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번째 환생-43화 (43/243)

# 43

한번 입으로 뱉은 말은 반드시 지킨다.

그것이 일곱 번의 환생을 거쳐 여덟 개의 다른 차원에서 살아본 최치우의 원칙이다.

미래 에너지 탐사대 멤버들과 함께 훈장을 받겠다는 그의 말은 현실이 됐다.

생각한 것 이상으로 최치우의 영향력은 이미 막강해져 있었다.

그는 독도 해저 자원 개발 프로젝트의 투자자이자 재계 유일의 참여 기업인 한영그룹의 후계자를 움직였다.

어쩌면 임동혁이 유일하게 아쉬운 소리를 하는 상대가 최치우일지 모른다.

최치우의 카드는 임동혁 외에도 더 있었다.

해수부의 실무를 담당하는 차관보 김기훈이 힘을 써준 것이다.

장관과 차관이 있지만 일선 공무원을 지휘하며 실무에 영향을 끼치는 사람은 차관보이다.

김기훈의 입김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실무회의에서 최치우의 활약상을 전해 듣고 호감을 표한 바 있는 김기훈은 적극적으로 전화를 돌렸다.

1급 공무원이 자기 일처럼 전화를 돌리면 안 될 일도 술술 풀린다.

어차피 독도 해저 자원 개발은 성공의 축포를 쏘아 올린 셈이다.

훈장을 남발할 수는 없지만, 미래 에너지 탐사대 전원이라고 해봐야 겨우 다섯 명이다.

김도현 교수와 최치우 몫으로 책정된 훈장 두 개를 여섯 개로 늘리는 게 마냥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최치우가 나서서 시동을 걸고, 임동혁과 김기훈이 지원사격을 퍼부으니 정부도 기조를 바꿨다.

만에 하나 S대에서 훈장과 포상을 거부하면 모양새가 나빠진다.

기껏 국민 여론을 호의적으로 만들었는데 잡음을 일으킬 순 없었다.

결국 최치우의 용기와 영향력 덕분에 미래 에너지 탐사대 전원이 훈장을 받게 됐다.

담당 교수이자 책임자인 김도현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일이다.

정부로부터 좋은 소식을 들은 최치우는 유은서, 이시환 등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저기, 치우야.”

그때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고개를 돌리니 예상하지 못한 얼굴이 보였다.

미래 에너지 탐사대의 대학원생 멤버인 백승수가 쭈뼛거리며 서 있는 게 아닌가.

백승수는 F.E의 최고참으로 성실하고 과묵한 선배였다.

다소 내성적인 성격 탓에 최치우와 교류가 활발하진 않았다.

그가 먼저 찾아와 말을 건 것은 처음이다.

“네, 선배님.”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그럼요.”

최치우는 유은서와 이시환에게 눈짓으로 사인을 보내고 거리를 벌렸다.

자연스레 둘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됐다.

둘만 있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승수는 커다란 뿔테 안경을 만지작거릴 뿐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무슨 말을 꺼내려는지 몰라도 상당히 망설이는 눈치다.

보다 못한 최치우가 대화의 물꼬를 터줬다.

“혹시 뭐 도와드릴 거라도……?”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너한테 고맙다는 이야기를 꼭 해야 할 것 같아서…….”

백승수는 눈을 내리깔고 천천히 대답했다.

말투는 어설펐지만 진심이 담겨 있는 게 느껴졌다.

최치우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내성적인 성격의 선배를 쳐다봤다.

“사실 박사 과정을 해야 할지, 아니면 연구소나 직장을 알아봐야 할지 고민이 많았는데… 너 덕분에 독도 프로젝트도 경험하고 훈장까지 받게 돼서 진짜 큰 힘이 됐어. 집에서도 원하는 공부 마음껏 하라고 응원해 주고 말이야. 우리까지 챙겨주려 애쓴 거 잊지 않을게. 진짜 고맙다, 치우야.”

군대를 다녀와 석사 과정 말기에 다다른 백승수는 곧 서른 살이 된다.

남자 나이 서른이면 진로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할 시기이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는 S대를 다닌다고 해서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다.

백승수에게 있어 독도 프로젝트와 정부의 훈장은 든든한 버팀목이 될 터였다.

만약 최치우가 나서지 않았다면 백승수를 비롯한 다른 멤버들은 훈장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한참 후배지만 다 함께 훈장을 받겠다고 말한 순간, 최치우는 대학원생 선배들까지 마음으로 사로잡아 버렸다.

