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
이시환에게 주어진 미션은 딱 하나였다.
끝없이 질문을 해라.
무의미한 것도 좋고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것도 좋으니 질문을 계속하라는 것이다.
김도현 교수로부터 지시를 받은 이시환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 날 오전 세미나는 점심시간에 맞춰서 끝날 예정이다.
그런데 김도현 교수는 다짜고짜 질문 폭탄을 던져서 점심시간 너머까지 세미나가 안 끝나게 만들라고 했다.
당최 이유를 짐작할 수 없는 임무였다.
그러나 이시환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이게 이시환이 최대 장점이었다.
그는 자신이 믿는 사람이 지시를 내리거나 부탁을 하면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생각이 짧은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유쾌하고 쾌활한 성격을 타고난 사람들이 그렇듯 사안을 단순하게 판단할 줄 아는 것이다.
이시환의 입장에서 김도현 교수는 좋은 사람, 무조건 믿고 따라도 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내린 지시라면 뭔지는 몰라도 일단 하고 본다.
이유는 나중에라도 알게 될 테니 조급해할 필요는 없었다.
최치우는 이시환이 이런 사고방식의 소유자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의 성향이 마음에 들었기에 빨리 친해지는 게 가능했다.
독도에서 이시환의 생명을 구해주지 않았더라도 둘은 금방 가까워졌을 것이다.
“남미의 광산은 아직 개발은 물론이고 탐사도 제대로 안 된 곳이 많습니다. 당장 활용 가능한 광물 외에도 현대 과학으로 측정이 불가능한 자원도 많이 묻혀 있다고 하는데, 이에 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시환이 손을 번쩍 들고 세 번째 질문을 던졌다.
그는 맡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시곗바늘은 12시 정각에 거의 도달했다.
곧 점심시간이지만 이시환 탓에 질문 시간이 길어지는 중이다.
김도현 교수의 지시 사항을 모르는 F.E의 대학원생 멤버들은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학부생 동생이 민폐를 끼친다고 여긴 것이다.
그들은 김도현 교수가 나서서 이시환을 만류해 주길 바랐다.
하지만 아무리 눈치를 봐도 김도현 교수는 느긋하게 앉아 있을 따름이다.
“에… 라틴 아메리카노…….”
질문을 받은 지구자원학과 교수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시환이 쏟아내는 질문은 하나같이 짧게 답변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학부생이나 대학원생이 아니라 교수가 직접 나서서 길게 설명을 해야만 하는 주제였다.
오전 세미나를 주관하던 교수가 수석 교수인 야마시타 히로시의 눈치를 봤다.
야마시타 교수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이 아무리 많이 쏟아져도 다 대답을 해주라는 뜻이다.
도쿄대 입장에서 서울대 F.E는 무려 30억 원의 연구비를 지원해 주는 소중한 고객이다.
학술 교류의 파트너지만, 실상을 따지고 들어가면 공돈을 갖다 바치러 온 사람들이다.
당연히 특별대우를 해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일본인들은 원래 남 앞에서 싫은 내색을 잘 하지 못한다.
만약 미국 대학과의 세미나에서 누군가 질문을 거듭하며 시간을 넘기면 교수가 적당히 끊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일본 특유의 속성 때문에 이시환의 시간 끌기는 잘 먹히고 있었다.
세미나실 분위기는 점점 루즈해졌지만, 이것도 최치우가 바라던 바다.
스으윽-
구석 자리에 앉아 있던 최치우가 물 흐르듯 자연스레 일어났다.
아무도 그에게 신경을 기울이지 않았다.
어제부터 존재감을 죽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온 결과였다.
그는 화장실을 가는 듯 세미나실에서 조용히 빠져나왔다.
지구자원학과의 주요 인력과 야마시타 교수는 계속 세미나실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시환의 질문이 끝나도 시간이 늦어진 만큼 곧장 F.E와 함께 학교 식당으로 갈 것이다.
야마시타 교수의 연구실은 텅 비어 있을 수도 있다.
점심시간에 연구실을 지키는 것은 끽해야 조교 몇 명이 전부일 것이다.
물론 보안 장치가 되어 있겠지만, 무엇도 최치우를 막을 수는 없었다.
