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내 목소리를 기억하다니 영광이네.”
“생각보다 연락이 늦었군요.”
“기다리고 있던 건가? 자네에게 어울리는 무대를 찾고 있었지.”
“400만 원을 썼으니 그냥 사라지진 않을 거라고 예측했습니다.”
“그때도 느꼈지만 나이답지 않은 판단력이야. 아무튼 고민은 좀 해봤나?”
“만나서 이야기하죠. 내일 2시 홍제역 앞에서.”
“귀한 유망주의 부름이니 내가 직접 가야지.”
최치우는 운영자에게 질질 끌려가지 않았다.
약속 시간과 장소도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운영자도 순순히 동의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에게도 최치우라는 참신한 카드가 필요한 것 같았다.
최치우는 실전 경험도 쌓고 돈도 벌 수 있기에 파이트 클럽에서 활동해 볼 생각이다.
하지만 주도권은 자신이 가져야 한다.
장기의 졸이 될 바에는 판을 엎어버릴 것이다.
“재밌어지겠는데.”
폰을 무음 모드로 바꾼 최치우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개학하기 전 피를 달아오르게 만드는 이벤트가 생길 것 같았다.
파이트 클럽에 얼마나 대단한 강자들이 있는지, 내공을 쓰지 않고 경험하는 실전은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다.
거기에다 돈도 벌 수 있다면 꿩 먹고 알 먹는 격이다.
“UFC처럼 시시하진 않겠지?”
누가 최치우의 혼잣말을 들었다면 정신이 나갔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최치우는 진심이었다.
세계 최고의 파이터들이 모이는 UFC도 짜고 치는 장난처럼 보였다.
부디 파이트 클럽은 자신을 자극할 수 있는 무대이기를 바랐다.
운영자의 전화를 받았기 때문일까.
체육관 중앙에서 수련에 임하는 그의 표정이 이전보다 진지해진 것 같았다.
***
파이트 클럽 운영자는 허풍을 떤 게 아니었다.
대한민국에서 돈과 권력을 가진, 그러면서도 심심해 죽을 것 같은 미친놈들이 파이트 클럽의 스폰서 군단이었다.
고등학생이나 길거리 파이터들이 싸우는 동영상을 찍어 올리는 건 주니어 리그 축에도 못 들었다.
메이저리그와 비교하면 싱글 A보다 낮은 단계였다.
최치우는 운영자의 추천으로 단번에 어둠의 세계에서 이름난 강자와 맞붙게 됐다.
운영자는 오늘 무대가 야구로 따지면 더블 A 수준이라고 일러줬다.
그렇기에 진짜 엄청난 스폰서들은 많이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도 파이트머니가 2천만 원이다.
국내 최고의 종합격투기 리그에서도 파이트머니로 2천만 원을 받는 선수는 거의 없었다.
파이트 클럽 운영자는 TV에 나오는 격투기를 전부 쇼라고 폄하했다.
대전료 차이만 봐도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만약 최치우가 이기면 얼마를 벌지 모른다.
기본 파이트머니 2천만 원에 싸움을 지켜본 스폰서들이 자유롭게 승리 수당을 붙여준다.
파이트 클럽 스폰서들은 짠돌이가 아니었다.
화끈하게 이기면 승리 수당이 파이트머니의 두 배, 세 배로 불어날 수도 있었다.
‘돈을 벌려고 싸우는 건 아니지만 준다는데 나쁠 건 없지. 웹툰으로는 꾸준히 벌고 여기선 가끔 목돈을 챙기면 되겠다.’
최치우는 가볍게 몸을 풀었다.
선수 대기실에도 샌드백이 설치돼 있었다.
운영자는 강남의 대형 종합격투기 체육관을 통째로 빌렸다.
최치우가 수련을 위해 임대한 낡은 체육관보다 열 배는 더 넓은 공간이었다.
당연히 오늘은 파이트 클럽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만 입장할 수 있었다.
‘누구랑 싸우게 될까?’
샌드백을 두들기다 보니 호기심이 생겼다.
최치우는 아직까지 어떤 상대와 싸우게 될지 몰랐다.
파이트 클럽은 키나 몸무게로 체급을 나누지 않았다.
룰이 없는 무제한 격투이니 누가 나와도 싸워 이기면 장땡이다.
운영자는 무대에 오르기 10분 전에 상대의 정보를 가르쳐 주는 게 원칙이라고 했다.
사전 정보가 없어야 공평하게 평소의 실력대로 싸울 수 있기 때문이란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대기실 문이 열렸다.
미니스커트를 입은 미녀가 들어왔다.
“경기 10분 전이에요.”
그녀가 붉은 입술을 달싹이며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최치우는 말없이 종이를 받아 읽었다.
드디어 누구와 싸우게 될지 알게 됐다.
“김인철, 키 190에 몸무게 105. 헤비급이네?”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운영자는 최치우의 첫 상대를 헤비급으로 매칭시켰다.
격투기 상식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파이트 클럽은 모든 상식을 파괴하는 무대이다.
