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
<올림푸스>
세계적으로 경기가 꽁꽁 얼어붙은 지 꽤 됐다.
2008년의 금융 사태 이후 경제학자들은 21세기형 대공황이라는 말을 즐겨 썼다.
미국 정도를 제외하면 서방 세계 주요 선진국의 경기는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숨통을 틔워주던 중국도 환율 조작국이란 오명을 쓰며 폭발적인 경제 성장을 이어가지 못했다.
여전히 성장은 하고 있었지만, 예전처럼 엄청난 대외 무역을 감당하며 세계 경기를 이끌 수준은 아니었다.
신흥개발국으로 주목받던 브라질, 인도 등 3세계 국가들의 발전도 기대에 못 미쳤다.
선진국은 선진국대로, 개발도상국은 그들대로 불만의 수위가 높아지는 시절.
자칫하다간 언제 3차 세계대전이 터질지 모른다는 전쟁과 테러의 공포도 세계를 위협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강의 기적을 이뤘지만 더 이상 누구도 크게 주목하지 않던 한국에서 호재가 연달아 터졌다.
대한민국은 어엿한 선진국 반열에 올랐으나, 이른바 선진국 증후군에 빠져 일본이 걸어간 길을 답습하는 중이었다.
G20에 드는 주요 국가지만, 세계 경기를 좌우할 영향력은 없다는 게 정설이었다.
하지만 독도 해저 자원 개발 프로젝트의 성공은 일약 한국의 위상을 바꿔놓았다.
사실 독도 해역에 묻힌 어마어마한 메탄 하이드레이트를 모두 상용화하려면 한참 멀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그러나 해저에 묻힌 실물을 채취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성과였다.
대한민국은 언제가 되었든 6억 톤에 달하는 메탄 하이드레이트를 채취할 가능성이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전 세계의 투자자와 큰손들은 불경기 상황에서 투자처를 찾지 못해 전전긍긍 중이다.
그들은 실물 가치보다 미래 가능성을 중요하게 여겼다.
세계 최대 규모의 자동차 회사인 GM보다 이제 막 걸음마를 떼고 있는 전기차 회사 테슬라의 시가총액이 훨씬 더 높았다.
당장의 이익률만 따지면 GM의 주가가 테슬라를 압도해야 한다.
테슬라는 아직도 적자에 적자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국책기관을 비롯한 거물 투자자들은 현재보다 미래의 가능성을 따라 움직인다.
대한민국은 독도의 메탄 하이드레이트 실물 채취 성공으로 전 세계에 가능성을 어필했다.
그것도 지구 전체의 화두인 미래 에너지에 대한 가능성이었다.
당연히 한국 주식시장이 요동치며 관련 주식들이 급등할 수밖에 없었다.
주가가 오르면 산업에 활기가 돌기 시작한다.
내수시장과 경기도 덩달아 살아나며 경제성장률 전망도 밝아지게 마련이다.
독도에서 들려온 승전보는 한국 경제, 나아가 세계 경제에 긍정적으로 기여하고 있었다.
물론 직접적으로 가장 큰 이익을 본 사람은 개발에 참여한 한영그룹이다.
한영그룹의 망나니 후계자로 악명이 자자하던 임동혁은 단숨에 재계의 슈퍼스타가 됐다.
후계 구도는 완벽해졌고, 회장을 대신해 일선에서 그룹의 투자를 지휘할 거라는 소문도 무성했다.
최치우는 바로 그 임동혁과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광화문 시즌스 호텔의 프레지던트 스위트룸이 두 사람의 회동 장소였다.
“최치우 씨가 우리 영감의 얼굴을 봤어야 한다니까. 꼬장꼬장한 이사회 할배들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그룹의 미래를 부탁한다고 하는데… 우리 영감이 글쎄, 나를 보고 뿌듯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임동혁은 평소보다 흥분해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는 생전 처음으로 아버지인 한영그룹 회장의 인정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상속자로서 입지를 완벽히 다졌고, 한영그룹의 주가 상승으로 인해 투자한 수천억 원을 벌써 회수하고도 남았다.
“파이트 클럽에서 최치우 씨의 경기를 본 게 내 인생을 바꿀 줄은 몰랐습니다. 쓸데없는 데 돈 쓴다고 비서들한테 욕만 먹었는데 역시 세상일은 모른다니까.”
“뉴스마다 난리더군요. 아무튼 확고부동한 그룹의 후계자가 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모두 최치우 씨 덕분이라는 거 잊지 않고 있습니다.”
임동혁이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그는 계산이 정확한 남자다.
최치우가 아니었으면 오늘의 영광도 없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황금 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를 정도로 멍청한 남자는 아니지.’
최치우는 임동혁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드레날린 중독 증상에 시달리는 재벌가의 망나니를 파트너로 택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승부사 본능, 그리고 자충수를 두지 않는 최소한의 냉정함.
임동혁은 확실히 미친놈이지만 그 두 가지를 갖고 있기에 파트너로 삼을 만했다.
