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
<포세이돈>
자연재해 수준의 마법을 펼치기 위해서는 최소 8서클에 도달해야 한다.
마나가 물처럼 샘솟던 아슬란 대륙에서도 8서클 마법사는 진귀했다.
그들은 대마도사 클래스라 불리며 왕국을 대표하는 선생으로 존경받았다.
최치우는 제로딘으로 살아가며 9서클 현자의 벽을 넘어섰지만, 어디까지나 평생을 마법에 바친 결과였다.
현생에서 마법 수련에 올인하지 않고 6서클에 오른 것만 해도 엄청난 성과이다.
그러나 6서클과 8서클은 그야말로 천지차이다.
물론 6서클 마법으로 군대를 박살 내거나 불가사의한 기적을 일으킬 수는 있다.
하지만 대자연을 움직여 재해 수준의 현상을 만들어내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최치우는 일반적인 마법의 법칙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시도했다.
그는 동해에 빠졌을 때, 깊은 바다의 심연과 몸이 하나 되는 경험을 했다.
단순히 자연의 마나를 이용하는 게 아니라 육신이 마나 그 자체가 되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때처럼 동해 바다의 마나와 하나로 연결될 수 있다면 비록 6서클에 머문 경지라도 자연재해를 일으키는 게 가능할 것 같았다.
‘아슬란의 마법사들이 들으면 미친 소리라고 하겠지.’
최치우는 심각한 와중에도 피식 미소를 흘렸다.
아슬란 대륙은 마나의 축복을 받은 마법사의 천국이었다.
그러나 어떤 마법사도 서클의 한계를 뛰어넘을 시도를 하지 못했다.
최치우 역시 제로딘으로 살아갈 때는 그저 서클을 높일 생각뿐이었다.
모두 정해진 길로만 걸어간 것이다.
그런데 현대의 지구라는, 마법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세상에서 전에 없던 길이 보였다.
이래서 사람은 언제나 낯선 환경에서 도전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기존의 틀을 부수고 한계를 뛰어넘을 계기가 생긴다.
‘평화적으로, 어떠한 무력 충돌도 없이… 그러나 대자연의 힘을 빌려 너희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신의 경고를 해주마.’
최치우는 일본 사람들이 수많은 신을 모신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오죽하면 역사 교과서에 버젓이 카미카제[神風]를 기록하고 마을마다 고유의 신사를 만들겠는가.
과학이 지배하는 21세기지만, 일본인들은 여전히 신의 분노를 무의식적으로 두려워한다.
최치우는 그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방식으로 엄포를 놓으려 했다.
쏴아아아!
바람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했다.
매서운 찬바람이 최치우를 중심으로 뚜렷한 흐름을 만들고 있었다.
탐사선 선실과 조타실에 있는 선원들은 그런 최치우를 이상하게 쳐다볼 따름이다.
혼자 갑판에 서서 눈을 감고 있으니 정상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들은 최치우가 무슨 일을 하려는지, 또 실제로 무슨 일을 해낼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리키는 갑판으로 나가려는 선원들을 막아서며 곁눈질로 최치우를 살폈다.
잘은 몰라도 어마어마한 사고가 터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사부는… 내가 아는 것 이상으로 괴물이다. 그레이트!’
리키는 마치 아이돌 스타를 바라보는 소녀 팬처럼 최치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탐사선에서 오직 리키만이 어렴풋이나마 느낌을 받았다.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최치우를 중심으로 응축되고 있다는 사실을.
‘8서클 마법 크라켄을 펼치는 건 역부족.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동해가 되어 성난 파도를 일으킨다!’
최치우는 자신이 알고 있는 기존의 마법 상식을 뒤엎었다.
더 이상 아슬란 대륙의 틀에 얽매일 필요가 없었다.
이미 한 번 새로운 형태의 마법을 체험하지 않았는가.
바다에서 자연재해를 일으키는 정석은 8서클 마법 크라켄(Kraken)을 캐스팅하는 것이다.
신화 속 바다 괴물인 크라켄의 이름을 딴 마법은 단기간에 해일과 폭풍우를 불러온다.
지금의 최치우는 아무리 노력해도 8서클 마법 크라켄을 캐스팅할 수 없다.
대신 크라켄을 대체할 수 있는,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강력한 위력을 뿜어낼 방도를 찾아냈다.
슈우우!
동해 바다의 마나가 최치우의 몸으로 흘러들어 왔다.
최치우는 육신의 경계를 허물고 바다의 기운을 끝없이 받아들였다.
