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번째 환생-34화 (34/243)

# 34

<로또>

서울로 돌아온 최치우는 김도현 교수와 함께 연구실에서 며칠 밤을 지새웠다.

어머니께는 공부할 게 많아서라고 변명했다.

최치우가 모은 돈으로 동네에 번듯한 가게를 연 어머니는 자나 깨나 아들 건강 걱정이었다.

언젠가부터 달라지기 시작한 아들이 특별한 재능을 가졌다는 걸 알게 됐지만, 그래도 어머니의 마음은 한결같았다.

아무리 장성했어도 길에서 차 조심하라고 당부하는 게 어머니의 마음이다.

최치우는 도쿄대 지구자원학과의 기밀 자료를 검토하면서도 틈틈이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누군가 자신을 걱정한다는 것, 그리고 그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낯설었지만 싫지 않았다.

“이렇게 정리하니 한결 보기가 좋네요. 후우…….”

김도현 교수가 피곤한 듯 한숨을 내쉬며 기지개를 켰다.

안경 너머 그의 눈동자가 빨갛게 충혈돼 있다.

도쿄대의 데이터는 방대했고, 그만큼 버릴 것도 많았다.

최치우가 어렵게 가져온 자료를 검토하고 분류하느라 눈알이 빠질 지경이었다.

물론 함께 며칠 밤을 샌 최치우도 피곤하긴 마찬가지였다.

무공 덕분에 일반인과는 차원이 다른 체력을 지녔지만, 정신적 피로도는 내공으로도 어찌 할 수 없었다.

연구가 괜히 힘든 게 아니었다.

두뇌를 풀로 가동하며 몇 시간을 보내면 누구든 탈진 상태가 된다.

그런 작업을 며칠에 걸쳐 계속했으니 금강불괴라도 피로감을 느끼는 게 당연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교수님.”

“내가 무슨 고생을 했겠어요. 치우 군이 만든 밥상에 숟가락만 얹었을 뿐인데.”

김도현은 한참 어린 제자인 최치우를 치하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독도에서부터 범상치 않은 면모를 보인 최치우는 김도현의 오랜 꿈을 이뤄줄 키맨이다.

이제는 혼자 힘으로 30억 원의 투자를 끌어오고, 그것을 발판 삼아 도쿄대에서 지구자원학과의 기밀 자료를 빼내기까지 했다.

연구 윤리를 벗어난 일이지만, 목표를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과감함과 저돌성은 김도현이 가지지 못한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미래 에너지 탐사대의 리더는 당연히 김도현 교수이다.

학부 1학년으로 F.E에 참여한 최치우는 운 좋은 막내일 따름이다.

하지만 실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최치우가 스스로 비전을 개척하고 김도현 교수는 조력자 역할을 기쁘게 맡았다.

두 사람은 며칠을 걸려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리스트를 쳐다보고 있었다.

도쿄대의 자료에서 추릴 것은 추려내고 핵심적인 내용만 알아보기 쉽게 요약한 리스트다.

당연히 맨 윗줄에는 메탄 하이드레이트의 해저 시추 기술이 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영그룹의 임동혁 본부장을 만날 거라고 했지요?”

“네, 교수님. 일본에서 돌아왔으니 성과를 보여줘야죠.”

“이런 표현이 조금 저속하지만 재벌 2세와의 내기에서 치우 군이 이긴 거네요.”

“임 본부장이 기분 나빠하진 않을 겁니다. 한 번 만나봤지만 정상이 아닌 사람이라서… 자신이 패배한 걸 더 좋아할지도 모릅니다.”

“듣기로는 소문이 안 좋던데. 한영그룹 회장도 컨트롤하기 힘든 망나니 후계자라는 말이 있잖아요.”

“교수님 앞에서 이런 말을 쓰기 그렇지만… 미친놈입니다.”

최치우는 임동혁을 떠올리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미친놈이라는 표현을 제외하고 그를 설명하긴 어렵다.

