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대담한 도발이었다.
최치우의 말을 들은 유강수는 말을 잃었다.
설마 금성고 3학년 일진을 다 데려오라고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최치우는 괜한 오기를 부리는 게 아니었다.
주니어 리그에서 오래 시간 끌고 싶지 않았다.
깔끔하게 금성고를 접수하고 남은 시간을 평탄하게 보내고 싶었다.
공부와 육체 단련 등 할 일이 무척 많았기 때문이다.
“후회하지 마라.”
유강수가 제 딴에는 위협적으로 말했다.
최치우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다시 등을 돌렸다.
그는 교실로 돌아가며 더욱 짙은 미소를 지었다.
‘너네는 두 달 전에 찾아왔어야 해. 지금 이빨을 드러낸 건 실수다.’
두 달은 무척 짧은 기간이지만 일곱 차원에 걸친 경험과 지식을 갖춘 최치우의 성장 속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는 원하지 않았지만, 본의 아니게 금성고를 제패하게 될 것 같았다.
***
최치우는 늘 그렇듯 보충수업이 끝나자마자 가방을 챙겼다.
그는 한 번도 야간자율학습을 하지 않았지만, 담임선생님은 눈치를 주지 않았다.
중간고사 성적이 잘 나온 이후 한결 학교 다니기가 편해졌다.
어린 학생들이 모인 학교에서도 사회의 법칙은 냉정하게 적용되고 있었다.
싸움이든 공부든 잘하는 만큼 대접받는 것이다.
저벅저벅.
기형적으로 생긴 운동장을 지나쳐 교문에 이르자 유강수가 보인다.
유강수 옆에는 각자 다르게 생긴 세 명이 더 서 있었다.
이미 얻어터진 김병철을 포함해 다섯 명이 금성고를 주무르는 일진인 것 같았다.
“가자.”
유강수가 대뜸 입을 열었다.
최치우는 한 명, 한 명을 돌아보며 태연하게 물었다.
“어디로?”
“조용한 데로 가야지. 왜, 겁나나?”
“뒷감당은 너네가 해라.”
최치우는 4 대 1의 싸움이 될지도 모르는데 쫄지 않았다.
한 명씩 돌아가며 네 번 싸우든 한 번에 네 명과 붙든 평범한 고등학생이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믿는 구석이 있었다.
배짱 넘치는 최치우의 태도에 나머지 세 명도 약간 놀란 기색이다.
“앞장서.”
최치우가 지시를 내렸다.
마치 벌써 금성고를 제패한 것 같은 기세였다.
네 명은 불만을 억누르고 앞서 걸어갔다.
좁은 골목을 몇 개 통과하니 인적 드문 공터가 나왔다.
공원으로 개발하다 방치된 곳이었다.
공터에 도착한 최치우는 책가방을 땅에 내려놓았다.
유강수와 일진도 가방을 놓고 고개를 까딱거리고 있다.
‘느낌이… 안 좋은데.’
그런데 묘하게 거슬리는 기분이 들었다.
단순히 기분 탓이 아니었다.
두 달 동안 조금씩 내력을 쌓으며 감각을 단련했기에 예사로 넘길 수 없었다.
찌릿!
최치우가 공터 구석, 커다란 나무로 시야가 가려진 쪽을 노려봤다.
“유강수, 이야기가 다르다?”
“뭐, 뭐? 뭐가?”
유강수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최치우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정곡을 찔렀다.
“저기 숨어 있는 사람들, 니가 불렀잖아.”
유강수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최치우의 몸에서 싸늘한 냉기가 뿜어졌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짝짝짝!
박수 소리가 울렸다.
나무 뒤에 숨어 있던 두 명이 모습을 드러내며 손뼉을 쳤다.
“역시 대단해! 강수 말로는 격투기를 배운 것 같다고 하던데 신경이 아주 예민하구만.”
짧은 머리의 중년인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뒤에 선 젊은 남자는 중년인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저씨, 뭡니까?”
“내가 강수한테 부탁했어. 학교에 격투기를 배운 것 같은 강적이 등장했다기에 직접 확인하려는 것이지. 다른 뜻은 없으니 걱정 말고.”
“다 큰 어른이 애들 싸움을 구경하겠다는 거군요.”
“그렇게 말하니 참 거시기하구만. 틀린 말은 아니지. 대신 차이가 있어.”
중년인이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남자답게 생긴 인상과 달리 유들유들한 말투가 독특한 캐릭터였다.
그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착! 착! 착! 착! 네 명이니까 400만 원. 자네가 싸우기만 하면 이 돈을 주지. 아무런 조건 없이. 이만하면 어른이 애들 싸움 구경하는 값으로 충분한 거 아닌가?”