흠뻑 머금은 기운 그대로 동해가 품은 자연의 힘, 마나 그 자체와 하나로 동화되는 중이다.
자연재해를 일으키는 마법을 펼치는 게 아니다.
자연과 하나 되어 마법을 일으킨다.
마법의 개념을 바꾼 시도가 성공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됐다!’
최치우가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는 평소처럼 검은 갈색이 아니었다.
은은한 푸른빛 서광이 눈동자를 물들이고 있었다.
동해 바다의 마나가 몸으로 들어왔다는 뜻이다.
심해의 정기를 육신으로 받아들인 최치우는 천천히 한 손을 들었다.
곧이어 그가 시야 저편에 떠다니는 일본 해저 연구함을 향해 손바닥을 활짝 펼쳤다.
‘이것은 나의 분노, 내가 내리는 징벌이다.’
거창한 캐스팅 절차도 필요하지 않았다.
최치우의 의지가 움직였고, 그에 따라 동해 바다가 심해에서부터 꿈틀거렸다.
쿠콰콰아악-!
최치우를 태운 탐사선 앞쪽에서 거친 물살이 치솟았다.
이윽고 여러 갈래의 물살이 점점 덩치를 키우며 사나운 파도로 변했다.
파도가 향하는 방향은 뚜렷했다.
한국 영해의 경계 수역에서 약을 올리는 일본 연구함이 목표물이었다.
저격수가 쏘아 보낸 총알처럼 난폭해진 물살이 일본 연구함을 노리고 질주했다.
파파파파팟!
누가 봐도 이상한 광경이었다.
잔잔하던 바다에 갑자기 한 방향으로만 파도가 미친 듯 몰아쳤다.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다.
그렇기에 대처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아마 일본 연구함은 갑작스런 자연재해에 난리가 났을 것이다.
급히 배를 돌리려 해도 이미 늦었다.
최치우가 일으킨 동해의 분노는 거세고 빨랐다.
콰앙!
쿠우웅!
용왕이 불러낸 수룡(水龍)처럼 길게 뻗어 나간 파도가 일본 연구함과 부딪쳤다.
연이은 충돌에 연구함이 휘청거리는 게 육안으로 보였다.
“어? 저러다 배가 뒤집히겠는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래?”
한국 측 탐사선에 탄 사람들도 일제히 눈길을 돌렸다.
난데없는 바다의 변덕에 다들 넋을 놓고 입을 크게 벌렸다.
“아이고!”
저절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집채만 한 커다란 파도가 또다시 일본 연구함을 덮쳤다.
한참 떨어져 있던 해상 보안청 순시선 세 척이 연구함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자칫하면 연구함이 넘어갈 수도 있음을 직감한 것이다.
‘이게… 마지막이다. 네이처 웨이브(nature wave).’
최치우는 자연의 마나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마법에 네이처 웨이브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는 몸 안으로 들어온 마나를 모두 내보낼 준비를 마쳤다.
마나를 한 번에 내보낸다면 이전보다 더욱 강한 위력의 마법을 펼칠 수 있지만, 육체가 일시적으로 진공상태가 되며 타격을 입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치우는 그것을 감수하려는 것이다.
독도 해저 자원 개발 프로젝트를 방해하기 위해 안달이 난 일본에게 묵직한 경고를 줄 수 있다면.
콰콰콰콰콰!
이제껏 몰아치던 어떤 파도보다 더욱 거센 물살이 일어났다.
사방팔방으로 새하얀 물방울이 튀었고, 최치우가 서 있는 갑판도 그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물살이 일본 연구함을 향했지만, 뒤쪽의 한국 탐사선도 크게 흔들렸다.
그러나 최치우는 석상처럼 갑판 위에 우뚝 서서 파도를 지휘했다.
파바박-!
쿠우우우웅!
위태롭게 휘청거리던 일본 연구함이 직격탄을 맞았다.
선체가 대각선으로 기울어지며 배가 완전히 중심을 잃었다.
원래 바다를 항해하는 배는 어지간해선 뒤집히지 않는다.
대신 한번 중심을 잃으면 걷잡을 수 없이 수습이 어려워진다.
일본의 연구함은 파도에 맞서 버틸 수 있는 한계를 넘어버렸다.
‘이만하면 됐어.’
최치우는 쫙 펼치고 있던 손바닥을 접었다.
그의 눈동자는 어느새 원래의 흑갈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순간, 빈혈 기운이 찾아오며 다리에 힘이 풀렸지만 쓰러지진 않았다.
