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
울릉도에는 상반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독도 해저 자원 개발 프로젝트가 시작된 이후 울릉도 경기가 살아났다.
100명 가까운 개발단 인력이 울릉도에 상주하게 됐고, 언론사의 취재도 빈번해졌기 때문이다.
독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관광객의 수도 예년보다 늘어났다.
관광업에 종사하는 울릉도 주민들은 개발 사업을 반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일본의 도발 수위가 높아지며 우려를 표하는 도민들도 있었다.
혹시라도 일본이 한국 영해를 침범하게 되면 울릉도의 평화가 깨질지도 모른다.
외부에서 볼 때는 엄살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삶의 터전을 일구고 살아가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작은 변화도 달갑지 않은 법이다.
그렇기에 개발단을 응원하는 분위기가 주를 이루는 가운데 마냥 환대하지만은 않는 도민들도 존재했다.
당연히 개발단 모두가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최치우는 리키와 함께 울릉도에 도착해서 정기석으로부터 이런저런 설명을 들었다.
정기석은 울릉도 도민들의 숨은 마음까지 헤아리며 최치우가 알아야 할 것들을 상세히 일러줬다.
이전에도 몇 번 답사를 나왔지만, 정기석이 직접 붙어서 브리핑을 해주니 현장 분위기를 확실히 파악할 수 있었다.
“도민들의 걱정이 깊어지기 전에 해결을 봐야겠군요, 단장님.”
최치우가 정기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기석 역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마땅한 해법이 없십니다. 정부에서는 외교적으로 풀어본다고 해도 이게 어디 쉽게 풀릴 문제겠십니까?”
“미국에서도 적극적으로 개입하긴 어렵겠죠.”
“미국은 예전부터 한일 갈등에는 유보적 태도를 보였십니다. 무력 충돌로 이어지지 않는 한 크게 개입하지 않을 거 같십니다.”
일본의 도발을 둘러싼 전문가들의 견해도 정기석의 말과 대동소이했다.
미국은 쉽게 나서지 않는다.
일본도 이번만큼은 만만히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특별한 계기가 없는 이상 독도를 기점으로 한 대치 국면은 지속될 확률이 높았다.
문제는 그로 인해 울릉도 도민들, 또 한국 국민들이 받을 스트레스이다.
울릉도 베이스캠프에서 독도의 시추 기계를 오가며 개발 작업을 실행하는 전문 인력의 멘탈도 신경 써야 한다.
전문가들은 버틴다고 해도 그들의 가족이 불안감을 느끼면 곤란했다.
최악의 경우 개발단이 와해될 수도 있었다.
일본이 노리는 것도 그런 점이다.
독도를 국제 분쟁 지역으로 부상시키는 게 숨은 의도라면 개발단을 불안하게 만드는 건 겉으로 드러난 의도이다.
어느 쪽이든 한국 정부 입장에서는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물밑에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성사시킨 최치우 역시 언짢았다.
‘너희들 뜻대로 돌아가게 놔둘 순 없지.’
숙소를 향해 걸어가는 최치우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이고 있었다.
보통 사람보다 감각이 예민한 리키는 그의 변화를 눈치챘다.
최치우의 몸에서 마치 싸울 때처럼 사나운 투기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사부?”
리키의 부름을 들은 최치우는 그제야 기운을 다스렸다.
일본을 향한 분노가 밖으로 표출된 것이다.
“괜찮으십니까, 치우 학생?”
정기석도 최치우를 돌아봤다.
그는 리키처럼 놀라지는 않았다.
최치우가 무의식적으로 발산한 투기를 느낄 만큼 몸의 감각이 뛰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배를 타고 온 최치우의 컨디션이 안 좋은 것으로 오해했다.
최치우는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보였다.
“아무렇지 않습니다. 그보다 숙소에 들어가면 현재 개발 상황에 대해서도 간략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당연히 그래야지요. 김 교수님도 치우 학생에게 가능한 상세하게 설명을 드리라고 했십니다.”
김도현 교수는 독도 인근 해역의 시추 기계에 나가 있었다.
그렇기에 시간이 조금 지나야 울릉도로 돌아올 것이다.
최치우는 김도현을 만나기 전까지 정기석에게서 사전 정보를 습득할 생각이다.
사실 정기석은 국내 해저 자원 개발 분야에서 손꼽히는 거물이다.
가스 하이드레이트 사업단의 초대 단장이었고, 지금도 고문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중이다.
