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번째 환생-37화 (37/243)

# 37

거대한 시추 기계가 독도 인근 해역에 우뚝 세워졌다.

한국은 어엿한 선진국이고, 기술력 부문에서 항상 세계 선두 그룹에 속해 있다.

해저 시추 자체는 원래부터 큰 문제가 아니었다.

해수부 산하의 가스 하이드레이트 사업단은 10년 넘게 독도 인근 해역을 연구해 왔다.

다만 결정적인 키 역할을 할 핵심 기술의 부재가 뼈아팠고, 최치우와 김도현 교수가 해결사 노릇을 한 것이다.

미래 에너지 탐사대의 독도 연수를 도와준 정기석은 감격을 금치 못했다.

남자답게 생긴 그는 시추 기계가 설립되는 현장에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2005년 발족된 가스 하이드레이트 사업단의 초대 단장으로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지 안 봐도 비디오다.

오죽하면 고문으로 물러나서도 인생을 독도에 바쳤다고 할 정도이겠는가.

“교수님, 정말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십니다. 죽기 전에 이런 날을 보게 되다니…….”

정기석이 커다란 손으로 김도현 교수의 하얀 손을 덥석 부여잡았다.

사업단의 다른 연구원들도 정기석만큼은 아니지만 감동한 표정이다.

그동안 끝이 보이지 않는 마라톤을 해오고 있었다.

지쳐서 포기한 연구원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전혀 뜻밖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사업단과 미래 에너지 탐사대 사이에 알력 다툼은 벌어지지 않았다.

미래 에너지 탐사대가 핵심 기술을 개발하고, 한영그룹의 후원을 성사시키지 않았다면 사업단은 여전히 안갯속에 있었을 터이다.

그렇기에 정기석을 비롯한 사업단의 연구원, 직원들은 미래 에너지 탐사대를 프로젝트의 주축으로 인정했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목표를 이뤄준 은인으로 여기는 분위기였다.

최치우는 뿌듯한 기분을 느끼며 배 위에서 시추 기계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제 그는 김도현 교수와 함께 매일매일 수집되는 시추 데이터를 분석하고 핵심 기술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체크하는 일을 하면 된다.

현장을 조율하는 컨트롤 타워 역할을 맡은 셈이다.

매일 배를 타고 바다 가운데로 출퇴근을 하고 때로는 시추 기계에서 당직을 서는 손발 역할은 주로 가스 하이드레이트 사업단이 맡게 됐다.

한영그룹은 그 모든 과정에 소요되는 막대한 예산을 처리하고 독도 해저 자원 개발의 홍보를 담당했다.

민간과 학계, 정부가 각자의 장점을 살려 시너지 효과를 내려는 것이다.

최치우는 민관 협력 사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지만, 사람들 말에 의하면 이만큼 팀플레이가 좋은 프로젝트도 드물다고 한다.

어쩌면 드러나지 않은 막내로서 이런 대규모 사업을 경험하는 게 최치우에겐 더없이 소중한 경험이 될지 모른다.

서로 다른 조직을 어떻게 통합해서 운영하는지 보고 배울 기회였다.

“최치우 학생, 예전에 왔을 때부터 눈여겨봤지만 김 교수님 도와서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고 들었십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하겠십니다.”

정기석은 최치우에게도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최치우는 반갑게 그의 손을 잡았다.

독도에서 이시환이 위기에 처하고 그를 구하며 동해 바다에 빠졌다가 깨달음을 얻던 순간이 떠올랐다.

생각해 보면 독도는 늘 최치우에게 선물만 안겨준 것 같다.

“현장에서 고생하실 사업단의 역할이 가장 중요합니다. 많이 배우겠습니다, 단장님.”

“어린 친구가 이리 말도 잘할까. 아무튼 큰 인물 나겠십니다, 교수님.”

정기석이 웃음을 터트리며 김도현을 바라봤다.

김도현 교수는 흐뭇한 표정으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다.

“앞으로 한 달 안에 성과를 내겠십니다, 교수님.”

“너무 서두르실 필요는 없습니다. 첫 시추 작업에서 지반에 무리를 가하면 후속 작업이 어려워질 수도 있습니다.”

“저희는 고마 교수님과 탐사대 지시만 착실히 따르겠십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정기석이 사뭇 믿음직스럽게 대답했다.

최치우는 남몰래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라면… 우리 프로젝트가 실패할 확률은 거의 없다. 반드시 성공한다.’

기술과 지원, 팀워크까지 모든 게 갖춰졌다.

최치우의 손끝에서 시작된 프로젝트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밝힐 날이 머지않은 것 같았다.

***

“누나!”

