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번째 환생-11화 (11/243)

# 11

“사실 평일에는 카페 알바, 주말에는 편의점 야간 알바를 해서 시간이 많이 없어요. 장비도 부족해서 스케치 습작 정도밖에 못 올리구요.”

그제야 이해가 됐다.

시간과 돈이 부족해 어설픈 스케치만 올린 것이다.

최치우는 저도 모르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

차라리 더 잘됐다.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환경 때문에 그림의 완성도가 낮았다니 다행스러웠다.

“스케치일 뿐인데 인물의 디테일이 아주 매력적이더군요. 충분한 시간과 작업 환경이 주어진다면 엄청난 그림이 나올 것 같습니다.”

최치우의 칭찬이 거듭되자 문지유의 볼이 더욱 빨갛게 물들었다.

“하, 하지만 정식으로 그림을 배운 적도 없고… 알바를 하나라도 빼면 힘든 처지라서요.”

“혼자 사세요?”

“네.”

“나이는요?”

“스물한 살이에요.”

“저보다 두 살 누나네요. 그냥 누나라고 부를게요.”

“예?”

최치우는 거침이 없었다.

문지유의 눈이 토끼처럼 동그래졌다.

“지유 누나, 내가 한 달 알바비랑 장비 구입비 지원해 줄게요. 물론 좋은 장비는 못 사겠지만. 딱 한 달만 나랑 작업해서 도전해 보고 안 될 것 같으면 그때 다시 알바 구해도 괜찮지 않아요?”

사실 최치우 입장에서는 큰맘 먹고 제안한 것이다.

어쩌면 괜한 노력만 들이고 400만 원을 거의 다 날릴지도 모른다.

문지유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커리어 없는 습작 그림 작가가 받을 수 없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저한테 왜 그렇게까지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거예요? 별로 내세울 게 없어서 부담스러워요.”

“웹툰 그리고 싶잖아요. 맞죠? 누나가 올린 그림에서 그게 느껴졌는데. 또 내가 보낸 이야기에 흠뻑 빠졌잖아요.”

“그, 그건 맞지만요…….”

“나도 도전하는 겁니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안 되니까.”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뱉은 말이다.

최치우는 자신의 전생 이야기가 사람들을 끌어모을 거라고 자신했다.

문지유가 작정하고 그림을 그리면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재능과 열정은 있는데 환경이 안 따라주는 것도 그녀에게 끌리는 이유 중 하나였다.

“정말 그렇게 해도 되겠어요?”

문지유도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불안감이 비쳤지만, 그만큼 기대와 설렘도 엿보였다.

최치우는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한 입으로 두말하는 스타일 아닙니다. 카페 보니까 보통 그림 작가 7, 글 작가 3이던데, 내가 과감하게 투자하는 대신 나중에 잘되면 5 대 5로 나누는 건 어떻습니까?”

“나는 좋아요. 근데 벌써부터 수익이 날 생각을 해도 될까요?”

“당연히 해야죠. 돈 벌려고 웹툰 만드는 건데, 그것도 대박 나서 왕창 벌려고!”

최치우가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문지유는 처음에는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웃음이 전염되었는지 아주 옅은 미소를 지었다.

최치우를 만나고 처음으로 웃은 것이다.

그는 펄펄 끓는 뜨거운 에너지로 그림 작가를 구했다.

마음먹은 순간부터 일을 추진하는 속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과연 전생의 경험이 살벌한 웹툰 시장에서 비장의 무기가 되어 줄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았다.

***

중간고사를 친 게 엊그제 같은데 또다시 기말고사 기간이 돌아왔다.

다른 고3 학생들은 시험이라면 지긋지긋해한다.

하지만 최치우는 예외였다.

중간고사에서 두각을 나타낸 그는 모의고사에서 이적을 선보였다.

기말고사라고 다를 게 없었다.

그는 즐거운 마음으로 시험을 쳤고, 두 번의 경험이 쌓인 덕분에 노하우도 생겼다.

