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뜨거운 여름>
기말고사 결과 최치우는 반에서 1등을 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1등을 해본 적 없는 최치우이다.
그런데 다른 것도 아닌 공부로 1등을 차지했다.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남몰래 거실에서 눈물을 훔치셨다.
어느 순간 어른스럽게 변한 아들이 마음을 잡고 공부를 하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그런데 반에서 1등이라니, 언감생심 기대도 하지 않던 성적이다.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2등과 1등은 또 느낌이 다르다.
어머니는 김밥집에서 동료 아줌마들과 손님들에게 두고두고 아들 자랑을 할 것 같았다.
최치우도 뿌듯했다.
반에서 1등이라는 성적보다 어머니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게 더 좋았다.
그는 지난 19년의 기억을 고스란히 갖고 있다.
어머니의 속을 썩이며 못난 아들로 살았던 것, 그럼에도 언제나 무한한 사랑을 받던 것을 모르지 않았다.
이제라도 조금씩 보답을 할 수 있다면, 그게 자신과 어머니의 새로운 운명이라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사실 최치우의 관심은 기말고사 성적보다 다른 데 머물고 있었다.
바로 여름방학이다.
고3에게 여름방학은 특별할 것 없는, 어쩌면 학기보다 더 괴로운 시간이다.
수능을 앞두고 스퍼트를 올려야 하는 시점, 또는 논술 준비를 빡세게 시작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치우는 여름방학 특강이나 논술 학원에 시간을 쏟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얄미운 이야기지만 공부는 지금처럼 매일 정도를 걸으면 된다.
대신 남는 시간을 활용해 육체 단련에 박차를 가할 예정이다.
동시에 문지유와 함께 작업하고 있는 웹툰 리얼 헌터로 승부를 봐야 한다.
그가 문지유에게 제시한 작업 기간은 한 달이었다.
이제 곧 그 한 달이 끝난다.
프롤로그와 3회까지, 총 4회 분량의 웹툰 원고를 들고 정식 연재를 결정지을 것이다.
네트와 케이툰, 양대 포털이 아니면 관심도 없었다.
문지유는 한 달 내내 죽어라 작업했다.
그러면서도 내심 불안해하고 있었다.
웹툰은 재밌게 잘 나왔지만, 신인이 양대 포털에서 정식 연재를 하는 건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치우는 자신만만했다.
물론 양대 포털의 벽은 높을 것이다.
하지만 벽보다 더 높은 재미를 보여주면 된다.
원래 인생은 상대적인 것이고, 리얼 헌터는 기존의 정식 연재 작품들보다 더 나은 작품이라 확신했다.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니.”
최치우는 혼자 좁은 방 안에서 눈을 감고 가부좌를 틀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기이한 힘이 실려 있는 것 같았다.
“후우!”
최치우는 얼마 없는 내공을 일주천시켰다.
천하제일검이던 시절과 비교하면 발톱의 때만도 못한 내공이다.
하지만 지구에서 손톱만큼의 내공이라도 쌓은 사람은 열 명도 채 안 될 것 같았다.
작디작은 씨앗에서 거목을 키워야 한다.
무력만으로 최고가 될 수 없는 세상이지만, 최치우는 육체 단련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압도적인 무력은 그에게 비장의 무기가 되어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돈도 권력도 명예도 안 통하는 최후의 순간, 무력만이 유일한 탈출구가 되는 법이다.
오죽하면 ‘법보다 주먹이 빠르다’, ‘주먹이 깡패다’라는 말이 떠돌겠는가.
“이제 시작이다.”
운기조식을 마친 최치우는 조용히 혼잣말을 읊조렸다.
여름방학은 그에게 무궁무진한 기회의 시간이 될 것 같았다.
일곱 번째 인생에 적응한 최치우가 기지개를 켜고 있다.
***
이메일은 편리한 수단이지만 읽지 않으면 끝이다.
네트와 케이툰 담당자가 무명의 신인이 보낸 이메일을 읽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2%도 많이 쳐준 것일지 모른다.
