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
<전생 디딤돌>
최치우는 인터넷 카페를 샅샅이 뒤졌다.
온라인 세계는 끝이 없을 정도로 방대했다.
이제까지 최치우는 검색을 통해 다양한 지식을 배우는 데 집중했다.
그러나 온갖 커뮤니티와 카페, SNS는 완전히 독립된 사회였다.
오프라인 세계와 달리 온라인 세계에서 사람들은 조금 더 가식 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시공을 초월하여 자유롭게 관계를 맺었다.
그렇게 얻을 수 있는 경험과 네트워크는 어마어마했다.
온라인의 영향력은 곧바로 오프라인으로 직결된다.
대통령 선거에서도 온라인 여론이 중요하게 작용하고, 네티즌들이 불매운동을 하면 대기업이 휘청거리기도 했다.
‘온라인을 정복하면 세상을 가질 수 있어.’
최치우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검색이 아닐 인터넷 커뮤니티와 카페를 중점적으로 파헤친 덕분이다.
그가 느닷없이 여러 커뮤니티를 확인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재능은 있는데 아직 빛을 발하지 못한 그림 작가를 찾으려는 것이다.
최치우의 수중에는 400만 원이 있다.
고등학교 3학년이 공부를 하면서 400만 원으로 사업을 시작하긴 어렵다.
자본과 시간 모두 제한적이다.
그렇기에 생각해 낸 아이디어가 바로 웹툰 제작이었다.
숨겨진 원석 같은 그림 작가를 찾아 웹툰을 만드는 데 400만 원이면 충분한 예산이다.
스토리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최치우의 머릿속에는 이야깃거리가 무궁무진하다.
억지로 쥐어 짜낸 스토리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다.
다른 차원을 넘나들며 직접 체험한 이야기를 풀어내면 게임 끝이다.
그는 환생할 때마다 버라이어티하고 다이내믹한 삶을 살았다.
사실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서만 웹툰을 제작하려는 게 아니었다.
그는 최치우로 환생하기 전, 아바타를 통해 신의 경고를 들었다.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환생일 수도 있었다.
아바타는 세상을 구하는 기쁨을 깨달으라는 뜬구름 잡는 미션을 줬다.
그러지 못하면 영혼이 완전히 소멸될지도 모른다.
서로 다른 세계에서 극한의 경험을 이겨내며 여기까지 왔는데 아무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소멸된다면 정말 허무하지 않을까.
그래서 최치우는 웹툰으로 돈도 벌고 지난 인생을 기록하려는 것이다.
웹툰을 보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기억하고 이야기하기를 원했다.
“어? 이건 좀 괜찮잖아?”
그때 최치우의 눈길을 잡아끄는 게시물이 있었다.
회원 수가 5만 명을 넘는 카페에 방금 올라온 그림이다.
몇 컷의 스케치가 전부였고, 채색은 되어 있지 않았다.
어설픈 감이 있지만 느낌이 좋았다.
커뮤니티와 카페를 탐색하며 수천, 수만 개의 그림을 봤지만 기억에 남는 게 별로 없었다.
채색까지 예쁘게 된 그림은 대부분 계약이 된 기성작가들이 올린 것이었다.
아마추어라도 유명세가 있는 사람이면 터무니없는 조건을 제시하거나 쪽지를 보내도 읽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우선 채색이 안 되어 크게 관심을 받지 못할 것 같았다.
스케치 자체도 완성도를 따지면 기준점 이하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자꾸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원래라면 얼른 다음[next] 버튼을 눌러 다른 그림을 봤어야 정상이다.
그림 작가 카페와 커뮤니티를 돌아다닌 것도 벌써 사흘째다.
매일 두 시간 넘게 그림을 보느라 이골이 난 상태였다.
“이렇게 눈길을 끈다는 건 감이 있다는 말인데…….”
최치우는 그림 말고 다른 설명이 없는지 확인했다.
보통 그림 작가 지망생들은 구구절절 자기소개와 원하는 스토리 작가 조건을 적어놓는다.
그러나 이 사람은 달랐다.