“아닙니다. 다 같이 고생했는데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나도 그렇고 다른 애들도 너한테 엄청 고마워하고 있다는 거 기억해 줘.”

“네.”

“그리고 선배님이라 하지 말고… 편하게 생각해, 편하게. 앞으로 더 친해지자, 우리.”

“그럴게요, 승수 형님.”

최치우는 백승수가 얼마나 용기를 냈는지 알 것 같았다.

평소의 그는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말을 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배에게 찾아와 고마움을 표시하며 마음을 전했다.

이것만으로도 최치우는 함께 훈장을 받으려 노력한 보람을 얻었다.

“그, 그럼 난 가볼게. 교수님께 강의 자료 드려야 해서…….”

“네, 형님. 이따 F.E 모임 때 봐요.”

“그래, 고맙다. 고마워, 치우야.”

백승수는 몇 번이나 고맙다는 말을 반복하고 공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최치우는 흐뭇한 얼굴로 백승수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예전에는, 그러니까 다른 차원에서는 혼자만 잘나가는 게 전부라고 생각했다.

일 초라도 빨리 성장하기 위해선 남을 챙길 여력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당장 내가 한 걸음 먼저 내딛는 것보다 함께 걸어가는 게 더 빨리, 더 오래, 더 멀리 갈 수 있는 방법이라는 걸 조금씩 깨닫고 있었다.

“나쁘지 않은데?”

최치우는 혼잣말을 읊조리며 걸음을 옮겼다.

적어도 백승수는 확실하게 최치우의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원래 내성적이고 과묵한 사람들은 마음을 쉽게 열지 않는다.

대신 한번 마음을 주면 절대 배신하지 않고 묵묵히 옆을 지킨다.

이제껏 친하게 지내진 않았어도 백승수가 어떤 인물인지 충분히 봐왔다.

앞으로 두고두고 도움이 될 인재임이 분명했다.

“백승수 선배랑 무슨 이야기했어?”

최치우가 돌아오자 이시환이 기다렸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유은서와 다른 친구들도 궁금한 기색이다.

“별거 아니고, 그냥 고맙다는 이야기였어.”

“진짜? 저 선배가 그런 이야기 쉽게 하는 스타일이 아닌데.”

“선배라 부르지 말고 형, 동생 하자고 해서 알겠다고 했지.”

“와, 대박이다. 승수 선배가 너를 100% 인정했나 보다. 순하게 보여도 일 처리나 성격은 완전 깐깐해서 애들이 어려워하는 조교잖아.”

“그럼 더 잘됐네. 맨날 덤벙거리는 형 말고 이제 승수 형님이랑 더 친하게 지내야지.”

“뭐? 너! 이 배신자!”

최치우의 농담에 이시환이 뜨거운 콧김을 뿜어냈다.

다른 친구들이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겨울의 기운이 약해지고 조금씩 봄이 드리우기 시작한 S대 캠퍼스.

최치우는 자신의 울타리를 넓혀가며 새로운 사람들을 품고 있었다.

***

“올림푸스?”

“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이 사는 곳이잖아요.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네요.”

김도현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연구실에는 김도현과 최치우 두 사람밖에 없었다.

한 시간 뒤 두 사람은 청와대로 출발할 예정이다.

대통령이 직접 수여하는 훈장을 받기 위해서이다.

그전에 먼저 만나 대화를 나누던 중 최치우가 올림푸스라는 말을 꺼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은 인간과 섞여 살았습니다. 인간들 틈에서 사고를 치기도 하고 또 선물을 주기도 하고. 특별하지만 결코 인간과 유리된 존재가 아니었죠.”

“엄밀히 말하면 신이라기보다는 영웅에 가까운 존재로 묘사되었지요.”

“우리가 하려는 일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특별한 능력으로 누구도 못한 일을 해내지만 결국 이 지구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려는 것이니까요.”

“개발로 인한 이익을 우리만 누리는 게 아니라 인류를 위해서 나누는 것이 나와 치우 군의 생각이잖아요.”

“맞습니다, 교수님.”

최치우는 올림푸스라는 이름을 되뇌며 눈을 반짝였다.

스스로 생각한 이름이지만 곱씹을수록 마음에 들었다.

김도현 교수도 최치우의 뜻을 이해했는지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다.

“좋아요. 어차피 치우 군이 주도해서 만들어 나갈 세상이니까. 미래 에너지 탐사대는 학교의 틀을 벗어날 수 없으니 여러 제약이 따를 거예요.”

