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번째 환생-29화 (29/243)

# 29

<찬스 메이커>

2학기 개강을 앞두고 최치우는 어머니에게 평생 잊지 못할 선물을 드렸다.

그는 일을 마치고 돌아온 어머니께 통장 여덟 개를 내밀었다.

각각 다른 이름으로 5천만 원이 들어 있는 통장이다.

“치우야, 이, 이게 다 뭐니?”

“전에 통장을 보여 드렸을 때 어머니께서 뭐든 믿고 맡겨주신다고 하셔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자세한 말씀은 드릴 수 없지만 편하게 써도 되는 돈이에요. 이제 어머니만의 가게를 하셨으면 좋겠어요.”

“4억? 이 돈을 어떻게…….”

어머니는 어느 순간 각성한 듯 변한 아들이 더 이상 평범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1년 만에 성적을 끌어올려 서울대에 들어가고, 웹툰을 만들어 돈을 척척 버는 걸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갑자기 4억이라는 큰돈을 가져올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김밥을 말아서 버는 돈이 한 달에 200만 원 남짓이다.

한 푼도 안 쓰고 20년을 꼬박 모아야 4억을 손에 쥘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하루의 유희로 쓸 수 있는 돈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인생을 걸어도 벌기 힘든 돈이다.

여덟 개의 통장을 받아 든 어머니는 여전히 비현실적인 기분을 느끼는 것 같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최치우는 그런 어머니를 바라보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어머니. 앞으로 이것보다 훨씬 더 놀라운 일들이 많이 생길 겁니다. 이 돈은 그동안 남의 가게에서 고생하신 세월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받아주세요.”

“치우야, 나는 우리 아들을 무조건 믿는단다. 그래도 조금은 불안하고 걱정도 되는구나.”

“항상 자랑스러운 아들이 될 거라는 약속 지키겠습니다. 걱정 대신 그냥 기뻐해 주세요.”

“정말… 정말로 이걸로 가게를 열어도 되겠니? 네가 긴히 쓰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구나.”

“전 개강하면 중요한 일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것 같습니다. 어머니께서 원하시는 곳에 마음껏 쓰는 게 제 소원입니다.”

어머니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쁜 감정이 실린 한숨은 아니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벅찬 감동을 주체하지 못해 나온 한숨이었다.

“우리 아들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뭐 하나 제대로 못 해줬는데 받기만 해서 어떡하니.”

“그런 말씀 마세요. 매일 아침, 저녁 차려주시고 제가 엇나갈 때도 묵묵히 지켜봐 주셨잖아요. 그리고 저를 무조건 믿어주신 거, 그거면 충분합니다.”

최치우의 목소리도 살짝 떨리고 있었다.

링스 월드를 포함하면 무려 여덟 개 차원에서 다른 인생을 살아봤다.

그렇지만 타인으로부터 절대적 신뢰를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어머니를 만나고 난 후 그는 사람이 사람에게 조건 없이 마음을 줄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에 비하면 4억은 아주 약소한 보답일 뿐이다.

“우리 아들 보기에 부끄럽지 않도록 더 열심히 살아야겠구나.”

“이미 저한테 어머니는 최고예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최치우와 어머니가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의 눈가에 촉촉한 물기가 맺힌 것 같다.

긴 여름이 끝나간다.

가을이 되면 최치우는 임동혁과의 30억짜리 내기에 온몸을 던질 것이다.

그 전에 가장 소중한 사람을 먼저 챙길 수 있어 다행스러웠다.

***

“충성! 생명의 은인 최치우 님 아니십니까!”

캠퍼스에 들어서자 3학년 이시환이 장난스럽게 인사를 해왔다.

군대를 다녀온 이시환은 한참 선배이자 학생들의 신망을 받는 과대이다.

그런데 아무리 장난이라지만 최치우에게 거수경례를 하며 고마움을 표했다.

최치우는 독도에서 그의 목숨을 구해줬고, 이시환은 평생 은혜를 갚겠다고 사나이의 약속을 했다.

“뭐야, 형.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잖아.”

최치우는 그 사건 이후 이시환에게 말을 놓았다.

이시환이 먼저 친형제처럼 지내자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과의 다른 학생들이 보기엔 적응되지 않는 광경이다.

