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번째 환생-30화 (30/243)

# 30

누구에게나 살면서 세 번의 기회가 찾아온다고 한다.

하지만 기회는 모든 상황이 다 갖춰진 상태에서 선물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때로는 위험을 감수하며 올인해야만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우물쭈물하다간 기회를 놓치게 되고, 영영 아쉬워하며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김도현 교수는 최치우라는 기회를 향해 손을 뻗었다.

사실 그는 평탄한 인생을 보장받은 계층이다.

현상유지만 해도 서울대 교수이자 세계적인 학자로 존경받으며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치우라는 아직 검증되지 않은 위험한 원석의 손을 잡은 이유는 하나였다.

바로 꿈 때문이다.

아무리 대단한 학자라도 세월이 지나면 잊힌다.

역사에 족적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은 소수 중에서도 극소수다.

김도현 교수는 자신의 할아버지인 고고학자 김도훈의 발치라도 따라가고 싶어 했다.

분야는 달라도 조부의 이름 앞에 뒤지지 않은 인물이 되고픈 게 평생의 소원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들은 절대 할 수 없는 일을 이뤄내야만 한다.

동해 바다에 빠졌다가 살아 돌아온, 볼 때마다 자신의 할아버지를 떠올리게 만드는 예측 불가능한 신입생 최치우.

그가 무슨 수를 썼는지 한영그룹의 후계자로부터 30억이라는 투자까지 받아왔다.

그런데도 운명의 이끌림을 느끼지 못한다면 승부사가 아닐 것이다.

김도현 교수의 지원 아래 최치우의 계획은 일사천리로 실행됐다.

미래 에너지 탐사대 명의로 도쿄대 지구자원학과에 공문을 보냈고, 곧바로 답신을 받았다.

도쿄대 입장에선 손해 볼 게 없는 조건이었다.

서울대 공대에서 심혈을 기울여 키우고 있는 학내 조직인 F.E가 먼저 학술 교류를 요청한 것이다.

그것도 거액의 연구비를 제시하면서.

도쿄대의 자존심도 살리고 실리도 챙길 수 있는 달콤한 제안이었다.

꿩 먹고 알 먹는 게 가능한데 그들이 왜 망설이겠는가.

30억이란 돈은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다.

특히 요즘처럼 국제 경기 불황으로 R&D 투자가 축소된 상황에서는 더더욱 큰돈이다.

서울대 역시 전향적으로 나섰다.

따지고 보면 학교 측에서 딱히 도울 것도 없었다.

30억이라는 투자금을 자체적으로 해결했기에 밑져야 본전인 장사이다.

학교 자금을 한 푼도 들이지 않고 국제적 학술 교류를 하게 된 것이다.

학술 교류와 세미나 횟수는 국제 대학 평가에서 중요한 지표로 작용한다.

김도현 교수의 계획을 서울대 공대 학과장이 흔쾌히 받아들인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 뒤에는 최치우가 있었다.

이제 겨우 1학년 2학기를 맞이한 스무 살 신입생이 서울대 F.E와 도쿄대 지구자원학과의 학술 교류를 추진하고 성사시킨 주인공이라는 걸 누가 믿을 수 있을까.

진실을 아는 사람은 오직 김도현 교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수면 아래에서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손발을 맞춰갔다.

남몰래 비현실적인 꿈을 키워온 중년의 교수와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지닌 대학 신입생.

언뜻 봐선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콤비가 사고를 쳐도 제대로 칠 것 같았다.

***

타닥- 타다닥!

최치우는 진지한 얼굴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랩탑 컴퓨터를 책상에 올려놓고 집중하는 모습이 마치 컴공과 학생 같았다.

방 안에는 최치우 혼자만 있지 않았다.

김도현 교수도 심각한 얼굴로 최치우를 지켜보는 중이다.

랩탑 모니터 화면에는 알아보기 힘든 프로그래밍 언어가 나열돼 있었다.

보통 사람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해질지 모른다.

하지만 최치우는 능숙하게 프로그래밍 언어를 다루고 있었다.

그는 고3 내내 매일 시간을 내서 구글링을 하며 현대의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공부했다.

바로 지난 환생에서 로봇 엔지니어로 살았던 경험을 살려내기 위해서였다.

