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번째 환생-2화 (2/243)

# 2

<환생도 지겹다>

촤아아악-!

핏방울이 하늘로 튀었다.

얇고 예리한 칼날이 상대의 가슴에 십(十) 자를 만들었다.

털썩!

육중한 거구를 자랑하던 사내가 무릎을 꿇었다.

그는 자신의 가슴에서 피가 철철 흐르는 것을 바라보며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천하통일을 목전에 두고 패배하다니…….”

“그래도 너 정도면 제법 강한 적이었다, 천마.”

천마(天魔).

마교의 절대자를 물리친 건 놀랍게도 한창 젊은 검객이었다.

절세신룡 이태민.

혜성처럼 강호에 나타나 천하제일검이 된 그가 무림을 구한 것이다.

천마는 이태민의 말에 눈을 부릅떴다.

다 죽어가면서도 기백은 잃지 않았다.

“뭣이라? 당금 무림에 나보다 더 강한 무인이 있다는 말이더냐?”

이태민은 한 손으로 귀를 파며 대답했다.

“무림에서는 네가 제일 강하지. 그런데 이전 차원에선 3위 정도 하려나.”

“그, 그게 무슨 말인가?”

“그런 게 있어. 아무튼 이제 그만 죽어라. 너를 죽이고 마교 잔당 소탕하러 가야 한다.”

이태민이 다시 검을 높이 들었다.

천마의 목숨을 완전히 끊기 위함이다.

그러나 천마는 무릎을 꿇은 상태로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하! 내가 괜히 너를 이곳으로 유인했겠느냐? 삼만 근의 폭약을 묻어두었다! 나와 함께 지옥으로 가자!”

말을 마친 천마가 두 손을 땅에 붙였다.

단전에 남은 내력을 쥐어짜 폭발시키려는 것이다.

아무리 천하제일검이라 해도 삼만 근의 폭약이 터지면 죽을 수밖에 없다.

더구나 이곳은 절벽 사이의 협곡이다.

몸을 날려 피할 구석도 보이지 않았다.

쿠구웅-!

천마의 내력이 폭약을 건드렸다.

절벽 전체가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머지않아 폭발이 일어나며 일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 같았다.

그럼에도 이태민은 너무나 평온한 얼굴이었다.

천마를 이기고도 억울하게 죽게 됐는데 여유가 철철 흘러넘쳤다.

“나는 지옥에 가고 싶어도 못 가.”

이태민의 의미심장한 말과 동시에 폭약이 터졌다.

퍼퍼펑!

쿠콰콰쾅-!

굉음이 두 사람을 집어삼켰다.

훗날 강호는 천하제일검이 천마와 함께 절벽에 묻혀서 무림을 구했다고 기억할 것이다.

절세신룡 이태민, 아니, 차원의 방랑자 치우는 폭발에 휩쓸리며 혼잣말을 읊조렸다.

“다음엔 또 어디서 환생할까…….”

***

두 개의 태양과 아홉 개의 달이 뜨는 세계.

천마 덕분에 예상보다 일찍 죽음을 맞이한 치우는 아슬란 대륙에서 눈을 떴다.

“늦었구나.”

그의 눈앞에 하얀 수염을 허리까지 기른 노인이 서 있었다.

치우는 당황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한 차원에서 죽으면 다른 차원에서 다시 살아난다.

창조의 이유를 깨닫기 전까지 무한정 반복되는 축복이자 징벌이다.

치우는 환생 거듭하며 여러 차원을 경험했다.

그렇기에 신이 어떤 법칙을 정했는지 몸으로 터득한 뒤였다.

누군가가 운명을 다하면 그 몸으로 치우의 영혼이 스며든다.

치우가 환생한 날, 몸의 주인은 죽을 운명이었다는 뜻이다.

대신 원래의 몸의 주인이 갖고 있던 기억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따라서 새로운 차원에 적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아슬란 대륙에서 치우는 제로딘이라는 마법사 수련생으로 환생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제로딘은 평범한 수련생이 아니었다.

무려 대마도사 쿤데라의 제자였다.

흰 수염 노인 쿤데라는 대륙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마법사였다.

대마도사는 인간이 닿을 수 있는 최고의 클래스로 알려져 있었다.

그다음 경지인 현자 클래스를 정복한 마법사는 아직까지 나타난 적이 없었다.

“제로딘, 오늘따라 이상하구나. 지각을 절대 하지 않더니 눈동자도 자주 흔들리고…….”