최치우는 지난 모의고사에서 영어만 2등급을 받았다.

실생활 위주의 영어 공부와 시험용 영어 공부가 달랐기 때문이다.

그때의 경험이 약이 됐다.

시험에서 어떤 경향으로 문제가 출제되는지 감을 잡은 것이다.

최치우는 기말고사를 치며 단 한 과목에서도 어렵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같은 반 친구들에게 말하면 재수 없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물론 금성고를 접수한 최치우에게 대놓고 말은 못하고 속으로만 투덜거리겠지만.

그러나 최치우는 기말고사보다 다른 것을 더 기대하고 있었다.

중간고사에서는 반에서 2등을 했다.

어쩌면 이번에는 1등을 노릴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성적보다 관심이 가는 분야가 생겼다.

바로 얼마 전부터 문지유와 함께 작업하고 있는 웹툰 리얼 헌터이다.

운명 같은 우연인지, 아니면 우연 같은 운명인지 서로의 진가를 알아본 두 사람은 의기투합했다.

최치우가 400만 원이라는 거금을 선뜻 투자하기로 결정하면서 일이 풀렸다.

문지유는 먼저 채색을 위해 필요한 장비를 구입했다.

또 카페 알바를 그만두고 한 달 동안 웹툰 작업에만 전념했다.

주말 편의점 야간 알바는 점장님과의 의리 때문에 당장 그만하기 어렵다고 했다.

최치우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어차피 웹툰이 잘되면 차근차근 정리하게 될 것이다.

“누나!”

최치우가 카페 문을 열고 문지유를 불렀다.

먼저 도착한 문지유가 구석자리에 앉아 있다.

그녀는 최치우를 보고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만난 이후 둘은 자주 연락을 주고받으며 작업을 함께했다.

덕분에 제법 많이 친해졌지만 문지유의 타고난 성격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왔어? 시험은 잘 쳤지?”

“잘 쳤겠죠, 아마? 하하하! 마음이 온통 웹툰에 가 있어서.”

최치우는 너스레를 떨며 자리에 앉았다.

오늘 드디어 리얼 헌터의 첫 번째 완성본을 보는 날이다.

그는 프롤로그와 1화가 완성됐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약속을 잡았다.

이메일로 파일을 받아도 되지만 첫 회는 만나서 함께 보고 싶었다.

“너, 너무 기대하지 마…….”

“당연히 기대해야죠. 대박 날 작품인데.”

최치우는 결과물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무엇보다 자신의 이야기가 가진 힘을 믿었다.

하급 몬스터에게 잡아먹히기 직전의 헌터로 환생한 걸 생각하면 지금도 등에 땀이 흐른다.

고난과 역경을 딛고 트리플 S급 몬스터인 루시펠을 봉인하기까지 흥미진진한 에피소드가 넘쳐났다.

시나리오가 훌륭하면 그림이 평타만 쳐도 성공할 수 있다.

그런데 문지유의 그림 실력은 평균 이상이었다.

장비를 갖추고 색을 입힌 그녀의 그림은 순정만화와 판타지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선이 다소 여성스러웠지만 요즘은 이런 스타일이 트렌드다.

작업 속도가 빠르지 않은 게 흠이지만 차차 나아질 부분이다.

통장에 원고료가 두둑이 꽂히기 시작하면 작업 속도는 무조건 빨라질 수밖에 없다.

최치우는 그때까지만 문지유를 이끌고 리더 역할을 하면 된다.

“어디 한번 볼까요?”

“그래, 여기 있어.”

최치우가 웹툰을 보기 위해 문지유의 옆자리로 이동했다.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며 작업용 태블릿 PC 화면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새삼 손이 참 하얗고 작았다.

“와!”

최치우가 짧게 탄성을 터트렸다.

첫 장면에서부터 감탄이 절로 나왔다.

절대 오버하는 게 아니었다.

