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번째 환생-8화 (8/243)

# 8

<다재다능>

최치우는 집에 돌아와 생각에 잠겼다.

그의 책상 위에는 100만 원 권 수표 넉 장이 놓여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중년인에게 싸운 대가로 받은 돈이다.

조건 없이 돈을 준다는데 안 받을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실리를 중시하는 최치우이기에 열이 받아서라도 400만 원을 챙겨왔다.

그러나 400만 원 때문에 고민하는 게 아니었다.

자신을 운영자라고 밝힌 중년인의 제안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인터넷 검색해 봐. 파이트 클럽. 국내 최대 규모의 이종격투기, 길거리 싸움 카페. 회원 수가 무려 60만이지.”

“관심을 받기 위해 실제로 싸우는 동영상을 찍어서 올리고, 그중에서 재능이 있는 사람은 접촉해서 돈을 준다. 대체 왜 그런 짓을 합니까?”

“선수 발굴과 육성이라는 개념 모르나? 우리 회원 중에 VIP 회원들은 어마어마한 사람들이네. 술, 여자, 도박 모두 다 해본 사람들이라 강렬한 자극을 원하지.”

“그래서요?”

“룰이 정해진 스포츠로는 VIP 회원들을 만족시킬 수 없어. 최고의 재능을 가진 길거리 파이터들이 비밀스러운 공간에서 피 튀기는 싸움을 한다면? 싸움 한판에 걸린 돈이 억 단위라면? 어때? 자네도 흥미가 생기지 않나?”

중년인은 능구렁이처럼 최치우를 유혹했다.

그는 당장 대답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천천히 생각해도 좋네. 자네, 최치우라고 했지? 내 촉대로 엄청난 자질을 지닌 것 같으니 바로 무대에 설 수도 있겠어. 이기기만 하면 최소 천만 원을 가져가는 거야. 비밀도 완벽하게 보장될 거고 말이지.”

말을 마친 중년인 운영자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그를 따르는 젊은 남자도 함께 움직였다.

조만간 다시 최치우를 찾아올 때 원하는 대답을 들을 거라고 확신하는 모양이다.

최치우는 멀어지는 둘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봤다.

거액이 오가는 비밀스러운 싸움판.

VIP들의 파이트 클럽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금방 이해가 되기는 했다.

“무림에도 검투전이 있었고 아슬란 대륙에서는 콜로세움에서 살아남은 전사가 기사 작위를 받기도 했지.”

어느 세계에나 맨몸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사람들은 존재했다.

그들을 위한 무대, 그들에게 열광하는 사람들도 늘 있어왔다.

조금씩 차이가 있을 뿐 여기도 마찬가지였다.

“모르겠다. 일단 400을 어떻게 할지 생각하자.”

최치우는 눈앞의 문제부터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중간고사 성적을 어머니에게 알려 드린 날을 회상했다.

반에서 2등을 했다고 알려드린 순간, 어머니는 이제껏 본 적 없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소녀처럼 기뻐하실 거라고는 최치우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최치우는 어머니가 작게 내뱉은 말을 놓치지 않았다.

“우리 아들, 마음잡고 공부하니 좋은 대학도 갈 수 있겠네. 내가 더 열심히 일해서 아들 대학은 보내줘야지.”

불현듯 흘러나온 어머니의 말에는 염려가 담겨 있었다.

최치우는 집안 사정이 나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에 열 시간 넘게 일해도 가난은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빚과 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생계를 위협한다.

죽도록 김밥을 말아도 살림살이가 나아지는 대신 아들의 대학 학비를 걱정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뿐인 아들이 마음을 잡고 좋은 성적을 냈는데 마냥 기뻐할 수 없는 현실이 너무 무거웠다.

최치우는 그런 어머니의 얼굴을 보며 새삼 돈의 중요성을 느꼈다.

책상 위에 올려진 400만 원은 어머니의 두 달 월급이다.

이 돈을 드리면 어머니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어디에서 돈을 벌었는지 궁금해하실 게 분명했다.

상식적으로 고등학생이 하루아침에 400만 원을 벌 수는 없다.

결국 돈을 드려도 어머니의 근심 걱정을 키울 뿐이다.

최치우는 결심을 한 듯 수표 넉 장을 집어 교복 안주머니에 넣었다.

“돈을 벌어야겠다. 나를 위해서, 그리고…….”

‘어머니를 위해서도’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직은 쑥스럽고 적응이 안 됐다.

그러나 마음은 뚜렷했다.

매일 아침 자신을 위해 토스트를 만들어두고 나가는 어머니가 더 이상 고생하지 않기를 바라게 됐다.

물론 최치우 본인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서 돈은 곧 힘이다.

돈이 없으면 대학을 못 가는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아예 사람 취급을 못 받게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무슨 수로 고등학생이 돈을 벌 수 있을까.

최치우에게 주어진 시드머니는 현재 400만 원밖에 없다.

학생에게는 무척 큰돈이지만 사업이나 투자를 하기엔 많이 모자란 액수이다.

그러나 최치우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일단 걸어가면 길이 만들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돈을 제대로 벌면 영약 같은 게 있는지 알아봐야겠어. 한 방에 내공을 팍 올리려면 영약이 최고지. 내공을 좀 쌓고 나서 마나도 느껴야 하고…….”

그는 벌써 돈을 번 다음에 뭘 할지 상상하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돈을 벌고 무공과 마법을 동시에 익히며 좋은 대학에서 계속 성장해 가는 자신의 모습.

상상만 해도 짜릿했다.

최치우는 일곱 번째 인생을 가장 멋지게 살아보겠다고 다짐했다.

조금씩, 조금씩 기회는 주어지고 있었다.

***

드르르륵!

최치우가 3학년 3반 문을 열었다.