중년인이 지갑에서 100만 원짜리 수표 넉 장을 꺼냈다.
고등학생은 상상하기 힘든 액수의 돈이다.
최치우를 떠나 유강수와 금성고 일진들의 표정이 변했다.
“배, 배, 백만 원! 원래 싸움 한판에 10만 원 아니에요?”
유강수는 중년인과 인연이 있는 듯했다.
이전에도 돈을 받고 싸운 모양이다.
중년인이 실실 웃으며 대답했다.
“원래는 그렇지. 하지만 이 친구는 내가 숨어 있는 걸 알아냈으니 상을 줘야지. 게다가 내 촉이 간만에 대물을 봤다고 말하고 있거든.”
“그럼 우리는요?”
“저 친구한테는 무조건 400을 주고 너네는 이기면 400을 준다. 됐지?”
“네!”
유강수가 우렁차게 대답했다.
일진 셋도 눈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최치우를 이기면 400만 원을 받게 된다.
한 사람씩 나눠도 무려 100만 원이라는 거금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미 김병철의 복수는 안중에도 없었다.
유강수와 아이들은 돈 때문에 싸울 의욕이 활활 타올랐다.
“뭐 하는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기분 더럽네. 돈으로 애들 싸움이나 시키고.”
최치우는 달랐다.
그는 중년인을 노려보며 불만을 내뱉었다.
집안 형편이 어렵지만 400만 원이라는 큰돈을 보고도 혹하지 않았다.
그런 모습마저 중년인의 흥미를 자극했다.
“첫 만남에 오해가 생겼지만, 시원하게 한판 붙고 나서 차차 풀도록 하지. 아까 말한 것처럼 우리는 구경만 할 테니 걱정은 말아.”
중년인이 손에 든 수표를 펄럭이며 뒤로 물러섰다.
그를 수행하는 젊은 남자도 함께 움직였다.
“각오해라, 최치우.”
고개를 돌린 최치우는 유강수와 일진의 표정을 확인했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좀비처럼 돈을 위해 물불을 안 가리는 모습이다.
말로 타이르긴 늦었다.
중년인 덕분에 놈들의 투지는 최고조로 치솟았다.
반드시 최치우를 이기고 400만 원을 타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찬 것 같았다.
“진짜 거지같은 상황이군.”
최치우의 입에서도 험한 말이 나왔다.
그도 한 번은 넘어야 할 과정이기에 금성고 일진을 정리하려 했다.
하지만 정체도 모르는 어른이 개입해서 애들 눈을 돌게 만들자 입맛이 썼다.
“으아아아-!”
곰같이 생긴 놈이 제일 먼저 소리를 지르며 덤볐다.
떡대가 웬만한 어른보다 더 컸다.
압도적인 체격으로 일진 노릇을 해온 것 같았다.
그러나 덩치가 크면 그만큼 느리게 마련이다.
타악!
최치우는 달려드는 놈을 옆으로 피하며 발목을 걷어찼다.
상대의 체중을 역이용한 것이다.
“어억!”
순식간에 균형이 무너진 떡대가 비틀거렸다.
최치우는 망설이지 않고 놈의 뒤통수를 냅다 후려쳤다.
퍽!
한 방이면 충분했다.
그대로 고꾸라진 떡대가 축 늘어졌다.
중심을 잃은 상태에서 맞았기에 곧바로 기절한 것이다.
“한 놈 재웠고, 다음!”
싸움이 시작되자 최치우의 피도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이유 불문, 벌어진 싸움은 무조건 이기고 봐야 한다.
“빵셔틀이던 새끼가 나대지 마라, 씨발 놈아!”
두 번째 상대는 최치우의 역린을 건드렸다.
빵셔틀이라는 단어를 들은 순간, 최치우는 기다리지 않고 땅을 박찼다.
단전의 내공이 종아리를 빵빵하게 채웠다.
슈우우욱- 퍼억!
화살처럼 쏘아져 명치에 주먹을 꽂았다.
상승 무공인 궁신탄영(弓身彈影)을 펼친 것이다.
위력은 본래의 1할 정도지만 피하거나 막을 틈이 없었다.
눈이 빠르지 않으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를 정도였다.
“우우욱… 우웨에엑!”
명치를 얻어맞은 놈은 그대로 구역질을 했다.
오늘 먹은 음식물을 모조리 게워내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둘.
눈이 매섭게 찢어진 놈과 유강수다.
아마 금성고 3학년 일진 중에서 유강수가 제일 센 놈 같았다.
“계속 덤벼. 아니면 같이 와도 좋아.”
최치우는 아직 여유로웠다.
