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짝!”
“4!”
“5!”
“6, 아, 아니, 짝!”
369게임에서 그녀가 걸리고 말았다.
동그라미 가운데는 어김없이 소주로 가득 채운 맥주잔이 놓여 있었다.
이미 많이 취한 상태에서 마시기엔 버거운 양이다.
벌칙에 당첨된 그녀가 울상을 했다.
“나 이거 마시면 토할지도 몰라요.”
말끝을 흐리며 살짝 고개를 젓는 모습이 애 같았다.
하지만 흑기사를 해줄 남자 선배들은 진즉 쓰러졌다.
남아 있는 건 2학년 여자 선배 두 명과 반쯤 맛이 간 1학년 남자, 그리고 최치우가 전부였다.
“유은서, 뭐 해? 걸렸으면 무조건 마셔야지!”
여자 선배 한 명이 걸걸한 목소리로 외쳤다.
덕분에 최치우는 여자 동기의 이름이 유은서라는 걸 알게 됐다.
‘리얼 헌터 애독자인데… 도와주지, 뭐.’
생각을 마친 최치우가 손을 번쩍 들었다.
“흑기사 하겠습니다.”
“오! 신입생들, 벌써 눈 맞은 거야? 그런 거야?”
“수상한데, 수상해.”
최치우가 나서자 여자 선배 두 명이 호들갑을 떨었다.
쓰러지기 직전의 1학년 동기도 게슴츠레한 눈길로 최치우와 유은서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런 거 아닙니다. 아무튼 흑기사.”
최치우는 손을 뻗어 술잔을 들었다.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꿀꺽꿀꺽.
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술잔을 비웠다.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야, 너 진짜 잘 마신다. 근데 흑기사 했음 소원을 말해야지.”
여자 선배들이 감탄하며 최치우를 부추겼다.
딱히 소원이랄 게 없는 최치우는 유은서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녀는 갑자기 흑기사를 해준 최치우를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돌렸다.
“내 소원은… 너 이름이 유은서라고 했나? 저기 구석에 가서 자라. 상태 안 좋아 보인다. 선배님들, 우리 셋이서 끝을 보죠.”
“어쭈? 화끈한데?”
“좋아, 끝까지 가는 거야!”
여자 선배 두 명이 신이 나서 목소리를 높였다.
최치우는 유은서가 이쯤에서 빠질 수 있도록 배려해 준 것이다.
1학년 남자 동기는 기다렸다는 듯 뒤로 자빠졌다.
“나 아직 괜찮은데…….”
유은서가 쭈뼛거렸지만 최치우는 고갯짓으로 빠지라는 신호를 줬다.
얼른 여자 선배 두 명도 쓰러트리고 뒷정리를 할 생각이다.
술판에서 벗어난 유은서는 묘한 눈길로 최치우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최치우는 별생각 없이 흑기사를 해줬지만, 본의 아니게 스무 살 파릇파릇한 신입생의 가슴에 깊이 각인된 것 같았다.
정작 그는 아무렇지 않게 여자 선배 두 명을 술로 격파했다.
짧고 굵은 신입생 MT가 끝나고, 에너지 자원 공학과에 뜨거운 소문이 돌았다.
수능 만점을 받고 입학한 사차원 신입생이 역대급 주량으로 MT를 지배했다는, 누가 들어도 흥미가 생길 소문이었다.
최치우는 벌써부터 다방면에서 에이스 본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금성고에 이어 서울대를 접수할 날도 금방 다가올 것 같았다.
***
소문은 빠르다.
생각보다 금방 퍼진다.
신입생 MT에서 전설 아닌 전설을 만든 최치우는 에너지 자원 공학과 요주의 인물이 됐다.
물론 나쁜 뜻은 아니었다.
선배들은 그의 주량을 시험하기 위해 저녁마다 도전장을 내밀었다.
서울대 공대의 음주 최종 보스는 7년째 학교에 다니는 컴공과 고학번 복학생이었다.
