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번째 환생-17화 (17/243)

# 17

그의 시야에 낡고 초라한 움막이 들어왔다.

누군가 임시로 거처를 마련해 놓은 게 보였다.

평범한 걸음걸이로 올라왔다면 30분은 족히 걸렸을 것이다.

하지만 경공을 펼친 덕분에 5분 만에 허철후의 움막을 찾을 수 있었다.

‘자연인이 산다에 나올 것 같은 곳이군.’

최치우는 종편 TV의 유명 프로그램을 떠올렸다.

대체 무슨 사연이 있기에 최고의 심마니가 이런 곳에 은거했는지 궁금해졌다.

‘이것저것 재지 말고 진심으로 승부하자.’

최치우는 머리를 굴리지 않았다.

그는 일부러 인기척을 내며 움막 가까이 다가갔다.

부스럭-

산길에서 나뭇가지를 밀어내고 나오려니 소리가 날 수밖에 없었다.

“누구요?”

기다렸다는 듯 움막 안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다 떨어진 개량 한복을 입은 할아버지가 나타났다.

“어허, 자네, 누군가?”

환갑을 넘긴 듯한 노인의 행색은 꾀죄죄했다.

그러나 얼굴빛과 눈동자가 맑고 기력도 왕성한 게 느껴졌다.

괴짜들이 으레 그렇듯 날카롭고 예민해 보이지는 않았다.

“허철후 선생님이십니까?”

“내가 허철후는 맞네만, 선생은 아니지.”

“어르신을 만나기 위해 서울에서 왔습니다. 최치우입니다.”

최치우는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허리를 일으킨 그는 한 번 더 놀랐다.

‘정명한 기운이다. 진짜 은거기인이구나.’

허철후의 눈빛이 노인답지 않게 형형했다.

낯선 불청객을 꿰뚫어 보려는 것 같았다.

“오랜만의 손님이고, 또 무척 어려 보여 사연이 궁금하네만… 자네가 찾는 것은 여기 없네. 나는 아무것도 줄 게 없으니 헛심 빼지 말고 돌아가게나.”

말을 마친 허철후가 다시 움막의 방문을 닫으려 했다.

가끔씩 불쑥 찾아와 약초나 뱀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는 모양이다.

“약초를 구하려 온 게 아닙니다.”

최치우는 그가 움막 안으로 들어가기 전 새로운 화두를 던졌다.

다행히 문을 닫으려던 허철후의 손이 멈췄다.

“산삼을 원하는 것도, 몸에 좋은 뱀을 찾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 뭣 하러 예까지 온 겐가? 내가 한때 이름을 날린 심마니이자 땅꾼이라 걸음을 한 것이 아니고?”

허철후의 목소리가 이전보다 커졌다.

산에서 뭘 먹고 사는지 음성에 힘이 실려 쩌렁쩌렁했다.

최치우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독을 찾고 있습니다.”

“독?”

“어설픈 독은 필요 없습니다. 사람이 절대 먹으면 안 되는 강력한 독을 원합니다.”

허철후의 눈매가 달라졌다.

최치우의 말에 담긴 뜻을 알아들은 것이다.

그의 반응을 본 최치우는 미소를 지었다.

‘역시 이 사람은 진짜다. 제대로 찾아왔어.’

사람이라곤 둘밖에 없는 외딴 산 중턱에서 노소(老少)가 서로를 마주 보고 서 있다.

은거기인이 된 전설적인 심마니, 한계를 모르고 성장하는 고3.

두 사람의 인연이 여기서 끝나지는 않을 것 같았다.

***

“정말 열아홉 살이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학생에게 술을 줘도 되나 모르겠구만.”

“술은 어른에게 배워야 된다고 들었습니다.”

“하긴, 그 말이 맞네. 한잔 들고 보지.”

허철후는 움막 뒤편에 묻어둔 술통 하나를 꺼내왔다.

그가 직접 채취한 약초를 섞어 땅 밑에서 푹 익힌 약주였다.

최치우는 두 손으로 술을 받았다.

향기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건배는 생략하세나.”

“네, 그럼.”

그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아주 잠깐 뜨거운 기운이 치솟았지만, 이내 시원하고 청아한 향이 온몸을 쓸어내렸다.

최치우가 살던 모든 차원을 통틀어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술이었다.

과연 허철후의 명성은 헛되지 않았다.

“술이 아니라 약이군요.”

“어허허, 어린 친구가 술맛을 제대로 보니 신기할 노릇일세.”

허철후는 기분이 좋은 듯 웃음을 터트렸다.

