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번째 환생-5화 (5/243)

# 5

어머니는 금방 비빔밥 한 그릇을 만들었다.

사실 남아 있는 나물에 고추장과 참기름을 넣고 비빈 게 전부이다.

반찬도 김치와 마른멸치가 고작이었다.

하지만 최치우는 누군가 자신을 위해 밥을 해줬다는 것 자체가 고마웠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고 감사할 일은 너무 많다.

“잘 먹겠습니다.”

“물도 마시고 천천히 먹어야 한다.”

“네.”

식탁에 앉아 숟가락을 뜨는데 맛있을 수밖에 없었다.

최치우는 김병철을 패느라 점심도 걸렀다.

오늘의 첫 끼니이자 환생 후 처음 하는 식사였다.

어머니는 허겁지겁 밥을 먹는 최치우를 흐뭇하게 쳐다봤다.

“천천히 먹으래도.”

“맛있어서요.”

“오늘 정말 이상하네. 너한테 집밥이 맛있다는 이야기도 다 듣고. 별일 없는 거 맞지?”

최치우는 순간적으로 김병철과 싸운 이야기를 할지 말지 망설였다.

그러나 이내 결정을 내렸다.

“아무 일도 없어요.”

“학교생활은? 새로 올라간 반 친구들은 괜찮아?”

“다 괜찮습니다. 3학년이라 학교 다니기도 편합니다.”

그는 말하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김병철 이야기를 꺼내면 그동안 빵셔틀로 괴롭힘을 당한 것도 알려질 수밖에 없다.

왠지 모르지만 어머니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만약 내일 학교에서 난리가 나면 어떻게든 혼자 감당할 생각이다.

“잘 먹었습니다.”

밥그릇을 깨끗하게 비운 최치우가 식탁에서 일어났다.

어머니는 오늘따라 예의 바른 아들을 따뜻한 눈빛으로 감싸 안고 있었다.

“방에서 공부 좀 하다 잘게요.”

“공부? 그러렴, 그러렴. 방해 안 할게.”

공부한다는 말로 또 한 번 어머니를 놀라게 하고 방으로 들어온 최치우는 의자 대신 바닥에 앉았다.

구글링을 통해 일차적인 정보는 충분히 수집했다.

이제 육체 단련을 위해 조금씩 준비할 차례였다.

문명화된 사회에서도 무력(武力)은 언제나 비장의 무기가 된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최치우가 두 눈을 감았다.

‘이 자세로 앉아 있는 것도 힘들어. 자세가 정말 엉망이었군. 그래도… 밑바닥에서 최고가 되는 게 내 주특기지.’

인간은 누구나 단전과 내공(內功)을 가지고 있다.

어느 세계에나 마나(Mana)가 흐른다.

다만 그것을 느끼고 개발하는 방법이 널리 알려진 차원도 있고 전혀 아닌 차원도 있을 뿐이다.

당연히 최치우가 살아가는 지구는 후자에 속한다.

그렇다고 해서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내공을 키우는 심법, 마나를 활용하는 캐스팅, 모두 최치우의 머릿속에 생생하게 담겨 있었다.

‘이 몸으로 마나를 느끼는 건 불가능해. 우선 내공을 쌓고 단전부터 키우자.’

최치우는 어떻게 육체를 단련할지 방향을 정했다.

좁쌀만 한 단전을 키우는 게 먼저이다.

현재의 상태로는 무림에서 손꼽히는 심법을 운용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기초적인 도인법으로 몸의 탁기를 제거하고 단전이라는 그릇을 깨끗하게 만드는 것이 첫 번째 단계이다.

첫 스텝만 밟아도 평균 이하인 최치우의 심신(心身)은 눈에 띄게 달라질 것이다.

‘조급해하지 말자. 서두르다가 주화입마라도 걸리면 이 세계에선 답이 없다.’

최치우가 처음 선택한 도인법은 달마역근경(達磨易筋經)이었다.

소림사 무술의 기초를 닦은 전설적인 승려 달마가 창안한 도인법으로 심신을 단련하는 데 적합한 기초 무공이다.

게다가 경지가 깊어지면 자연스레 상승 무공으로 이어진다.

그는 이태민으로 살아갈 때 소림사를 구해주고 여러 비급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 덕을 이렇게 현생에서 톡톡히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시작해 볼까?”

기분 좋게 혼잣말을 읊조린 최치우는 가부좌를 풀고 일어섰다.

달마역근경은 온몸에 기가 흐르게 만드는 체조이기에 움직이며 수련해야 한다.

좁은 방 안에서 팔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한 최치우의 표정은 무척 진지해 보였다.

내일 학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내일 고민하면 된다.