0.2%일 가능성도 있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 개의 습작 메일이 쏟아질 게 불 보듯 뻔했다.
그렇기에 수많은 습작가들이 투고 메일 대신 도전 게시판에서부터 자신을 알리는 것이다.
담당자들은 최소한 베스트 도전에 올라온 작품부터 검토할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밟으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최치우는 정식 연재가 아닌 곳에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남들 다 하는 대로 따라 하는 건 최치우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는 문지유가 최종 검수를 마친 원고를 컬러프린터로 인쇄했다.
당연히 파일을 담은 USB도 준비했다.
USB만 가져가서 전달하면 컴퓨터에 꽂아보지도 않을까 봐 일부러 원고 인쇄까지 해둔 것이다.
철저하게 준비를 마친 그는 지하철을 탔다.
목적지는 판교 테크노벨리.
네트와 케이툰 모두 판교에 본사를 두고 있다.
다행히 하루면 두 회사 담당자와 모두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최치우는 직접 회사를 찾아가 몸으로 부딪칠 작정이다.
“다음 내리실 역은 서판교, 서판교 역입니다.”
지하철 안내 멘트가 흘러나왔다.
두 회사가 어디에 있는지는 이미 인터넷으로 찾아봤다.
최치우는 성큼성큼 걸어 지하철역을 빠져나왔다.
나오자마자 신세계가 펼쳐졌다.
현대식으로 지어진 빌딩들이 판교 테크노벨리를 빛내고 있었다.
서울 근교에 세워진 현대 신도시.
이곳은 게임, 콘텐츠, IT 등 대한민국을 이끄는 신산업이 자라는 모태이다.
신문 기사로는 접했지만 직접 눈으로 보니 감회가 남달랐다.
“한국의 신흥 부자들은 여기 다 모여 있단 말이지.”
으리으리한 빌딩숲이 최치우의 심장을 건드렸다.
높이 솟은 빌딩은 얼마나 비쌀까.
몇 백억이 넘는 빌딩을 자기 이름으로 갖고 있다면 어떤 기분일까.
성을 가진 영주가 되는 것, 왕국의 주인이 되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일 것 같았다.
“일단 나는 웹툰 하나 들고 여기 온 작가 지망생일 뿐이지만,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다.”
최치우는 판교의 빌딩숲을 바라보며 각오를 확실히 다졌다.
허무맹랑한 꿈이 아닌, 실현 가능한 목표라 믿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먼저 찾은 네트 본사 건물에 들어가는 것부터 난관이었다.
사원증이 없으면 진입이 불가능했다.
로비에는 체격 좋은 경비들이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도 생각하지 않고 판교까지 찾아왔을 최치우가 아니다.
그는 안내데스크로 찾아가 당당하게 말했다.
“콘텐츠팀의 윤영국 팀장님 부탁드립니다.”
“어디에서 오셨다고 전해드릴까요?”
“오늘 미팅 약속한 웹툰 작가 최치우입니다.”
“잠시 기다려 주세요.”
데스크 여직원이 사내 전화를 들었다.
최치우는 당연히 콘텐츠 팀장과 약속을 잡지 않았다.
죽어라 인터넷을 검색해서 팀장의 이름을 알아냈을 뿐이다.
약간의 정보와 불굴의 무대뽀 정신, 그 둘이 결합하면 안 될 일도 되게 만들 수 있었다.
“윤 팀장님께서 그런 미팅 잡은 적 없다고 하시는데요?”
예상한 대로 여직원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최치우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목소리를 살짝 높였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분명히 윤 팀장님과 약속을 잡고 왔습니다. 착오가 있는 것 같은데 한 번 더 확인해 주시죠.”
그 모습에 데스크 직원이 윤 팀장에게 다시금 보고를 올렸다.
통화가 조금 길어지는 것 같았다.
‘직접 작품을 들고 찾아오는 작가가 몇 명이나 되겠어. 이름과 직함을 정확히 말하면서 들이대면 분명 기회는 열린다. 문전박대를 당하진 않을 거야.’
최치우는 나름의 계산을 마치고 네트 본사를 방문했다.