“주요 경력은… 칠성파 행동 대장. 하하하하! 재밌네, 재밌어.”
어설픈 양아치가 아니라 국내에서 손꼽히는 진짜배기 조폭과 싸워야 한다.
최치우는 혼자 남은 대기실에서 웃음을 터트렸다.
고등학교 3학년의 상대로 헤비급 조폭을 선택한 파이트 클럽 운영자도 재밌었고, 칠성파 행동 대장이 겨우 더블 A 수준에서 뛴다는 것도 재밌었다.
그는 웃음기를 머금은 채 대기실 문을 열고 나왔다.
어둠의 무대에 올라 환생 후 처음으로 실전다운 실전을 체험할 시간이 된 것이다.
***
무대는 예상 외로 조용했다.
툭 솟아난 링 위로 조명이 집중됐다.
관객석에 앉은 사람들은 어둠 속에 얼굴을 숨기고 있었다.
하지만 최치우는 어떤 사람들이 스폰서 자리에 앉아 있는지 확인했다.
무공을 수련하며 날카로워진 시각 덕분이다.
‘대략 열 명 정도? 그렇게 많지는 않군. 뒤쪽에 서 있는 사람들은 스폰서들의 비서와 경호원일 테고.’
어둠에 가려진 관객석을 훑어본 최치우는 가볍게 바닥을 박찼다.
링에 올라서자 상대가 보였다.
맞은편 구석에 먼저 올라와 있는 키 190에 몸무게 105킬로의 거구.
다름 아닌 칠성파 행동 대장 출신 김인철이었다.
‘더럽게 크다. 오크랑 비슷하겠는데?’
최치우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김인철의 체구는 아슬란 대륙의 오크를 연상시켰다.
오크는 딱 저만한 덩치와 낮은 지능, 흉포한 본능으로 인간들을 괴롭혔다.
물론 파이어볼 한 방에 꽁지가 빠져라 도망가는 족속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여기서 파이어볼은 무슨, 내공도 안 쓰고 붙어야 시험이 되겠지.’
최치우는 단전에 쌓인 내공을 아예 사용하지 않을 계획이다.
미력한 내공이나마 운용하는 순간 치트키를 쓰는 셈이다.
실전 경험을 쌓기 위해선 자제하는 편이 나았다.
내공을 써야만 상대할 수 있는 강자를 만나기 전까진 최대한 원칙을 지킬 생각이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여러분. 오늘 준비한 세 개의 매치 중에서 첫 번째 카드를 소개하겠습니다.”
그때 파이트 클럽 운영자가 링 아래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마이크를 안 들었고, UFC 아나운서처럼 호들갑을 떨지도 않았다.
소수의 인원만 모여 있기에 굳이 오버할 필요가 없었다.
여기 모인 스폰서들은 피 튀는 싸움으로 아드레날린이 분비되기를 원한다.
더 화끈한 자극을 위해 싸움 시작 전에는 일부러 요란을 안 떠는 것 같았다.
“라이트 사이드, 키 190㎝에 몸무게 105㎏, 파이트 클럽 전적 4승 1패, 김인철!”
소개를 받은 김인철이 링 위에서 어두운 객석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신분을 드러내지 않은 스폰서들이 파이트머니 이상의 승리 수당을 챙겨주기 때문이다.
김인철은 파이트 클럽 안에서 제법 알려진 유명 인사였다.
그가 등장하자 객석의 스폰서들이 살짝 웅성거렸다.
“레프트 사이드, 키 177㎝에 몸무게 75㎏, 파이트 클럽 데뷔전, 최강!”
최치우는 가명을 사용했다.
파이트 클럽에서의 일이 외부로 알려질 가능성은 극히 낮다.
그럼에도 굳이 본명을 쓰고 싶지 않았다.
웹툰 리얼 헌터를 연재할 때도 문지유는 본명을 쓰지만 최치우는 최강이라는 필명을 쓰기로 했다.
우둑- 우두둑-
김인철이 목을 좌우로 꺾자 우악스런 소리가 들렸다.
딴에는 기선 제압을 하려는 것 같았다.
최치우는 여유로운 자세로 그를 쳐다봤다.
체급으로는 게임이 되지 않는다.
아마 김인철은 오늘 싸움을 거저먹는다고 생각할 것 같았다.
“매치 시작 전, 마지막 배팅 받겠습니다.”
미니스커트를 입고 대기실에서 쪽지를 전해준 미녀가 객석 사이사이를 돌아다녔다.
스폰서들의 여흥을 돋우기 위해 승리 예측 도박을 하는 모양이다.
보나마나 김인철의 승리에 돈을 거는 사람이 대다수일 것이다.
‘우리나라 조폭이 얼마나 잘 싸우는지 한번 볼까.’
최치우는 신경을 김인철에게 집중시켰다.
파이트 클럽에서는 최치우를 새파란 도전자로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최치우에게 있어 김인철은 테스트 상대일 뿐이었다.
“매치- 업!”
운영자가 싸움의 시작을 알렸다.
룰이 없으니 심판도 없다.
