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기연보다 인연>
여름방학이 끝났다.
최치우는 이글거리는 태양이 기승을 부리는 동안 이룬 게 적지 않았다.
웹툰 정식 연재가 시작됐고, 파이트 클럽에서 데뷔전 승리를 거뒀다.
최강이라는 그의 가명은 웹툰 바닥과 파이트 클럽에서 요주의 신인으로 주가를 올리게 됐다.
뿐만 아니라 전주에서 산신령 허철후를 만났다.
원래는 여유 자금 6천만 원을 다 투자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영약을 얻을 수 있다면 남는 장사이다.
돈은 언제든 벌 수 있지만, 내공을 증폭시킬 기회는 아무 때나 찾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허철후는 돈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최치우의 가능성을 목도하고 은거를 깼다.
순식간에 술을 물로 바꾸는 힘을 가진 최치우가 만독불침이라는 전설 속 경지를 언급했다.
게다가 덤으로 임독양맥도 타통하겠다고 밝혔다.
약초꾼이라면 그러한 광경을 보고 싶을 수밖에 없다.
물론 허철후의 마음은 일종의 호승심만으로 움직이진 않았다.
그가 세상에 진 빚을 최치우가 대신 갚겠다는 말이 결정적이었다.
최치우는 호령독삼을 통해 얻은 힘으로 세상을 이롭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성인군자처럼 살 수는 없지만, 그래도 약한 사람들을 등치면서 성공하진 않을 것이다.
허철후는 최치우에게 투자를 한 셈이다.
어쩌면 그에게 있어서 인생 마지막 승부수인지도 모른다.
“여긴가, 자네가 꿈을 키우는 공간이?”
지리산으로 떠난 허철후가 최치우를 찾아왔다.
둘은 최치우가 무공을 수련하는 체육관에서 다시 만났다.
“멀리 오셨는데 내어드릴 차나 커피도 없습니다.”
“되었네. 대접이나 받자고 예까지 왔겠나.”
허철후는 미소를 지으며 철퍼덕 주저앉았다.
최치우도 그의 맞은편에 앉아 숨을 골랐다.
일주일 동안 연락이 없던 허철후가 불쑥 서울에 나타난 이유는 하나뿐일 것이다.
호령독삼.
자연이 품은 순수한 극독을 거둬 온 게 분명했다.
“먼저 간단히 설명부터 하겠네.”
허철후는 말을 빙빙 돌리지 않았다.
자신이 얼마나 힘들게 호령독삼을 채취했는지 생색을 내지도 않았다.
쓸데없이 말이 많은 사람은 사기꾼일 확률이 높다.
말보다 행동을 선호한다는 점에서 허철후는 최치우와 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호령독삼은 예로부터 우리 땅에서 나는 가장 위험한 독초로 유명했네. 워낙 희귀하기에 기록되어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뿐, 심마니와 땅꾼 중에서 호령독삼 이야기를 안 들어본 이는 몇 없을 걸세.”
마치 할아버지에게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를 듣는 기분이다.
최치우는 진지하게 그의 설명을 경청했다.
곧 희대의 독초인 호령독삼을 소화시켜야 한다.
그렇기에 작은 단서 하나도 놓칠 수 없었다.
“호령독삼은 돌연변이지. 산삼에 독성이 깃들어 기이하게 진화한 것일세. 그렇기에 독성과 약성 모두 천종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강하다네. 오죽하면 호령독삼 이파리를 잘못 뜯은 산짐승들이 모조리 죽어 자빠지겠는가. 그렇게 죽은 짐승의 시체를 먹은 호랑이도 덩달아 쓰러졌다고 하네.”
“독 기운으로 호랑이를 죽일 정도라면…….”
“어마어마한 놈인 게지. 처음 호령독삼이 알려진 것도 사냥꾼들에 의해서라네. 산짐승과 호랑이 시체가 줄지어 있는 걸 보고 호령독삼의 위험성을 알게 됐다는 설이 있네.”
각오는 했지만 새삼 호령독삼이 얼마나 무서운 독초인지 알게 됐다.
그러나 겁이 나지는 않았다.
최치우는 허철후를 바라보며 말했다.
“호랑이는 쓰러져도 저는 다를 겁니다.”
“암, 달라야지. 마음은 단단히 먹었는가?”
“준비됐습니다.”
“잠시 기다리게.”
허철후가 체육관 구석에 놓아둔 상자로 걸어갔다.
검은색 천으로 덮어놓은 상자에서 호령독삼을 꺼내려는 것이다.
솨아아아-
천을 걷어내고 상자 뚜껑을 열자 퀴퀴한 향이 진동했다.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깊이 묵은 향이었다.