그는 일부러 강렬한 눈빛을 유지한 채 안내 데스크 여직원을 쳐다봤다.
곧이어 통화를 마친 여직원이 몸을 돌렸다.
“윤영국 팀장님께서 일단 올라오라고 하시네요.”
“고맙습니다. 몇 층으로 가면 될까요?”
“6층 콘텐츠 기획본부로 가시면 됩니다.”
여직원이 임시 출입증을 건네줬다.
최치우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지만 겉으로는 담담하게 출입증을 받았다.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니 금방 6층에 다다랐다.
외부만큼 빌딩 내부도 현대적으로 세련되게 구성돼 있었다.
최치우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여유로웠다.
머지않아 네트에서 모셔가려 애쓰는 웹툰 작가가 될 거라고 자신했기 때문이다.
“윤영국 팀장님?”
그가 넓은 사무실 안에서 윤영국의 책상을 찾아 입을 열었다.
노타이셔츠를 입은 30대 후반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하루 종일 컴퓨터를 해서인지 눈이 충혈돼 있었다.
“최치우 씨? 데스크에도 말했지만 나랑 연락한 적 없잖아요? 근데 약속을 잡았다고요?”
말투도 신경질적이다.
바빠 죽겠다는 티를 팍팍 냈다.
최치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져온 웹툰 인쇄물과 파일이 담긴 USB를 꺼냈다.
“이게 뭡니까?”
윤영국이 언성을 높였다.
다짜고짜 결과물을 그의 책상 위에 올려놓은 최치우가 대답했다.
“실례를 범해 죄송합니다. 많은 것 바라지 않습니다. 제가 가져온 웹툰을 검토해 주십시오. 연락처는 USB에 있습니다.”
할 말을 마친 최치우는 인사를 하고 등을 돌렸다.
구차하게 윤영국 팀장을 붙잡고 매달리지 않았다.
윤영국 팀장이 황당해하는 사이 최치우는 벌써 복도로 나왔다.
그는 윤 팀장이 무조건 웹툰을 볼 거라고 확신했다.
이렇게 미친 짓을 하는 습작가를 만나봤을 리 없었다.
욕을 하면서도 인쇄된 웹툰을 슬쩍 쳐다보기는 할 것이다.
그 순간, 윤 팀장은 리얼 헌터에 매료되어 빠져들 게 분명했다.
어마어마한 자신감 없이는 감히 시도하기 힘든 무모한 도전이었다.
남들도 다 할 수 있는 일처럼 보이지만 남들은 안 하는 일이다.
게다가 확실한 결과물이 없으면 역효과를 낳는다.
최치우는 스스로 미끼가 되어 네트를 낚으려 했다.
이제 한 건 마쳤으니 케이툰에서 낚시를 할 차례다.
‘네트랑 케이툰 팀장들이 날 붙잡으려고 서로 싸우면 엄청 재밌겠다.’
판교 테크노벨리의 빌딩숲을 가로지르는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최치우의 입가로 짙은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
판교에 다녀온 다음 날, 최치우는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그는 있지도 않은 미팅을 구실로 네트와 케이툰 담당자에게 리얼 헌터를 던지듯 안겨주고 나왔다.
또라이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다.
어쨌거나 최선을 다했고, 담당자들이 리얼 헌터를 한 번이라도 훑어볼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었다.
최치우의 승부수가 통할지, 아니면 그저 무모한 객기였는지 해답은 시간이 내려줄 것이다.
보통 투고한 습작가는 연락이 올 때까지 전전긍긍 아무 일도 못한다.
하지만 최치우는 달랐다.
그는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계획대로 일정을 소화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여름방학이다.
최치우는 학교에 가지 않는 대신 자기 자신을 몇 단계 업그레이드시키겠다고 다짐했다.
“달마역근경 다음은 뭐가 좋을까.”
어머니가 일을 나가시고 혼자 남아서 편하게 혼잣말을 했다.
달마가 창안한 도인법 역근경은 최치우에게 큰 도움이 됐다.
