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뭔가 다른 차원>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시간이 흘러갔다.
김병철은 학교를 조퇴하고 친구들의 부축을 받아 병원으로 갔다.
당분간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는 지경이 됐을 것이다.
최치우는 학교에서 난리가 날 것을 각오했지만, 선생님들은 점심시간의 싸움을 모르는 눈치였다.
어쩌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적어도 오늘 내로는 싸움의 후폭풍이 불어 닥치지 않을 전망이다.
대신 학생들의 태도는 확연하게 달라졌다.
대놓고 괴롭히진 않아도 은연중 최치우를 무시하던 학생들이 다수였다.
김병철이 매점 심부름을 시킬 때 자기 용무를 보태는 놈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다들 최치우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최치우가 비록 모래를 차는 임기응변을 쓰긴 했지만, 요행이 아닌 실력으로 김병철을 떡실신시켰기 때문이다.
사각을 파고들어 주먹을 턱에 꽂는 장면은 UFC가 따로 없었다.
더 무서운 건 그다음이었다.
최치우는 쓰러진 김병철의 몸에 걸터앉아 확실하게 마무리를 했다.
웬만큼 독하지 않으면 고등학생들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금성고 학생들의 뇌리에 최치우가 김병철의 얼굴을 박살 내는 광경이 강렬하게 각인됐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그는 공식 빵셔틀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성질 더러운 일진을 박살 낸, 전교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주먹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어느 차원이나 약육강식의 법칙은 똑같군.’
최치우는 팔짱을 끼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약해 보이면 도와주기보다는 잡아먹으려 드는 게 짐승의 본능이다.
인간도 그 본능에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고차원적으로 발전한 태양계의 지구도 마찬가지였다.
이곳 역시 사람 사는 곳이고, 이제껏 최치우가 경험한 차원들과 비슷한 법칙이 통용되고 있었다.
‘우선은 이 차원에 대해 조금 더 알아봐야겠어.’
최치우는 공부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가 갖고 있는 지구에 대한 지식은 무척 제한적이다.
공부에 관심이 없는 고등학교 3학년 수준의 지식이 전부였다.
이 정도로도 당장 적응하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최치우가 만족하기엔 머릿속에 담긴 정보가 한참 부족했다.
그는 언제나 새로운 차원에서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가려 노력해 왔다.
세계의 정점에 올라서야만 보다 더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으로 일생을 살아가면 신의 뜻을 깨우치기 어려울 것 같았다.
물론 지난 여섯 번의 차원에서는 실패했지만 딱히 다른 방법이 없었다.
영혼에 새겨진 타고난 승부욕도 항상 그를 최고의 자리로 이끌었다.
‘이 몸과 이 머리로는 갈 길이 멀다.’
최치우는 냉정하게 자기 자신을 평가했다.
고작 같은 학교의 일진 한 명 때려눕혔다고 만족할 수 없었다.
지구라는 차원에서 최강의 인류가 되기까지, 그리하여 신의 원대한 뜻을 깨닫기까지 머나먼 여정을 시작해야 한다.
‘여기서는 7이 행운의 숫자로군. 이번만큼은 행운이란 게 따라줬으면…….’
최치우는 혼자 깊은 생각의 바다를 헤엄치며 시간을 보냈다.
김병철을 쓰러트린 그가 말없이 가만히 앉아 있으니 학생들은 최치우를 더 무서워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간은 공평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
학교 수업은 해가 지기 전에 끝났다.
야간자율학습이 있지만 고3들에게는 선택권이 주어졌다.
학원이나 과외 수업을 위해 야자를 빼먹어도 묵인해 주는 것이다.
1학년, 2학년은 누릴 수 없는 특혜였다.
입시를 목전에 둔 고3이기에 학교에서 최대한 배려를 해준 것이다.
어차피 공부를 포기한 학생들은 억지로 붙잡아 교실에 앉혀놔도 면학 분위기만 흐린다.
