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
임동혁이 작정하고 나섰다.
재벌 2세가 자신의 후계자 자리를 걸고 일을 밀어붙이면 추진력이 엄청날 수밖에 없다.
그사이 최치우는 임동혁과 김도현 교수를 만나게 해줬다.
서울 모처에서 이뤄진 미팅에서 김도현 교수는 해저 시추 기술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물론 전문적인 내용이라 임동혁이 100%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김도현 교수의 설명을 통해 그는 독도에 묻힌 메탄 하이드레이트를 채취할 수 있는 기술을 확보했음을 확신하게 됐다.
일본이 보유한 기술은 마냥 특별한 게 아니었다.
그들이 실제로 해저의 메탄 하이드레이트를 시추했을 때의 데이터가 기술의 80% 이상이었다.
덕분에 김도현 교수와 최치우는 시행착오를 줄이고, 독도 인근 해역에 맞춰 시뮬레이션을 작동시킬 수 있었다.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은 김도현 교수와 최치우가 함께 개발했다.
최치우는 바로 직전의 인생에서 얻은 지식을 토대로 무시무시한 개발력을 보여줬다.
해킹 능력뿐 아니라 복잡하고 창의적인 기술을 개발하는 능력도 여느 전공자 못지않았다.
미래 에너지를 전공하는 학부생이 천재적인 해킹 실력과 개발 능력을 갖췄다는 것, 게임으로 치면 사기 캐릭터인 셈이다.
어디 그뿐인가.
김도현 교수는 모르지만 임동혁은 최치우가 파이트 클럽의 최강이라는 것까지 알고 있다.
비공식이긴 해도 한국 제일의 강자라는 걸 인지하고 있으니 더더욱 최치우를 괴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최치우라는 인물을 만난 걸 일생일대의 기회로 여겼다.
복권을 긁어보겠다는 말이 괜한 비유가 아니었다.
이 복권이 터지기만 하면 임동혁은 망나니 재벌 2세에서 일약 그룹의 미래를 이끌 후계자로 위상이 바뀌게 된다.
당장 메탄 하이드레이트를 넉넉히 채취해 상업적인 수익을 거둘 필요도 없었다.
실물 채취에만 성공하면 한영그룹의 이미지는 단번에 국민 기업으로 떠오를 것이다.
그다음 상업화를 위한 기술 개발과 준비는 여러 상황을 보면서 천천히 준비해도 늦지 않았다.
시추 성공만으로 한영그룹은 국가가 주도하는 공공 개발 사업 입찰에 이점을 갖게 되는 것은 물론 수천억 이상의 광고 효과를 누리게 된다.
대외적으로는 망나니로 알려졌지만, 승부사 본능을 타고난 임동혁이 아무 이유 없이 운명을 건 게 아니었다.
그는 파이트 클럽에서 피 튀는 싸움을 볼 때보다 더 흥분해 있었다.
잘못되면 후계자 자리가 날아간다는 생각에 아드레날린이 쉬지 않고 분비됐다.
임동혁은 마치 여자친구라도 된 것 양 최치우에게 자주 연락했다.
그도 미래 에너지 탐사대의 숨은 실세가 최치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김도현 교수와 더불어 최치우의 진면목을 엿본 몇 안 되는 사람에 속한다.
그래서인지 자신이 어떻게 프로젝트를 성사시키려 노력하는지 끊임없이 알리려 했다.
2학기가 끝나지 않아 학교생활을 병행하고 있는 최치우는 조금 귀찮기도 했다.
중요한 대목만 알려주면 되는데 임동혁의 연락이 너무 잦았기 때문이다.
우웅- 우웅-
“전화 왔어, 치우야.”
함께 캠퍼스를 걷고 있던 유은서가 진동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폰을 확인한 최치우는 임동혁의 이름을 보고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안 받아도 되는 전화라서.”
“정말?”
“응, 괜찮아.”
최치우와 유은서는 여름방학 이후 부쩍 가까워졌다.
몇 번의 가벼운 데이트를 했고, 서울대 에너지자원공학과 내부에서는 유은서가 최치우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알음알음 퍼져 있었다.
공대 여신으로 손꼽히는 유은서의 마음을 차지한 최치우를 질투하는 선배들도 생겼다.
신입생이 김도현 교수가 이끄는 미래 에너지 탐사대에 들어간 것만 해도 배 아픈 일이었다.
그런데 복학생들이 호시탐탐 노리던 유은서의 마음까지 뺏었으니 얄미울 만도 했다.
“이따 강의 끝나고 뭐 먹을까?”
“나 오늘은 어머니 가게 도와드리기로 했는데…….”
“맞다, 어머님 가게 새로 열었다고 했지? 그럼 내가 같이 가서 도와드리면 어때?”