그는 소맥과 양맥 폭탄주를 번갈아 타며 최치우를 공략했지만 난공불락이었다.
결국 공대 최종 보스는 술집 화장실에서 오바이트를 하고 기절한 채 발견됐다.
최치우는 개강 후 한 달이 지나기 전에 공대를 평정해 버렸다.
단순히 술로만 인정받은 게 전부는 아니다.
그는 평범한 신입생과 달리 포부와 목표가 뚜렷했다.
에너지 자원 공학과에 대해 누구보다 철저히 예습을 했고, 술자리에서는 전공 대화가 나올 때마다 10년 묵은 조교처럼 설명을 술술 풀어놓았다.
요즘 세상에 자기 전공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대학생을 찾기란 사막에서 바늘 찾기만큼 힘든 일이다.
그러나 최치우는 선배들도 잊고 있던 비전을 이야기하며 에너지 자원 공학과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사차원적인 면모였으나 술자리에 함께한 사람들의 호감을 사는 데는 제격이었다.
꿈이 사라진 헬조선이지만, 그렇기에 사람들은 여전히 꿈을 꾸는 소수의 인물을 좋아하고 따른다.
최치우는 에너지 자원 공학과를 넘어 공대 전체에 희미해진 꿈을 불어넣는 존재였다.
하지만 실력 없이 말만 앞선다면 꿈이 아니라 망상이다.
술 잘 마시고 비전이 있다고 해서 주목받는 건 학기 초반뿐이다.
실력으로 진짜 에이스임을 증명해야 했다.
기회는 금방 찾아왔다.
1학년 전공과목인 에너지의 미래는 중간고사를 조별 발표로 대신했다.
사실 대학생들은 조별 과제를 극도로 싫어했다.
공산주의가 왜 망하는지 알고 싶으면 대학 조별 과제를 해보라고 할 정도이다.
반드시 아무것도 안 하고 묻어가려는 조원이 나오기 때문이다.
최치우의 조에도 속칭 뺑끼를 치려는 학생들이 섞여 있었다.
4인 1조인데 한 명이 역할을 안 하면 세 명이 부담을 지게 된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에너지의 미래가 1학년 전공과목이라서 선배들이 없다는 점이다.
최치우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자신의 조를 장악했다.
만약 선배가 포함됐다면 하극상도 감수했을 것이다.
과외 때문에 바쁘다고 미적거린 남학생은 삼수생이었다.
다른 1학년보다 두 살이 더 많기에 조별 과제를 날로 먹으려는 건지 몰랐다.
그러나 최치우 앞에선 통하지 않았다.
그는 무림을 평정할 수 있는 무공과 아슬란 대륙을 놀라게 만든 마법을 일상에 사용했다.
원래는 마교를 때려잡고 몬스터를 불에 구워버리는 데 써야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현대의 지구에선 그럴 일이 없다.
이러려고 무공과 마법을 배웠나 하는 자괴감이 들 수도 있지만 아무렴 어떤가.
필요할 때 마음대로 쓸 수 있으면 그만이다.
고오오오-
최치우가 단전의 내공을 개방시키면 주위의 공기가 바뀐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기운이 사방을 옥죄며 지배하는 것이다.
내력이 없는 보통 사람은 감당하기 힘들다.
저도 모르게 심신이 억눌리며 답답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다.
최치우는 거기에 더해 3서클 마법 사일런스 스페이스를 역으로 걸었다.
능글거리던 삼수생은 일시적으로 외부의 모든 소리가 차단되는 것을 경험했다.
그것만으로도 오싹한데 화룡점정(畵龍點睛)으로 전음을 보냈다.
[똑바로 해라. 까불지 말고.]
믿기 힘든 일이었다.
최치우는 분명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데 그의 음성이 사방에서 웅웅거리며 들렸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다.
내공으로 위축시키고, 마법으로 소리를 차단하고, 전음으로 경고를 날린다.
3단 콤보가 작렬했다.