그러고 보면 연구 생명을 걸고 최치우와 한 배를 탄 김도현도 정상은 아니었다.

김도현, 임동혁, 리키, 그리고 최치우까지.

각자 정도와 방향은 달라도 비정상인 인간들이 모여 뭔가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아직 이들 모두가 팀(team)이 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디로 튈지 모르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보유한 조합인 것은 분명했다.

최치우는 쟁쟁한 인물들의 중심에서 길을 개척해 가고 있었다.

“어쨌든 임 본부장이 투자를 결정하면 일은 정말 빨리 진행될 수 있을 거예요.”

“정부 쪽 협상은 교수님께서 힘을 써주십시오.”

“그거야 당연히 내가 해결해야지요. 걱정 말아요.”

독도에 시추 기계를 세우기 위해서는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일본과의 외교적 마찰을 감수해야 하기에 정부의 부담도 만만찮을 것이다.

하지만 김도현은 청와대의 요직과 장관들에게 자문을 해주는 국제적인 저명인사이다.

정치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폴리페서는 아니지만, 교수로서 그의 전문성과 영향력은 폭넓은 인정을 받고 있었다.

임동혁의 한영그룹도 개발 사업을 성사시키기 위해 다른 루트로 로비에 나설 것이다.

양 방향 로비와 민간 자금, 핵심 기술 등 어느 하나 빠지는 게 없다.

독도에 시추 기계를 세운다는 것, 수많은 사람이 꿈꿨지만 감히 시도조차 못한 일이다.

그러나 최치우는 내년 봄이면 충분히 시추 기계를 세워놓고 우리의 영해에서 미래 자원을 채취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믿음은 열정을 낳고 열정은 행동으로 진화했다.

그 결과, 꿈만 같이 멀게 느껴지던 일이 어느새 눈앞의 현실로 다가와 있었다.

독도의 메탄 하이드레이트만이 아니다.

도쿄대 지구자원학과의 자료를 통해 내년, 내후년, 그 이후 먼 미래까지 목표로 삼을 수 있는 새로운 도전 과제들도 찾게 됐다.

“브라질의 광산, 인도 갠지스강의 미확인 미생물, 그리고 백두산 천지에 있다는 괴생물체 등등, 최소한의 근거를 확보한 자료만 리스트에 포함시켰는데도 열 개를 넘겼군요.”

“도쿄대에서는 이만한 자료를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은 이유가 뭘까요? 엄청난 화제가 됐을 테고 투자도 많이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합리적인 질문이었다.

최치우는 도쿄대의 자료가 보물지도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도현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현실적인 부분을 설명해 줬다.

“학계는 보수적이고 특히 일본은 그런 풍토가 더욱 강해요. 나름의 근거야 있지만… 이런 가설을 공식 발표했다간 후폭풍을 감당하기 힘들었을 거예요. 만약 투자를 받아서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최소한의 성과도 못 올리면 도쿄대 지구자원학과의 신망이 땅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만한 모험을 강행하기 힘드니 기밀 자료로 보관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네요. 나와 치우 군에게는 이 리스트의 가치가 엄청나게 느껴지지만 야마시타 교수에게는 계륵 같은 존재 아니었을까요.”

계륵(鷄肋).

버리기는 아깝고 취하기는 애매한 것을 뜻하는 말이다.

삼국지의 조조에게 있어 유비가 자리 잡은 촉한이 계륵이었듯 야마시타 교수에게는 100% 검증되지 않은 자료들이 계륵이었다.

그러나 최치우에게는 아니었다.

그는 야마시타 교수의 컴퓨터에서 자료들을 봤을 때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 온 기분을 느꼈다.

지금도 변함이 없다.

특히 브라질의 광물은 아무리 봐도 미스릴이 맞는 것 같았다.

다른 차원에서의 경험과 지식이 현생의 지구에서 미래 에너지를 찾는 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치우 군, 임 본부장에게는 어디까지 이야기할 계획인가요?”