주거니 받거니 몇 번 술잔을 비운 그가 가슴 깊이 묻어둔 이야기를 꺼냈다.

“대충 알고 찾아왔겠지만 내 별명은 산신령이었네. 심마니 중에서도 제일이었고, 땅꾼 중에서도 나보다 나은 놈이 거의 없었지. 오죽하면 산신령이라는 과분한 별명이 붙었겠나.”

“어울리는 별명 같습니다.”

“그런가? 아무튼 산신령이라는 이름값 덕분에 잘 나갔었지. 돈도 원 없이 벌고 TV에도 나오고……. 하지만 다 무상한 짓거리였네.”

허철후의 말에서 짙은 회한이 느껴졌다.

그는 자신이 만든 약주를 한 대접 가득 따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내가 왜 이런 움막에 처박혀 사는지 궁금하겠지?”

“궁금합니다.”

“사람을 죽였네.”

최치우는 변함없는 시선으로 허철후를 바라봤다.

확신하건대 그가 일부러 사람을 죽일 범죄자는 아닐 것이다.

“어째서 놀라지 않는 겐가?”

“놀랐습니다. 그러나 사연을 끝까지 듣고 놀라는 게 순서인 듯합니다.”

“역시 신통한 젊은이로고. 그럼 어디 내 사연을 들어보게.”

허철후는 다시 술 한잔을 비웠다.

소매로 대충 입가를 닦은 그가 오래 묵혀둔 이야기를 꺼냈다.

“하늘은 내게 탁월한 재주를 선물해 줬네. 손끝마다 산삼이 스쳤고, 대충 발로 밟으면 몸에 좋은 뱀이 걸렸으니……. 나는 산신령이라는 별명을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기고만장했더랬지. 그러던 중 흔히 말하는 재벌 가문의 의뢰를 받게 되었어.”

허철후의 사연은 흥미진진했다.

최치우는 숨을 죽이고 그의 말에 몰입했다.

“다 늙어 기력이 쇠한 회장을 위해 아들이 산삼을 수소문한 걸세. 돈은 얼마가 들어도 괜찮다면서. 재벌 2세지만 효심이 지극한 친구였지. 마침 내게 삼대가 덕을 쌓아야 구경할 수 있다는 천종 한 뿌리가 있었네. 무려 120년을 살아온 놈이었고, 한국에서 이보다 더 귀한 삼은 찾기 힘들 거라 자신했지.”

“120년 수령의 천종산삼이라면… 가치를 돈으로 따지기 힘들다고 들었습니다.”

“10억을 받고 넘겨줬네. 부르는 게 값이네만, 그만하면 적당하다 여겼지. 돈을 받고 팔았는데도 고맙다는 소리를 백 번 넘게 들었다네. 헌데 천종을 복용한 그 친구의 아버지, 재벌 회장이 어찌 됐는지 아는가?”

“부작용이 발생한 겁니까?”

“열병이 나서 죽어버렸네. 예상한 것보다 천종의 약기가 강했고, 늙은 육신이 감당하기엔 버거웠던 게지.”

“꼭 산삼을 복용한 탓이라고 단정할 수는…….”

“그 양반이 갑자기 죽으며 보인 증상은 천종의 부작용이 분명했네. 누구도 나를 탓하지 않았으나 나는 견딜 수 없었지. 그래서 심마니 노릇을 하며 번 돈을 전부 기부하고 이곳에 숨어든 게야.”

허철후는 꼿꼿한 인간이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을 허용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최치우는 교과서에서 배운 윤동주 시인을 떠올렸다.

직업과 시대는 달라도 두 사람 사이에 닮은 구석이 매우 많은 것 같았다.

“내가 왜 더 이상 삼이나 뱀을 팔지 않는지 알겠는가?”

“이해가 됩니다.”

“어린 친구의 공력이 대단하다는 것이 느껴지네. 독이 곧 약이고 약이 곧 독이지. 그만한 심득을 벌써 깨우쳤으니 자네는 보통 사람이 아닐 걸세. 허나 미력한 재주로 또다시 세상에 죄를 짓고 싶지 않은 마음을 헤아려 주게.”

허철후는 처음 만난 소년에게 진심을 털어놓았다.

한 분야에서 경지에 오르게 되면 전체를 아우르는 안목을 갖게 된다.

만류귀종(萬流歸宗)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그는 최치우의 진가를 어느 정도 알아봤고, 자신을 귀찮게 하는 다른 불청객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걸 인정했다.

그렇기에 가슴속에 묵혀둔 사연까지 말해준 것이다.

최치우도 허철후의 사람됨에 감동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어르신, 속내를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한 말씀만 드리고 싶습니다.”