하급 몬스터가 입을 쫙 벌리고 있는 모습으로 첫 장면이 시작되었다.

그 앞에 놓인 주인공은 절체절명의 위기인 게 한눈에 보였다.

“시작이 반이라고 했잖아요. 절반은 먹고 들어갔네. 긴장감이 딱!”

최치우가 유쾌하게 말했다.

문지유는 칭찬이 부끄러운 듯 화면을 아래로 내렸다.

프롤로그에서 주인공은 고 레벨 헌터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구한다.

하지만 고레벨 헌터에게 무시를 당하고 반드시 강해지겠다는 다짐을 하며 프롤로그가 끝났다.

이윽고 1화에서는 저레벨 용병단과 함께 던전 탐험을 시작하게 된다.

평범한 하급 던전인 줄 알았는데 C급의 무시무시한 몬스터가 튀어나오며 1화가 마무리되었다.

프롤로그와 1화를 보면 2화가 궁금해 미칠 수밖에 없다.

이 모든 이야기 전개를 알고 있는 최치우도 2화가 궁금할 정도였다.

“대박이다. 진짜 대박이야.”

“정말?”

“정말이죠. 누나도 보면 느낌이 오지 않아요?”

“나도 엄청 몰입해서 작업했어. 스토리가 워낙 좋아서…….”

“그럼 뭘 의심해요. 믿고 가는 거지.”

최치우는 목이 타는 듯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마셨다.

탁!

커피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최치우가 고개를 돌렸다.

바로 옆자리에 앉아서 문지유의 얼굴이 한층 가까이 있다.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거리이다.

최치우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문지유의 얼굴색은 점점 빨개지고 있었다.

“지유 누나, 우리 이거 도전으로 풀지 맙시다.”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문지유가 놀랄 때 짓는 표정을 보여줬다.

보통 신인들은 포털 사이트의 도전 게시판에 웹툰을 올린다.

그러다 인기를 얻으면 베스트 도전으로 승격되고, 이후에 정식 계약 제의를 받을 수도 있다.

베스트 도전에 오르는 것만 해도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최치우는 정상적인 과정을 전부 패스하자고 말한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리얼 헌터는 신인 습작 수준이 아닙니다. 남들이 시속 60㎞로 달린다고 우리도 그럴 필요 있어요? 자신감을 가지고 질주합시다.”

“그렇지만… 신인이 투고를 해도 검토를 거의 안 한다고 하던데…….”

“그럼 아까운 작품 놓치는 거죠. 여러 곳에 투고도 안 할 겁니다. 제일 큰 플랫폼인 네트랑 케이툰 웹툰 관리자한테만 보냅시다.”

최치우는 이미 지침을 정했다.

리얼 헌터 팀의 리더는 최치우이다.

그는 문지유의 의견을 존중하지만, 언제나 최종 결정은 스스로 내릴 작정이다.

애초에 문지유는 리더가 될 성격이 아니기도 했다.

그녀가 불안한 기색을 보이자 최치우가 다시금 확신을 심어줬다.

“안 될 거라는 생각을 버려요. 시작부터 왜 지고 들어가요? 결과는 내가 책임질 테니 믿고 따라와요.”

“그, 그래, 알겠어, 치우야.”

“힘들겠지만 이번 달 안에 3화는 완성해 주세요. 그럼 프롤로그랑 같이 투고할 테니까.”

최치우는 문지유를 강하게 몰아붙였다.

어차피 정식으로 연재하면 1주일에 1화를 만들어야 한다.

지금부터 스케줄 관리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잦은 휴재와 딜레이로 독자들의 원망을 사게 될 것이다.

문지유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최치우는 짙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와 눈을 맞췄다.

성공의 예감이 그의 심장을 움켜쥔 것 같았다.

망설이거나 머뭇거릴 이유가 하나도 없다.

여름방학을 앞둔 최치우는 전생을 디딤돌 삼아 높이 점프할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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