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
오늘 하루 최치우는 두 사람을 만나기로 했다.
둘 다 며칠 전 올림픽 공원 체조 경기장에서 엮인 사람들이다.
한 명은 최치우가 먼저 만나기를 원했고, 또 다른 한 명은 그쪽에서 최치우를 찾았다.
“프레지던트 스위트룸으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최치우는 호텔 로비에서 질문했다.
그는 우선 먼저 만나고자 한 사람, 한영그룹의 후계자를 찾아왔다.
파이트 클럽 운영자를 통해 전해 받은 약속 장소는 다름 아닌 특급 호텔이었다.
광화문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새로 문을 연 시즌스호텔은 로비부터 때깔이 달랐다.
“죄송하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최치우입니다.”
“신분증 부탁드리겠습니다.”
호텔 직원은 깐깐하게 신분 확인을 했다.
프레지던트 스위트룸의 숙박료는 1박에 2천만 원 수준이다.
각국의 정상이나 기업 오너, 국제적인 스타들이 머무는 곳이기에 아무나 올려 보낼 수 없었다.
미리 컨펌을 받은 사람만 출입이 가능했다.
당연히 전용 엘리베이터도 따로 있었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희 직원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안내를 해주는 전담 직원의 복장도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최치우는 직원을 따라 별도로 마련된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띠잉-!
고층으로 올라간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한 발 앞서 내린 직원이 대리석으로 장식된 복도를 가로질렀다.
스위트룸 전용 층이라고 하는데 방문이 몇 개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넓은 공간을 소수의 고객들에게 배정한 것이다.
“여기서 벨을 누르시면 됩니다. 저는 먼저 내려가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직원은 허리를 숙이고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러 갔다.
프라이버시를 중시하는 VVIP 고객에게 불편을 주지 않기 위한 조치였다.
딩동!
혼자 남은 최치우가 벨을 눌렀다.
곧이어 대답 대신 자동으로 문이 열렸다.
철커덕!
최치우는 주저하지 않고 룸 안으로 들어섰다.
그냥 스위트룸도 아닌 프레지던트 스위트룸은 어떻게 꾸며놨을지 궁금했다.
‘다르긴 다르네.’
기다란 복도가 최치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벽면에는 명화가 걸려 있고 자단목과 대리석을 아낌없이 사용했다.
“최강 선수?”
복도 저편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정장을 타이트하게 입은 30대 중후반의 젊은 남자였다.
그가 바로 재계 서열 10위 안에 드는 한영그룹의 후계자 임동혁 본부장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본부장님.”
최치우는 인사를 건네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입구와 연결된 복도를 지나치자 프레지던트 스위트룸이 얼마나 넓은지 알 수 있었다.
그랜드피아노가 놓인 거실에서는 광화문 광장이 내려다보였고, 다섯 개 이상의 방이 더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호화스러운 스위트룸에 감탄할 때가 아니었다.
임동혁 본부장.
예상보다 훨씬 젊고 탄탄한 몸을 지닌 그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나는 처음이 아닙니다. 파이트 클럽에서 최강 선수 덕분에 5억을 배팅했다 날렸으니까. 아주 유쾌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는 존댓말을 쓰며 차분하게 말했지만 왠지 비꼬는 것 같았다.
눈동자에는 이상한 광기가 서려 있었다.
하긴, 파이트 클럽에서 무제한 룰로 싸우는 걸 지켜보며 몇 억을 우습게 쓰는 사람이 정상일 리 없었다.
최치우는 임동혁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자본주의의 정점에 서 있는 남자지만 부모를 잘 만났을 뿐이다.
제국을 몰락시킨 전력이 있는 최치우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본부장님의 기억에 남았다니 다행이군요.”
“아주 강렬했습니다. 그러니 따로 만나자는 제안에도 응한 것이고.”
임동혁은 자신 앞에서 당당한 최치우가 흥미로운 듯했다.
그는 가죽으로 된 소파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앉아서 이야기합시다. 광화문 광장을 내려다보면 왕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임동혁이 바(bar)에서 위스키 한 잔을 따랐다.
대낮부터 독한 위스키 잔을 든 그가 소파에 앉았다.
그의 맞은편에 앉으니 전면 유리 아래로 광화문 광장과 경복궁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런 풍경을 자주 보면 나르시스트가 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말을 빙빙 돌리는 걸 안 좋아합니다. 지루한 걸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성격이라……. 최강 선수, 파이트 클럽에서 뜨는 싸움꾼이 굳이 날 만나자고 한 이유가 뭡니까?”
대뜸 본론으로 들어간 임동혁이 위스키를 마셨다.
독한 위스키를 단숨에 반잔이나 마시는 걸 보니 싸움 구경만큼 술도 좋아하는 모양이다.
“평범한 사람은 감당할 수 없는 제안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최치우는 한 문장으로 임동혁의 흥미를 끄는 데 성공했다.