‘습작입니다’라는 한 문장이 전부였다.
그러고 보니 ID도 특이했다.
“MoonJ? 문제이? 문제? 무슨 뜻이지? 아무튼… 촉이 오긴 한다.”
최치우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5분 넘게 자신의 눈길을 끌었고, 독특한 느낌으로 가능성을 보여줬다.
이만하면 연락부터 해보고 볼 일이었다.
어차피 먼저 연락한다고 해도 같이 작업을 하게 될 확률은 무척 낮았다.
딸칵!
최치우는 MoonJ라는 ID를 클릭해 쪽지를 보냈다.
쪽지 내용을 굳이 길게 쓰지 않았다.
보통 아마추어들이 설명에 집착한다.
프로는 말이 아니라 결과물로 증명하는 법이다.
최치우는 아직 프로 작가가 아니지만 아마추어 티를 내고 싶진 않았다.
<그림 느낌이 좋아서 연락합니다. ID로 제가 구상한 스토리 요약해서 보냅니다. 읽어보고 재밌으면 답장 바랍니다.>
과연 쪽지를 읽기는 할까.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도 시도는 좋았어.”
최치우는 다시 한번 MoonJ의 그림을 천천히 감상했다.
불안한 스케치지만 손끝이나 눈동자 등 디테일한 표현이 살아 있었다.
채색까지 완벽하게 되어 인기 폭발인 그림보다 더 마음에 들었다.
“운명이라면 만나게 되겠지.”
최치우는 담담하게 마우스를 클릭했다.
30분 정도는 더 카페를 탐색하고 어머니가 돌아오면 저녁 식사를 할 생각이다.
평소 같았으면 방에서 달마역근경을 수련할 시간이다.
그러나 지금은 돈을 불리기 위해 웹툰 제작을 하는 게 우선이었다.
게다가 기초 도인법인 달마역근경의 효과는 이미 톡톡히 봤다.
단전이 깨끗해졌고 손톱만 한 내공도 쌓였다.
육체도 한결 건강해진 게 분명했다.
이제는 보다 높은 단계로 발전할 수 있는 상승 무공을 익힐 차례였다.
곧 기말고사를 치고 나면 여름방학이 시작된다.
그럼 자연스럽게 도약의 기회를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컴퓨터 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최치우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고 있다.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는 사람만 가질 수 있는, 생(生)의 에너지로 가득한 눈동자였다.
***
왁자지껄한 점심시간이다.
일찍 밥을 먹은 최치우는 교과서를 읽는 중이다.
오늘 5교시 수업은 이과 반으로 옮겨서 과탐을 듣는다.
그는 전교에서 유일하게 고3 때 문과에서 이과로 전과를 허락받은 학생이 됐다.
싸움으로 금성고를 접수하고, 일진을 찍소리도 못하게 만든 최치우가 공부까지 잘하는 것이다.
그것도 보통 잘하는 게 아니라 중간고사와 모의고사에서 전교권에 들었다.
어쩌다 한 번 행운이 따라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는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금성고 학생들은 빵셔틀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거듭한 최치우에게 잘 보이려 애썼다.
물론 최치우가 쓸데없이 아부하는 학생들을 가까이 두진 않았다.
그는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자신만의 공간을 지켰다.
학생들과 모나지 않게 인사를 주고받지만, 그들 틈에 섞이는 대신 공부에 집중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범생이라고 놀림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금성고에서 최치우를 손가락질할 정도로 간이 큰 학생은 없었다.
‘교과서는 진짜 잘 만들었다니까.’
그는 새삼 교과서에 감탄하고 있었다.
수능 전국 1등이 TV에 나와 교과서 위주로 예습과 복습을 철저히 했다고 말하는 게 뻥이 아니었다.
진짜 교과서 위주로 예습, 복습을 열심히 하면 성적이 오를 수밖에 없었다.
무공이든 공부든 편법보다 정공법이 훨씬 더 위력적이다.
불가사의한 능력을 바탕으로 정도(正道)를 걸으며 공부하는 최치우는 다가오는 기말고사에서 또 한 번 이변을 보여줄 것 같았다.
