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4화 The last Chapter-7080 (13) - [완]
1975년. IBM에서 PC를 출시했다.
“그래도 예상보다 늦었는데?”
정 수석차관의 평가에 오랜만에 놀러 온 빨갱이와 창기가 혀를 찼다.
“쯧! 예상보다 늦었다고? 우리는 아직 비슷한 물건을 내놓지도 못했는데?”
“슬슬 내보낼 거다.”
“설마 이번에도 메모리 반도체 집중이냐?”
창기의 물음에 정 수석차관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번에는 그런 실수를 피해야지.”
과거의 역사에서 자신이 몸담았던 S그룹의 아픈 역사를 알고 있던 정 수석차관이었다.
* * *
9전단의 출현 이후, 컴퓨터의 강점을 알아챈 미국 정부와 관련 연구소, 기업에서는 컴퓨터 개발에 심력을 쏟았다. 특히나 괴수들이 CPU를 만들어 낸 이후, 관련 기업과 연구기관의 연구실에서 휴일이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치열한 연구와 개발 경쟁을 통해 미국과 한국의 중요 관공서와 기업들에는 대형 컴퓨터가 일찌감치 보급되기 시작되었다. 대형 컴퓨터에 연결된 터미널 단말기가 책상 위에 자리한 것이 익숙해지면서 일상생활에도 조금씩 컴퓨터가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대형 컴퓨터 시장이 제대로 자리를 잡으면서 기업들이 개인용 컴퓨터(PC, Personal Computer)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1970년대로 들어서면서 몇몇 회사에서 PC를 내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판매 성적은 지지부진했다. 개인용이라고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개인이 사기에는 부담이 가는 가격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판매가 지지부진한 상황이었지만 PC를 내놓는 회사들은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컴퓨터는 필수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많은 회사들의 도전과 좌절이 반복되는 동안 드디어 IBM이 PC를 내놓은 것이었다. IBM이 출시한 PC를 분석한 보고서를 보던 정 수석차관이 혀를 찼다.
“쯧! 얘들이 실수했네….”
지난 역사와 달리 IBM은 폐쇄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IBM이 실수를 했다고 혀를 차던 정 수석차관은 곧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하고는 고개를 모로 꼬았다.
“아닌가? 아직 그 빌어먹을 사과사가 안 나왔으니까….”
과거 역사에서 컴퓨터 업계의 획을 그었던 인사들은 이번 역사에서는 제대로 두각을 보이는 이들이 없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두각을 보이기 시작하는 시기는 1970년대 후반부터였기 때문이었다. 지금이라면 아직도 학교에 있거나 이제 막 아이디어를 붙잡고 사업을 시작하려고 할 때였다.
“그 양반들이 어떻게 변할지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겠군.”
보고서를 덮은 정 수석차관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비서를 호출했다.
“전자회사들 사장단과의 미팅은 잘 준비되었지요?”
“예.”
“그럼 움직입시다.”
* * *
1976년, 한국의 국립전자 연구소에서 PC의 시제품을 선보였다. K-7455라는 이름이 붙은 CPU를 가지고 128KB의 메모리 용량을 가진 기본 시스템에 새로운 저장매체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버를 보조저장장치로 선택한 이 컴퓨터는 전용의 모니터를 사용할 수도 있었고, TV를 모니터로 사용할 수 있었다. 시제품의 발표회장에서 한국 정부는 특이한 정책을 발표했는데, 핵심인 CPU를 제외한 나머지 아키텍쳐를 모두 공개한 것이었다. 이로써 CPU를 제외한 메인보드와 메모리, 보조저장장치, 출력장치 등은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게 만든 것이었다.
국립전자 연구소에서 새로운 PC를 선보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의 S전자와 L전자에서 해당 CPU를 사용한 PC를 출시했다. 가격은 갓 회사에 취직한 새내기 회사원의 3개월 치 월급에 해당하는 고가였지만, 그래도 판매는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다.
“모조리 다 까 보인 것은 좀 무리였던 것 아냐?”
창기의 지적에 정 수석차관은 고개를 저었다.
“폐쇄해봤자 결국은 일본의 PC-98시리즈의 길을 따라갈 뿐이야. 진짜 우리가 팔아먹을 것은 본체가 아니라 CPU야. K-CPU에 호환하는 부품들이 많아져서 경쟁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시장을 장악하게 될 거다. 종국에는 말이지.”
“그래도 아깝잖아.”