최치우 입장에서는 사소한 행동이지만 당하는 사람은 귀신을 본 느낌일 수밖에 없다.
영문은 몰라도 함부로 나대다간 큰코다치겠다는 불길한 사인을 주기엔 충분했다.
“다시 한번 물어볼게요. 아무리 바빠도 자기 역할은 해줬으면 합니다.”
최치우가 힘주어 말했다.
삼수생은 더 이상 최치우의 말을 가볍게 넘기지 못했다.
“어… 그, 그럼 나는 모레까지 자료 조사해서 단톡방에 올릴게.”
“네트에 대충 검색해서 컨트롤 C, 컨트롤 V 하는 거면 도움이 안 됩니다.”
“전공 서적이랑 참고 자료 찾아서 만들어야지. 열심히 할게.”
삼수생이 제법 힘든 일을 떠안았다.
자연스레 리더십을 보인 최치우는 일사천리로 역할을 분담했다.
“너 PPT 할 줄 알지? 그럼 PPT는 니가 만들어줘.”
“알았어.”
야무지게 생긴 여학생에겐 파워포인트를 부탁했다.
나머지 한 명은 최치우와 함께 자료를 검토해서 발표 원고를 작성할 예정이다.
특별히 원하는 사람이 없어서 발표는 최치우가 맡게 됐다.
최치우는 첫 번째 조별 회의에서 30분도 지나기 전에 역할을 나누고 로드맵을 짰다.
아니나 다를까, 다른 조는 책임 회피를 하는 조원들 때문에 서로 원수가 되고 있었다.
‘누군가 대신 나서줄 거라는 기대는 무의미해. 문제가 있으면 모두 내가 해결한다. 그 열매도 내가 먼저 따서 함께 나누면 되고.’
최치우는 리더가 되어 조별 과제를 진행하며 큰 교훈을 얻었다.
아주 작은 단위의 조직이지만 그는 사람들을 이끄는 법을 배워갔다.
이전까지의 삶에서 그는 혼자서만 싸우는 외로운 승부사였다.
그러나 최치우는 불특정 다수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 역량을 키우고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많이 변화하고 또 많이 성장하는 중이다.
***
“이처럼 에너지의 미래는 우리가 감히 짐작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지금의 과학적 지식으로 한계를 긋고 재단하면 안 됩니다. 수소와 전기가 새로운 대체 에너지로 각광받고 있지만, 메탄 하이드레이트 같은 미지의 에너지원이 언제 떠오를지 모릅니다. 당장은 활용 가능한 방법이 없어도 기술이 발전하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죠. 우리가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에너지와 금속이 세계를 구할 수도 있습니다. 에너지의 미래는 곧 인류와 세계의 미래입니다.”
발표가 끝났다.
최치우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조별 과제를 마무리 지었다.
그가 조를 이끌었지만 네 명 모두 자기 역할을 해냈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꿀을 빨려고 하던 삼수생도 자료 조사를 열심히 했다.
짝짝짝짝짝!
강의실에 박수 소리가 울렸다.
원래 예의상 발표가 끝날 때마다 박수를 친다.
그렇지만 최치우를 향한 박수 소리는 유독 큰 것 같았다.
같은 강의실의 학생들도 누가 과제를 잘했는지 알 건 다 알기 때문이다.
“1학년 조별 과제에서 이런 퀄리티라니, 기대 이상이에요. 아주 훌륭했어요.”
“감사합니다. 조원들이 노력해 준 덕분입니다.”
최치우는 공개적으로 교수의 칭찬을 받았다.
그러면서 공을 조원들과 나누는 걸 잊지 않았다.
작은 칭찬이라도 함께 고생한 사람들을 챙기는 건 아주 중요한 덕목이다.
최치우는 1학년답지 않은 멋진 발표와 더불어 조원들을 챙기는 모습으로 좋은 이미지를 만들었다.
신입생 MT와 연이은 술자리에 이어 전공과목 조별 과제를 통해 또 한 번 두각을 나타낸 것이다.