비리비리하고 허약하다 못해 온갖 탁기(濁氣)로 더렵혀진 몸의 기틀을 깨끗이 잡아준 것이다.
하지만 이제 한계를 넘어설 때가 됐다.
이미 최치우의 단전에는 내공이 쌓였고, 뼈와 가죽밖에 없던 몸에도 조금씩 근육이 붙고 있었다.
이대로 성장하면 국가 대표급 운동선수를 뛰어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무기 앞에서는 무력해진다.
칼을 든 사람을 맨손으로 완벽하게 제압하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 이상의 무공이 필요했다.
하물며 상대가 총을 가지고 있다면 대책이 없다.
반드시 상승 무공이나 마법을 자유자재로 펼칠 수 있어야만 대응이 가능할 것이다.
어쩌면 먼 미래에는 권총 정도가 아닌 기관총, 샷건, 또는 미사일을 쓰는 적과 부딪칠지도 모른다.
평범한 사람에게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사건이지만, 최치우는 벌써부터 비현실적인 영역을 넘나들고 있었다.
이 세계의 정점이 되는 과정에서 누구와 싸우게 될지 섣불리 예측할 수 없었다.
여러 번의 환생을 거치며 최치우는 유비무환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꼈다.
시간이 있을 때, 기회가 될 때 뭐든 준비해 놓아야 한다.
언제 어느 때 갑자기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검법이나 도법은 상황이 여의치 않고, 결국 박투술을 익힐 수밖에 없는데…….”
최치우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는 천하제일검 이태민이었다.
내공 하나 없는 낭인무사에서 천마를 쓰러트린 무림의 영웅으로 성장한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검을 자유롭게 들고 다닐 수 있다면 무서울 게 없다.
이태민의 독문검법을 익히면 총을 든 특수부대도 전멸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현대의 대한민국에서 검을 차고 다니면 TV 특종 세상에 이런 일이에 소개될 것이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허가받지 않은 총검류 소지가 불법이다.
“권왕의 무공은 너무 포악하고, 장제의 재주를 빌려야 하나.”
환생 첫날, 최치우는 권왕의 맹아일격을 이용해 김병철을 날려 버렸다.
권왕의 아랑권(餓狼拳)은 흠잡을 데 없는 상승 무공이지만 초식 하나하나가 전부 살초이다.
내공이 쌓인 상태에서 펼치면 아무리 힘 조절을 해도 100% 죽거나 중상이다.
현대에서 요긴하게 쓰기에는 너무 투박했다.
그렇다고 장제(掌帝)의 무공을 익히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장제의 태극무량장(太極無量掌)은 부드러우면서도 위력적이다.
상대를 간단히 제압할 수도 있고, 때에 따라선 아랑권보다 더욱 사나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결정적인 단점이 있었다.
무당파의 여러 심법 중에서 동자공을 배워야만 태극무량장을 펼치는 게 가능했다.
동자공을 배우면 여자와 사랑을 나누는 순간 단전이 깨져 버린다.
“정신 차리자, 최치우. 무공 하나 때문에 평생 숫총각으로 살 순 없지.”
눈을 크게 뜬 최치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딱히 여색(女色)을 과하게 밝히는 타입이 아니었다.
무림에서는 악명이 자자하던 색마를 직접 잡아 죽이기도 했다.
그 덕에 절세신룡이라는 별호를 얻었다.
하지만 최치우 역시 건장한 남자다.
아름다운 여성을 좋아하는, 그리고 육체의 반응에 솔직한 남성이다.
제아무리 대단한 무공이라 해도 좋아하는 여성과 사랑을 나누는 즐거움을 포기할 정도는 아니었다.
장제의 태극무량장은 아예 머릿속에서 지워 버려도 될 것 같았다.
“그럼 남은 후보가… 아!”
곰곰이 기억을 돌아보던 최치우는 손바닥으로 무릎을 내려쳤다.
“왜 이 생각을 못했지?”
그는 스스로를 질책했다.
그러나 표정은 훨씬 밝아졌다.
현대에서 쓰기 적합한 상승 무공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금강나한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