중상을 입거나 죽어도 책임은 스스로의 몫이다.
돈과 권력을 가진 스폰서들은 얼마든지 사고사로 위장시킬 수 있었다.
실제로 파이트 클럽에서 죽어나간 사람이 적지 않다고 들었다.
무기를 써도 되는 스페셜 매치도 있다고 하니 그야말로 야생의 전투장이었다.
“운영자가 돌았나 보다, 꼬맹아.”
김인철이 슬렁슬렁 다가오며 조소를 흘렸다.
노골적으로 최치우를 무시하고 있었다.
최치우는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마주 봤다.
“최선을 다해봐.”
긴말하지 않았다.
칠성파 행동 대장의 최선을 경험하고 싶을 따름이다.
그러나 최치우의 담담한 말이 김인철의 성질을 긁었다.
어리고 작은 놈이 건방지게 선생 같은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후우욱!
주먹이 날아왔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속도였다.
샥-
최치우의 머리칼이 주먹 끝에 스쳤다.
솥뚜껑 같은 주먹을 한 끗 차이로 피했다.
김인철은 작심한 듯 주먹을 퍼부었다.
붕- 부웅- 부우웅-
원, 투, 쓰리.
스트레이트와 훅이 섞여 시야를 어지럽혔다.
놀랍게도 최치우는 두 주먹으로 김인철의 펀치를 일일이 쳐냈다.
빡! 빡! 빡!
주먹과 주먹이 부딪치며 살벌한 타격 음이 울렸다.
내공을 쓰지 않아도 최치우의 펀치는 김인철보다 빠르고 강했다.
‘시시하다.’
최치우의 솔직한 감상이다.
두 주먹이 빨갛게 달아올랐지만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주먹이 막힌 김인철이 고통스러운 듯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아프기도 하지만 당황스러울 것이다.
모든 펀치가 정확하게 막혔기 때문이다.
“좆만 한 새끼가!”
욕을 한다는 건 절박하다는 뜻이다.
강자는 약자에게 욕을 할 이유가 없다.
화아악-
김인철이 신장과 체중을 이용해 최치우를 덮치려 했다.
주먹이 안 되니 몸으로 붙잡고 뭉개려는 것이다.
‘좋은 생각이지만…….’
최치우는 눈앞을 가린 김인철의 몸뚱어리를 보며 눈을 빛냈다.
피할 구석도 없고, 이대로 짓눌리면 위험해진다.
‘나한텐 안 통해.’
최치우는 피하지 않았다.
대신 우뚝 서서 정권을 질렀다.
슈슈슈슈슉-!
그의 주먹이 두 개에서 네 개, 네 개에서 여덟 개로 늘어났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파박! 파바바박!
최치우를 덮치려고 쫙 펼쳐진 김인철의 몸에 정권이 연타로 박혔다.
금강나한권 일초 천수여래(千手如來).
내공 없이 펼쳐도 권영(拳影)이 아른거렸다.
털썩- 쿠우웅!
바람 빠진 풍선처럼 힘을 잃은 김인철이 쓰러졌다.
있는 힘껏 최치우를 덮치려다 실컷 얻어맞고 앞으로 고꾸라진 것이다.
체중과 키 차이도, 조폭의 위압감과 실전 경험도 최치우를 위협하지 못했다.
‘이 느낌이다!’
최치우는 김인철을 쓰러트린 걸 기뻐하지 않았다.
당연한 결과였기 때문이다.
그는 두 주먹에 남아 있는 생생한 느낌에 속으로 환호했다.
시시했지만 실전은 실전이었다.
내공 없이 펼친 금강나한권이 짜릿한 손맛을 안겨줬다.
“레프트 사이드, 최강 승!”
의외의 결과에 얼이 빠져 있던 운영자가 승리를 선언했다.
너무 일방적으로 이겨 피가 튈 여지도 없었다.
객석에서 경기를 지켜본 스폰서들은 눈을 부릅뜨고 수군거렸다.
“저, 저거 뭐지? 김인철이면 칠성파 행동 대장 출신인데?”
“최강인가 하는 놈이 완전히 갖고 놀았어. 저 새끼, 물건이야.”
“키키킥, 운영자가 간만에 A급을 물어왔구만.”
자극에 미친 스폰서들의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최치우는 파이트 클럽 데뷔 무대에서 확실한 인상을 남겼다.
링 아래에 선 운영자는 아직도 믿기 힘들다는 듯 대(大) 자로 뻗은 김인철과 최치우를 번갈아 쳐다봤다.
자기가 매치를 잡았지만, 설마 최치우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둘 줄은 몰랐던 것이다.
‘돈이고 뭐고 다음 실전은 좀 더 재밌었으면 좋겠군.’
최치우는 남들이 들으면 오만하다고 욕할 생각을 하며 팔짱을 꼈다.
흔들림 없는 모습이 마치 전성기 소림사의 사대금강을 보는 듯했다.
최강이라는 그의 가명은 앞으로 파이트 클럽에서, 그리고 웹툰계에서 파란을 일으킬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