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번째 환생-27화 (27/243)

# 27

최치우가 무대에 올랐다.

링 맞은편에는 까무잡잡한 피부의 남자가 서 있었다.

경지에 오르면 체격만 봐도 대강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리키 김, 그는 어중이떠중이가 아니었다.

UFC 라이트헤비급 챔피언을 쓰러트린 것도 100% 사실일 것이다.

‘완벽한 하드웨어를 타고났어.’

최치우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리키 김은 절대 거구가 아니었다.

대신 체형의 밸런스가 완벽에 가까웠다.

180㎝ 정도 될 것 같은 키, 길쭉한 팔다리, 골고루 발달된 근육까지.

무공을 익히지 않고 평범한 수련으로 저런 몸을 만들었다는 게 놀라웠다.

‘곤륜노들이 떠오르는군.’

최치우는 무림에서의 기억을 돌아봤다.

곤륜산 부근에는 서역에서 넘어온 외국인이 심심찮게 나타났다.

그중에서도 백인은 벽안인, 흑인은 곤륜노로 불렸다.

특히 곤륜노들은 무지막지한 외공으로 무림에서도 악명이 높았다.

내공을 깊이 수양한 곤륜파의 검객들이 허무하게 패배하는 일도 잦았다.

리키 김을 보고 있으니 곤륜노들과 치열하게 맞붙던 시절이 생각났다.

최치우의 시선을 느낀 것일까.

리키 김도 이쪽을 쳐다봤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동자에서는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회사에 출근한 직장인 같은 눈빛이다.

‘확실히 특이하네.’

최치우는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한국 파이트 클럽에서 마지막이 될 상대가 바로 리키 김이다.

첫인상일 뿐이지만 주먹을 교환할 가치는 있을 것 같아 다행이었다.

“라이트 사이드, 키 180㎝에 몸무게 92㎏, 파이트 클럽 전적 8승 무패! 설명이 필요 없는 대한민국 최강자, UFC 챔피언을 농락한 남자 리키-!”

소개하는 운영자의 목소리 톤이 살짝 높아졌다.

호들갑을 떨지는 않았지만 그 역시 S급 파이터 리키 김의 등장에 흥분하고 있었다.

“레프트 사이드, 키 179㎝에 몸무게 78㎏, 파이트 클럽 전적 1승 무패. 단번에 S급 매치에 오른 유일한 신인 최강!”

최치우, 아니, 신인 파이터 최강의 이력은 상대적으로 초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키 김은 방심하지 않는 것 같았다.

큰 눈으로 최치우를 바라보며 기세를 다듬고 있었다.

‘조폭 따위와는 다르다. 생각보다 재밌겠어.’

최치우도 상대를 인정했다.

칠성파 행동 대장 김인철과는 격이 다른 진짜배기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긴장이 되는 건 아니었다.

내공과 마법을 쓰지 않아도 여유롭게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렇지만 곧 시작될 싸움이 무의미한 시간 낭비가 될 것 같진 않았다.

“매치 시작 전, 마지막 배팅받겠습니다.”

어두운 객석에서 미니스커트를 입은 미녀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30명의 VVIP들은 과연 누구에게 얼마를 걸까.

S급과 B급.

한국에서 제일 싸움을 잘한다는 리키와 정체 모를 신인 최강.

99 : 1이라는 극단적인 배당이 떠도 이상할 게 없었다.

‘나한테 돈 건 사람들은 오늘 대박 나겠다.’

최치우는 스스로에게 돈을 걸고 싶었다.

역배당으로 대박이 날 걸 확신하기 때문이다.

“매치- 업!”

곧이어 파이트의 시작을 알리는 음성이 울렸다.

파이트 클럽에서는 정해진 룰이 없었다.

낭심을 공격해도 되고 눈을 찔러도 괜찮았다.

당연히 1라운드 5분이라는 격투기 룰도 따르지 않았다.

쉬는 시간 없이 한쪽이 전투 불능이 될 때까지 무제한 룰로 싸울 뿐이다.

스윽-

리키 김이 천천히 주먹을 내밀었다.

격투기 선수들이 종종 하는 인사이다.

하지만 살벌한 전쟁터인 파이트 클럽과는 어울리지 않는 행위였다.

툭!

최치우는 여유롭게 웃으며 주먹 대 주먹으로 인사를 나눴다.

‘마음에 드는 친구네.’

그러나 이제부터는 1초도 방심할 수 없었다.

인사가 끝난 직후 리키가 동물처럼 쇄도했다.

전광석화 같은 동작으로 갑자기 파고든 것이다.

훅!