최치우가 길 건너편에서 반가운 얼굴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환하게 웃으며 횡단보도를 건넌 그는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재충전을 위해 일본으로 떠난 문지유가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처음엔 짧은 여행을 다녀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도쿄의 매력에 빠졌는지 짐을 싸고 꽤 오랫동안 머물렀다.

그러다 몇 달이 지나서야 다시 최치우 앞에 나타난 것이다.

물론 틈틈이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직접 얼굴을 본 건 무척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치우야?”

내성적인 성격의 문지유가 부끄러운 듯 웃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확실히 환경이 달라져서인지 그녀에게서 묘하게 일본 여자 분위기가 풍겼다.

살도 좀 빠지면서 훨씬 여성스러워진 것 같았다.

“나야 잘 지냈지. 누나는 일본이 완전 좋았나 봐요?”

“자극을 많이 받았어. 정말 그림 잘 그리는 사람들이 많아서… 나도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어.”

“이미 엄청 잘 그리면서.”

“아니야. 솔직히 치우 네가 아니었으면 난 여전히 알바하면서 습작생으로 남았을 거야.”

문지유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천천히 말했다.

최치우는 그녀를 데리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파스타와 피자를 테이블에 놓고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졌다.

“리얼 헌터 시즌 2, 최선을 다해서 명작으로 만들게.”

“누나가 준비되면 언제든지 시작하면 되니까 너무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요.”

“시즌 1이 우연히 찾아온 행운이었다면 시즌 2는 내 손으로 의미 있게 만들어가고 싶어.”

“스토리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최치우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의 머릿속에 리얼 헌터의 스토리는 무궁무진하게 남아 있다.

웹툰 작업은 최치우에게도 즐거운 일이었다.

아주 잠깐의 시간만 내서 쏠쏠하게 돈도 벌고 자신의 지난 삶도 기록으로 남길 수 있다.

무엇보다 수많은 독자들이 최치우의 전생 이야기에 열광하며 몰입하는 걸 지켜보는 재미가 가장 컸다.

이래서 한번 작가가 되면 마약처럼 창작 활동을 끊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일본에 다녀오더니 각오를 단단히 다진 것 같은데, 너무 힘주지 말고 편하게 그려요.”

“무조건 시즌 1보다 잘 그릴 거야. 스토리 못지않게 작화도 대단하다는 칭찬을 듣고 싶어. 꼭.”

수줍음을 많이 타던 문지유가 한 사람의 작가로 깨어난 모양이다.

최치우는 그녀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이 흐뭇했다.

이전까지의 삶에서 그는 오직 자기 자신만을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 생에서는 문지유라는 사람을 발굴하고 어엿한 인기 작가로 키우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이런 즐거움 때문에 차원을 떠나 많은 명사(名師)들이 제자를 양성하는 것 같았다.

현실에서는 문지유가 누나지만 최치우는 그녀가 제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문지유는 리얼 헌터 시즌 2에 대한 의지를 활활 불태우고 있었다.

“누나, 리얼 헌터 잘 끝내고 나면 나랑 더 죽이는 작품 같이해요.”

“벌써 다음 작품도 구상하고 있어?”

“리얼 헌터야 워낙 이야기가 많이 남아서 시즌 5까진 무난히 나오겠지만, 그다음 웹툰도 함께해야죠. 누나가 싫으면 어쩔 수 없고.”

“아, 아냐. 너랑 계속할 수 있으면 나한테는 다시없는 행운인걸. 오히려 내가 부탁하고 싶은 입장이지.”

문지유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최치우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누나도 알겠지만 난 군대를 가야 되니까 그동안 리얼 헌터를 끝까지 만들고… 내가 제대할 쯤에는 완전히 새로운 웹툰을 시작하면 타이밍이 딱 맞겠죠?”

“군대……. 그렇구나.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문지유는 아쉬움이 느껴지는 표정을 지었다.

마치 당장 최치우가 입대한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 같았다.

최치우는 순진한 그녀의 모습에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이어갔다.

“아무튼 나 제대할 때는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많이 쌓일 것 같아요.”

“어떤 스토리야?”

“내 이야기예요.”

“응? 치우 네 이야기?”

“남미의 광산에서 정체불명의 금속을 캐내고, 사막에서 신기루가 아닌 미확인 에너지를 찾고, 그렇게 지구를 자원 고갈에서부터 구해내는 이야기. 어때요? 재밌을 거 같아요?”

“완전 신선한데?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유형의 히어로물인 거 같아. 근데 그게 어떻게 네 이야기가 되는 거야?”

“나중에 알게 될 거예요. 어쨌든 재밌다니까 다행이네.”