“우선은 독도의 메탄 하이드레이트 시추 기술만 보여줄 생각입니다. 그와 언제까지 함께하게 될지 아직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역시 치우 군은 학생 같지 않아요. 매번 놀라지만 또 놀라게 되네요.”

김도현은 최치우의 대답을 듣고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의 스무 살 청년이라면 30억이라는 거금을 선뜻 내준 임동혁에게 고마움을 느낄 것이다.

그러다 자발적으로 간이고 쓸개고 다 내주려 들지도 모른다.

그런데 최치우는 달랐다.

그는 철저하게 자기 사람과 아직 100% 믿을 수 없는 사람을 구분했다.

계산적인 모습을 절대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경험과 연륜이 쌓인 능구렁이처럼 냉정하게 상황과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몇 번의 생을 거친 최치우에겐 당연한 일이지만, 그를 스무 살 신입생으로 아는 김도현은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긴, 내가 판단할 수 있는 그릇이 아니란 걸 이미 인정해 놓고 무슨…….’

김도현 교수는 헤아리기 힘든 최치우의 눈동자를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복잡하게 생각할 거였다면 도쿄대를 해킹하는 무지막지한 일에 뛰어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이미 최치우라는 항로를 알 수 없는 배에 승선했다.

바람을 타고 풍랑을 가르며 앞으로 나가기만 하면 된다.

며칠 동안의 밤샘 작업을 마친 최치우와 김도현은 피로를 수습하며 기분 좋게 웃었다.

뒤풀이로 공대 건물의 자판기 커피라도 나눠 마셔야 할 것 같았다.

***

임동혁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전처럼 싱글 몰트 위스키를 한 손에 들고 최치우를 바라봤다.

곧이어 임동혁이 미친놈처럼 웃기 시작했다.

“하하, 하하하하! 하하하하하! 이게 진짜 사실이란 말이지?”

그는 자기 자신에게 혼잣말을 하며 한참 동안 광소(狂笑)를 터트렸다.

이윽고 스스로를 진정시킨 그가 다시 최치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최치우 씨, 지금 내가 준 30억을 모조리 도쿄대에 미끼로 쓰고… 그 대신 지구자원학과에서 핵심 기술을 빼왔다고 말한 거 맞습니까?”

“본부장님이 들은 그대로입니다.”

“이런 국제적인 범죄에 명성이 하늘을 찌르는 김도현 교수도 참여했고?”

“굳이 따지자면 범죄는 나 혼자 저지른 셈입니다.”

최치우는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어차피 제대로 미친놈인 임동혁이 도쿄대의 자료를 빼앗아온 걸 문제 삼을 리 없다.

그래도 김도현 교수는 직접 가담하지 않았음을 명확히 했다.

만의 하나라도 일이 꼬이면 오롯이 책임을 지기 위해서이다.

그런 모습이 의외인 듯 임동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통은 어떻게든 책임을 나누려 하는데… 특이합니다. 어쨌거나 해저에 묻힌 메탄 하이드레이트를 시추할 수 있는 기술은 김도현 교수가 보증한다 이 말이군요.”

“실물 채취에 성공한 적 있는 도쿄대의 기술입니다. 물론 이걸 무작정 카피하는 건 아닙니다만.”

“적당히 우리 상황에 맞게 참고하고 응용하면 독도에서 메탄 하이드레이트를 채취하는 것, 충분히 가능하겠습니다.”

확실히 임동혁은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갔다.

최치우가 1을 말하면 알아서 10을 판단하고 있었다.

재계에는 개차반에 망나니로 소문이 났지만, 실은 만만치 않은 잠재력을 숨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거 정말… 덕분에 피가 뜨거워집니다.”

그는 온몸에서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 듯 손끝을 부르르 떨었다.

오죽 인생이 심심하면 억대의 돈을 쓰며 파이트 클럽의 스폰서 노릇을 하겠는가.

태어날 때부터 모든 걸 가진 재벌 2세 임동혁은 드디어 흥미를 가질 일을 만났다.