그는 임동혁과 같은 인간형이 어디에 끌리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일곱 차원에 걸친 경험이 있는데 모를 수가 없다.
평범하고 지루한 걸 죽기보다 싫어하며 자신의 특별함을 과시하기 위해 온갖 기행을 일삼는 유형이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제국의 황태자와 왕국의 왕자들이 임동혁과 같은 기질을 타고나는 경우가 많았다.
“싸움꾼이 제안이라……. UFC 같은 단체라도 하나 만들자는 건 아닐 테고.”
“그런 시시한 일이라면 임 본부장님 말고도 하겠다는 사람이 줄을 섰습니다.”
“하하하하하! 어디 들어나 봅시다. 한국에서 싸움을 제일 잘하는 남자의 제안을.”
임동혁은 크게 웃으며 남은 위스키를 비웠다.
살짝 충혈된 그의 눈이 최치우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
최치우도 임동혁을 마주 봤다.
“독도 바다에 묻힌 자원, 메탄 하이드레이트를 채취하려고 합니다.”
“뭐라고 했습니까?”
임동혁이 인상을 찡그렸다.
한영그룹은 방산과 건설, 금융을 비롯해 플랜트 개발 사업체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임동혁도 메탄 하이드레이트가 뭔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아는 만큼 더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등장해서 리키를 쓰러트린 희대의 파이터가 뜬금없이 메탄 하이드레이트 이야기를 꺼내다니, 내가 어수룩한 재벌 2세로 보여서 사기를 치려는 겁니까? 그렇다면 많이 실망인데.”
“아닙니다. 제 본명은 최치우, 서울대 에너지자원공학과에 다니고 있습니다. 얼마 전 김도현 교수님과 함께 미래 에너지 탐사대의 일원으로 독도에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김도현 교수와?”
임동혁이 놀라는 강도가 점점 커지고 있다.
파이트 클럽의 싸움꾼이 서울대 공대를 다니는 것도 놀라웠고, 김도현 교수와 함께 독도를 탐사한 멤버라는 것도 믿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잠깐만.”
임동혁이 스마트폰으로 검색했다.
김도현 교수와 최치우의 이름이 동시에 들어간 기사를 찾는 것이다.
“거짓말이 아니라니… 이거 참, 대한민국 파이터들 다 쪽팔려 죽어야겠습니다. 서울대 공대생에게 최강의 자리를 내주고.”
“파이트 클럽은 기회를 잡기 위한 발판에 불과했습니다. 임동혁 본부장님, 지금 우리의 기술력과 여건으로 메탄 하이드레이트 채취가 불가능하다는 건 알고 있을 겁니다.”
“알다마다. 우리 플랜트 사업부에서도 한때 검토를 했습니다.”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외교적 마찰만 감당할 수 있다면 독도의 메탄 하이드레이트, 채취할 수 있습니다.”
대체 무엇을 믿고 이토록 당당하게 말하는 것일까.
최치우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임동혁은 그런 최치우에게 이끌려 조금씩 심장이 뛰는 걸 느꼈다.
아드레날린이 분비되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달라졌다는 근거가 있습니까, 최강 선수? 아니, 최치우 씨.”
“김도현 교수님과 함께한 탐사에서 가능성을 확인했습니다.”
“말이 아니라 근거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30억만 먼저 투자하면 메탄 하이드레이트 실물을 해저에서 채취하는 기술을 가져오겠습니다. 그리고 서울대 공대와 한영그룹이 함께 독도에 시추 기계를 세우는 겁니다.”
밑도 끝도 없이 30억을 투자하라는 말을 들어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임동혁은 파이트 클럽 운영자가 보증한 미친놈이다.
아드레날린 중증 중독자인 그는 이미 흥분한 상태였다.
물론 명색이 대기업 후계자인 임동혁이 순간의 감정만으로 결정을 내릴 리는 없다.
하지만 30억이라는 거액은 그에게 있어 그렇게 큰 리스크가 아니었다.
“핵심 기술만 확보되면 제반 환경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한영은 국민 기업으로 거듭날 테고, 향후 국가사업에서의 입찰 주도권을 가지면서 투자 이상의 이익을 거두게 될 겁니다. 아버지도 더 이상 내게 지긋지긋한 잔소리를 하지 않을 수도. 문제는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느냐 아닙니까?”
“대한민국에서 싸움을 제일 잘하는 남자의 말이라면 뭐가 됐든 한 번쯤 믿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솔직히 본부장님에게 30억은 푼돈이라 생각됩니다만.”
“하! 그 한결같은 태도. 이렇게 따로 찾아온 걸 보면 서울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진행하는 프로젝트도 아닌 거 같고.”
“맞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제가 엮을 겁니다. 본부장님이 투자를 결정하면 김도현 교수님과 함께 진행해야죠.”
“그래서 핵심 기술은 언제까지?”