“이놈일세. 25년 전 지리산에서 처음 발견했고, 이후 누구도 건드리지 못한 것을 캐왔네.”
허철후는 하얀 삼베로 호령독삼을 싸놓았다.
하지만 호령독삼의 독기 때문에 삼베가 까맣게 변색돼 있었다.
“평범한 사람은 이파리 하나만 씹어도 즉사할 것이네. 노파심에 한 번 더 일러둠세.”
“어르신, 저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허철후가 체육관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최치우는 조심스레 삼베를 풀고 새까만 호령독삼을 직접 봤다.
굵은 산삼처럼 생겼으나 몸통이 검은색이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파리는 다른 산삼처럼 초록색이었다.
허철후는 어떤 식으로든 복용하기 쉽게 기본적인 손질을 해왔다.
덕분에 흙이나 잔해가 묻어 있지 않았다.
‘호령독삼을 발판 삼아 시간을 아낀다. 이쯤은 가볍게 해낼 수 있다, 최치우.’
스스로를 다독인 최치우는 금강나한권을 운용했다.
마침 불가(佛家)의 정종 무공을 익힌 게 도움이 됐다.
금강나한권의 구결대로 내공을 움직이면 자연스레 해독 작용이 일어난다.
“후우우!”
최치우는 한 번 더 심호흡을 했다.
술을 물로 만든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도전이다.
만약 호령독삼의 강력한 독기를 약으로 소화시켜 흡수하지 못하면 어이없이 생명을 잃게 된다.
또다시 환생이야 하겠지만 그는 이번 인생에서 이루고 느끼고픈 게 많았다.
투둑- 투두둑-
최치우가 과감하게 뿌리를 뜯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호령독삼을 씹어 먹기 시작했다.
와작, 와자작!
우물거리며 뿌리 하나를 잘근잘근 삼켰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뿌리를 입에 넣는 순간 쓰러졌을 것이다.
다행히 최치우는 아직 멀쩡했다.
그는 이파리와 잔가지를 떼어 먹었다.
가장 굵은 몸통은 마지막을 위해 남겨뒀다.
겉으로 보기엔 그저 약초를 생으로 먹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최치우는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금강나한권의 구결을 운용하며 내공을 전신으로 보냈다.
‘역하다. 사천당문의 절독을 통째로 마시는 기분…….’
잠깐이라도 방심하면 그대로 토악질을 할 것 같았다.
내공의 흐름이 깨지는 순간, 무방비로 독기에 노출된 육체는 안에서부터 녹아내릴 것이다.
‘조금만 더!’
최치우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내공을 운용했다.
어느새 그는 호령독삼의 가장 굵은 몸통을 삼켰다.
이 광경을 지켜보는 허철후도 손에 땀을 쥐고 있었다.
우선 최치우가 호령독삼을 다 먹었다는 게 놀라웠고, 혹시 언제 쓰러질지 몰라 마음이 위태로웠다.
화아아악!
가부좌를 틀고 앉은 최치우의 등 뒤에서 서광이 솟아나왔다.
독기와 내공이 부딪치며 어마어마한 기운이 그의 몸에서 뿜어지고 있었다.
‘독을 응축시켜 단전으로 보내고, 정순한 내공으로 걸러내어 다시 전신 혈도로 퍼트린다. 그 찰나의 힘으로 임독양맥을 뚫는다!’
계산이 완벽하게 섰다.
최치우는 호령독삼이라는 맹수를 단전으로 몰아넣었다.
죽으나 사나 단전에서 승부를 봐야 한다.
아랫배가 부글부글 끓다 못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버티자, 무조건!’
그때였다.
꽝!
최치우의 몸에서 뭔가 폭발하는 소리가 울렸다.
이윽고 그의 온몸이 휘청거리며 흔들거렸다.
“이, 이보게!”
지켜보던 허철후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그러나 옆으로 넘어질 것 같던 최치우의 몸이 다시 균형을 잡았다.
방금 전의 충격은 임독양맥이 뚫리며 발생한 것이다.
최치우가 호령독삼의 기운을 빌려 임독양맥을 타통한 것이다.
스윽-
그는 감았던 눈을 뜨고 허철후를 바라봤다.
[어르신, 해냈습니다.]
최치우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데도 허철후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을 수 있었다.
귀가 아니라 속마음으로 뜻이 전해진 것이다.
“이것이… 대체 무슨 일인가? 말을 안 하는데 어떻게 자네 목소리가 들리는 게지?”
[전음이라는 것입니다.]
최치우는 말 대신 전음을 사용하며 미소를 지었다.
임독양맥을 타통하며 내공이 급증했다.