어퍼컷이 치솟았다.

새까만 주먹이 최치우의 턱을 노렸다.

부웅-

최치우는 간발의 차로 어퍼컷을 피했다.

웬만한 파이터는 방금 전의 공격에 당했을 것이다.

‘진짜 실력자다.’

최치우가 감탄하는 사이, 리키는 바로 다음 동작을 이어나갔다.

그의 레게 머리가 몸의 스피드를 감당하지 못하고 출렁거렸다.

빡! 파팍!

강력한 펀치가 최치우의 가드를 두드렸다.

팔뚝이 욱신거렸다.

최치우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곧장 가드가 풀렸을 것이다.

‘이제…….’

그는 리키의 공격이 멈춘 잠깐의 틈을 놓치지 않았다.

내공을 안 써도 판단력과 스피드, 파워는 이미 인간의 한계를 초월했다.

‘내 차례다!’

퍼어억!

대각선으로 휘어진 펀치가 리키의 어깨를 강타했다.

원래는 관자놀이를 노렸다.

리키가 순간적으로 어깨를 들어 치명타를 막아낸 것이다.

“왓 더 헬!”

뒤로 물러선 리키가 영어로 욕을 내뱉었다.

최치우의 주먹에 맞은 그의 어깨가 시뻘겋게 부어올랐다.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체험한 것이다.

만만치 않은 통증이 리키의 전투 본능을 일깨웠다.

리키 김은 이전과 달리 눈을 사납게 떴다.

‘제대로 해볼 마음이 들었나 보군.’

최치우는 자세를 낮추고 공격에 대비했다.

이윽고 리키가 한 마리 흑표범처럼 달려들었다.

‘주먹? 발? 아니다!’

타격이 아니었다.

바람처럼 다가온 리키가 두 팔을 뻗어 최치우의 몸통을 잡았다.

‘그래플러(grappler)! 골치 아프게 됐어.’

단단한 근육으로 미끈미끈 온몸을 조이는 게 장난이 아니었다.

숙련된 레슬러, 혹은 주짓수 마스터의 냄새가 났다.

으드득!

리키의 양팔이 최치우의 왼팔을 기묘한 각도로 꺾었다.

관절과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게 느껴졌다.

‘내공은 절대 안 써. 점혈도 필요 없다.’

최치우는 자존심을 지켰다.

내공을 쓰거나 점혈법을 사용하면 실전에서 붙는 의미가 사라진다.

그는 고통을 참으며 눈을 부릅떴다.

‘금강나한권으로 끝낸다.’

온몸이 붙잡혀 주먹을 휘두를 공간이 없다.

하지만 이럴 때 안성맞춤인 초식이 있다.

‘나한극(羅漢戟).’

최치우는 오른손을 펼쳐 수도(手刀)를 만들었다.

나한극은 손목 관절의 반탄력을 이용해 짧은 공간에서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하는 초식이다.

으드드드득!

왼쪽 팔이 탈골 직전까지 압박을 받는 순간, 망설임 없이 나한극을 펼쳤다.

투웅-!

간단하게 까딱 움직인 최치우의 손날이 리키의 갈비뼈 사이에 박혔다.

관중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리키는 마치 도끼에 몸통을 찍힌 듯한 충격을 받았다.

“커흡!”

리키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고수들의 싸움에서 호흡이 깨지면 승부는 갈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딱 달라붙어 있던 리키가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이럴 때는 깔끔하게 끝내주는 것이 예의이다.

최치우는 바닥을 박차며 마지막 한 방을 날렸다.

‘명파금강(鳴波金剛).’

부드럽게 뻗은 정권이 리키의 명치에 꽂혔다.

왕(王) 자 근육으로 무장했어도 방법이 없다.

명파금강은 몸 내부를 흔들어 무너트리는 초식이기 때문이다.

만약 최치우가 내공을 담았다면 오장육부가 찢어졌을 것이다.

쿠우웅!

리키 김이 의식을 잃은 듯 뒤로 쓰러졌다.

여기까지 1분 30초.

최치우는 내공을 쓰지 않고 대한민국의 비공식 최강자를 이겼다.

“와-!”

“저게! 하아……!”

“말이 돼?”

어둠으로 가려진 관중석에서 탄식과 비명이 터져 나왔다.

VVIP들은 여간해선 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렇지만 B급 신인 파이터가 리키를 쓰러트렸으니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파이트 클럽 운영자도 마찬가지였다.

링 가까이에 서 있는 그는 설마 최치우가 리키 김을 이길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최치우는 운영자의 넋이 나간 얼굴을 보며 씨익 웃었다.

