없다.
당연히 전투에서 이기겠지만, 베네투가 다칠지 모른다.
게다가 이 지역의 갱스터들이 복수를 하겠다고 덤비면 더더욱 귀찮아진다.
그렇기에 최치우는 마법이라는 카드를 꺼냈다.
무공으로 단련된 감각으로 갱스터들을 감지하고, 마법으로 원거리에서 정리를 하려는 것이다.
‘우선 11시 방향에 세 명!’
그는 가장 가까이 접근한 갱스터들을 노렸다.
가만히 놔두면 머지않아 지프의 진로를 막으며 나타날 거리였다.
그러나 최치우가 더 빨랐다.
“프리즌(prison)!”
5서클 마법 프리즌이 캐스팅 됐다.
브라질 밀림 지대의 마나가 최치우와 공명하며 이적을 만들어냈다.
촤좌좌좌좍-!
굵은 나무줄기가 살아 있는 뱀처럼 뻗어나가 갱스터들을 옭아맸다.
최치우는 나무 감옥에 꽁꽁 얽매여 움직이지 못할 갱스터들을 상상하며 미소를 지었다.
“으헉!”
“또마노꾸-!”
11시 방향에서 갱스터들의 비명과 욕이 들려왔다.
그제야 소리를 들은 베네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갱스터, 써!”
“돈 워리. 저스트 고, 패스트!”
최치우는 베네투를 안심시키며 재차 속력을 높이라고 주문했다.
세 명을 나무 감옥에 가뒀지만, 아직 다른 갱스터들의 인기척이 남아 있었다.
‘3시 방향에 두 명!’
최치우의 레이더에 2인조 갱스터가 걸렸다.
11시 방향을 처리하는 사이 놈들이 제법 가깝게 접근했다.
금방이라도 몸을 일으켜 지프를 향해 총구를 겨눌지 모른다.
최치우는 서둘러 6서클 마법을 캐스팅했다.
“미니 퀘이크(Mini Quake)!”
6서클이면 현재 최치우가 캐스팅할 수 있는 최고의 마법이다.
곧이어 3시 방향에서 지축이 흔들리는 굉음이 터져 나왔다.
쿠그그긍-!
“으와아아아아아…….”
갱스터들의 비명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리며 점점 작아졌다.
미니 퀘이크는 8서클의 자연재해 마법인 어쓰퀘이크의 축소판이다.
어쓰퀘이크보다 훨씬 작은 지역에 강도가 약한 지진을 일으킨다.
그러나 수십 명을 넉넉히 땅 밑으로 빨아들이기 충분한 위력적인 마법이다.
베네투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영문을 모르는 얼굴이었다.
밀림의 갱스터들에게 걸린 것 같은데, 옆자리의 고객이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면 어디선가 비명이 들릴 뿐이다.
그야말로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어쨌거나 위험천만한 갱스터들의 밀림 지대를 무사히 탈출하게 될 것 같았다.
부웅- 부우웅-
운전대를 꽉 잡은 베네투는 진흙 구덩이를 요리조리 피하며 있는 힘껏 엑셀을 밟았다.
최치우는 브라질 갱스터들의 얼굴을 볼 필요도 없이 밀림을 빠져나왔다.
갱스터들도 자신이 누구에게, 어떻게 당했는지 모를 것이다.
기이한 자연 현상에 발목이 잡힌 오늘은 그들에게 두고두고 무서운 전설로 회자 될 것 같았다.
다른 차원의 금속, 미쓰릴을 확인하기 위해 나아가는 최치우를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앞으로 3시간이면 최치우는 무너진 광산에 도착한다.
밀림을 벗어나 목적지에 가까워진 그의 눈빛에 짙은 생기가 감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