“사실은 어제 늦게까지 파이어볼을 연습했습니다.”

“흐음, 무리한 수련은 집중력을 갉아먹는다는 점을 명심하거라.”

“명심하겠습니다.”

쿤데라는 꺼림칙한 기분을 느꼈지만, 치우가 하나뿐인 제자 제로딘으로 환생했다고는 의심하지 않았다.

신과 아바타, 그리고 치우를 제외하면 다른 차원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차원을 넘나들며 환생을 하는 사람이 있다니 상상조차 불가능한 일이다.

“어디 수련의 성과를 한번 보자꾸나.”

“네!”

치우는 환생 첫날이지만 착실하게 제로딘 역할을 했다.

대마도사의 제자로 환생한 것은 운이 좋게 잘 풀린 케이스이다.

지난 세 번의 환생에서는 소매치기, 몬스터에게 잡아먹히기 직전의 헌터, 내공 없는 낭인무사로 인생을 시작했다.

그때와 달리 좋은 스승 밑에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처억-!

제로딘이 된 치우가 팔을 앞으로 쭉 뻗었다.

그는 어제까지의 제로딘의 기억을 갖고 있었다.

“캐스팅, 파이어볼!”

마나로 이루어진 복잡한 수식이 손바닥에 떠올랐다.

곧이어 축구공 크기의 불덩어리가 허공에 나타나 열기를 뿜어냈다.

슈우욱- 퍼엉!

제로딘의 의지대로 한참을 날아간 파이어볼이 통나무를 쓰러트렸다.

‘마나를 배열해서 캐스팅을 성공하면 마법이 구현된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데?’

치우의 영혼이 깃든 제로딘은 머리가 아닌 몸으로 마법을 경험하며 희열을 느꼈다.

그의 재능은 천부적이다 못해 악마적이었다.

오죽하면 신으로부터 환생이라는 시험을 받겠는가.

짝짝짝!

“훌륭하구나!”

쿤데라가 박수를 치며 제자의 성취를 칭찬했다.

그는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진하고 또 정진하여라, 제로딘. 너라면 현자의 벽을 넘을지도 모르겠구나.”

대마도사 쿤데라는 괜한 말을 하지 않았다.

그의 예언은 오랜 시간이 지나 이뤄졌다.

아슬란 대륙에서도 세월은 쏜살같이 흘렀다.

쿤데라가 죽고 수련생이던 제로딘은 왕궁마법사를 거쳐 대마도사 클래스에 도달했다.

이후 왕궁에서 은퇴한 그는 기어코 현자의 벽을 넘고 말았다.

88세의 나이에 최초로 현자 클래스의 마법사가 된 것이다.

그러나 현자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신이 수많은 세상을 창조한 이유를 깨달을 순 없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제로딘을 찾아왔을 때, 그는 따뜻한 벽난로 앞 나무 의자에 앉아 있었다.

현자 클래스에 도달한 제로딘은 자신이 곧 죽는다는 것을 예측했다.

“또 다른 삶을 살게 되겠군.”

한숨이 절로 나왔다.

다시 산다는 게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그는 아슬란 대륙에서 70년 넘게 제로딘으로 충실한 인생을 살아왔다.

이제 평온한 안식을 얻고 싶었다.

하지만 다시 치우가 되어 낯선 차원으로 날아가야 한다.

과연 언제쯤 창조의 이유를 깨달을 수 있을까.

정말 그런 게 있기는 한 것일까.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신의 장난은 아닐까.

현자 제로딘의 마지막 순간, 그가 홀로 유언을 남겼다.

“환생도 지겹다.”

***

아슬란 대륙에서 네 번째 환생을 마친 치우는 다섯 번째, 여섯 번째 환생도 경험했다.

다섯 번째 세계는 다시 떠올리기도 싫었다.

여섯 번째 차원에서 그는 기계화 군단의 엔지니어로 환생했다.

그리고 어김없이 일곱 번째 환생을 하게 됐다.

번쩍!

그런데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곧바로 환생하지 않고 환한 빛으로 가득 찬 공간에 영혼이 머물렀다.

낯설지 않은 느낌이다.

“아바타!”

신의 대리자로 영원한 환생을 알려주던 아바타의 기운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황금빛 날개를 활짝 펼친 존재가 눈앞에 나타났다.

“드디어 내 환생이 끝난 건가?”