덕분에 최치우도 일찍 하교할 수 있었다.
그는 선생님들 사이에서 조용한데 공부 못하는 놈으로 찍혀 있었다.
성적은 중하위권에 특별히 사고를 치지 않는 존재감 약한 학생인 셈이다.
빵셔틀로 고생했다는 건 선생님들이 알 리 없었다.
고3 담당 교사들의 관심은 공부 잘하는 모범생들에게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최치우는 야자를 하지 않는 3학년들 틈에 섞여 교문 밖으로 나왔다.
“쟤가 그 최치우지? 빵셔틀.”
“들리겠다. 말조심해. 김병철이 턱이랑 코랑 다 박살 났다는데… 너도 잘못 걸리지 말고.”
“아, 맞다.”
점심시간의 싸움 이야기가 전교를 제대로 휩쓴 모양이다.
우르르 뒤섞여 하교하는 길에 최치우를 의식하는 3학년들이 제법 생겨났다.
최치우는 당연히 그런 학생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다른 문제에 집중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어머니의 존재이다.
링스 월드에서 그는 천애 고아였다.
여섯 번의 차원을 넘나들며 환생을 했지만, 단 한 번도 부모님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부모라는 존재는 그에게 있어 미지의 영역이었다.
일곱 번째 환생에서도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다.
하지만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원래 최치우는 어머니께 불평과 짜증을 토로하기 일쑤였다.
하루 종일 김밥을 팔며 고생하는 어머니에게 버릇없이 굴면 안 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과연 어떤 아들이 되어야 할까.
온갖 경험과 지식으로 무장한 최치우도 아들 노릇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벌써부터 어색한 것이다.
“나를 낳아주고 키워주는 사람,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사람…….”
집까지 터벅터벅 걸어가며 어머니의 사전적 정의를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머리로는 이해가 됐다.
그러나 가슴으로 받아들이긴 어려웠다.
확실한 건 일곱 번째 환생이 이전과는 여러모로 다른 점이 많다는 것이다.
지구라는 세계는 다른 차원보다 훨씬 복잡했고, 처음 주어진 어머니의 존재도 낯설었다.
신이 색다른 기회를 준 것일까, 아니면 더 골탕을 먹이려는 것일까.
최치우는 잠깐 하늘을 올려다보고 빠르게 걸었다.
그의 집은 금성고에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았다.
빠른 걸음으로 20분이 조금 넘는 거리이다.
보통 학생들은 마을버스를 타겠지만, 최치우는 굳이 걸어서 등하교를 해왔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기에 버스비라도 아껴야 했다.
‘버스 세 번이면 김밥이 두 줄이다.’
최치우는 자신도 모르게 버스비와 식비를 계산하고 있었다.
아직 혼란스러운 게 많지만, 일곱 번째 인생의 주인공인 최치우로 동화되어 간다는 뜻이다.
뭔가 다른 차원에서 다른 일상이 펼쳐질 것 같았다.
***
타닥, 타닥, 타다닥!
조용한 방 안에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만 울린다.
최치우는 심각한 표정으로 컴퓨터 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컴퓨터를 다루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고등학생이라면 누구나 기본적인 컴퓨터 상식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여섯 번째 차원에서 기계화 군단의 엔지니어였다.
기술의 발전 방향이 다르긴 하지만, 지구보다 훨씬 고도화된 문명의 지식을 습득한 상태였다.
여건만 주어지면 언제든 최고 레벨 엔지니어로서 실력을 뽐낼 수 있었다.
‘참 다양한 방식으로 과학 기술이 발전했어.’
최치우는 구글링을 통해 최신 정보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기존에 갖고 있는 고등학생 수준의 정보로는 문명이 어디까지 발전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인터넷과 구글만 있으면 뭐든 알아낼 수 있는 세상이다.
컴퓨터 앞에 앉은 최치우는 마치 스펀지 같았다.