오늘,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것이 그가 수많은 차원에서 최고의 인간이 됐던 비법이다.

그 비법은 현대의 지구에서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었다.

***

날이 밝았다.

무진장 길게 느껴진 환생 첫날이 지나가고 두 번째 해가 떠오른 것이다.

단 하나의 태양이 푸른 하늘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어머니는 최치우보다 일찍 일어나 김밥 가게로 출근하셨다.

거실로 나오니 식탁 위에 토스트 두 쪽이 놓여 있다.

새벽같이 출근하면서도 아들이 아침을 거를까 염려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전해졌다.

최치우는 토스트로 배를 채우고 간단히 씻었다.

그는 세수를 하며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다.

강인한 영혼이 깃들어 맹하던 눈빛이 맑고 뚜렷해졌다.

눈빛만 변해도 인상이 달려진다.

최치우는 물기 묻은 손으로 자신의 눈, 코, 입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이만하면 나쁘지 않은 얼굴이다.

연예인처럼 잘생긴 건 아니지만 딱히 흠잡을 구석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감을 갖고 살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허약한 육체는 단련하면 되고, 부족한 지식은 채우면 되고, 허우대도 멀쩡하고……. 빵이나 나르면서 허송세월할 수는 없지.”

말에는 힘이 있다.

인생은 결국 말하는 대로, 자기 자신이 믿는 대로 풀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최치우는 아침부터 스스로에게 힘을 불어넣었다.

이윽고 교복을 입은 그가 집 밖으로 나섰다.

낡은 다세대주택이 모여 있는 동네를 벗어나 학교까지 걷고 또 걸었다.

최치우는 오늘 또한 어제만큼 순탄치 않을 거라고 예상했다.

김병철은 악질적인 일진이지만 어쨌든 같은 학교 학생이다.

게다가 잘나가는 부잣집 아들이라고 들었다.

그런 놈을 두들겨 패서 병원에 보냈으니 조용히 넘어갈 리 없을 것 같았다.

어제 곧바로 사달이 안 난 것만 해도 운이 좋았다.

‘내가 저지른 일은 내가 책임을 져야지.’

걱정은 됐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어머니가 알게 되는 게 걱정스러울 뿐, 선생님에게 혼나고 학교에서 징계를 받는 게 겁나는 것은 아니었다.

‘정학 처분을 받으면 수련과 공부에 집중할 수 있고, 강제 전학을 가라고 하면 새로운 환경에서 조용히 미래를 준비해야지. 뭐가 어떻게 되든 후회는 없다.’

생각해 보면 고작 주먹 두 방을 먹인 게 전부이다.

턱에 한 방, 코에 한 방.

그동안 최치우가 빵셔틀로 괴롭힘을 당한 것을 생각하면 그만하길 다행이었다.

“어? 쟤, 학교 왔네?”

“쉿! 듣겠다. 조용히 해, 인마.”

교실에 들어선 최치우는 자신을 쳐다보는 학생들의 시선을 느꼈다.

확실히 어제의 싸움 이후 금성고 학생들은 최치우라는 존재를 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수많은 학생들이 구경하는 가운데 김병철을 통쾌하게 쓰러트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직접 현장을 보지 못한 학생들은 최치우의 숨겨진 싸움 실력을 소문으로 들었다.

소문 속 최치우는 격투기 선수처럼 김병철을 원 펀치로 제압하고 쓰러진 놈에게 무자비하게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원래 소문은 부풀려지게 마련인데, 최치우가 워낙 압도적인 싸움을 했기에 더 이상 과장될 것도 없었다.

“근데 그렇게 싸움을 잘하는데 왜 이때까지 빵셔틀로 살았을까?”

“모르지. 격투기 체육관에서 절대 싸우지 말라고 했을 수도 있고. 알고 보면 선수 준비하는 거 아냐?”

“헐! 소름이다, 소름. 나 쟤한테 한 번도 심부름 시킨 적 없는데 완전 다행인 거 아니냐.”

“아, 씨. 나는 김병철이 시킬 때 서너 번 부탁한 적 있는데… 어떡하지?”

“뭘 어떡해? 그냥 눈도 마주치지 말고 죽은 듯이 있어.”

같은 반 친구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다 들렸다.

어제부터 달마역근경으로 수련을 시작했다고 그새 감각이 한층 예민해져 있었다.

드르르륵-

그때 교실 문이 열리고 담임선생님이 들어왔다.

정년퇴직을 앞둔 담임은 권태에 찌들어 학생들에게 아무 관심이 없는 양반이었다.

“최치우.”

“네.”

담임이 오자마자 최치우를 불렀다.

최치우는 각오했다는 듯 담담하게 손을 들었다.