“최치우 군은… 강의 끝나고 내 방으로 와요.”
“알겠습니다.”
미중년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교수가 최치우를 따로 불렀다.
최치우는 아직 그에 대해 잘 몰랐다.
그러나 전공 교수의 부름을 받은 건 나쁜 일이 아닐 터였다.
그렇게 강의가 끝났고, 보나마나 최치우의 조는 A+를 받게 될 것이다.
최치우는 전공 교수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며 그의 연구실로 걸어갔다.
‘김도현 교수, 세계가 주목하는 미래 에너지 전문가인데… 미국에 교환교수로 갔다가 이번에 복귀하셨군. 그래서 모를 수밖에 없었어. 특이한 점은 전설적인 고고학자 김도훈의 손자, 역시 평범한 사람은 아닌 것 같네.’
최치우는 입학하기 전부터 에너지 자원 공학과에 대한 준비를 철저히 했다.
그래서 웬만큼 유명한 전공 교수는 다 알고 있었다.
김도현 교수를 빼먹은 건 그가 지난 학기까지 외국에 있었기 때문이다.
똑똑-.
여유를 두고 천천히 움직인 최치우는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준 건 김도현 교수가 아닌 조교였다.
“어떻게 왔어요?”
“에너지 자원 공학과 1학년 최치우입니다. 교수님께서 잠깐 보자고 하셨습니다.”
“아, 이야기 들었어요. 들어와요.”
무슨 말을 들었는지 조교가 흔쾌히 문을 열어줬다.
연구실 안에는 김도현 교수가 쓰는 방이 따로 하나 더 있었다.
“교수님, 1학년 최치우 학생 왔습니다.”
“들어와요. 그리고 우리 커피 두 잔만 부탁해요.”
김도현 교수는 조교에게도 존댓말을 쓰는 모양이다.
권위적인 대학 사회에서 흔치 않은 모습이다.
그의 집무실에 들어선 최치우는 인사를 하고 소파에 마주 앉았다.
“내가 좀 찾아봤는데 수능 만점을 받았더군요. 과대인 이시환 학생도 최치우 학생을 아주 좋게 평가하고 말이에요.”
김도현 교수는 잠깐 사이 최치우에 대해 조사를 마쳤다.
최치우가 연구실로 걸어오며 김도현에 대해 알아본 것과 똑같았다.
“방금 전 발표는 1학년 레벨이 아니었어요. 디테일이 중요한 게 아니라 미래 에너지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아주 남달라서……. 사실 한국에서 열심히 공부해 서울대를 온 학생들은 어딘지 머리가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최치우 학생은 다른 거 같아서 커피나 한잔 마시고 싶었어요.”
어려서부터 외국에서 자라서인지 김도현의 말투는 나긋나긋했다.
다른 중년 남성이라면 이상하겠지만, 갈색 뿔테와 부드러운 눈매 때문에 말투도 제법 잘 어울렸다.
“과찬이십니다.”
“좀 즉흥적으로 떠오른 생각인데, 여름방학 계획이 있어요?”
“아직 특별한 건 없습니다.”
“우리 과에서 대학원생과 고학년 한두 명이 포함된 탐사대를 만들 계획이에요. 원래라면 신입생은 자격이 없지만 최치우 학생이 원한다면 함께했으면 하는데, 어때요?”
“탐사대라면 어떤 활동을 하는지 궁금합니다, 교수님.”
“이번 여름엔 독도를 갈 거예요. 최치우 학생이 발표한 메탄 하이드레이트를 탐구하는 게 목적이지요.”
미국에서 돌아온 촉망 받는 학자 김도현은 독도 밑에 매장된 불타는 얼음 메탄 하이드레이트(Methane Hydrate)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최치우는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고민이 필요한 때가 있고 곧장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참여하겠습니다.”
“시원시원하네요. 좋아요. 대신 여름방학 전까진 혼자 알고 있어요.”
김도현과의 만남이 최치우를 어디로 이끌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최치우의 가슴이 세차게 뛰고 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