“지금 당장은 우리가 한 발 앞선 것 같지? 컴퓨터 업계의 괴수들은 아직 출현하지도 않았어. 역사가 바뀐 덕에 그들이 안 나타날 수도 있지만 더한 괴물들이 나타날 가능성도 인정해야 해. 이런 말 하면 친미주의자로 몰릴 수 있겠지만, 미국이라면 그렇게 될 가능성이 충분해. 괜히 눈앞의 이익만 보고 움직여서는 안 돼.”
“쩝….”
정 수석차관의 설명에 벌레와 창기는 가볍게 입맛을 다셨다.
그렇게 시장에 나온 K-시리즈 CPU가 빠르게 시장에 퍼질 수 있게 만든 일등공신은 벌레가 지휘하는 파키였다.
“이거 돈 좀 되겠는데?”
“저희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돈이 되는 상품이다! 움직여!”
돈이 되겠다고 판단한 벌레는 연구진들을 동원해 K시리즈 CPU를 사용하는 PC 제품군을 만들어 출시했다.
파키에서 만들어 출시한 PC는 미국 시장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최소한의 요구 수준인 32KB 메모리를 장착하고 가정용 TV와 연결해 사용하는 저가-Home버전-부터 사용가능한 최대용량인 256KB의 메모리를 장착하고 최고급의 콘덴서를 대량으로 사용한 전원부품, 전용의 모니터를 사용하는 최고가의 상품-Master버전-까지 5단계로 나뉜 컴퓨터를 본 미국의 소비자들은 자신들의 형편에 맞춰 파키의 PC들을 구매했다.
파키의 PC들이 잘 팔린 것은 위와 같이 다양한 가격대를 지닌 상품들의 주축인 저가 상품군들이 쉽게 업그레이드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 당장 돈이 없어 홈 버전을 구매했어도 여유가 된다면 언제든지 마스터 버전까지 업그레이드 할 수 있다는 점이 소비자들을 자극한 것이었다.
파키의 피시 상품들이 시장에서 히트를 치자, 다른 가전회사들에서도 비슷한 상품을 내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존의 컴퓨터 회사들이 폐쇄정책과 엄청난 액수의 로열티에 부담을 느낀 경쟁사들은 결국 파키와 마찬가지로 K시리즈 CPU와 아키텍쳐를 채용해야 했다.
결국, 이런 움직임을 통해 미국의 PC 시장에서 K시리즈 CPU를 사용하는 제품들이 차지하는 비율이 점점 늘어가기 시작했다. K시리즈 PC들의 시장 점유율이 늘어가면서 다른 컴퓨터 업체들도 비슷한 정책을 취하기 시작했지만 K시리즈 PC에 맞춘 S/W들이 S/W 시장을 잡아먹어 버리면서 점점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시장의 추이를 살펴보던 벌레는 정 수석차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이야기했지? 길은 내가 만들 테니 잘 따라오라고 말이야. 어떠냐?”
-눈물 나게 고맙다, 새꺄.
* * *
1976년,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렸다.
“올림픽은 좀 무리지 않을까?”
“그게 돈이 한두 푼 들어가는 것이 아닌데….”
1968년에 처음 올림픽 개최를 천명했을 때, 많은 이들이 걱정을 했지만, 정 수석차관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충분히 열 수 있습니다! 과거의 역사에서 일본은 1964년 올림픽을 열었습니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의 경제력과 앞으로를 생각해 보면 그 정도는 감당할 여력이 있습니다.”
“그런가?”
“그리고 아직도 우리 대한민국을 모르는 국가들과 외국인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우리를 알려야 합니다!”
정 수석차관의 강한 주장에 정치인들은 올림픽 개최에 찬성했다. 그들이 찬성을 한 가장 큰 이유는 대한민국과 한국인을 알려야 한다는 필요성 부분이 아니라 ‘일본도 열었었다.’라는 부분이었다.
“지금 우리가 일본보다 잘 사는데 못할 것은 또 뭐야!”
“올림픽 그까짓 거 하자고!”
자존심 문제가 되어버리면서 정치인들은 올림픽 개최에 동의했다. 항상 여당에 반대만 하던 야당도 이번에는 아무 말 않고 찬성을 할 정도였다.
그렇게 해서 1976년 벌어진 서울 하계 올림픽,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은 두 눈을 크게 떴다.
-동북아의 숨은 강국!
-과거와 미래의 아름다운 조화!
한국을 찾은 외신-특히 유럽-들은 계속해서 특집을 내보냈고, TV영상을 통해 한국을 본 많은 유럽인들이 직접 자신들의 눈으로 보기 위해 한국으로 찾아왔다.
이렇게 해서 벌어진 1차 한류붐은 1984년 북해도에서 열린 동계 올림픽을 통해 최고점을 찍었다.