“교수님께서 F.E를 통해 인재를 키워주시고 그들이 올림푸스에서 저와 함께 미래를 개척하게 될 겁니다. 결국 미래 에너지 탐사대와 올림푸스는 하나의 팀이 되는 거죠.”

최치우는 이미 S대 공대가 온전히 품기엔 너무 거물이 돼 있었다.

세상에 이름이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낭중지추(囊中之錐)였다.

그는 스물한 살의 나이로 독도 해저 자원 개발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게다가 한영그룹의 후계자 임동혁으로부터 어마어마한 제안을 받았다.

한도가 없는 블랙카드와 함께 독자적인 사업부를 맡아서 그룹과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어달라는 부탁이었다.

누구라도 눈이 뒤집어질 제안이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최치우는 신중하게 고민을 거듭했다.

임동혁이 애가 타서 또다시 제안할 정도였다.

가볍지 않은 고민 끝에 최치우는 임동혁과 손을 잡기로 결심했다.

사업부의 완벽한 독립성과 자율성을 법적으로 보장한다는 약속까지 추가로 얻어냈다.

올림푸스는 최치우가 맡게 될 미래 에너지 사업부의 명칭이다.

S대의 틀을 벗어나면 활동 폭이 훨씬 넓어진다.

대학교는 일종의 공공기관이기에 자질구레한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에 반해 자기 사업을 하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다.

공식적으로는 한영그룹 소속의 자회사지만, 실상은 임동혁이 최치우의 회사에 투자자로 참여하며 공동 지분을 보유한 형태이다.

그렇기에 한영그룹의 자금을 바탕으로 최치우가 자신의 사업을 일으켰다고 봐야 한다.

최치우는 수면 아래에서 독도에 묻힌 메탄 하이드레이트를 채취하게 만들었다.

그로 인한 파급 효과를 헤아리기 힘들다.

그가 수면 위로 떠올라서 올림푸스를 이끌며 마음껏 날개를 펼친다면 과연 얼마나 대단한 일들이 벌어지게 될까.

김도현 교수는 곧 다가올 미래를 상상하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최치우라는 창창한 기개의 인물이 열어나갈 역사의 일익(一翼)을 담당하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주어진 역할이 있다.

김도현 교수는 최치우의 조력자로, 멘토로, 또 파트너로 함께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영영 불가능할 것 같던 꿈을 최치우 덕분에 이룰 수 있게 됐으니 더 바랄 게 없었다.

벌써 정부의 훈장과 엄청난 명예, 그리고 독도의 보물을 품에 안았다.

여기서 더 욕심내면 어리석은 짓이다.

“교수님, 따로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뭐든 말해요. 치우 군 부탁이라면 들어주지 않을 도리가 없으니까요.”

“임동혁 본부장에게도 언급했습니다만, 저도 언젠가 군대를 가야 합니다.”

“아, 그렇지요.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요.”

김도현 교수도 임동혁처럼 충격을 받은 눈치다.

남자 대학생들에게 입대는 가장 큰 문제였다.

그렇지만 최치우는 보통 대학생 같지 않았다.

김도현 교수마저 최치우의 담대한 행보를 따라가는 형국이다.

때문에 그가 군대를 가야 할 어린 나이라는 것을 미처 실감하지 못한 것이다.

“당장은 아니겠지만 병역 의무를 수행하는 동안 교수님께서 임 본부장과 함께 올림푸스의 기틀을 잡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래요, 치우 군. 내가 도울 수 있는 거라면 뭐든 할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항상 감사합니다, 교수님.”

“나야말로 치우 군에게 늘 고마워요. 이제 시간이 됐으니 일어나 볼까요?”

“네.”

최치우와 김도현 교수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다른 곳도 아닌 청와대에서 대통령에게 직접 훈장을 수여받는 날이다.

이런 날 지각을 할 수 없으니 일찍 움직여야 했다.

최치우는 군대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21개월은 금방 흘러갈 것이다.

자신의 진면목을 알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줄 김도현과 임동혁이 있으니 공백을 염려할 필요는 없었다.

백승수, 이시환, 리키 등 올림푸스에서 함께 하고픈 인재들도 하나둘 점찍어놓았다.

지금처럼 최치우만의 페이스대로 준비해 나가면 된다.

인류를 구원할 영웅들의 무대 올림푸스의 위대한 비전이 영글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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