“둘이 언제 이렇게 친해졌냐? 미래 에너지 탐사대라고 막 끈끈해지고 그런 거야?”

“큰 사고가 날 뻔했는데 치우가 저를 구해줬지 말입니다. 그래서 진짜 형, 동생처럼 지내기로 했습니다, 선배님.”

이시환이 살아 있는 화석인 고학번 선배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설명을 들은 선배들은 최치우를 다시 봤다.

“오, 그래? 1학년 에이스라고 지만 알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네.”

“치우, 그런 애 아닙니다. 완전 이타적이고 어린데도 리더십이 장난 아니고… 아무튼 그렇습니다.”

“이시환 너, 과대라는 놈이 완전 신입생 빠돌이 다 됐다?”

“생명의 은인인데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이시환이 최치우 칭찬을 연발하다 넉살 좋게 웃었다.

평소 인망이 두터웠기에 그의 말은 에너지자원공학과에 큰 영향을 끼친다.

최치우는 2학기 개강을 하자마자 고학번 선배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줬다.

이시환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기에 나타나는 부수적인 효과였다.

“시환이 형, 선배님들, 김도현 교수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그래그래, 이따 강의실에서 보자!”

최치우는 적당히 재회의 자리를 정리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는 사흘 전 전화를 걸어 김도현 교수와의 약속을 잡았다.

연구실에 도착하자 조교가 최치우를 반겨줬다.

대학원생인 조교도 같은 F.E 멤버이기에 최치우의 활약을 두 눈으로 지켜봤다.

“치우야, 안 그래도 교수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다.”

“네, 안으로 들어갈게요.”

이제 거의 한식구가 되다 보니 복잡한 절차가 필요 없었다.

최치우는 연구실 내부에 있는 김도현 교수의 개인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똑똑.

“교수님, 최치우입니다.”

“들어와요!”

김도현 교수의 목소리 톤이 평상시보다 높았다.

독도 탐사 이후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었기에 최치우를 꽤나 반가워하는 것 같았다.

“방학은 잘 보내고 온 거겠죠?”

“덕분에 보람차게 보냈습니다.”

“독도를 다녀온 후 계속 치우 군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어요. 내가 어쩌면 괜한 말을 한 건 아닐까 싶기도 했고요.”

김도현 교수는 최치우가 동해에 빠지는 사건이 일어난 다음 둘이서 나눈 대화를 언급했다.

그는 최치우를 자신의 조부인 고고학자 김도훈과 비교하며 평범한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더불어 세계의 신비를 밝혀주는 존재가 되길 바란다는 기대감도 숨기지 않았다.

공대 교수가 초현실적인 믿음을 가졌다는 걸 알렸으니 김도현 교수도 모험을 한 셈이다.

만약 최치우가 말이라도 흘리고 다니면 그의 명예는 실추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최치우는 김도현 교수와의 대화를 누구에게도 전하지 않았다.

“교수님, 그때 해주신 말씀, 저도 깊이 생각해 봤습니다.”

“그랬나요?”

김도현 교수의 동공이 커졌다.

그는 먼저 기대를 드러내며 손을 내밀었다.

이제 최치우가 답을 할 차례였다.

“제가 평범한 사람인지 아닌지보다 중요한 건 어떤 꿈을 꾸고 무슨 일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도 평범하게 사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원대한 꿈에 인생을 던져 기적을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맞아요, 치우 군. 어떤 사람인가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이겠지요.”

“그래서 교수님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1년 안에 독도에 묻힌 메탄 하이드레이트의 실물 채취를 성공시키려 합니다.”

“……!”

김도현 교수는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다.

놀란 표정으로 안경을 올리며 최치우를 쳐다볼 뿐이다.

다른 학생이 이런 말을 했다면 귀담아듣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김도현 교수는 최치우가 가진 잠재력을 누구보다 먼저 감지한 장본인이다.

그는 이해하지 못할 설렘이 심장을 두드리는 걸 느끼며 잠자코 앉아 있었다.

“한영그룹의 임동혁 본부장으로부터 30억 투자를 받았습니다.”

“한영그룹에서 30억을요? 그것도 치우 군에게?”

“조건은 하나입니다. 겨울이 끝나기 전에 해저의 메탄 하이드레이트를 채취할 수 있는 핵심 기술을 가져오는 것.”