새로운 세상의 지식을 물처럼 흡수하며 뇌의 용량을 어마어마하게 늘리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는 반드시 영어를 배워야겠군.’
다만 한 가지, 영어를 못한다는 게 아쉬웠다.
대부분의 고급 정보는 영어 원서로 만들어져 있다.
한국어로 번역이 되지 않은 자료가 훨씬 더 많지만 당장은 읽을 방법이 없었다.
구글 번역기로 돌려볼까 해도 완성도가 떨어졌다.
결국 스스로 영어 공부를 하는 게 유일한 해결책 같았다.
‘영어, 입시 공부, 그리고 육체 단련까지… 할 일이 정말 태산이다.’
지금의 최치우는 세계의 정점에 올라설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었다.
냉정하게 말하면 큰 꿈을 꿀 자격조차 없었다.
하지만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했다.
끼이익- 철컥!
그때였다.
현관문이 열렸다.
최치우가 학교에서 돌아와 컴퓨터로 정보를 수집한 지 몇 시간이 지났다.
그사이 일을 마친 어머니가 귀가한 것이다.
“치우 왔니?”
어머니의 음성이 최치우의 가슴에 잔잔한 파문을 만들어냈다.
고단한 노동에 지친 기색이 목소리에 담겨 있었다.
그럼에도 아들을 향한 관심이 느껴졌다.
“네, 어머니.”
최치우는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거실로 나갔다.
작은 방 두 개와 부엌 겸 거실이 좁은 집의 전부였다.
외풍이 심한 오래된 다세대주택이지만 이마저도 감지덕지했다.
거실에서 어머니와 마주친 최치우가 고개를 숙였다.
“다녀오셨어요.”
“어? 응… 다녀왔지. 그런데 혹시 어디 아픈 거 아니지?”
어머니는 최치우가 직접 나와 인사를 하자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거의 몇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최치우는 고등학교에서 빵셔틀이 된 스트레스를 집에서 풀어왔다.
툭하면 어머니께 짜증을 내는 못난 아들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최치우는 오늘뿐 아니라 앞으로도 다르게 살겠다고 마음먹었다.
어머니와 아들 사이의 사랑, 정. 솔직히 이런 감정을 가슴 깊이 이해하진 못했다.
이제껏 한 번도 부모님을 만나본 적이 없기에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최소한의 도리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안 아파요. 괜찮습니다.”
“그래, 그럼 다행이구나. 저녁은 챙겨 먹었니?”
“아, 그러고 보니 아직…….”
집에 와서 구글링으로 정보를 습득하는 데 몰입하느라 밥을 깜빡했다.
일단 집중하면 무섭게 빠져드는 것이 최치우의 강점이었다.
어머니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한창때 끼니 거르면 안 되지. 조금만 기다리면 비빔밥 해줄게.”
“네, 어머니.”
최치우는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어머니라는 말이 영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싫거나 불편하지도 않았다.
그는 가만히 서서 어머니의 모습을 쳐다봤다.
쉬지 않고 일하느라 여기저기 피부가 벗겨진 손, 종일 서 있어서 퉁퉁 부은 다리까지.
고운 얼굴을 한 어머니는 혼자서 최치우를 키우기 위해 세월의 풍파를 정면으로 맞은 것 같았다.
“방에서 쉬고 있으렴.”
어머니는 가방을 내려놓고 곧장 싱크대 앞에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열 시간 넘게 김밥을 말았으면 밥 냄새도 맡기 싫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아들의 저녁밥을 차려주기 위해 다시 부엌에 선 것이다.
최치우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며 묘한 기분을 느꼈다.
아슬란 대륙에서 대마도사 쿤데라에게 스승과 제자로 예쁨을 받을 때와는 확실히 다른 기분이었다.
‘부모님과의 관계가 이런 건가.’
아직은 알 듯 모를 듯했다.
최치우는 방에 들어가지 않고 거실에 서서 계속 어머니를 지켜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