띠링-
그때 꽤 오래된 구형 스마트폰 알람이 울렸다.
문자나 전화, 메신저는 아니었다.
최치우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폰으로 인터넷을 켰다.
‘새로운 쪽지 1통!’
갑자기 그의 눈이 커졌다.
포털 사이트에서 쪽지가 도착했다는 알람이었다.
쪽지를 보낸 사람은 감각 있는 스케치로 시선을 당긴 그림 작가였다.
최치우는 떨리는 마음으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느낌이 통했다.
최치우는 미세하지만 전율을 느꼈다.
뭔가 될 것 같다는 확신이 강하게 든 순간이다.
***
일요일 오후 2시, 은평구 녹번동의 작은 카페.
최치우는 그림 작가 MoonJ가 일러준 장소로 나왔다.
약속 시간보다 10분 일찍 도착했지만 카페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주인조차 손님용 테이블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정말 나오기는 하겠지?’
이쯤 되니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MoonJ의 전화번호도 모른다.
쪽지를 통해 시간과 장소를 정한 게 전부이다.
의심의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려는 찰나, 최치우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느낌을 믿자. 내가 그림에 꽂힌 것처럼 그 사람도 내 스토리에 빠진 게 분명해.’
최치우가 완성되지 않은 스케치에서 끌림을 느꼈듯 그도 전생을 다룬 이야기에 매료됐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굳이 답장을 보내 약속을 잡을 리 없었다.
최치우는 링스 월드에서 아바타를 만난 후 두 번째 환생했을 때의 기억을 되살렸다.
물론 환생이라는 소재는 쓰지 않았다.
대신 몬스터에게 잡아먹히기 직전의 평범한 헌터에서 끝내 트리플 S급 루시펠을 막아낸 여정을 요약해서 전달했다.
이야기를 추리고 추렸지만 실제로 경험한 인생이기에 박진감은 어마어마했다.
“저기…….”
최치우가 자신의 스토리를 돌아보는 사이, 뒤에서 낯선 음성이 울렸다.
가냘픈 여자의 목소리였다.
“네?”
최치우는 몸을 돌렸다.
그의 눈앞에 155㎝도 안 될 것 같은 작은 여자가 야구 모자를 쓰고 서 있었다.
눈이 동그랗고 큰 걸 제외하면 키를 포함해 신체의 모든 부분이 작았다.
특히 새하얀 손은 성인이 아닌 덜 자란 소녀의 것처럼 보였다.
“저, 저… 오늘 두 시에 약속한…….”
“아! MoonJ 님?”
“네, 제가 문제이예요.”
아담한 체구의 여성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야구 모자 아래로 드러난 두 뺨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다.
쪽지로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는 당연히 남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직접 만나니 수줍음이 많은 여성이었다.
최치우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최치우입니다.”
“네, 보내주신 스토리는 잘 읽었어요. 너무 재밌어서 그만…….”
“재밌었다니 다행이군요. 안에 들어가서 마저 이야기하실까요?”
“그래요.”
여성 작가 MoonJ가 기어들어 가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최치우는 카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커피 두 잔을 계산하고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수중에 400만 원이 있기에 커피값을 내는 건 부담스럽지 않았다.
“잘 마실게요.”
“아닙니다. 그보다 MoonJ 님, 제가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제 이름은… 문지유예요.”
얼굴과 체형에 어울리는 예쁜 이름이다.
이제 그녀의 닉네임도 이해가 됐다.
최치우는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대화를 이끌 수밖에 없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저는 문지유 님의 스케치에서 뭔가 끌리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서 같이 웹툰 작업을 하려고 쪽지를 보낸 겁니다.”
“고, 고마워요. 저도 치우 씨 스토리가 너무 재밌어서 그만 답장을……. 사실 아직 작업을 할 처지도 안 되는데…….”
최치우는 자신의 두 번째 환생 이야기에 리얼 헌터라는 제목을 붙였다.
단순하지만 강렬한 제목이었다.
그는 눈을 내리깐 문지유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작업을 할 처지가 안 된다는 건 무슨 뜻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