과학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분야가 아니다.

화학과 공학이 다르고, 그 안에서도 세부적으로 파고들어 가면 다양성이 끝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전투 로봇 엔지니어였다고 해서 곧바로 지구의 현대 과학에 능통해지는 건 아니다.

1년 하고도 절반이 넘는 시간 동안 최치우는 그 간극을 채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인터넷에 넘치는 프로그래밍 소스와 전문 지식을 흡수해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었다.

난이도 자체만 놓고 보면 로봇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보다 훨씬 쉬웠다.

철 지난 유행어지만 에너지자원공학을 전공하면서 컴공과의 누구보다 뛰어난 해커가 된 것이다.

세계적인 해커들이 대부분 비전공자였다는 걸 생각하면 마냥 신기한 일도 아니었다.

“방금 막 3분이 지나갔어요, 치우 군.”

김도현 교수가 타임 키핑을 해줬다.

최치우는 제한된 시간 안에 방화벽을 뚫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체크 메이트.”

곧이어 최치우가 키보드에서 손을 뗐다.

랩탑 모니터에는 서울대 학생들의 학사 자료가 주르륵 떠올라 있는 상태였다.

김도현 교수는 직접 보고도 믿기 힘든지 안경을 벗었다.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네요. 치우 군 때문에 놀랄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최치우는 3분 안에 서울대학교 행정실을 해킹한 것이다.

간발의 차로 3분을 넘겼지만 미션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정작 해킹을 당한 행정실에서는 학사 자료가 노출됐는지 알지도 못하고 있었다.

단순 해킹은 간단하다.

그러나 해킹을 당한 쪽에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게 만들려면 일이 몇 배는 더 어려워진다.

삐빅!

최치우는 화면을 끄면서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연습 삼아 해킹한 것이기에 굳이 학사 자료를 복사할 필요는 없었다.

“기분이 이상하네요, 교수님.”

“3분보다 몇 초 늦어서 그래요?”

“그게 아니라… 교수님과 함께 학교 사이트를 해킹했다는 게 재밌어서요.”

최치우가 미소를 지었다.

김도현 교수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서울대에서 월급을 받는 교수인데 학생이 해킹하는 걸 지켜보며 독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네요. 서울대 연구실에서 서울대 자료를 해킹하다니…….”

물론 특별한 이유가 있었고, 장차 서울대에 크게 도움이 될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그래도 아이러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만큼 최치우와 김도현이 서로를 신뢰하며 모험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서로를 마주 보며 웃은 둘은 화제를 돌렸다.

“치우 군의 실력은 잘 알겠지만, 도쿄대 지구자원학과의 보안은 훨씬 더 철저하겠지요.”

“그럴 겁니다. 가능한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하고 준비해야죠.”

“시간이 많지는 않아요. 1주일 뒤에 출국이고, 우리나라가 아닌 일본에서는 여러 제약이 따를 거예요.”

“임동혁 본부장과 30억짜리 내기를 했습니다. 상황이 아무리 어려워도 절대 질 수는 없습니다.”

“좋아요. 도쿄에서의 학회를 위해 특별히 부탁할 게 또 있다고 했지요?”

“네, 교수님. 두 사람을 중용해야 합니다. 한 명은 교수님도 잘 아는 우리 멤버이고, 나머지 한 명은 완전히 새로운 인물입니다.”

김도현 교수는 감이 잡히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와 최치우는 어느 정도 이심전심, 뜻이 통하는 사이로 발전하고 있었다.

“우리 멤버라면 과대인 이시환 학생이겠지요?”

“맞습니다. 시환이 형이 학회에서 미래 에너지 탐사대 대표로 발표를 하면서 주의를 끌어야 합니다.”

“시환 학생에게 모든 내막을 말해줄 건가요?”

“아직은 시기상조입니다. 그랬다간 형이 부담을 느낄 거 같아요. 필요한 만큼 적당히 주문하겠습니다.”

“그래요, 그 부분은 치우 군에게 일임하지요. 그럼 나머지 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리키 김이라고 하는 친구입니다. 흑인 혼혈이지만 한국어 의사소통이 원활합니다.”