기대 이상으로 재밌는 싸움이었다.

그리고 당연한 승리를 얻었다.

The winner takes it all.

승자는 모든 것을 얻는다.

최치우는 승리의 열매를 남김없이 먹어치울 작정이다.

***

1억의 파이트머니, 그리고 의외의 결과에 깜짝 놀란 VVIP들이 쏜 보너스만 3억이었다.

30명이 평균 천만 원씩 보너스를 낸 셈인데, 사실은 세 명이 각각 1억이라는 거금을 냈다고 한다.

대부분의 VVIP들은 리키에게 거액을 배팅했고, 최치우 덕에 판돈을 모조리 날렸다.

돈이 문제인 사람들은 아니지만 승부에서 지면 기분이 나빠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S급 파이터의 매치치고는 의외로 적은 보너스가 나왔다고 한다.

운영자는 태연한 얼굴로 3억이 적은 돈이라고 말했다.

그는 리키를 꺾고 단숨에 한국에서 손꼽히는 파이터로 급부상한 최치우에게 잘 보이려 애썼다.

“최강, 진짜 이름 그대로 최강이었구만. 내가 원석 하나는 기가 막히게 발견했지.”

“아까는 얼빠진 표정 아니었습니까?”

“그거야 너무 놀라서 그랬고……. 이제 최고의 스폰서들이 자네를 주목하기 시작했으니 다음 매치 파이트머니는 10억을 넘길 수 있을 것 같네.”

평범한 사람은 평생 모을 수 없는 돈이 10억이다.

싸움 한 판에 그만한 돈을 보장받을 수 있다.

최치우가 마음먹고 한국의 파이트 클럽을 휩쓸면 돈을 쓸어 담는 것도 가능했다.

그러나 최치우는 파이트 클럽에 흥미를 잃었다.

리키를 능가하는 상대가 나올 것 같지도 않고, 생활비와 학비는 웹툰 연재로 해결된다.

그는 이제부터 미래 에너지와 자원 개발에 집중하고 싶었다.

프로젝트 하나만 성공하면 수천 억, 수조 원 이상의 부가가치를 낳는 일이다.

남들에게는 크게 느껴질 10억이라는 돈이 시시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지급하는 돈은 모두 안전하네. 추적도 불가능하지. 한 번에 거액을 쓰지만 않는다면 세무서에서도 눈치챌 수 없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내게 말하게. 국세청을 관할하는 정무위원회 국회의원도 우리 VVIP니까.”

“알겠습니다.”

“이번에는 자네가 받을 돈이 총 4억이로군. 액수가 커졌으니 차명 계좌에 5천씩 넣어서 통장 여덟 개를 만들어주겠네.”

“돈보다 더 중요한 부탁이 있습니다.”

최치우는 4억보다 중요한 부탁을 언급했다.

운영자는 떨떠름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제일 돈 많고 제일 미친놈을… 소개해 달라는 말, 진심이었나?”

“당연히 진심이었습니다. 안 됩니까?”

“아니아니, 떠오르는 분이 있기는 하네만…….”

운영자가 곤란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이렇게 고민하는 모습은 처음이다.

그만큼 함부로 부탁하기 어려운 사람인 것 같았다.

하지만 운영자는 리키를 쓰러트린 파이터 최강을 놓칠 수 없었다.

“한영그룹이라고 들어봤겠지?”

“재계 서열 10위 안에 드는 대기업이죠. 66빌딩도 한영그룹 소유라고 들었습니다.”

“맞네. 한영그룹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 지금 회장님의 첫째 아드님이 우리 스폰서라네. 그분도 오늘 매치를 봤으니 자네를 만나고 싶어 하실 수도 있겠구만.”

말로만 듣던 재벌 2세가 오늘 매치를 지켜봤다니 신기했다.

과연 파이트 클럽의 네트워크는 무시할 게 아니었다.

“직함은 전략 본부장이지만 나중에는 그룹을 물려받을 분이니 돈이 많기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지. 그리고 무엇보다…….”

“무엇보다?”

“최강 자네의 요청대로 굉장히 특이하신 분이네.”

“미친놈이란 뜻이군요.”

최치우는 운영자가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콕 짚었다.

촉이 왔다.

재계에서 미친놈으로 소문이 자자한 한영그룹의 후계자를 발판 삼아 마음껏 놀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최치우는 다시 독도를 조준했다.

리키와의 싸움 또한 독도로 나아가는 과정이었다.

그의 그림은 독도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지구의 에너지와 자원, 세계의 신비를 캐낼 것이다.

최치우는 그야말로 미친놈처럼 거침없이 질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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