‘시환이 형, 그리고 리키가 잘해주겠지.’
최치우는 둘의 얼굴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이시환과 리키 김.
하루 사이에 절친이 된 듯한 두 사람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사고를 쳐야 한다.
이시환이 세미나를 질질 끄는 역할이라면, 리키는 어마어마한 물리력을 이용해 도쿄대를 난장판으로 만들 것이다.
리키는 도쿄대 학생들로 북적거리는 식당에서 불특정 다수에게 시비를 걸 계획이다.
이상한 이유로 소란을 피우고, 학교 경비원들이 몰려들게 만든 다음 최대한 오래 제압당하지 않고 버틴다.
이게 리키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최치우가 등장하기 전까지 한국 파이트 클럽의 최강자였으며 UFC 챔피언을 때려눕힌 리키에게 딱 맞는 미션이었다.
경비원이 최소 열 명 이상은 모여야 겨우 리키를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를 다치게 할 필요는 없었다.
리키도 이시환처럼 시간을 끄는 게 주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경비원에게 제압당한 다음에도 어렵지 않게 상황을 무마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데이터를 빼낸 걸 들키지만 않으면 도쿄대 지구자원학과가 나서서 편의를 봐줄 것이다.
30억을 아낌없이 쓴, 그리고 앞으로도 얼마를 더 쓸지 모르는 고객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말이다.
‘저기다.’
최치우는 세미나실 건물 꼭대기 층에 위치한 수석 교수 연구실을 찾아냈다.
긴 복도 끝에 굳게 닫힌 문이 보였다.
다행인 건 같은 층 다른 연구실들의 문도 닫혀 있다는 사실이다.
‘다들 점심 먹으러 간 모양이군. 사람들의 시선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만… CCTV를 해결해야지.’
요즘은 사람의 눈보다 CCTV가 더 무섭다.
복도 천장에는 작은 CCTV가 네 개나 설치돼 있었다.
최치우가 꼭대기 층으로 올라오는 과정도 CCTV에 다 찍혔을 것이다.
‘우선 급한 불, 아니, 급한 CCTV부터 끄고, 데이터 카피하는 김에 전산실까지 뚫어야겠다.’
그는 웬만한 해커는 엄두도 못 낼 어마어마한 일을 식은 죽 먹기처럼 생각했다.
지구자원학과의 기밀 데이터를 유출하면서 전산실까지 해킹해 CCTV를 지워 버리겠다는 뜻이다.
아무리 날고 기는 로봇 엔지니어였지만, 그렇게 쉽게 해킹을 할 수 있을까.
최치우는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김도현 교수가 보는 앞에서 서울대 전산실을 3분 만에 털어버리며 능력을 입증했다.
세간의 상식으로 최치우를 재단하면 안 된다.
“일루전(illusion).”
6서클 마법이 캐스팅됐다.
동해에서 깨달음을 얻으며 단번에 경지를 높인 덕을 톡톡히 볼 것 같았다.
샤라라라라-
마나가 출렁이며 복도를 휘감기 시작했다.
일루전은 공간을 지배하며 환상을 일으키는 마법이다.
짧은 순간이라도 일정 공간의 시각적 이미지를 완전히 컨트롤할 수 있다.
지속 시간과 공간의 범위에 따라 마나 소모량이 달라진다.
CCTV 넉 대가 커버하는 복도의 이미를 완전히 바꾸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5초!’
최치우는 5초의 시간을 벌기 위해 6서클 일루전을 펼친 것이다.
중간에 다른 방에서 누가 튀어나오지 않는다면 5초 만에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마음 같아선 기력을 날려 CCTV를 부수고 싶지만 그러면 흔적이 남는다.
그렇기에 어려운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타악!
일루전이 복도의 이미지를 왜곡하자마자 최치우는 몸을 날렸다.
마법이 발현되는 5초 동안 CCTV에는 아무것도 찍히지 않을 것이다.
그저 텅 빈 복도의 이미지만 남을 뿐이다.
휘이이익!
땅을 박찬 최치우의 몸이 화살처럼 앞으로 쏘아졌다.