“그래서 말인데…….”
스테이크와 함께 곁들이던 위스키로 입술을 적신 임동혁이 뭔가를 꺼냈다.
“최치우 씨에게 주는 선물, 아니, 보답입니다.”
그가 얼른 말을 고쳤다.
선물은 대가 없이 주는 것이다.
최치우 덕분에 막대한 이득을 본 임동혁은 선물이 아닌 보답을 하는 게 맞았다.
온종일 뉴스를 장식하고 있는 재벌 2세가 단어 하나를 사용하는 데 있어서도 최치우의 심기를 살폈다.
최치우는 피식 웃으며 임동혁이 내민 걸 쳐다봤다.
“카드입니까?”
“블랙인데, 못 들어봤어요?”
“블랙?”
최치우는 금시초문이다.
임동혁이 테이블에 올려놓은 카드는 보통 신용카드와는 다르게 어떤 글자나 무늬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
그저 까만색이 전부였다.
이름도, 유효 기간도 없는 순수한 까만색 카드.
“한국에서 999명만 발급받을 수 있는 카드가 바로 블랙입니다. 현재까지 100명 정도만 이 카드를 갖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게 그렇게 대단한 겁니까?”
최치우는 여전히 심드렁한 얼굴로 카드를 잡았다.
묵직한 게 무게감도 제법 있었다.
“우선 한도 따위가 없습니다. 한 달에 1억? 10억? 아니, 100억을 써도 됩니다.”
“한도가 없는 카드라…….”
“당연히 결제는 내가, 아니, 공식적으로 새로 만들어질 한영그룹 내 독자적 사업부에서 합니다. 최치우 씨는 그저 원하는 대로 편하게 쓰면 됩니다.”
쉽게 말해 백지수표나 다름없었다.
백지수표는 한 번 액수를 쓰고 나면 끝이다.
그런데 블랙카드는 얼마든지 쓰고 또 쓸 수 있다.
임동혁은 독도 개발에 자신을 투자자로 참여시켜 준 것에 대한 보답을 화끈하게 했다.
최치우에게 마르지 않는 샘물을 준 것이다.
“내가 얼마를 쓸 줄 알고… 정말 괜찮겠습니까?”
남들이 보면 기겁할 장면이다.
최치우는 한영그룹의 후계자에게 돈으로 도발을 걸었다.
그의 배짱에 임동혁이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기분이 좋아서 웃는 것 같았다.
“하하하! 하하하하! 최치우 씨, 당신은 정말 나보다 더 미친놈이 확실하다니까. 하하하하하!”
“뭐, 아무튼 보답은 잘 받도록 하죠.”
“개인적인 용도로 얼마든지 사용해도 됩니다. 1년에 100억까지는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그냥 100억도 아니고 1년에 100억을 마음대로 쓰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최치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본부장님, 생각보다 통이 작군요. 1년에 100억이라니.”
“하하하! 물론 더 써도 됩니다. 블랙카드는 보답이기도 하지만 앞으로 최치우 씨와 계속 함께 일하고 싶다는 약속의 징표입니다.”
“들어보죠, 임 본부장님이 그리고 싶은 그림.”
최치우는 능숙하게 화제를 전환했다.
그는 식사가 시작될 때부터 임동혁이 다른 제안을 할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한번 단물을 맛본 사람이 여기서 손을 털 리 없었다.
게다가 아드레날린 중독인 임동혁은 독도 개발에 버금가는 짜릿한 프로젝트를 원할 것이다.
그를 만족시킬 사람, 그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최치우밖에 없었다.
스물한 살의 최치우는 30대의 대기업 후계자를 능수능란하게 컨트롤하고 있었다.
중요한 이야기를 앞둔 임동혁은 속이 타는지 찬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블랙카드로 쓴 금액은 독자적 사업부에서 결제할 거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죠.”
“한영그룹의 독자적 사업부를 최치우 씨가 맡아줬으면 합니다. 나와 함께 그룹의 미래를, 아니,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어가는 겁니다.”
파격적인 제안이다.
대기업의 핵심 사업부를 대학 학부생에게 맡기겠다는 것이다.
임동혁은 최치우의 진가를 톡톡히 경험했지만, 모든 것을 감안해도 쉽지 않은 제안이 분명했다.
최치우도 흥미를 보였다.
블랙카드를 받았을 때의 무미건조한 표정과는 달랐다.
“독자적 사업부라……. 설마 내가 한영그룹을 위해 일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을 것 같은데요.”
“물론입니다. 그러니 독자적이라는 수식어를 강조하는 것 아닙니까. 최치우 씨를 한영그룹의 울타리에 담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서로가 서로의 날개가 되자는 뜻입니다.”
“흠.”
세상을 놀라게 할 파격적 제안이지만, 설득하기 위해 애쓰는 쪽은 임동혁이었다.