“겨울이 끝나기 전에 가져오겠습니다.”
“구체적 플랜은 있습니까?”
“그거야 말이 아닌 결과로 보여 드릴 겁니다.”
“최치우 씨, 당신 정말 대책 없이 미친놈인 거 압니까?”
“본부장님도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고 해서 찾아왔습니다.”
“하하하하하! 그렇지! 나도 미친놈이지!”
한바탕 폭소를 터트린 임동혁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는 다시 바로 걸어가 싱글몰트 위스키를 가득 따랐다.
“까짓것, 30억짜리 내기라고 생각합니다. 실패하면 최치우 씨가 내 경호원이 되는 걸로. 한국에서 제일 센 사람을 수족으로 쓸 수 있다면 30억쯤 날려도 됩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받아들이죠.”
정말 어이없게 30억짜리 딜이 결정됐다.
최치우도 그렇고 임동혁도 세상의 기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말이 쉬워 30억이지 재벌 2세에게도 가벼운 액수는 아니었다.
맨몸과 배짱 하나로 터무니없는 딜을 성사시킨 최치우는 임동혁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그 위스키, 같이 한잔 마시고 싶습니다.”
“아아, 술이라면 얼마든지.”
아직 서로를 신뢰하지 않는, 그러나 서로에게 이상한 기대감을 느낀 두 사람은 건배를 했다.
그야말로 제정신이 아닌, 미친놈들의 회합이었다.
오늘의 만남이 해프닝으로 남을지, 아니면 역사를 바꾸는 분기점이 될지 지켜봐야 할 것 같았다.
***
최치우가 만나려고 한 사람이 임동혁이었다면 최치우를 만나고 싶어 한 사람은 리키 김이었다.
파이트 클럽에서 최치우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한 그는 운영자를 들들 볶았다고 한다.
보통 패배를 당한 사람은, 특히 도전자에게 쓰러진 챔피언은 복수심에 이를 갈게 마련이다.
그런데 리키는 달랐다.
복수를 하려면 리턴 매치를 요구했어야 한다.
그게 아니라 최치우와 사적인 자리를 만든 건 다른 생각이 있다는 뜻이다.
임동혁과 위스키 몇 잔을 마시고 나온 최치우는 택시를 잡았다.
리키와의 약속 장소는 광화문 바로 옆 삼청동의 한옥 찻집이다.
삼청동 언덕의 찻집에 도착하니 리키가 기다리고 있다.
전통차를 파는 기와집에 레게 머리를 한 흑인 혼혈이 앉아 있으니 사뭇 이질적으로 보였다.
이곳을 약속 장소로 선택한 사람은 리키 김이다.
그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사랑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또 보게 될 줄은 몰랐네요.”
신발을 벗고 찻집 안으로 들어간 최치우가 가볍게 인사를 했다.
리키는 양반 다리를 풀고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UM… 이러케 나와 줘서 캄사합니다, 최강.”
그의 한국말은 제법 유창했다.
버터 발음이 묻어 나왔지만, 의사소통에는 불편함이 없었다.
“내 이름은 최치우입니다. 최강은 파이트 클럽에서만 쓰는 닉네임이죠.”
“치우, 굿 네임. 멋있어요.”
다소 어색한 덕담이 오갔다.
차를 시키고 마주앉은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사실…….”
리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는 보기와 다르게 매우 예의 바르고 순진한 사람 같았다.
최치우를 어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부탁을 하고 싶어서 미팅 요청했습니다, 치우.”
“무슨 부탁입니까?”
“내가 치우를 잡았을 때, 클린치에서 스탠딩 암바를 걸려고 했을 때, 유 노우?”
“기억하고 있습니다. 위험한 상황이었으니까.”
“그때 공간이 절대 안 나왔는데 손목 스냅으로 내 배를 때린 기술 말입니다.”
리키는 자신이 어떻게 패배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최치우가 금강나한권의 나한극으로 리키의 복부를 친 순간, 사실상 게임은 끝났다.
마무리를 지은 명파금강은 피날레였다.
“그 기술… 배우고 싶습니다. 꼭, 플리즈. 대신 시키는 거 뭐든 다 할게요. 유 남 생[you know what i’m saying]?”
리키의 커다란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혹시 최치우가 거절할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게 티가 났다.
최치우는 웃음을 참으며 리키를 쳐다봤다.
자신을 때려눕힌 상대를 찾아와 싸움 기술을 알려달라니, 이 사람도 절대 정상은 아니었다.
‘오늘은 미친놈만 두 명을 연달아 만나는군.’
그런데 이상하게 싫지가 않았다.
최치우는 말없이 리키를 바라봤고, 리키는 애가 타는지 레게 머리를 뒤로 걷어내고 눈만 끔벅거렸다.
확실한 사실은 하나이다.
그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최치우에게 사람이 모이고 있었다.
그것도 평범함의 한계를 한참 벗어난 골 때리는 사람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