따라서 빈약한 내공으로는 펼칠 엄두를 못 내던 전음을 자유자재로 쓰게 된 것이다.
만독불침(萬毒不侵)도 확실했다.
최치우의 전신 혈도를 타고 호령독삼의 독 기운이 순화되어 흐르고 있었다.
독이 독을 막아주는 결계가 된 셈이다.
“자네!”
상황을 파악한 허철후가 벌떡 일어섰다.
최치우도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뻗었다.
기쁨에 겨워 맞잡은 두 사람의 손이 따뜻하고 든든해 보였다.
***
계절의 변화는 역시 옷차림의 변화로 체감할 수 있다.
분명 엊그제까지 반팔을 입고 다녀도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런데 이제는 긴팔을 입는 게 자연스러웠고, 추위를 많이 타는 녀석들은 동복 재킷까지 꺼내 입었다.
이러다 보면 금방 겨울이 되어 패딩을 입고 다닐 것이다.
최치우는 옷장을 열어 겨울옷을 확인했다.
막상 찾아보니 입을 만한 패딩이 하나도 없었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메이커 패딩은 꿈도 못 꿨을 터이다.
“사실 지금은 패딩 따위 더 필요 없지만.”
최치우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웃었다.
엄지손톱 크기의 내공이 불쑥 자라 주먹만큼 커졌다.
임독양맥을 타통하면서 내력이 급증했다.
이만한 내공이면 아주 조금 모자란 일 갑자이다.
자그마치 60년 동안 수련해야 얻을 수 있는 내공이 단전에 꿈틀거리고 있었다.
내공을 운용하면 패딩이 아니라 반팔만 입고도 한겨울을 보낼 수 있다.
단전에서 올라온 뜨끈뜨끈한 열기가 추위로부터 온몸을 지켜줄 것이다.
그러나 반팔을 입고 다니면 주위에서 이상하게 쳐다볼 게 분명했다.
무엇보다 어머니가 걱정하실 것 같았다.
‘갑자기 옷을 사면 어머니께서 이상하게 생각하실 테고, 그렇다고 이대로 다니기도 애매하고. 어느 정도까지 말씀을 드리는 게 좋을까.’
최치우의 고민이 깊어졌다.
원래 사소한 문제가 더 어려운 법이다.
그의 수중에는 당장 쓸 수 있는 현금이 5천만 원 넘게 있었다.
끝끝내 답례를 거부하는 허철후에게 천만 원을 건네주고 남은 돈이다.
최치우는 부족하지만 진심으로 성의를 표시했다.
허철후도 더는 사양하지 않았다.
사실 허철후는 움막 뒤뜰에 묻어놓은 약초 몇 뿌리만 팔아도 금방 재기할 수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갑부가 될 수 있는 능력자였다.
그러나 최치우 덕분에 오랜 은거를 깬 그는 먼저 심신을 수양한 후 세상에 나오겠다고 약조했다.
앞으로도 최치우의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줄 것 같았다.
어쨌든 예상보다 적은 돈을 쓰고 기연을 얻은 최치우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인생을 살며 가장 중요하게 여길 것이 인연이라는 깨달음이다.
돈도, 기연도 인연보다 중요하지 않았다.
좋은 인연은 무궁무진한 보물이 쌓인 창고와 같다.
만약 돈 때문에, 눈앞의 이익 때문에 인연을 저버리면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꼴이다.
“나도 참 늦게 배운다.”
일곱 여덟 번의 인생을 살고 나서 겨우 사람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최치우는 불세출의 재능을 지녔지만, 이런 부분에서는 완전히 젬병이었다.
하지만 이제라도 인연의 무게를 느끼게 됐으니 감사한 일이었다.
옷장을 둘러보다 생각이 깊어졌다.
“복잡하게 고민하지 말자. 내 사람들에겐 최대한 솔직하게 다가가는 거야.”
그는 결심을 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고민이 끝났으니 행동은 빠를 수밖에 없다.
“어머니!”
최치우가 방문을 열고 어머니를 불렀다.
늦게 퇴근해 거실에서 TV 드라마 재방송을 보던 어머니가 걸어왔다.
“아직 안 잤니?”
“네, 말씀드릴 게 있어요.”
어머니는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최치우를 바라봤다.
사춘기에서 벗어나 마음을 잡은 아들은 그녀의 자랑이 됐다.
무슨 말을 하든 그저 기특해 보였다.
“웹툰이라고 들어보셨죠?”
“컴퓨터로 만화 보는 거 맞지?”
“네. 지금 네트에서 연재되고 있는 리얼 헌터라는 웹툰, 제가 스토리를 썼습니다.”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