최치우는 현생에서 자신의 삶을 웹툰으로 남길 생각이다.

언제 어느 때 육신과 영혼이 소멸할지 모른다.

그래도 이 세계에 족적을 남겼음을, 자신이라는 사람이 존재했음을 알리고 싶었다.

무의미하게 살다가 이름도 없이 사라지고 싶지 않다는 욕망.

이것이야말로 강해지고 싶은 욕망이나 부와 명예를 좇는 야망보다 더 강렬한 근원적인 영혼의 외침일지 모른다.

문지유는 그런 점에서 아주 소중한 파트너였다.

그녀 스스로는 모르고 있지만 최치우의 존재 의미를 기록하는 관찰자이자 사관(史官)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다.

“다른 별일은 없었어? 대학 생활은 어때?”

“기대 이상으로 재밌어요. 이런저런 프로젝트도 많고 연애도 하고.”

“연애? 여자친구 생긴 거야?”

“아, 누나한테 말 안 했구나? 어쩌다 보니 같은 과에서 CC를 하게 됐어요.”

최치우는 유은서를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공대 여신으로 칭송을 받으면서도 틈만 나면 최치우에게 딱 달라붙어 안 떨어지는 유은서는 마치 비타민 같았다.

하지만 그의 연애 소식을 들은 문지유는 어쩔 줄을 모르는 표정이다.

“하긴, 너 같은 사람을 그냥 놔둘 리가 없지.”

“에이, 그건 아니다. 일본에서는 별일 없었어요?”

“난 그냥 만화 보고… 그림 그리고……. 그러기만 했어.”

문지유의 목소리에 감출 수 없는 아쉬움이 담겨 있었다.

최치우도 이제는 그녀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러나 일부러 모르는 척 티를 내지 않았다.

문지유는 무척 매력적인 여자이다.

그렇지만 함께 웹툰을 만들며 영혼의 흔적을 기록하는 사람으로 남기고 싶었다.

어떻게 보면 언제든 헤어질 수 있는 연인보다 더 소중한 관계로 여기는 것이다.

“파스타랑 피자 다 식겠다. 많이 먹어요, 누나.”

“응…….”

약간 어색해진 분위기에서 식사가 계속됐다.

최치우는 그녀 모르게 속으로 다짐을 했다.

‘내 삶을 기록하는 대신… 아주 오래도록 기억될 최고의 웹툰 작가로 만들어줄게요, 지유 누나.’

독도에서는 해저 시추를 위한 작업이 한창인 가운데 최치우는 일상의 여러 분야를 직접 챙기고 있었다.

***

새해의 태양이 떠올랐고, 최치우는 스물한 살이 됐다.

성인으로 보낸 지난 1년 동안 그는 남들이 10년을 집중해도 이루기 힘든 성과를 만들어냈다.

어머니에게 가게를 선물했고, 대형 포털 사이트에 웹툰을 연재해 인기를 끌었으며, 비공식적으로 한국에서 가장 싸움을 잘하는 남자가 됐다.

이게 전부가 아니다.

신입생이지만 세계적인 석학이자 전공 교수인 김도현을 자신의 팀으로 만들었다.

미래 에너지 탐사대의 비밀스러운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최치우가 김도현 교수의 팀원인 게 아닌, 김도현 교수가 최치우의 팀원인 셈이다.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팀 최치우는 막강한 소수 정예 진용을 갖추고 있었다.

반쯤 미쳤지만 누구보다 냉정하고 치밀한 한영그룹의 후계자 임동혁이 있고, 이제 한국에서 두 번째로 싸움을 잘하는 리키 김이 최치우를 사부로 받들어 모신다.

이시환을 비롯해 대학원생 선배들도 알게 모르게 최치우의 마력에 빠져들며 굳건한 팀워크를 형성하고 있었다.

독도 해저 자원 개발 프로젝트로 인연을 맺은 해수부와 가스 하이드레이트 사업단 사람들도 언제 어느 때 최치우의 팀원이 될지 모른다.

착착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만큼이나 최치우는 미래를 향한 준비를 해나갔다.

인위적으로 만든 게 아니다.

자연스레 사람들이 그의 주변으로 모이고 있었다.

이러한 에너지를 어떻게 활용할지, 무엇을 위해 지구에서의 삶을 바칠지 최치우는 어느 차원에서보다 진지하게 인생을 마주하기 시작했다.

그의 고민과 열정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 누구도 짐작하지 못한다.

분명한 것은 지구라는 행성에 살아가는 모든 인류에 영향을 끼치리란 사실이다.

강인한 영혼으로 차원을 떠돌아온 최치우는 이 세상에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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