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교실 구석에 앉은 치우의 눈이 반짝였다.
계속되는 환생에 질렸지만, 새로운 삶이 시작된 순간만큼은 의지가 생겼다.
그것은 모든 생명의 본능이다.
치우는 머릿속 조각들을 맞추며 지구에 적응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
고등학교 3학년이면 세상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갖추고 있다.
어린아이로 환생하는 것보단 여러모로 편리했다.
치우는 링스 월드에서의 인생과 여섯 번의 환생을 거치며 얻은 지식을 고스란히 갖고 있었다.
거기에 19년에 걸친 최치우의 기억이 더해진 것이다.
물론 지난 차원에서 마음껏 사용하던 능력은 무(無)로 돌아간다.
기억과 지식, 경험만 유지될 뿐 낯선 환경에서 모든 게 새 몸에 맞춰진다.
그러나 엄청난 무기를 지닌 것만은 틀림없었다.
다른 차원에서의 경험을 활용하면 엄청나게 빨리 성장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내공이 하나도 없는 낭인무사로 환생했어도 천마를 쓰러트린 천하제일검이 되는 게 가능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하다. 너무하다고!’
치우는 속으로 울분을 터트렸다.
금성고 3학년 최치우는 일곱 번째 환생 중 최악의 케이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매일 시장에서 김밥을 팔며 열네 시간씩 일하신다.
단지 어려운 가정 형편을 원망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길바닥에서 먹고 자는 소매치기로 환생한 적도 있었다.
문제는 최치우의 몸 상태와 정신 상태였다.
‘마나는 아예 없고 내공은커녕 단전도 좁쌀만 하고… 게다가 근육도 너무 모자란 체형. 그나마 키가 평균은 되는 게 다행인가. 목, 어깨, 척추, 허리, 무릎까지 자세와 균형도 맞지 않는다. 이런 몸이라면 어린 오크 한 마리도 못 잡고 찢겨 죽겠어.’
이태민으로 환생했을 때는 내공이 없는 대신 튼튼한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소매치기는 민첩했고, 제로딘은 마법에 관한 천부적인 재능의 소유자였다.
최치우로 환생하기 바로 직전, 기계군단의 엔지니어는 로봇에 생명을 불어넣는 장인이었다.
그런데 최치우는 내세울 게 하나도 없었다.
19년 동안의 기억을 샅샅이 뒤져봐도 정말 써먹을 재능이라곤 없었다.
허우대만 멀쩡한 약골이라도 다른 장점이 있으면 된다.
하지만 정신 상태는 몸 상태보다 더더욱 심각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며 왕따를 당하기 시작해서 막 3학년이 됐다.
그간의 오랜 괴롭힘 때문에 최치우의 정신은 한없이 나약해지고 비뚤어져 있었다.
두려움, 절망, 복종, 무기력함.
이런 감정들이 최치우의 기억을 지배하며 정신을 좀먹었다.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집에서 풀었다.
온갖 고생을 다 하면서 혼자 최치우를 키운 어머니께 매일 짜증을 냈다.
‘하필 이런 놈으로 환생하다니…….’
탄식이 절로 나왔다.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했다.
오죽 학교생활이 힘들었으면 벌써부터 몸과 정신이 이렇게 망가졌을까.
‘그래도 반항이라도 해봤어야지. 애꿎은 어머니에게 화풀이를 하는 건 아니지, 이놈아.’
최치우가 최치우를 꾸짖었다.
환생을 통해 새로워진 최치우가 과거의 자신을 혼내면서 안타까워했다.
이것은 자책인 동시에 위로이기도 했다.
지금부터 잘살면 된다.
과거보다 중요한 것은 현재와 미래이다.
불멸의 전사, 차원 방랑자의 영혼이 깃들었으니 금성고 공식 빵셔틀은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당장 해결해야 할 과제가 다가오고 있었다.
국사 시간이 끝나면 금성고를 대표하는 양아치 김병철이 가만있지 않을 게 분명했다.
일진이라고 설치는 학생들 중에서 제일 질이 안 좋은 놈이 김병철이었다.
보통 고3이 되면 일진도 공부에 신경을 쓴다.
수능이 20대 이후의 인생을 가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병철은 미래를 포기한 인간처럼 계속 막장으로 굴었다.
집이 부자이기 때문에 겁나는 게 없어서인지도 모른다.
‘어느 차원이나 불공평한 건 마찬가지군. 저런 쓰레기가 부잣집에서 편하게 살고.’
김병철은 약한 학생들만 골라서 지독하게 괴롭히는 인간 말종이었다.
악평이 자자하지만 선생님들도 함부로 훈계하지 못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학교에 거액의 발전 기금을 냈기 때문이라고 한다.
딩동댕동- 딩동댕동-
“수고하셨습니다!”
50분이 다 지나고 학생들이 국사 선생님께 인사를 했다.