“말해보게.”

“세상에 진 빚, 갚으셔야 합니다.”

“무어라?”

예상 못한 말에 허철후가 눈을 크게 떴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진즉 술잔을 던졌을 터이다.

최치우는 허철후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을 계속했다.

“약으로 쓸 엄두도 낼 수 없는 순수한 극독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다스려 약으로 소화시키겠습니다. 그렇게 얻은 힘으로 세상에 보탬이 되겠습니다. 어르신께서 약을 잘못 써서 빚을 졌다고 느끼신다면 제가 대신 그 빚을 갚겠다는 뜻입니다.”

“…….”

술잔을 잡은 허철후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화가 나서가 아니었다.

최치우의 당돌한 말에 마음의 빗장이 열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네 말대로 된다고 치세. 허나 자연에서 발생한 극독은 인간이 다스릴 수 없네. 120년 묵은 천종의 부작용은 애들 장난으로 느껴질 정도겠지. 그것을 다스려 약으로 소화시킨다? 정녕 현실에 그만한 경지를 이룬 사람이 있겠는가.”

“보여 드리겠습니다.”

최치우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프로의 세계에서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증명해야 한다.

그는 허철후가 땅속에서 꺼내온 술독을 가까이 당겼다.

맑고 깊은 향이 나는 약주지만 40도를 가뿐히 넘는 독주이기도 하다.

허철후는 잠잠히 최치우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가진 내력이라면… 이 정도는 충분히 가능해.’

최치우는 단전에 남은 내공을 손끝으로 모았다.

엄지손톱 크기를 겨우 넘긴 내공이지만 순정(純正)하고 위력적인 기운이다.

고오오오오-

내공이 집중되자 주위의 공기가 달라졌다.

‘집중해서 모두 한 방에 태워 버린다!’

최치우의 눈동자가 칼날처럼 예리하게 빛났다.

그가 작정한 순간, 두 손에 모은 내공이 불꽃처럼 뿜어졌다.

화르르륵!

무형의 내공은 거친 불길처럼 술독을 휩쓸고 허공으로 사라졌다.

이치는 간단하다.

뜨거운 불로 술기운을 태워 버리는 것과 똑같다.

졸졸졸-

최치우가 텅 빈 허철후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드시지요.”

말없이 술잔을 비운 허철후는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허어, 기인을 만나 은거를 풀게 되는구만. 하늘이 내게 남겨둔 운명이 있던가.”

놀랍게도 술독의 약주는 밍밍한 물이 되어 있었다.

최치우가 내공으로 독한 알코올을 다 태워 버렸기 때문이다.

술을 물로 만든 기적을 체험한 허철후는 더 이상 최치우를 의심하지 않았다.

눈앞에 앉은 소년이라면 자연이 만든 극독을 다스려 약으로 소화할 게 분명해 보였다.

“그래, 어느 정도로 강력한 독을 원하나?”

“만독불침을 이루고 남은 기운으로 임독양맥을 타통할 만큼 강력한 독이어야 합니다.”

“만독불침? 임독양맥? 그게 실현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전설 속 설화인 줄 알았거늘.”

“방금 보시지 않았습니까. 술이 물이 되는 것을.”

최치우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에 허철후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결심을 굳힌 듯 최치우의 손을 붙잡았다.

꺼칠하고 때 묻은 손이지만 체온은 따뜻했다.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 될지 짐작하지 못하겠네만… 세상을 이롭게 해줘야 하네.”

“약속은 꼭 지키겠습니다.”

“만독불침과 임독양맥 타통을 이룰 만한 극독이라면…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는구만.”

최치우는 기대감 어린 눈빛으로 허철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호령독삼(虎靈毒蔘), 그것밖에 없네.”

호랑이의 영혼이 깃든 독 산삼.

이름만 들어도 짜릿한 느낌이 온다.

은거를 깨기로 결심한 허철후가 작정한 듯 말했다.

“지리산에 호령독삼이 한 뿌리 있다네. 나 말고는 아는 사람도 없거니와 어떤 심마니도 감히 건드릴 엄두를 못 내는 놈이지. 일주일만 주게.”

“감사합니다, 어르신.”

최치우는 고마움을 담아 고개를 깊이 숙였다.

기대 이상의 선물을 받게 될 것 같았다.

호령독삼도 호령독삼이지만 허철후라는 기인과 인연을 맺은 것 자체가 가장 큰 수확이었다.

무서운 고3 최치우는 단번에 몇 단계 한계를 돌파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열아홉 살의 여름, 시간은 여전히 그의 편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