“괜찮겠어? 힘들 텐데……. 너 기말 시험공부도 해야 하잖아.”
“아냐, 진짜 괜찮아. 인사도 한번 드리고 싶었어.”
유은서가 적극적으로 나왔다.
어떻게든 구실을 만들어 최치우의 어머니에게 눈도장을 찍고 싶은 것이다.
최치우도 이제는 그녀가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직 확실하게 마음을 열지는 않았지만, 귀엽고 예쁜 동기를 더 이상 애태울 생각은 없었다.
“그래, 가서 일은 하지 말고 인사만 드려.”
최치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유은서의 손을 잡았다.
새로 열어드린 어머니의 가게에 초대하면서 처음으로 스킨십을 한 것이다.
예상 못한 타이밍에 유은서의 두 뺨이 빨갛게 물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손을 빼지 않고 초승달 같은 눈웃음을 지으며 최치우를 쳐다봤다.
한창 분위기가 좋은 그때, 뒤쪽에서 자동차 클랙슨이 요란하게 울렸다.
빵빵-!
“최치우 씨, 데이트하느라 전화도 안 받고, 너무한 거 아닙니까?”
시끄러운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한영그룹의 임동혁이 수억 원 대의 고급 자동차를 타고 캠퍼스로 찾아온 것이다.
“아, 결국 학교까지.”
최치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유은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질문했다.
“누구야? 이상한 사람 아니지?”
“이상한 사람 맞아. 근데 위험한 사람은 아니고, 미래 에너지 탐사대에 도움을 주고 있는 사람이야.”
“F.E에 도움을 주는 사람?”
최치우의 설명을 들은 유은서는 다시금 임동혁을 쳐다봤다.
새하얀 슈퍼카를 타고 캠퍼스에 나타나 경적을 울린 모습은 돈 많은 양아치가 따로 없었다.
그런데 서울대 공대의 주요 프로젝트인 미래 에너지 탐사대의 조력자라니 믿기 어려웠다.
“저 사람, 한영그룹 후계자 임동혁 본부장이거든.”
“와아, 역시 F.E는 스케일이 다른 거 같아.”
임동혁의 정체를 밝히자 유은서가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한영그룹이라는 굴지의 대기업 후계자가 미래 에너지 탐사대를 지원한다는 사실에 놀란 것이다.
그제야 날라리 같은 임동혁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임동혁은 차를 아무렇게나 세워두고 최치우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무리 데이트 중이라지만 내 전화도 안 받고, 너무한 거 아닙니까?”
“학교까지 무슨 일입니까?”
최치우는 임동혁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용건을 물었다.
임동혁도 대답 대신 질문을 먼저 했다.
“옆에는… 최치우 씨의 여자친구?”
그의 질문에 유은서가 더 긴장한 눈치다.
최치우는 그녀의 손을 놓지 않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시다시피 그렇습니다.”
“이런, 최치우 씨도 평범한 대학생처럼 연애를 하는군요.”
“당사자 앞에서 그런 말은 조심하시는 게…….”
“아아, 내 실수. 어쨌거나 중요한 일이 있어 왔습니다. 김 교수님과 함께 바로 의논해야 할 일입니다.”
임동혁은 미친놈이긴 해도 실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굳이 서울대까지 찾아온 걸 보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최치우는 고개를 돌려 유은서를 바라봤다.
그녀는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최치우를 마주 보고 있었다.
자신을 여자친구로 인정한 최치우의 모습에 심장이 뛰었고, 한편으로는 그가 한영그룹의 후계자를 막 대하는 걸 보면서 동경심을 느꼈다.
같은 학교, 같은 과를 다니지만 최치우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 같았다.
어쩌면 유은서는 이런 점 때문에 아직 어린 티가 나는 동기들과 어른인 척만 하는 복학생들을 제치고 최치우에게 반한 건지도 모른다.
“은서야, 나 교수님 잠깐 뵙고 와야 될 것 같다.”
“어? 그래야지. 이따가 카톡해.”
“톡할게.”
유은서가 마지못해 최치우의 손을 놓았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 피부로 와 닿았던 따뜻한 체온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최치우는 임동혁과 함께 공대 건물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유은서는 한동안 같은 자리에서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공대 여신이 제대로 사랑에 빠진 것 같았다.
***
겨울이 찾아왔다.
찬바람이 매섭게 불었고, 관악 일대를 쏘다니는 서울대 학생들도 두툼한 패딩으로 몸을 감쌌다.
그렇지만 최치우는 한여름보다 따뜻한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
가을쯤 새롭게 문을 연 어머니의 가게는 대박은 아니어도 평탄하게 운영되는 중이다.