최치우는 큰 반응 없이 임동혁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나는 최치우 씨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독도에서 메탄 하이드레트를 채취한 거, 최치우 씨가 처음부터 끝까지 밑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나와 김도현 교수밖에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그 능력으로 세계를 누비며 마음껏 활약할 수 있도록 서포트하겠습니다.”
“내가 다른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오직 하고 싶은 일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대신 나는 최치우 씨가 이뤄낼 성과를 함께 나눌 자격을 얻고 싶습니다.”
임동혁은 자존심을 내려놓았다.
아쉬울 것 없는 그가 일생일대의 승부수를 던진 셈이다.
최치우에게도 나쁠 것 없는 제안이었다.
잠시 고심하던 최치우는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말해 괜찮은 딜입니다. 그런데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문제입니까?”
최치우는 뜸을 들였다.
임동혁은 긴장한 눈빛으로 최치우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는 자신과 그룹의 앞날을 최치우에게 걸었다.
과연 어떤 문제가 최치우의 결단을 가로막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최치우의 입에서 나온 말은 임동혁의 힘을 쭉 빠지게 만들었다.
“군대.”
“네?”
“군대부터 가야 됩니다. 대한민국 남자 아닙니까.”
“아, 아아…….”
임동혁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 말끝을 흐렸다.
최치우는 그를 쳐다보며 가볍게 웃었다.
“일단 본부장님의 제안은 무겁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나를 돕는 날개가 있다면 더 자유롭게 비상할 수 있을 것 같군요.”
“긍정적으로 고려해 주면 좋겠습니다.”
“그러죠.”
최치우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놓치기 아까운 어마어마한 제안도 그의 평정심을 흔들지 못했다.
그는 선택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닌, 선택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서울의 밤, 최치우는 날개가 되고 싶다는 재벌 2세의 제안을 받았다.
독도를 넘어 이어질 그의 걸음마다 폭풍이 몰아칠 것 같았다.
군대라는 복병이 남았지만 최치우의 나이는 아직 스물한 살에 불과하다.
시간은 그의 편이었다.
***
메탄 하이드레이트를 상용화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해저에 고체 상태로 묻혀 있는 실물을 채취한 것은 위대한 시작이다.
그다음부터는 대량 채취 기술을 도입해야 하고, 환경오염을 최소화하며 상용화시키는 방안도 연구해야 한다.
독도의 해저 자원을 바탕으로 미래의 산유국이 되기까지 넘어야 할 벽이 많은 것이다.
그러나 전 세계에 기술력을 입증하며 가능성을 보인 덕에 얻은 경제적 효과는 천문학적이었다.
정부, 특히 해수부 관계자들은 요즘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며 싱글벙글했다.
정기석은 실물 채취에 성공한 날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펑펑 흘렸다고 한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숙원이 풀린 것이다.
한국 정부 차원에서도 공식적으로 논공행상을 준비했다.
개발 프로젝트의 키는 서울대 미래 에너지 탐사대가 쥐고 있었다.
누구도 그 사실을 부정하지 못한다.
김도현 교수는 서울대 공대를 대표해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게 됐다.
또한 미래 에너지 탐사대에 소속된 학생 중 한 명에게도 포상이 주어질 예정이다.
사람들은 당연히 최치우가 주인공이 될 거라 생각했다.
개발 사업에 참여한 사람들은 가장 어린 최치우가 실세이자 핵심 인물임을 알고 있다.
오죽하면 해수부 차관보인 김기훈이 최치우에게 따로 인사와 덕담을 건넬 정도였다.
다른 멤버들도 불만을 품을 수 없었다.
최치우가 비공개 회의에 참여하며 김도현 교수 이상으로 활약했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조심스럽지만… 학생 대표로 훈장과 포상을 받는 건 아무래도 2학년 최치우 군이 적임자인 것 같네요.”
미래 에너지 탐사대를 모아놓고 김도현 교수가 입을 열었다.
굳이 의사를 확인하지 않아도 모두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세 명의 대학원생 멤버들과 이시환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수상자로 지목된 최치우가 브레이크를 걸었다.
“교수님, 죄송하지만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다 같이 밤을 새우고 동해의 찬바람을 맞으며 고생했습니다. 함께 받지 못할 상이라면 안 받겠습니다.”
잔잔하지만 무거운 파문이 일었다.
최치우의 뜻은 꺾이지 않을 것 같았다.
대학원생 선배 셋, 그리고 이시환과 김도현 교수가 놀란 눈으로 최치우를 바라봤다.
“정부가 우리에게 선심 쓰듯 훈장을 줄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없었으면 시작도 못 했을 프로젝트입니다. 훈장이든 뭐든 다 함께 받을 수 있도록 만들겠습니다.”
최치우는 단순히 선심을 쓰기 위해 고집을 부리는 게 아니었다.
그는 누가 주도권을 잡고 있는지 정부에게도 각인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더불어 미래 에너지 탐사대 멤버들을 확실하게 챙기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렸다.
평생 한 번도 받기 힘든 훈장을 손쉽게 가져오겠다고 장담하는 최치우의 패기에 모두 빨려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