“따라와라. 다른 학생들은 1교시 시작할 때까지 조용히 자습하고 있고, 떠드는 놈 명단은 반장이 적어서 제출하고. 알겠나?”

“예!”

학생들이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최치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담임선생님의 뒤를 따라갔다.

말없이 복도를 걸어가던 담임은 상담실을 저만치 앞두고 잠깐 멈춰 섰다.

“김병철을 때렸다면서? 병철이 어머님이 와 계신다.”

“…….”

“듣자 하니 김병철이가 평소에 애들을 많이 괴롭혔다지? 이왕이면 서로 일 크게 만들지 말고 조용히 덮자.”

담임이 의외의 말을 꺼냈다.

건조한 목소리로 사건을 적당히 무마하자고 한 것이다.

대충 이해는 됐다.

정년을 앞두고 자기 반에서 폭력 사건이 일어났다면 좋을 게 하나도 없다.

골치만 아프고 경력에도 흠이 생긴다.

최치우를 위해서가 아니라 담임의 보신(保身)을 위해 싸움을 적당히 무마하려는 것이다.

담임선생님의 무감정하고 사무적인 태도가 최치우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최치우는 담임의 눈을 마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이번 차원은… 참 복잡하고 재밌는 세상이야.’

***

상담실에서 한바탕 난리가 났지만, 담임은 우직하게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김병철의 어머니는 최치우를 가만두지 않겠다며 길길이 날뛰었다.

명품 로고가 큼지막하게 박힌 옷을 걸치고 온 그녀는 최치우의 뺨이라도 올려붙일 기세였다.

최고 수준의 징계를 내리지 않으면 학교를 매장시키겠다는 악담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말년을 평탄하게 보내려는 담임의 의지는 그보다 더 강했다.

“어머님, 죄송하지만 병철이가 평소 학생들을 많이 괴롭힌 모양입니다만…….”

사실상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싸움 문제를 공론화하면 김병철의 생활기록부에 폭력 가담자임을 적겠다고 사인을 준 것이다.

김병철의 어머니는 씩씩거리면서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최치우를 노려보며 잊지 못할 명언을 남겼다.

“우리 병철이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지? 시의원이야, 시의원! 너 아주 운 좋은 줄 알아. 밑바닥 인생이라 봐주는 거니까.”

순간 최치우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막말을 쏟아내는 아줌마에게 맹아일격을 날릴까 갈등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도 김밥을 말고 있을 어머니, 이른 아침에도 토스트를 구워놓고 나간 어머니 생각이 그를 붙잡았다.

“병철이 어머님, 말씀이 너무 심하십니다.”

담임이 나서면서 불쾌한 만남은 끝이 났다.

알고 보니 김병철은 턱뼈가 골절되고 코뼈에 금이 갔다고 한다.

이만하면 최치우가 아무 처벌을 안 받게 된 것은 기적이었다.

그렇다고 담임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평소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가 자기 안위 때문에 나선 사람이기 때문이다.

“겨우 덮었으니까 졸업할 때까지 조용히 지내라.”

상담실에서 나온 최치우는 담임의 당부를 듣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김병철의 어머니를 노려봤다.

두고 보자는 말 따위를 할 필요는 없었다.

최치우의 이글거리는 눈빛이 말보다 강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언젠가 반드시 오늘 뱉은 말을 후회하게 만들어준다, 못생긴 아줌마.’

김병철의 어머니도 마지막 순간 최치우가 뿜어낸 눈빛에 위축된 것 같았다.

최치우는 혼자 복도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그는 반으로 돌아가며 많은 생각을 했다.

‘다른 차원에서는 무력이 제일 중요했지만 여긴 확실히 달라. 돈, 명예, 인맥, 사회적 지위, 이 모든 것이 무력만큼, 아니, 무력보다 더 중요해. 이 세계의 정점이 되기 위해서는 준비할 것도, 갖춰야 할 것도 많다. 그래야 다시는 저런 인간에게 무시당하지 않겠지.’

김병철을 두드려 팬 건 단순한 신고식이 아니었다.

이 사건을 통해 최치우는 자신이 무엇을 추구해야 할지 생생하게 체감했다.

김병철의 어머니는 그 기폭제 역할을 했을 따름이다.

꽈악!

최치우는 3학년 1반 문 앞에서 손이 빨개지도록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그는 이 세상의 밑바닥에 위치해 있었다.

분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바닥이기에 앞으로 높이 올라갈 일만 남았다.

최치우의 눈동자가 한층 깊어지고 짙어졌다.

평범한 고등학생 눈이라고는 믿기 힘들었다.

담임은 조용히 지내라고 했지만, 남은 고3 생활이 파란만장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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