해수부에서 현장 대표로 내세운 사람도 다름 아닌 정기석이었다.
그런 위치에 있지만 이제 막 스물한 살이 된 학부생 최치우를 결코 얕잡아보지 않았다.
단순히 김도현 교수가 총애하는 학생이기 때문은 아니다.
지난여름, 첫 번째 독도 답사에서 최치우는 이시환을 구하다 동해 바다에 빠졌다.
절체절명의 순간, 자신보다 먼저 동료를 구하는 용기는 아무나 보여줄 수 없다.
게다가 풍랑이 거센 바다에서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때부터 정기석은 최치우가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걸 느끼고 있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최치우는 독도 해저 자원 개발 프로젝트의 중심인물로 김도현 교수와 함께 주요 회의에 참석했다.
참석만 하는 게 아니라 해저 시추에 필요한 핵심 기술을 제시하고, 난해한 부분에서 직접 설명을 덧붙였다.
그동안 꽉 막힌 부분이던 핵심 기술 문제를 해결한 일등 공신으로 실무진 사이에 소문이 났다.
나이와 경력의 한계를 스스로 뛰어넘은 것이다.
물론 융통성 없는 꼰대라면 여전히 최치우를 애송이 취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기석은 해저 자원 개발을 위해 일생을 바친 남자 중의 남자였다.
그는 김도현을 깍듯이 모시듯 최치우에게도 예의를 다했다.
때때로 어린 조카를 보듯 흐뭇한 시선을 던지기도 했지만, 한 명의 프로페셔널로 존중하는 티가 역력했다.
프로는 프로를 알아본다.
무림에서도 고수는 고수를 알아봤다.
어느 대륙, 어느 차원이나 마찬가지였다.
진짜 실력자는 결코 경거망동하지 않으며 남을 깔아보지 않는다.
정기석은 자기 분야에서 경지에 오른 사람다웠다.
“먼 길 왔으니 조금만 쉬고 밥부터 한술 뜨는 게 좋겠십니다. 개발 현황 브리핑은 식사 후에 해드리고, 끝날 때 되면 김 교수님도 울릉도로 돌아오실 거 같십니다.”
“감사합니다, 단장님.”
“감사는요, 무슨. 그럼 밥 맛있게 묵고 좀 이따 보겠십니다.”
정기석이 너털웃음을 터트리고 나갔다.
최치우와 리키가 편히 쉴 수 있게 배려해 주는 것이다.
“사부, 난 뭘 하면 될까요? 텔 미 애니띵!”
“아직은 아무것도. 사고 안 치고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그럼 한가할 때 나한극 응용 동작 더 가르쳐 줘야 합니다. 오케이?”
“그러죠.”
“예쓰!”
리키는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그는 요즘 최치우에게 무공 기술을 전수받으며 조금씩 강해지는 걸 삶의 낙으로 여겼다.
최치우는 희희낙락하는 리키를 뒤로하고 짐을 정리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그저 개발단의 성과를 확인하기 위해 독도로 온 게 아니었다.
배낭을 풀고 짐을 정리하는 그의 눈빛이 다시 날카로워졌다.
아까처럼 투기를 뿜어내지는 않았지만, 눈동자에 한 자루 칼을 품은 것 같았다.
리키가 그의 눈을 봤다면 깜짝 놀랐을 것이다.
‘어느 차원에서도, 그 누구도 내 앞을 가로막진 못했다. 여기서도 다를 건 없어.’
단신으로 제국을 멸망시킨 영혼의 본성이 깨어나고 있었다.
그를 분노하게 만든 대상은 누가 됐든 단단히 각오해야 할 것 같았다.
***
휘이이이이!
매서운 바람이 불고 있다.
아직 겨울의 한파가 물러나지 않았다.
서울도 마찬가지인데 파도치는 동해 한복판은 말할 것도 없었다.
특별히 기후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늦겨울 동해의 칼바람은 원래 얼굴을 얼어붙게 만든다.
최치우는 갑판으로 나가는 문 앞에 서서 창문 너머 바다를 바라봤다.
어제 울릉도에 도착한 그는 정기석과 김도현에게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다행히 해저 시추는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특별한 변수가 없다면 조만간 첫 번째 실물 채취에 돌입할 예정이다.
최치우가 도쿄대에서 가져온 핵심 기술은 한국 실정에 맞춰 업그레이드됐고, 머지않아 결실을 볼 일만 남았다.