최치우는 고개를 돌려 김병철의 자리를 쳐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놈이 자신을 마주 보며 비릿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일곱 번째 인생도 순탄하지는 않겠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칼 하나로 수십만을 죽이고 제국을 몰락시킨 장본인이 겨우 고등학생 양아치와 싸워야 한다.
최악의 피지컬을 가진 몸이라 잘못하면 환생 첫날에 두들겨 맞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너무 우스웠다.
‘신이시여, 정말 내 영혼을 인정사정없이 시험하는군. 하늘에서 재밌게 보고 있겠지?’
최치우는 조물주를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먼저 팔을 뻗어 김병철을 지목했다.
“양아치 새끼야, 점심시간에 나랑 한판 붙자.”
반 전체가 조용해졌다.
다들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을 잃었다.
30명의 학생이 최치우만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다.
전교생이 다 아는 공식 빵셔틀이 성질 더러운 일진에게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지목당한 김병철도 넋이 나갔다.
사람은 전혀 예상 못한 일을 당하면 어안이 벙벙해질 수밖에 없다.
“이 찐따 새끼가 아까부터 진짜 돌았나.”
김병철이 황당한 듯 고개를 좌우로 까딱거리며 일어섰다.
다른 학생들은 김병철이 최치우에게 다가가기 쉽도록 길을 비켜줬다.
대부분 선량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모두 공범이다.
왕따는 나쁜 소수의 주동과 침묵하는 다수의 공조에 의해 이뤄지는 범죄 행위이다.
최치우는 애초에 반 친구들로부터 무엇도 기대하지 않았다.
“점심시간, 학교 뒤뜰, 애들 다 보는 데서 정식으로 붙자. 내가 지면 졸업할 때까지 군말 없이 노예처럼 산다.”
최치우가 승부수를 던졌다.
이제 막 고3이 됐기에 수능까지 8개월은 더 학교를 다녀야 한다.
남은 학교생활을 편하게 보내려면 과감하게 배팅할 필요가 있었다.
더구나 교실보다는 뒤뜰이 싸우기 유리한 장소였다.
“군말 없이 노예? 니 입으로 말했다?”
김병철이 미끼를 물었다.
사실 빵셔틀로 살고 있는 지금도 노예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스스로 인정을 하고 안 하고의 차이는 꽤 크다.
최치우는 김병철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입으로 두말 안 한다.”
“뭘 잘못 처먹었는지 몰라도 단단히 미쳤네. 점심시간부터 노예 될 준비나 해라.”
딜이 성사됐다.
2시간 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희대의 싸움판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최치우는 굳이 자신이 이겼을 때의 조건을 걸지 않았다.
그는 김병철을 철저하게 박살 낼 작정이다.
그렇기에 다른 조건이 필요치 않았다.
“야, 저러다 최치우 죽으면 어떡하지?”
“설마 병철이가 그 정도까지 하겠어. 적당히 패고 말겠지.”
“근데 진짜 돌았는지도 몰라. 무슨 깡으로 병철이한테 개기는 걸까?”
“아, 몰라, 난 그냥 공부나 할래.”
같은 반 아이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김병철이 최치우를 반죽인다는 것은 기정사실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그저 몇몇이 최치우의 용감한, 혹은 무모한 행동을 궁금해할 따름이었다.
‘두고 봐라. 이제 이놈은, 아니, 나는 새로운 인생을 살 테니까.’
최치우가 책상 아래에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는 모든 차원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높은 곳에 서면 보이는 풍경이 달라지는 법이다.
신이 수많은 세상을 창조한 이유를 깨닫기 위해서라도 차원의 정점에 올라야 할 것 같았다.
게다가 링스 월드에서부터 치우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승부욕의 소유자였다.
계속되는 환생에 지쳐가도 본성이 어디로 사라지진 않는다.
싸움을 앞둔 최치우의 눈빛이 투지로 반짝였다.
김병철은 그동안 약한 학생들을 괴롭힌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것 같았다.
***
“야, 야! 진짜 한다!”
“와, 헛소문인 줄 알았는데 진짜네?”
금성고 학생들은 평소와 다른 이유로 웅성거렸다.
점심시간 종이 치자마자 밥도 마다하고 뒤뜰로 모인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짬이 안 되는 1학년, 2학년들은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구경했다.
3학년 공식 빵셔틀 최치우와 일진 김병철이 한판 붙는다는 소문은 이미 전교에 다 퍼졌다.
학생들의 관심사는 단 하나였다.
김병철이 얼마나 잔인하게 최치우를 두들겨 패고 노예로 부릴 것인가.
1%라도 반전을 기대하는 학생은 없었다.
“질질 짜면서 무릎 꿇고 빌면 그만해 줄게. 그니까 더 못 맞겠으면 무릎부터 꿇어.”
김병철이 최치우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그는 기분이 나빠질 대로 나빠져 있었다.
고작 빵셔틀이랑 붙는다는 이유로 함께 어울리던 3학년 일진들에게 무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엉겁결에 최치우의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생각할수록 불쾌한 일이었다.
