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번째 환생-26화 (26/243)

# 26

<미친놈이 미친놈에게>

서울로 돌아온 최치우는 문지유와 저녁을 먹었다.

곧 일본으로 재충전 여행을 떠날 그녀를 응원하고 축하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시즌 2에 대한 부담을 절대 주지 않았다.

네트의 윤영국 팀장이 빠른 연재 재개를 위해 얼마나 애걸복걸하는지도 전달할 필요가 없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문지유의 컨디션과 자신감이었다.

그녀는 누구보다 시즌 2를 빨리 그리고 싶어 했다.

하지만 창작력이 고갈되면 답이 없다.

그 느낌은 창작을 해본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누나, 걱정하지 말고 푹 쉬다 와요. 시즌 2는 올 겨울부터 시작해도 안 늦고… 만약 힘들면 네트에선 내년까지도 기다려 준다고 했으니까.”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치우야. 네트 쪽 입장도 있을 텐데 힘든 일은 네가 다 맡아서 하고…….”

“그게 내 일인데요. 누나는 아무 데도 신경 쓰지 말고 그림만 그리면 됩니다. 이번 여행에서는 아예 그림 생각도 싹 잊어버리고 재밌게 놀다 왔으면 좋겠어요.”

“아니야. 아키하바라에서 영감 많이 받아와서 시즌 2는 더 멋지게 그릴게!”

문지유가 당차게 대답했다.

원래 그녀는 우물쭈물하며 말을 더듬기 일쑤였다.

그러나 리얼 헌터를 연재하며 성격도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인정받게 되면 자존감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최치우는 문지유의 긍정적인 변화를 흐뭇하게 지켜봤다.

나이로는 누나 동생이지만, 실제 관계에서는 최치우가 큰오빠 노릇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식당에서 나왔다.

미슐랭 1스타를 받은 레스토랑의 디너 코스를 먹었기에 디저트와 커피도 마셨다.

이제 잠시 헤어질 시간이다.

원래도 자주 보지는 않았지만 괜히 기분이 묘해졌다.

특히 문지유가 짙은 아쉬움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금방 쌩쌩해져서 돌아올게, 치우야. 그리고 맨날 하는 말이지만… 정말 고마워.”

“나도 늘 하는 말이지만, 누나한테 고마워요.”

“이, 이건 내 선물이야. 시즌 1 성공 기념 선물이라 생각하고 받아줘.”

문지유가 불쑥 선물을 내밀었다.

최치우는 놀란 표정으로 선물을 받았다.

“난 아무것도 못 챙겼는데…….”

“괜찮아. 널 만난 게 나한테는 제일 큰 선물이니까. 그, 그럼 일본 다녀와서 연락할게.”

문지유가 인사를 건네고 도망치듯 후다닥 돌아섰다.

최치우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곧이어 문지유의 모습이 코너를 돌아 사라졌다.

“나도 다음부터는 작은 거라도 좀 챙겨야겠다.”

그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선물 상자를 열었다.

아기자기하게 포장된 작은 선물 상자 안에는 넥타이가 들어 있었다.

“명품으로 샀네. 이거 비쌀 텐데.”

최치우는 문지유의 정성에 고마워하며 혼잣말을 읊조렸다.

넥타이 옆으로 작은 메모지가 보였다.

-앞으로 정장 입을 일 많아질 거 같아서 골라봤어.

정말 짧은 메모였지만 문지유의 마음이 느껴졌다.

그녀가 넥타이를 고르기 위해 백화점 매장을 들락날락했을 모습이 상상됐다.

고마운 인연들 덕분에 소중한 순간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차곡차곡 쌓인 순간은 먼 미래에 추억이란 이름으로 남을 것이다.

최치우는 아무래도 이번 인생을 가장 좋아하게 될 것 같았다.

어쩌면 이미 그러고 있는지도 모른다.

***

운영자는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그로서도 어렵게 성사시킨 빅 매치였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보다 바쁘게 일정을 진행시킬 수밖에 없었다.

역시 저번처럼 상대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비공개였다.

하지만 UFC 라이트헤비급 챔피언을 쓰러트린 흑인 혼혈이라는 것만 해도 충분한 정보였다.

‘미국에도 파이트 클럽이란 게 있다는 말이지. 게다가 UFC 챔피언이 출전할 정도면… 보이지 않는 어마어마한 시장이 있다는 뜻.’

최치우는 운영자와의 통화에서 더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

파이트 클럽은 한국만의 단체가 아닌 것 같았다.

미국에서도 운영되고 있고 현직 UFC 세계 챔피언이 참여하기도 한다.

운영자가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다.

인터넷에 UFC 라이트헤비급 챔피언을 치면 정보가 주르륵 뜬다.

‘백 헨더슨. 훈련 중 부상을 입어 내년까지 UFC 출전 불가. 따라서 잠정 챔피언과 랭킹 2위의 다음 타이틀 매치 이후에는 벨트를 반납해야 한다. 여기서 말한 훈련 중 부상을 파이트 클럽에서 당했겠군.’