치우의 영혼이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천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아바타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멸망의 인도자 치우, 그대에게 신의 경고를 전하겠어요.”

“신의 경고?”

“당신은 환생을 거듭하며 다른 세상으로부터 어떤 것도 배우지 못하고 있답니다.”

“개소리! 난 어느 세계에서건 최강의 자리에 올랐어!”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가련한 존재여, 부디 이번 생에서는 세상을 구하는 기쁨을 깨닫기를. 신의 인내심이 다하면… 영원한 소멸이 찾아올지 몰라요.”

“영원한 소멸? 누가 그따위를 겁낼 것 같아?”

“다시 만나는 날까지 안녕하기를.”

아바타의 날개가 펄럭였다.

치우는 곧 새로운 차원에서 눈을 뜨게 될 것을 직감했다.

호기롭게 외쳤지만 막상 영원히 소멸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환생의 고리를 끊고 진정한 안식과 함께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게 될까.

아쉽게도 길게 생각할 수 없었다.

그의 영혼은 이미 다른 차원으로 빨려가고 있었다.

***

화아악-!

눈을 뜬 치우는 낯선 세상에서 처음 들리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최치우, 돌았냐? 대가리에 총 맞았냐고!”

사나운 말투가 자신을 향해 쏘아지고 있었다.

일곱 번째 차원으로 환생한 치우는 원래의 몸의 주인이 갖고 있던 기억을 흡수했다.

‘태양계, 지구, 대한민국, 고등학생, 나와 같은 이름, 그리고… 빵셔틀?’

상당히 생소한 용어가 떠올랐다.

헌터나 마법사로 환생했을 때는 기억을 받아들이는 게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환생은 뭔가 달랐다.

이제껏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복잡하고 다양한 정보가 치우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게다가 치우라는 자신의 진짜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상황도 처음이다.

“이 새끼가 진짜 미쳤나? 야? 야?”

불쾌한 감각이 치우의 정신을 깨웠다.

키가 멀대 같은 놈이 손가락으로 치우의 이마를 톡톡 건드렸다.

“최치우 씨, 쉬는 시간 끝나기 전에 매점 튀어갔다 오셔야죠. 디지게 맞기 싫으면.”

놈은 치우를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있었다.

동등한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것이다.

마치 태초의 차원 링스 월드에서 제국을 지배한 하이엘프들이 나머지 종족을 노예처럼 부리던 것과 비슷했다.

아주 오래전, 지긋지긋한 환생을 하게 만든 원인이 떠올랐다.

치우는 자기 손으로 죽인 제국의 황제 카이저 레골라스를 기억하며 눈을 부릅떴다.

찌릿!

눈동자에 칼날 같은 살기가 서렸다.

일곱 번의 환생을 거치며 이질적인 차원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눈빛이다.

순간적으로 상대를 위축시키기에 충분했다.

“어, 어…….”

치우를 괴롭히던 일진 김병철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저도 모르게 치우의 눈빛에 겁을 먹은 것이다.

하지만 놈은 곧장 머리를 가로저으며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잠깐 졸아들었지만 감히 자신에게 눈을 부라린 치우를 때리려 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치우는 링스 월드에서 수십만 명을 죽인 멸망의 인도자가 아닌, 금성고 3학년 공식 빵셔틀 최치우이기 때문이다.

딩동댕동- 딩동댕동-

“병철아, 선생님 바로 앞!”

그때 마침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부지런하기로 유명한 국사 선생님은 벌써 앞문을 열고 있었다.

주먹을 뻗기 직전이던 김병철이 씩씩거리며 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최치우를 노려보며 손날로 목을 그었다.

수업이 끝나면 각오하라는 뜻이다.

치우는 반대편 구석 자리에 앉았다.

새롭게 눈을 뜬 차원은 아무래도 좀 이상했다.

하필 환생하게 된 몸의 주인도 상태가 안 좋았다.

50분의 수업 시간 동안 머리를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김병철을 어떻게 할 것인지는 나중 문제였다.

“다들 137페이지 펼치고 집중!”

국사 선생님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선생님을 비롯해 학생 중 누구 하나 최치우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원래의 최치우가 수업 시간에 보여주는 태도와 흡사했다.

차원의 방랑자 치우는 금성고 3학년 최치우의 기억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일곱 번째 환생을 한 그는 여덟 번째 차원에서 새로운 몸의 주인으로 살아가야 한다.

‘이제부터 나는 최치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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