남은 변수는 일본의 도발밖에 없었다.
현장에서 느낀 도발 수위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단순히 일본 정부의 주요 인사들이 언론 플레이를 펼치는 정도가 아니었다.
독도 인근 한국 영해의 경계선까지 일본의 해저 연구함이 출몰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따금 일본 연구함이 모습을 드러낸다는 소식은 서울에서도 접했다.
그런데 한국 해경이 경고 방송을 펼칠 만큼 영해 경계선 가까이 다가온다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일본의 해저 연구함은 해상 보안청 순시선을 부록처럼 달고 다닌다.
해상 자위대, 즉 일본 해군이 언제든지 개입할 여지가 있다는 뜻이다.
현재 일본은 절대로 먼저 군대를 동원할 수 없다.
오직 방어만을 위해서 병력을 쓰도록 헌법에 강제되어 있다.
그러나 극우 정치인들이 지속적으로 헌법 개정을 위해 힘쓰고 있고, 빌미만 주어지면 내일이라도 태세를 변환할 것이다.
일본 해군의 군사력은 자타가 공인하는 아시아 최강이다.
그만한 해군력을 억누르고 있으니 어떻게든 명분을 찾기만 학수고대하는 게 당연했다.
그들에게 있어 한국의 독도 해저 자원 개발은 훌륭한 명분이었다.
현재 독도는 일촉즉발의 상황이라는 게 괜한 엄살이 아닌 것이다.
최치우는 모든 상황을 전해 듣고, 현장의 공기를 피부로 느낀 뒤 결심을 더욱 굳혔다.
그는 우리 영해의 경계 수역을 오가는 개발단 탐사선에 몸을 싣고 있었다.
가장 가까이에서 자기 눈으로 일본의 도발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거의 매일 출몰하는 일본의 해저 연구함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최치우처럼 한계를 초월한 시각을 가진 사람이 아닌, 평범한 사람도 충분히 일본 연구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 영해 너머 경계 수역에 하얀색 함선이 기웃거리는 게 보였다.
그 뒤로는 무장한 해상 보안청 순시선 석 대가 거리를 두고 있었다.
순시선이 석 대나 동행했다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리키, 내가 나가 있는 동안 아무도 못 올라오게 해줘요.”
“노 프라블럼, 사부.”
리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최치우의 말이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할 정도로 충성심이 깊어졌다.
나한극을 비롯한 무공 기술을 전수받으며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고 있기 때문이다.
끼이익-
최치우는 망설임 없이 갑판으로 나가는 문을 열었다.
소리가 들리자 배 안의 사람들이 일제히 최치우를 쳐다봤다.
김도현과 정기석은 동행하지 않았기에 배 안에 최치우와 가까운 사람은 없었다.
“어? 어! 나가면 안 되는데!”
“학생! 바람이 많이 불어서 갑판은 위험해요!”
선원들이 걱정스레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최치우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다시 닫힌 문 앞은 190㎝의 장신 리키가 든든히 지키고 있다.
“돈 워리, 가이스. 우리 사부가 잠깐 바람 쐬는 거니까 방해하지 맙시다. 오케이?”
“그, 그래도…….”
선원들이 우물쭈물하는 사이, 최치우는 갑판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는 찬바람이 몰아치는 갑판에 홀로 서서 바다 너머를 주시했다.
일본 해저 연구함에서도 이쪽을 염탐하고 있을 것이다.
뜬금없이 갑판 위로 올라온 한 남자를 이상하게 여길지 모른다.
최치우는 두 손을 단전에 모으고 눈을 감았다.
흔들리는 배의 갑판 위에서 눈을 감았지만, 그의 몸은 마치 평지에 서 있는 것처럼 완벽하게 균형을 잡고 있었다.
‘6서클 마법으로 자연을 움직이는 건 불가능하지만, 마나와 하나 되는 깨달음이라면…….’
그는 동해 바다에 빠졌을 때 마나와 일체화되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당시 최치우는 서클의 한계를 넘어 동해의 힘을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그때의 깨달음이 아니었다면 차가운 바닷속 깊이 가라앉았을 것이다.
최치우는 다시 한번 그날의 이적을 재현시킬 작정이다.
목적은 분명했다.
불순한 의도를 품고 우리 영해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일본의 배들에게 자연의 진노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고오오오오-!
미증유의 에너지가 최치우의 몸으로 모여들고 있다.
독도가 자리 잡은 동해에서 역사에 남을 대사건이 터질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