“그 친구는 왜? 그리고 치우 군과는 어떤 관계이지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비장의 카드입니다. 저와는, 음, 자기 마음대로 저를 사부라고 부르는데 그냥 친구 하기로 했습니다.”

김도현 교수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최치우를 사부라고 부르는 혼혈인의 존재가 색달랐기 때문이다.

어쨌든 최치우는 자석처럼 사람들을 빨아들이며 작은 군단을 갖추기 시작했다.

미래 에너지 탐사대는 사실상 최치우 군단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1주일 뒤, 도쿄에서 재밌는 일들이 연달아 발생할 것 같았다.

***

“와우, 싸부! 나 일본은 퍼스트 타임입니다. 완전 신나! YO-!”

리키가 들뜬 얼굴로 휘파람을 불었다.

최치우 옆에 앉은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찢어진 청바지에 헐렁한 셔츠, 레게 머리를 한 흑인 혼혈은 이목을 집중시킬 수밖에 없다.

심지어 동행하는 미래 에너지 탐사대 멤버들도 리키를 신기해했다.

“아침 비행기라 다들 피곤하니까 조용히 갑시다. 오케이?”

최치우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리키는 살짝 시무룩해졌지만 이내 고개를 좌우로 두리번거리며 공항을 구경했다.

그는 최치우의 생각대로 임동혁과는 다른 스타일의 미친놈이었다.

리키는 파이트 클럽에서 패배한 후 나한극을 배우기 위해 최치우를 다시 찾았고, 그 대가로 뭐든 하겠다고 약속했다.

리키가 싫지 않던 최치우는 삼청동 찻집에서 거래 아닌 거래를 맺었다.

나한극의 초식과 발동 원리를 가르쳐 주는 것쯤은 어렵지 않았다.

어차피 내공 운용과 금강나한권 전체에 대한 깨달음이 없으면 살상력을 내긴 힘들다.

물론 나한극 초식 하나를 전수받는 것만으로도 리키의 싸움 실력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될 것이다.

이후 리키는 최치우를 사부라 부르며 자신만의 방식대로 존중을 표했다.

얼마 전까지 그는 한국 최고의 파이트 클럽 선수였기에 돈은 충분한 것 같았다.

그렇기에 일본에 가서 일을 도와달라는 최치우의 부탁도 기꺼이 받아들였다.

“둘이 너무 친한 거 아냐? 서운하게시리.”

그때 이시환이 끼어들었다.

그는 리키라는 낯선 인물이 최치우 옆에 있는 것을 경계했다.

김도현 교수는 리키를 최치우의 친구이자 영어 통역 담당이라고 소개했다.

하지만 정상적인 통역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게다가 미래 에너지 탐사대 멤버 대부분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기에 통역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교수님의 말이니 다들 그냥 받아들였지만, 이상한 구석이 많았다.

“시환이 형, 형이 리키랑 좀 놀아줘. 이렇게 말이 많은 줄은 몰랐어.”

“뭐? 내가 왜?”

“두 사람, 은근히 잘 어울릴 거 같은데.”

“너, 생명의 은인이라고 그렇게 막말하는 거 아니다.”

“그러지 말고 이야기라도 해봐. 어차피 일본에서 같이 움직여야 하는데 친해지면 좋잖아. 리키, 여긴 나랑 같이 학교 다니는 시환이 형.”

최치우는 이시환을 반 강제로 리키 옆에 앉혀놓았다.

그리고는 김도현 교수에게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이런저런 의논을 했다.

이시환은 별수 없이 리키의 수다를 받아냈다.

그런데 몇 마디 주고받다 보니 최치우의 말대로 코드가 맞는 느낌이 들었다.

최치우는 김도현 교수 옆에서 둘의 모습을 지켜보고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한편, 도쿄로 같이 가는 대학원생 멤버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랩탑을 꺼내 자료를 체크하고 있었다.

진지하게 학술 교류 준비에 임하는 것이다.

도쿄대라는 국제적 명문과 교류를 하는 건 대학원생들에게 큰 기회이기도 하다.

최치우의 손끝에서 시작된 풍경이 공항 라운지를 적시고 있었다.

판을 깔았으니 쥐고 흔들 일만 남았다.

곧 도쿄로 출발할 비행기처럼 최치우도 높이 날아오를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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