“하지만 이제까지 해저에 묻힌 하이드레이트를 채취하는 데 성공한 국가는 미국과 일본밖에 없……!”

김도현 교수는 뭔가 느낌이 온 듯 말을 멈췄다.

그는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언제나 설마가 사람 잡는 법이다.

최치우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30억은 모두 미끼로 쓸 겁니다. 교류 학회와 연구비 지원을 명목으로 도쿄대 지구자원학과에 30억을 다 퍼주겠다고 하면 그쪽에서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지요. 요즘처럼 연구비 투자가 마른 현실에서… 게다가 우리 서울대가 고개를 낮추고 들어가면 도쿄대의 자존심도 세워주는 격이 되겠네요.”

“도쿄대 지구자원학과는 해저 시추 핵심 기술뿐 아니라 다양한 기밀 자료를 보유하고 있는 걸로 유명합니다. 그들의 보물 창고를 털겠습니다.”

“하지만 그건…….”

“일본입니다, 교수님. 우리는 그들에게 무슨 짓을 해도 괜찮습니다. 그들이 진심으로 사과하기 전까지는.”

“설령 그렇다고 해도 방법이 있나요? 무슨 수로 도쿄대 지구자원학과의 기밀 자료를 가져올 수 있겠어요?”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파도가 몰아치는 동해 바다에서 살아 돌아오는 것보단 쉬울 겁니다.”

최치우는 간접적으로 자신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음을 인정했다.

유일하게 조금이라도 눈치를 챈 김도현 교수를 통하지 않고서는 일을 진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차피 김도현 교수가 먼저 마음을 열며 다가왔기에 큰 부담이 없었다.

“이건 정말… 역대급 프로젝트가 되겠네요.”

“함께해 주십시오, 교수님.”

“운명이란 게 이래서 무서운 건가 봐요. 미국에서부터 고민하며 미래 에너지 탐사대를 만들었는데, 치우 군을 위해 한발 앞서 준비한 셈이 되었군요.”

최치우는 김도현 교수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줬다.

재촉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답은 김도현 교수의 마음 안에 있다.

“내가 말했죠? 평생의 꿈이 있다면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미스터리를 발견해 인류를 구하는 거라고. 그 역할을 치우 군이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들었다고요. 물론 이렇게 빨리 응답을 받을 줄은 몰랐지만.”

“도와주시는 겁니까?”

“내겐 다른 선택지가 없네요. 이 제안을 거절하고 평생을 후회하며 살아갈 자신이 없어요.”

“교수님, 감사합니다!”

천군만마를 얻어도 이보다 기쁘진 않을 것이다.

최치우는 김도현 교수를 얻은 것으로 팔부 능선을 넘었다고 생각했다.

“섣부른 예측인지 모르지만 치우 군은 정말 우리 할아버지를 능가하는 사람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아직은 비교되는 것조차 부담스럽습니다.”

최치우는 겸손하게 말했지만, 언젠가는 고고학자 김도훈의 아성을 넘어서고 싶었다.

그가 과거의 유물을 발견했다면 자신은 미래의 자원을 발견할 것이다.

스무 살 최치우는 벌써 전설로 남은 거인과 보이지 않는 경쟁을 시작했다.

“공식적으로 치우 군은 미래 에너지 탐사대의 막내지만, 나와 있을 때는 뭐든 편하게 말하며 주도적으로 프로젝트를 끌어가도록 해요. 우선 학과장님을 통해 도쿄대 지구자원학과와 접촉하는 게 순서겠지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겨울이 끝나기 전에 해결하려면 한시가 급하네요. 알겠어요. 오늘 학과장님을 뵙도록 하지요.”

김도현 교수는 어딘지 모르게 신이 나 보였다.

그에게도 두 번 다시 없을 기회였다.

교수이자 학자로서의 생명을 걸어야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평생 꿈만 꾸고 살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저도 모르게 소년처럼 들뜨는 것이다.

최치우는 김도현 교수와 실무적인 대화를 나누며 계획을 다듬었다.

기회는 잡는 것이 아니다.

기다리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자기 손으로 기회를 만드는 사람이 앞서갈 수밖에 없다.

최치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판을 짜며 기회를 만들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함께하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기회를 나눠주는 것이다.

동해의 파도보다 거칠게 최치우가 나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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