무엇보다 어머니가 사장님이 되어 즐겁게, 그리고 예전보다 편하게 쉬어가며 일을 한다는 게 기뻤다.
어차피 앞으로 최치우가 벌어들일 돈의 스케일은 차원이 다를 것이다.
그는 자기 가게를 열고픈 어머니의 꿈을 이뤄드린 것으로 만족했다.
최치우가 늦게까지 학교에 머무는 탓에 자주 뵙지는 못해도 집안에선 언제나 훈훈한 공기가 흘렀다.
그의 겨울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건 어머니의 가게뿐만이 아니었다.
서울대 공대에서 제일 귀엽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유은서와 연애를 시작했다.
점점 미모에 물이 오르던 유은서는 연애를 시작하면서 하루가 다르게 예뻐졌다.
최치우는 수많은 남학생들의 질투를 받으며 공개 캠퍼스 커플이 됐다.
사실 그는 독도의 자원 개발과 관련해 해야 할 일이 워낙 많아서 연애에만 집중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가끔 비는 시간에 유은서와 같이 데이트를 하는 게 일상의 활력소가 됐다.
이성에게 무턱대고 끌리기엔 최치우의 영혼은 너무나 경험이 많았다.
그렇기에 공대 여신으로 불리는 유은서에게도 적당히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모습이 여자들의 마음을 더 끌어들이는 법이다.
남녀를 떠나서 먼저 안달이 난 상대는 매력이 없다.
최치우는 본의 아니게 나쁜 남자가 되어 유은서의 마음을 휘어잡았다.
그러나 겨울이 뜨거운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가게를 열고 행복해진 어머니도, 만날 때마다 귀엽게 애교를 부리는 유은서도, 그리고 일본 여행에서 돌아와 리얼 헌터 시즌 2를 준비 중인 문지유도 모두 소중한 존재들이다.
그럼에도 최치우의 영혼까지 몰입하게 만드는 그 무언가는 다른 일이었다.
다름 아닌 독도 해저 자원 개발이다.
서울대 공대의 미래 에너지 탐사대, 그리고 기존의 가스 하이드레이트 개발 사업단이 주축을 이루고 한영그룹이 민간 투자를 담당하는 국가 단위의 대형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김도현 교수와 임동혁이 전력으로 추진해 정부의 사업 승인을 받았다.
서울대 공대도 미래 에너지 탐사대가 만들어온 어마어마한 크기의 국가사업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동안 핵심 기술이 없어 제자리 돌기를 거듭하던 가스 하이드레이트 개발 사업단은 프로젝트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독도 해저 자원 개발 프로젝트는 정부의 내부 승인이 끝났고, 한영그룹도 본부장 직속 사업부를 만들었다.
임동혁이 후계자 입지를 걸고 덤볐기에 그룹에서도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사업 시행이 발표되면 전국의 모든 언론이 특종으로 다룰 게 분명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외교적 문제로 비화시키며 난리를 칠 것이 뻔했다.
그렇기에 모든 준비가 비밀스럽게 이뤄지고 있었다.
연말로 예정된 발표 행사가 끝나면 전 세계가 대한민국 독도를 주목하게 될 것이다.
최치우는 겨울방학에도 쉴 틈 없이 김도현 교수와 함께 해저 시추에 필요한 핵심 기술을 다듬고 전체 프로젝트의 밑그림을 그렸다.
처음 정부와 가스 사업단, 그리고 한영그룹의 전문가들은 최치우가 수뇌부 회의에 참석하는 걸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의문은 머지않아 풀렸다.
최치우는 예리한 문제 제기와 직관적인 해결책, 다각도에서 분석한 전문 기술로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굳이 김도현 교수가 감싸고돌지 않아도 스스로 실력을 입증한 것이다.
물론 대외적으로는 1학년 학부생인 최치우가 독도 해저 자원 개발의 얼굴로 나설 일은 없었다.
최치우 스스로도 원하지 않았다.
괜히 집중 견제의 대상이 되며 활동에 제약만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은 전면에 드러날 때가 아니었다.
하지만 아는 사람들, 즉 일을 진행하는 플레이 메이커들은 다들 최치우의 진가를 알고 있었다.
그는 극소수의 전문가와 정부 주요 인사들 사이에서 미래 에너지 탐사대의 실세이자 독도 해저 자원 개발의 핵심 멤버로 강렬하게 인식됐다.
곧 베일에 싸인 독도 해저 자원 개발의 실체가 공개될 예정이다.
개발 사업이 실패하게 되면 한껏 올라간 최치우의 주가도 바닥으로 떨어진다.
최치우와 임동혁, 그리고 김도현 교수의 운명이 걸린 프로젝트가 로또일지 꽝일지 이제 정말 시추 기계를 설립하고 결과를 확인하는 일만 남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