“한국에서 싸움을 제일 잘하는 서울대 공대생이 도쿄대에서 기술을 훔쳐 왔고, 세계 최고로 꼽히는 교수가 보증을 선다. 이거 완전 영화 아닙니까?”

“영화가 아닌 실화입니다.”

최치우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임동혁을 응시했다.

그는 장난을 치기 위해 시간을 낸 게 아니었다.

“내기에서는 내가 이겼으니 30억은 잘 쓴 걸로 치겠습니다.”

“아아, 그래. 우리 내기를 했죠? 어차피 기술이라고 보여줘도 나는 맞는지 틀린지 알 방법도 없습니다. 그러나 최치우 씨가, 그리고 김도현 교수가 거짓말을 하진 않을 테니.”

임동혁은 30억이라는 거금이 걸렸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최치우의 말을 믿었다.

이어서 꺼낸 말은 더 스케일이 컸다.

“그 기술로 독도에 시추 기계를 박는 데는 얼마가 듭니까?”

“일단 착수에 수천억 원이 들어갑니다. 그다음부터는 개발 상황에 따라 얼마가 더 들어갈지 모르죠.”

“골 때리는 사업이군요. 그랬다가 시추를 못하면 투자금은 다 날리는 거고?”

“기술과 노하우가 남겠지만 빈털이되는 거야 어쩔 수 없겠죠.”

최치우는 남의 일 말하듯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둘 다 수천억 대 이상의 대규모 개발 사업을 언급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아니었다.

“그래서 최치우 씨는 이제 뭘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임동혁 본부장님의 투자를 받을 생각입니다만.”

“내 투자를?”

“30억 쓰신 김에 조금 더 쓰시죠. 독도의 천연자원을 개발한 영웅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기를.”

최치우는 투자를 받으려는 사람이 아니라 커다란 호의를 베푸는 사람 같았다.

독도에서 시추에 성공하면 향후 수십 년간 막대한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

게다가 참여한 기업의 이미지는 말도 못하게 좋아질 것이다.

뻔한 광고나 홍보 캠페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임동혁은 독한 위스키를 단숨에 털어 마시고 물었다.

“최치우 씨, 내가 독자적으로 이 프로젝트를 추진하려면 상속권을 걸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우리 영감이 아주 꼬장꼬장한 양반이라서 말입니다.”

“한영그룹의 회장님을 말하는 것이군요.”

“반대로 내가 한 방 제대로 터트리면 영감도 조금 일찍 상속을 할지 모르고. 어쨌거나 운명을 걸어야 한다는 말씀.”

“부담스러우면 투자하지 않아도 됩니다. 핵심 기술이 있다는 게 알려지면 사람들이 줄을 서겠죠.”

“아아, 무슨 그런 섭섭한 말을. 대박이 날지 꽝일지 모르지만, 손에 들어온 복권을 긁지도 않으면 임동혁이 아니지.”

“결정하신 겁니까?”

임동혁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기업 후계자가 자신의 상속권을 걸고 덤벼야 하는 프로젝트이다.

그런 것치고는 결정이 너무 빠른 감이 있었다.

하지만 최치우가 임동혁을 마음에 들어 하는 건 이런 과감함 때문이었다.

“긁어봅시다, 이 복권.”

“본부장님, 운이 아주 좋으시군요.”

“나 같은 호구를 잡은 최치우 씨가 운이 좋은 게 아닙니까?”

“둘 다 좋은 걸로 하죠, 그럼.”

한영그룹의 후계자로부터 민자 투자를 약속 받은 최치우가 미소를 지었다.

시작이 반이라고 했는데 이미 팔부 능선에 오른 기분이 들었다.

그는 이미 독도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최치우는 지구라는,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가장 넓고 복잡한 차원을 무대 삼아 종횡무진 활약할 것 같았다.

무한의 환생으로 인해 형벌이라 생각하던 삶이 점점 즐거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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