체력도 펄펄했고 내력을 많이 소모하지도 않았다.
그의 단전에는 엄지손톱 크기의 내공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두 달 동안 어렵게 쌓은 내공은 아주 미약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엄청난 무기가 될 것이다.
“먼저 싸워라.”
유강수가 마지막 남은 일진은 떠밀었다.
400만 원을 갖겠다는 욕망은 사라지고 녀석의 얼굴에는 최치우를 향한 공포가 서려 있었다.
“괜히 맞지 말고 집에 가. 쪽팔리는 건 잠깐이지만 아픈 건 오래간다.”
“어? 나, 나는… 가, 갈게.”
세 번째 일진은 최치우의 경고 같은 조언을 받아들였다.
이미 온몸이 얼어붙어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두다다다!
가방을 낚아챈 녀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 공터를 벗어났다.
“너 하나 남았다.”
이쯤 되면 유강수도 겁을 먹을 법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확실히 운동부라 그런지 일진이라고 까불기만 하는 놈들과는 레벨이 달랐다.
유강수는 혼자 400만 원을 먹겠다는 생각인지 눈빛이 달라졌다.
작은 키, 터질 것 같은 허벅지, 튼튼해 보이는 어깨.
유강수의 피지컬은 어디 내놔도 뒤지지 않았다.
‘신체 조건으로는 지금의 나보다 월등해.’
최치우는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육체에서 밀리는 부분은 경험과 기술, 내공으로 극복해야 한다.
“많이 설쳤다, 최치우. 더는 못 봐주겠다.”
“언제는 봐준 적 있고?”
최치우는 유강수와의 기세 싸움에서 밀리지 않았다.
여기에서 승리하면 주먹으로 금성고를 접수하게 된다.
큰 의미는 없지만 어쨌든 남은 학창 시절을 편하게 보낼 수 있다.
유강수는 뒤쪽으로 물러난 중년인을 한번 쳐다보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최치우를 쓰러트리면 친구의 복수, 금성고 일진의 자존심 회복, 게다가 400만 원 획득까지 무려 일석삼조이다.
“흐읍!”
유강수는 짧게 기합을 내질렀다.
유도부 출신답게 쓸데없이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쿵! 쿵!
자세를 낮추고 다가오는 폼이 제법이다.
빈틈없이 최치우의 시야를 장악했다.
‘피하지 말고… 제대로 붙어보자!’
최치우도 호승심이 불타올랐다.
비리비리한 몸뚱어리로 두 달간 수련한 성과를 확인하고 싶었다.
콰아악-!
달려든 유강수가 최치우의 허리와 셔츠를 잡았다.
“끝났어!”
그가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유도 선수에게 몸을 내어주면 승부는 보나마나이다.
“읍!”
유강수가 그대로 최치우를 들어 올렸다.
엎어치기로 땅에 패대기치려는 것이다.
아직 부실한 최치우의 몸이 허공에 살짝 떠올랐다.
바로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푹- 푹!
“허억……!”
갑자기 유강수가 신음을 흘렸다.
그의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엎어치기도 하려다 만 꼴이 됐다.
투툭!
최치우는 가볍게 유강수의 손을 털어냈다.
웬일인지 유강수는 움직이지도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
최치우가 훈계와 함께 주먹을 휘둘렀다.
짧은 궤적의 주먹이 유강수의 관자놀이를 강타했다.
퍼억!
유강수는 그대로 기절했다.
주먹에 내공을 담지 않았기에 잠시 쓰러졌다 일어날 것이다.
최치우는 일부러 유강수에게 잡혀줬다.
유도선수의 파워를 경험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몸이 넘어가려는 찰나, 손가락에 내공을 실어 혈도를 짚었다.
번개처럼 마혈(痲穴)을 공략한 노림수가 먹혔다.
온몸에 맥이 빠진 유강수는 이유도 모르고 허수아비처럼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귀여운 것들.”
최치우는 자신이 쓰러트린 유강수와 일진을 보고 웃음을 지었다.
딱히 악감정은 들지 않았다.
그는 엉겁결에 일진을 평정하고 금성고를 접수하게 됐다.
덕분에 이제 좀 덜 귀찮게 됐다는 생각이 먼저였다.
짝짝짝짝짝!
그런데 뒤에서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직 해결해야 할, 어쩌면 일진과는 비교도 안 되게 귀찮을지 모를 존재가 남아 있었다.
몸을 돌린 최치우가 중년인을 쳐다봤다.
아까보다 확실하게 느껴졌다.
400만 원으로 아이들을 홀린 중년인은 물론 그 옆의 젊은 남자도 이 세계에서는 무시하기 힘든 고수인 게 확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