1976년의 하계 올림픽과 1984년의 동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면서 한국의 위상은 과거의 역사에서 일본이 차지하던 위치를 빼앗았다. 유럽과 미국의 본토박이들은 아시아에서 왔다는 말을 들으면 가장 먼저 ‘코리아?’라고 묻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이 된 것이었다.
* * *
1980년. 정 수석차관이 정년을 맞이했다.
“조금만 더 국가를 위해 봉사해 줄 수는 없습니까?”
대통령을 위시해 각료들과 정치인들까지 나서서 퇴직을 준비하는 정 수석차관을 붙잡았지만, 정 수석차관은 정중히 거절을 했다.
“정해진 정년보다 5년을 더 끌었습니다. 잘못하면 카르텔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나는 것이 순리입니다.”
정 수석차관의 말이 정론이었기 때문에 대통령과 정치인들은 입맛을 다시며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야, 기왕 관두는 김에 너도 정치 한번 해보는 것이 어때?”
“그래. 완벽한 전문가잖아.”
정계입문을 권유하는 빨갱이와 창기의 말에 정 수석차관이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지난 35년 동안 붙잡고 갈궈 댔던 것도 지겨워 죽겠는데, 그걸 또 하라고? 죽을래?”
“아… 그건 그러네….”
빨갱이가 수긍을 하자, 옆에 있던 창기가 입을 열었다.
“네 심정은 알겠는데, 요즘 들어 미국 쪽에서 슬슬 안 좋은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거든? 불안해서 그런다.”
“이미 대책은 세워 놨어. 그리고 그 부분은 이제 남은 놈들이 알아서 해야지. 내가 죽을 때까지 나서서 해결해줘야 하냐?”
“그건 그렇지….”
창기의 말처럼 미국의 몇몇 언론인들과 경제인들이 한국에 대한 불만을 공공연히 토하고 있었다.
1950년대와 60년대의 황금기가 지나면서 미국의 경제발전도 조금씩 둔화되기 시작되었다. 실업률도 증가세로 돌아서고, 경제에 대한 적신호가 여기저기서 켜지고 있을 때, 때맞춰 서울 올림픽이 열렸다.
화려한 서울 올림픽과 대한민국의 발전상을 본 몇몇 경제학자들과 정치인들이 한국에 대한 비난을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한국이 우리의 경제를 약탈하고 있다!”
“한국인들이 당신들의 일자리를 뺐어가고 있다!”
19세기 말부터 튀어나왔던 ‘황화론(黃禍論)’까지 들먹이며 한국에 대한 성토의 강도는 점점 강해져 갔다.
하지만, 보고를 받은 대통령들과 각료들, 그리고 정치인들이 걱정을 지우지 못하는 반면 정 수석차관은 여유만만한 표정이었다.
“수석차관은 걱정이 안 됩니까?”
“별로요. 목소리가 큰 만큼 곧 가라앉을 것입니다.”
“예?”
다들 의아해하고 있을 때, 미국 내부에서 반론들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우리에게 일자리를 준 이들이 한국인들이다! 무슨 헛소리야!”
“우리 회사에 투자를 한 이들이 한국인들이다! 누가 누구의 부를 훔쳐 가고 있는가? 한국인들인가, 너희 정치인들인가?”
“패배자들의 핑계일 뿐이다!”
한국인들을 비난하는 목소리보다 더욱 큰 목소리로 반박하는 이들이 늘면서, 한국을 비난하던 이들의 목소리는 작아졌고, 입지도 줄어들었다.
“이게 어떻게….”
다들 이유를 궁금해할 때, 정 수석차관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미국 경제에서 우리를 들어내 버리면 미국 경제가 망하니까….”
“응?”
“과거 역사에서 일본이 미국에게 왜 그렇게 당했을까? 그리고 중국은… 열심히 버텼지만 우리가 올 때 패배 직전이었지? 왜 그렇게 몰렸을까?”
“이유를 말하라니까 갑자기 일본과 중국은 왜….”
“미국은 세계의 시장이야. 모두가 미국에서 돈을 벌어가지. 자고로 남이 우리 집 돈 들고 가는 것을 좋아하는 인간은 없어. 그런데 일본과 중국은 미국 시장에서 매우 전근대적인 방법을 써먹었지.”
“전근대적인 방법?”
“먼저 일본. 일본은 말 그대로 전쟁을 벌였지. 남의 땅에 깃발을 박는 방식 말이야. 록펠러센터에 일장기 박고, 콜롬비아 영화사에 일장기 박고. 으하하하! 이제부터 여기는 우리 일본제국의 것이다! 이런 식으로 했으니 미국도 당연히 전쟁을 벌였고, 결국은 일본이 박살 났지.”
“중국은?”