그는 짧게나마 대자연을 움직여 재해를 일으켰다.
그러고도 두 다리로 서서 자신이 만든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인명 피해는 없을 것이다.
최치우가 마법을 거둔 즉시 동해 바다는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연구함에 타고 있던 일본인들은 구명조끼를 착용했을 것이고, 근처에 있던 순시선에 의해 금방 구조될 확률이 높았다.
아니나 다를까, 순시선 세 척은 이미 비상 사이렌을 켜고 구조 작업에 돌입했다.
최치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뒤돌아섰다.
당장 오늘 오후부터 일본과 한국의 뉴스가 방금 전 사건으로 뒤덮일 것이다.
이 경고를 가볍게 받아들인다면 일본은 더 큰 대가를 치러야만 할 것이다.
최치우는 선실로 돌아와 조용히 휴식을 취했다.
리키도 그의 지친 안색을 보고 궁금증을 꾹 억눌렀다.
아무래도 질문은 나중에 해야 할 것 같았다.
이렇게 세상이 모르는 또 한 페이지의 역사가 최치우의 손끝에서 시작됐다.
전설과 신화에 등장하는 용왕이나 포세이돈의 현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리키만 어렴풋이 낌새를 차렸을 뿐, 누구도 이상한 자연재해와 최치우를 연관 지어 생각하지 못했다.
감히 상상조차 하기 힘든 게 당연한 일이다.
선실 의자에 앉은 최치우는 침묵을 지키며 텅 빈 육신을 다독였다.
***
“뉴스 특보입니다. 오늘 오전 동해상에서 일본의 해저 연구함이 파도에 휩쓸려 전복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최근 우리 정부의 독도 해저 자원 개발에 항의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연구함과 순시선을 경계 수역까지 보내왔는데요, 이번 사고로 인해 일본 국내 여론이 악화될 조짐이라고 합니다. 빠른 구조 작업으로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갑작스러운 대형 사고에 일본 정부는 난색을 표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소식을 도쿄에 나가 있는 김형재 특파원이 알아보겠습니다.”
TV 뉴스에서는 일제히 일본 연구함이 동해에서 뒤집힌 사건을 다뤘다.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소규모 자연재해가 아무런 징조 없이 하필이면 일본 연구함만을 향해 일어났다.
현대 과학으로 설명하기 힘든 미스터리한 일이기에 일본 국내 여론은 더더욱 나빠지고 있었다.
사실 대부분의 일본 국민은 독도 문제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렇기에 괜히 분쟁을 일으키다 사고를 당하게 만든 일본 정부를 질타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크지 않은 연구함이라고 해도 배가 침몰했다는 것은 아주 큰 사건이다.
그것도 한국 영해의 경계 수역에서 침몰했으니 뒤처리도 골치 아프게 생겼다.
일본 정부는 뜻하지 않게 뼈아픈 손실을 입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을 향한 도발을 지속하는 건 힘들 수밖에 없다.
“사부, 저거… 사부가 한 거? 아, 나도 참 크레이지한 질문인 거 아는데… 너무 이상해서.”
울릉도의 숙소에서 같이 뉴스를 보던 리키가 참아온 질문을 꺼냈다.
최치우는 리키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파도를 일으켜 배를 뒤집는 게 가능할까요?”
“그, 그런 게 가능할…….”
리키의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나마 이상한 기운을 느끼고 질문이라도 한 게 용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리키도 잘 알고 있었다.
“아무튼 멀리까지 와서 고생했어요, 리키. 대신 다음엔 나한극보다 어려운 기술을 알려주겠습니다.”
“와우! 나한극보다 더 어려운 거? 리얼리?”
리키는 언제 궁금증을 품었냐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어차피 고민해 봐야 답이 안 나올 문제는 빨리 잊고 최치우로부터 무공 기술 하나라도 더 배우는 게 낫다.
최치우는 그의 단순한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계속 한 팀으로 데리고 다니며 이런저런 기술을 전수해 주는 것이다.
“다 잘될 거니까 오늘 저녁에는 울릉도 명이나물에 삼겹살이나 구워 먹죠.”
최치우가 뒤로 드러누우며 가볍게 말했다.
해저 시추는 순조롭게 진행 중이고, 일본은 함부로 도발을 이어가지 못할 것이다.
불가능의 영역에서 가장 간단하고 확실한 방법으로 독도 프로젝트를 지켜낸 최치우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