점심을 먹고 시끄럽게 떠들던 3반 학생들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빵셔틀에서 요주의 인물로 떠오른 최치우는 금성고 학생들을 긴장시키는 존재였다.

최치우는 터벅터벅 걸어가 3반 맨 뒷자리로 향했다.

“유강수.”

그는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는 유강수를 깨웠다.

최치우의 목소리를 들은 유강수가 마지못해 얼굴을 들었다.

“무슨 일인데?”

“어제 좀 세게 때린 거 같아서… 내가 갈 때까지 못 일어나길래 죽었는지 살았는지 보려고 왔다.”

둘의 대화를 들은 학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유강수와 일진이 최치우와 한판 붙기로 했다는 건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그 싸움의 결과가 이렇게 알려졌다.

유도부 출신으로 금성고 일진을 이끌던 유강수가 최치우에게 맞아서 기절을 했다.

도무지 믿기 힘든 사실이지만 빵셔틀 최치우가 금성고를 접수한 것이다.

“…….”

유강수는 말이 없었다.

이미 최치우에게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몸으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최치우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앞으로 조용히 지내자. 나는 일진 놀이 같은 거 할 생각도 없고 너네가 애들 괴롭히지만 않으면 관심도 안 가질 테니까.”

“알았다.”

유강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최치우는 의미심장한 경고를 남겼다.

“그리고 운영자 그 아저씨랑 더 엮이지 마. 너희가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냐. 괜히 푼돈 때문에 잘못 엮였다가 피 본다.”

“그것도… 알겠다.”

유강수는 온순한 아이처럼 고분고분해졌다.

그도 머리가 있다면 파이트 클럽의 위험성을 깨달았을 것이다.

한편, 최치우가 유강수를 다루는 모습을 지켜본 3반 학생들은 쇼크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할 말을 다 마친 최치우는 유유히 3반을 빠져나왔다.

최치우의 발걸음은 1반이 아닌 교무실로 이어졌다.

담임선생님과 긴히 이야기할 것이 있었다.

미리 약속을 해뒀기에 담임은 교무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무슨 일로 네가 상담 신청을 했는지 궁금하네.”

담임은 중간고사 성적이 나온 이후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최치우는 담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자신의 용건을 말했다.

“이과로 전과하고 싶습니다, 선생님.”

“뭐라고?”

담임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고3이 다 되어서 갑자기 전과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과 학생들은 수능 때 문과 전형으로 시험을 치기도 한다.

훨씬 더 어려운 수리 영역에 부담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치우처럼 문과에서 이과로 가겠다는 학생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단순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문과 학생이 이과에서 다루는 어려운 수리 영역과 과학 탐구 과목을 단기간에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한 미션이다.

만약 예전의 최치우가 이런 소리를 했다면 담임은 다짜고짜 싸대기부터 날렸을지 모른다.

하지만 최치우는 지난 중간고사에서 엄청난 성적 상승을 보여줬다.

반에서 2등을 했기에 담임도 인내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너도 이과로 전과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겠지?”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이과를 가려는 이유를 말해봐라. 이번에 성적도 잘 나왔는데 계속 유지해야지. 괜히 이과 수업 듣다가 타이밍 놓치면 대학은 어떻게 하려고? 1학년이나 2학년도 아니고 고3인 녀석이 말이야.”

“이과 공부도 자신 있습니다. 그동안 틈틈이 준비해 왔습니다.”

담임의 눈빛이 변했다.

그는 최치우가 이과 과목을 준비했다는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중간고사 성적도 그렇고 아무래도 니가 실력 있는 족집게 과외 선생을 만난 모양인데… 그래도 고3 때 이과로 옮기는 걸 허락해 주긴 어렵다.”

“제안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제안? 무슨 제안?”

“다음 모의고사에서 이과 영역 시험을 치겠습니다. 점수에서 가능성이 보이면 전과를 허락해 주시고 그게 아니라면 저도 고집부리지 않겠습니다.”

“크흐음, 그놈 참.”

담임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들어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담임은 최치우가 모의고사에서 쓴맛을 보고 다시 제자리를 찾을 거라고 생각했다.

“기회는 딱 한 번, 다음 모의고사가 전부이니 그런 줄 알아라.”

“감사합니다.”

“만약 결과가 좋아도 이제 와서 반을 옮기는 건 힘들고, 이과 과목 수업만 듣게 해주마.”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원하는 것을 얻어낸 최치우는 가벼운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넘어야 할 고비가 남아 있었다.

모의고사에서 괜찮은 성적을 내야만 이과로 옮기는 게 가능해진다.

수십 년을 고등학교에서 근무한 담임선생님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미션이다.

그러나 최치우는 해낼 자신이 있었다.

무모한 도전이 아니었다.

그의 여섯 번째 환생을 떠올리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최치우는 바로 직전 인생에서 기계화 군단의 엔지니어로 로봇에 생명을 불어넣는 장본인이었다.

고등학교 수학과 과학이 아무리 어려워도 소꿉장난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암기가 필요한 부분, 약간의 응용이 필요한 부분만 적응하면 된다.

수학적 사고와 과학적 논리는 모두 최치우의 기억 속에 잠자고 있었다.

“문돌이는 답이 없어.”

교무실에서 나온 최치우는 피식 웃으며 자조적인 말을 내뱉었다.

물론 농담이 섞인 유행어였다.

하지만 최치우는 보다 성공적인 미래를 위해 공대에 가겠다고 결심했다.

공대를 졸업하면 결국 치킨집 사장이 된다는 한국 사회의 현실도 잘 알고 있었다.

치킨집을 운영하는 게 나쁜 일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최치우는 한국 너머의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티브 잡스, 마크 주커버그, 엘런 머스크, 금방 따라잡아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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