공식 발표는 훈련 중 부상이라고 났지만 보나마나였다.

백 헨더슨을 저 지경으로 만들었으니 상대는 분명 탈(脫) 아시아 레벨이다.

내공을 전혀 쓰지 않으면 제법 붙을 맛이 날지도 모르겠다.

파이트머니 1억 원도 적지 않은 액수였다.

UFC 페더급에서 챔피언 타이틀 매치에 도전한 한국 선수가 파이트머니 1억을 받았다.

최치우처럼 아무런 정보가 없는, 전적 1승의 신인이 1억 원을 보장받는다는 건 파이트 클럽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랑 붙을 상대는 최소 10억 이상 받겠네. 물론 내가 이겨서 1억에 보너스까지 받고……. 정신이 반쯤 나간, 그러나 돈은 썩어나는 투자자를 잡아야지.”

최치우는 단순히 한 번의 싸움만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실전 경험 부족은 다른 방면으로 채우면 된다.

어차피 현대에서는 누구와 싸워도 최치우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최신형 무기로 중무장한 군대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겠지만 말이다.

대신 파이트 클럽을 통해 지름길을 걸어갈 수는 있다.

본격적으로 미래 에너지와 자원을 개발하기 시작하면 버는 돈의 액수가 달라지겠지만 지금으로선 1억도 큰돈이다.

뿐만 아니라 최치우는 파이트 클럽에 돈을 펑펑 쓰는 큰손들과 만나고 싶었다.

아드레날린에 중독된 부자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족속들이 궁금했다.

그들이라면 최치우의 계획에 흥미를 보일지 모른다.

평범한 투자자는 최치우의 계획을 미쳤다고 평가할 게 뻔하다.

“사람은 큰물에서 놀아야지.”

최치우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하다는 상대와의 싸움을 걱정하지 않았다.

이미 싸움 이후를 생각하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현실에서 그는 잘나가는 웹툰 스토리 작가, 그리고 조금씩 주목을 받기 시작한 서울대 공대 F.E의 멤버이다.

단기간에 빼어난 성과를 이뤘지만, 아직은 사회에서는 유망주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다.

독자적으로 대형 프로젝트를 이끌며 판을 바꾸기엔 부족한 이력이다.

하지만 최치우에게는 무력이라는, 그것도 지상 최강의 무력이라는 비밀 병기가 있었다.

파이트 클럽에서의 활약을 통해 큰물에서 노는 투자자를 끌어들여 판을 짠다.

그다음 김도현 교수와 F.E 멤버들이 주축이 되어 독도의 메탄 하이드레이트 개발 작업에 드라이브를 건다.

과정마다 필요한 어려운 작업은 최치우가 직접 나서서 음으로 양으로 해치워 버린다.

이게 현재까지 최치우의 머릿속에 그려진 빅 플랜이었다.

누가 들으면 영화 시나리오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최치우는 자신의 플랜을 실제로 이뤄낼 자신이 있었다.

그것도 1년을 넘기기 전에.

“치우야!”

그때 맑은 목소리가 최치우의 상념을 깨웠다.

길 건너편에서 같은 과 동기 유은서가 손을 흔들며 걸어오고 있었다.

최치우는 그녀의 연극 동아리 공연에 가겠다는 약속을 어겼다.

독도를 다녀온 뒤 이것저것 생각을 정리하느라 연극을 깜빡한 것이다.

그 대신 유은서에게 밥을 산다고 했다.

파스텔 톤 원피스를 입고 연하게 화장을 한 유은서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웃음기를 머금어서인지 평소보다 더 귀여운 티가 났다.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들, 특히 남자들은 유은서를 곁눈질로 쳐다보기 바빴다.

공대 여신 소리를 들을 만했다.

칙칙한 공대를 다니는데도 연극 동아리에서 여자 주인공 역할을 맡았으니 설명이 필요 없었다.

“많이 기다렸어?”

“아니. 나도 방금 왔어.”

“독도는 잘 갔다 왔지? 미래 에너지 탐사대랑 김도현 교수님, 여기저기 신문에 많이 나왔던데, 진짜 신기했어.”

“재밌는 경험이었지. 일단 밥부터 먹으러 가자. 뭐 먹을래?”

최치우는 유은서와 나란히 걸음을 맞추며 합정역 카페 거리로 들어섰다.

여름방학이 끝나기 전에 해결해야 할 굵직한 일들을 앞두고 있지만, 일상을 포기하고 미션에만 집중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는 앞선 여섯 번의 환생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저녁이 되자 천천히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세련된 디자인의 가로등이 합정역 카페 거리를 비추고, 최치우와 유은서는 자주 웃음을 터트리며 식당을 골랐다.

스무 살의 여름다운 나날이었다.

***

파이트 클럽의 매치 장소를 통보받은 최치우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운영자는 올림픽 공원 체조 경기장을 빌렸다.