궁신탄영(弓身彈影)이라는 경공 절기가 공간을 도약하게 만들었다.
튀어져 나간 최치우의 몸은 불과 2초 만에 수석 교수 연구실의 문에 다다랐다.
남은 시간은 3초.
지금처럼 격렬하게 움직이며 일루전을 오래 지속시키는 건 무리다.
3초가 지나면 마법이 걷히고 CCTV에 최치우가 찍히게 될 터였다.
딸칵-
연구실 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었다.
다행히 현관문에는 특별한 보안 설비가 없었다.
도쿄대 안방이기에 보안에 크게 신경 쓰지 않은 것일 수도 있었다.
‘문 고장쯤은 문제없겠지.’
최치우는 판단을 마치고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우드득!
문고리의 잠금장치가 부서지는 소리가 울렸다.
이제 막 4초가 지났다.
최치우는 헐거워진 문고리를 돌리고 야마시타 수석 교수의 연구실 문을 열었다.
끼이익- 타악!
‘5초, 세이프.’
연구실에 들어온 최치우는 미소를 지었다.
복도에 펼쳐둔 일루전 마법의 효과는 사라졌을 것이다.
“나, 난데스까?”
진입해 성공했으니 제압을 할 차례이다.
문을 잠가놓은 연구실 안에 조교 한 명이 남아 있었다.
다들 점심을 먹으러 갔는데 혼자 남아 다른 일을 하는 중인 것 같았다.
“스미마셍.”
최치우는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며 몸을 날렸다.
조교가 증언을 하게 되면 일이 복잡해진다.
그러나 일단 연구실에 진입한 이상 이것저것 가릴 겨를이 없었다.
푸우욱!
그는 전광석화처럼 달려들어 조교의 혈도를 짚었다.
점심도 거르고 연구실을 지키던 조교는 입을 한껏 벌린 채 그대로 기절했다.
마혈(痲穴)을 강하게 눌렀기에 30분 정도는 얌전히 기절해 있을 것이다.
최치우는 그가 깨어난 뒤를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해킹에 성공하면 CCTV 데이터를 다 지울 수 있고, 기밀 자료를 카피한 흔적도 남지 않는다.
유일한 흔적은 부서진 연구실 문고리밖에 없다.
그것만으로 최치우를 몰아붙이긴 힘들다.
조교가 최치우의 침입을 증언해도 헛것을 본 취급을 당하기 쉽다.
석연치 않아 의심스럽더라도 증거가 없는 것이다.
‘저쪽이 야마시타 교수의 집무실이군.’
수석 교수 연구실은 무척 넓었다.
공간을 아껴 쓰는 일본 스타일과는 달랐다.
도쿄대 안에서 야마시타 교수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최치우는 그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집무실에는 야마시타 교수가 사용하는 데스크탑 PC가 설치돼 있었다.
‘바로 시작한다.’
최치우는 야마시타 교수의 의자에 앉아 PC를 켰다.
컴퓨터 전원이 들어오는 시간마저 아깝게 느껴졌다.
대학교 안이니만큼 시설 보안은 허술하지만, 내부 전산망 보안은 간단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지구자원학과의 핵심 기술과 극비 자료는 이중삼중의 시스템으로 보호되고 있을 게 분명했다.
3분 안에 서울대학교 행정실을 해킹한 것과는 레벨이 다른 미션이다.
‘빠르면 10분, 최대 20분이 한계야. 안전하게 빠져나가려면 반드시 20분 안에 끝내야 해.’
최치우는 PC를 만지며 시간을 확인했다.
이시환이 아무리 용을 써도 지금쯤 세미나는 끝났을 것이다.
물 흐르듯 김도현 교수가 야마시타 교수에게 곧바로 점심을 먹자고 제안하고, 학생 식당에선 리키가 난동을 부려 이목을 집중시키는 계획이다.
중간에 한 명이라도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수석 교수 연구실로 오게 하면 안 된다.
‘잘 부탁합니다, 리키!’
영문도 모르고 사고를 쳐야 할 리키가 잘해주길 바랄 따름이다.
곧이어 그는 모니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최치우는 도쿄대의 심장을 빼앗기 위한 마지막 관문에 도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