최치우가 감히 자신에게 도전할 마음을 먹었다는 것 자체가 용납이 안 됐다.
‘눈동자가 흔들리고 목소리는 쓸데없이 높아졌다. 흥분하고 있다는 증거지. 구경꾼이 많이 몰린 상황에 당황하고 있는 게 분명하군.’
최치우는 말없이 김병철을 분석하고 있었다.
자신만만한 척하고 있지만 김병철의 상태는 평소 같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흥분하고 당황하면 운동신경은 떨어지고 실수할 확률은 올라간다.
교실 뒤에서 싸우는 것보다는 최치우에게 유리해졌다.
‘게다가 여기.’
최치우가 굳이 학교 뒤뜰을 결전의 장소로 선택한 이유가 있었다.
뒤뜰에는 모래가 곳곳에 뭉쳐 있었다.
씨름장 공사를 하다가 만 흔적이 뒤뜰에 남아 있는 것이다.
최치우는 기억 속 뒤뜰의 지형을 떠올리고 유레카를 외쳤다.
“이제 와서 겁나냐? 미친 새끼가 아가리 닫고 가만히 서 있네.”
김병철이 다시 한번 시비를 걸었다.
최치우는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당장 피지컬로 따지면 김병철이 월등하다.
키도 머리 하나는 더 크고 근력이나 민첩성도 비리비리한 최치우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
하지만 싸움은 피지컬만으로 하는 게 아니다.
최치우는 무려 7차원에 걸친 경험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 영혼의 강인함으로는 모든 차원을 통틀어 둘째가라면 서럽다.
“입 그만 털고 덤벼.”
최치우의 도발이 김병철의 신경을 왕창 긁었다.
이성을 잃은 그가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이 개새끼가!”
힘이 잔뜩 실렸지만 동작이 무척 컸다.
맞으면 아플 것이다.
그러나 맞아줄 이유가 없다.
최치우는 재빨리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부우웅-!
무식한 주먹질이 허공을 갈랐다.
이제 공은 최치우에게 넘어왔다.
파박!
그는 섣불리 반격하는 대신 바로 옆의 모래 덩어리를 발로 찼다.
동시에 희뿌연 먼지가 휘날리며 모래가 김병철에게 튀었다.
“이런, 썅!”
김병철이 욕을 하며 손을 휘저었다.
갑자기 날아든 모래가 눈에 들어가 보이는 게 없었다.
최치우는 망설이지 않고 스텝을 밟았다.
‘맹아일격(猛牙一擊)!’
아주 미약하지만 그의 오른손에 바람의 힘이 응축됐다.
절세신룡 이태민의 차원에서 권왕(拳王)이 쓰던 무공이다.
내공이 하나도 없는 상태지만 초식은 따라 할 수 있었다.
그래봤자 원래의 위력 10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순간적인 속도와 파괴력은 장난이 아니었다.
쐐애액- 빠악!
제대로 걸렸다.
최치우의 주먹이 김병철의 아래턱을 강타했다.
순도 100%의 정타가 급소 중의 급소인 아래턱을 날려 버린 것이다.
“커어억……!”
김병철의 눈이 뒤집혔다.
그가 하얀 게거품을 문 채 뒤로 쓰러졌다.
쿠웅!
대(大) 자로 뻗은 꼴이 우스웠다.
싸움을 지켜보던 금성고 학생들은 공포 영화를 본 것처럼 얼어붙었다.
그러나 최치우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이런 양아치들의 습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다시 덤빌 생각을 못 하게 확실히 끝장을 봐야 한다.
“후우, 후우우!”
최치우의 몸 상태도 좋지는 않았다.
환생을 하자마자 최악의 몸뚱이로 상승 무공인 맹아일격을 펼쳤기 때문이다.
그래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앞으로는 내 얼굴만 봐도… 오줌을 지리게 될 거다.”
최치우는 쓰러진 김병철의 가슴팍에 걸터앉았다.
곧이어 UFC 파이터가 파운딩을 하는 것처럼 놈의 얼굴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퍽!
김병철의 코에서 쌍코피가 터졌다.
사방이 조용해졌다.
하지만 최치우는 멈추지 않았다.
자신이 환생한 걸 보니 원래 몸의 주인은 오늘 죽을 운명이었다.
어쩌면 쓰러져 있는 김병철에게 맞아서 죽을 운명은 아니었을까.
‘최치우, 이제 네가 나고 내가 너다.’
그는 환생하기 전까지 존재하던 스스로의 복수를 대신 해줄 작정이다.
빠악! 퍼억! 퍼퍼퍽!
힘은 빠졌지만 분노가 실린 주먹이 김병철의 얼굴을 난타했다.
그 살벌한 광경에 싸움 구경을 하는 학생들 모두가 공포감을 느꼈다.
“후, 이만하면 됐다.”
땀을 한 바가지 쏟아낸 최치우는 오랜만에 살아 있음을 느꼈다.
신이 내린 형벌, 7번째 차원에서의 환생을 즐길 준비가 끝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