UFC에서 한국 투어를 진행했을 때 사용한 바로 그 경기장이었다.

양지에는 UFC가 있지만, 리얼한 싸움이 펼쳐지는 음지의 지배자는 파이트 클럽이란 걸 과시하는 듯했다.

대체 어떻게 체조 경기장을 빌렸는지 궁금해졌다.

돈만 있다고 해서 대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특히 파이트 클럽처럼 비공개 행사의 경우 절차가 더 까다롭다.

대관 사유부터 행사 진행에 이르기까지 보안을 유지하기 어렵다.

그러나 파이트 클럽의 S급 매치에는 국내 최고의 VIP들이 관전자로 참석한다.

말 한 마디로 정부 부처를 움직이는 사람도 있고, 돈이라면 썩어나서 요일마다 슈퍼카를 바꿔 타는 사람도 있다.

그들이 마음먹으면 체조 경기장을 빌려 비공개 행사를 치르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설령 그게 피가 튀고 사람이 죽어나갈지 모르는 불법 파이트라도 상관없는 것이다.

드러난 현실에서 통용되는 상식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최치우는 대학교 1학년의 시각으로 이 세계를 판단하면 안 되겠다고 느꼈다.

평범한 사람들은 알 수 없지만 현대의 지구는 어느 차원보다 더 복잡한 약육강식의 정글 같았다.

개개인의 무력이 약하다고 해서 만만히 볼 차원이 아니었다.

‘일단 당장은 매치에만 집중하자. 하나씩 하나씩 엮다 보면 뿌리까지 나오겠지.’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다.

최치우는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렇게 앞으로 나가다 보면 금방 세계를 움직이는 자리에 올라갈 것이다.

공개되지 않은 무수한 비밀도 자연스레 접하게 되리라.

벌써부터 조급증을 낼 필요는 없었다.

“대기실로 모시겠습니다.”

최치우는 체조 경기장 입구에서 까다로운 신분 확인 절차를 밟았다.

확실히 모든 게 1년 전 파이트와는 달랐다.

당시만 해도 시설이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올림픽 공원 체조 경기장은 국제 무대가 열리는 곳이다.

선수 대기실의 규모와 안락함을 다른 곳과 비교하면 실례이다.

끼이익-

대기실에 도착한 지 10분쯤 지났을까.

여전한 얼굴의 운영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거 보게. 키가 더 크고 몸도 좋아졌군. 확실히 아직 성장기란 말이지.”

“오랜만에 보자마자 웬 호들갑입니까?”

최치우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파이트 클럽 운영자가 친한 척을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못 본 사이 더 까칠해졌구만. 준비는 다 됐겠지?”

“싸울 준비는 언제든.”

“좋네, 좋아! 오늘은 특별히 최고의 VVIP 30명만 초대했네.”

스케일이 달랐다.

이토록 넓은 체조 경기장에 겨우 30명만 부른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넉넉하고 편안한 공간과 프라이버시를 보장해 주기 위해서이다.

S급 파이터가 나서는 빅 매치에는 사람을 많이 부를 이유가 없었다.

소수의 VVIP들이 막대한 돈을 쓰기 때문이다.

“사실은 우리 VVIP들도 반신반의하고 있어. 자네의 공식 랭크가 B급이기 때문이지. 이제껏 B급 신인이 S급 파이터와 붙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네. 그러니 제대로 싸워줘야 내 모가지가 안 날아간다는 걸 명심해 주면 좋겠군.”

“B급이고 S급이고 그냥 놀랄 준비나 하면 됩니다.”

“자신감은 여전하니 마음이 조금 놓이네. 그럼 상대에 대해 알려주지.”

가장 중요한 대목이 나왔다.

최치우는 여유롭게 앉아서 운영자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리키 김! 명실상부 대한민국에서 제일 싸움 잘하는 사람이야.”

UFC 챔피언을 쓰러트린 흑인 혼혈의 이름을 알게 됐다.

하지만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이긴다. 무조건 이긴다.

어떻게 이기느냐의 문제일 따름이다.

“최강 자네가 대등하게 싸우기만 해도 스폰서들은 엄청난 보너스를 쏠지 모르네.”

운영자는 본명 대신 닉네임으로 최치우를 불렀다.

최치우는 그의 말에 피식 미소를 지었다.

“운영자 아저씨, 오늘 놀랄 일이 많겠네요.”

“무슨 소리지?”

“나중에 보면 알게 될 겁니다. 그보다 내가 이기면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 거 지켜야 합니다.”

“그거야 당연하지! 그런데 대체 무슨 부탁을 하고 싶은 건가?”

처억.

최치우는 무대로 나가 싸우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이전보다 더욱 짙은 미소를 머금고 운영자를 쳐다봤다.

“파이트 클럽의 스폰서 중에서… 제일 돈 많고 제일 미친놈을 소개해 주세요. 나와 단둘이서 만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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