“중화사상에 입각해 미국을 오랑캐 대하듯이 했는데 잘 되었겠냐? ‘중국은 무조건 옳고, 너희들은 그저 우리 중국의 뜻에 따라라.’ 이런 옛날 중화사상을 근본으로 미국을 대했는데 동티가 안 나겠냐?”
“흐음….”
정 수석차관의 말에 빨갱이와 창기는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정 수석차관이 한숨을 쉬었다.
“벌레는 그냥 알아듣던데….”
“그래. 우리 멍청하니까 좀 친절하게 설명을 해줘 봐.”
빨갱이의 말에 정 수석차관은 입을 열었다.
“간단해. 미국에서 벌은 돈을 미국에 풀었다.”
“응?”
정 수석차관의 설명에 따르면 다음과 같았다.
한국의 기업이 미국에서 돈을 벌어들이며 한국 정부에 낸 세금에서 상당 부분이 미국의 코람캐피탈을 통해 미국 경제로 흘러 들어갔다. 이렇게 들어간 자금을 이용해 코람 캐피탈은 미국의 자본시장에서 점점 더 덩치를 키워갔다.
코람캐피탈이 슬슬 다른 메이저 캐피탈의 견제를 받을 정도로 성장하자, 한국 정부는 비슷한 다른 투자사들을 설립해 미국의 자본시장에 점점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렇게 해서 지금 미국 자본시장에는 코람캐피탈을 빼고도 4개의 메이저 투자사가 우리 정부 소유로 있지.”
“헐?”
“그리고 제조업체들 역시 마찬가지야. 미국 수출이 어느 이상 늘어나면 바로 미국에 법인을 만들었지.”
“법인?”
“한국계 미국회사가 만들어지는 거야.”
그렇게 탄생한 법인들은 미국의 여기저기에 공장들을 세웠다. 그들이 공장을 세운 기준은 간단했다.
‘다른 주에 비해 경제력이 떨어지는 주’
적어도 1만 명 이상의 고용을 창출하는 공장을 짓겠다는 의사를 표하면 해당 주의 주지사는 물론이고 해당 주가 지역구인 연방의 상하원 의원들까지 나서서 편의를 봐주었다. 도로망이 취약하면 도로가 새로 깔리는 일은 아주 흔한 것이었다.
그렇게 한국계 미국회사를 만들어지는 과정에도 확실하게 지켜야 할 기준이 있었다. 법인 사무직원의 최소한 30%는 한국인이어야 했다. 그리고 공장의 품질검수 담당자는 100% 한국인이었다.
“그래야 한국본토의 고용상황도 계속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고, 품질이 안정적으로 유지해야 판로도 확대할 수 있으니까….”
“흐음….”
공장이 만들어지고 안정적으로 생산을 시작되면 미국법인은 적극적으로 시장 확대에 들어갔다.
“시장 확대?”
“캐나다나 멕시코, 기타 남미국가들.”
“우리나라의 회사들이 직접 진출해도 되잖아?”
“뒷배가 대한민국인 것과 미국인 것, 어느 쪽이 말빨이 잘 먹히겠냐?”
“아아.”
시장이 확대되면서 덩치를 키울 필요가 생기면 미국법인은 투자를 유치했다. 물론 지분 유지를 위해 본사인 한국기업의 투자도 들어갔지만, 많은 부분은 미국의 투자사들 몫이었다. 여기서도 한 가지 규칙이 있었는데, 그것은 코람캐피탈을 비롯한 한국계 투자사들의 투자는 피하는 것이었다.
“한국계 투자사는 순수 미국계 회사들을 공략하고, 한국계 미국법인은 순수 미국계 자본들을 흡수하고… 그렇게 해서 지금의 상황이 만들어진 거야. 서로 지독하게 물고 물리게 만들어서 미국이 어떻게 못하게 만들어 버린 거지.”
“미국 정부도 속 좀 상하겠다.”
“그렇지도 않아. 한국계 미국법인이 해외에서 파워가 느는 것과 비례해 미국 정부의 영향력도 강화되고 있으니까. 윈윈이지.”
정 수석차관의 말처럼 한국에 대한 비난은 점점 모습을 감추었다. 정치인들은 정치자금이 말라버렸고, 지식인들은 발표할 장소를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정 수석차관이 미국에서 벌인 것과 마찬가지의 방법으로 유럽을 공략했다. 한국 사업체의 공장이 있는 국가들은 국가가 나서서 한국을 변호했다.
* * *
1980년대 초반, 한차례의 위기를 이겨낸 대한민국은 지금까지와 같이 조용히 그리고 꾸준히 성장을 이어갔다.
1982년. 세계 군사전문가들의 눈이 한국으로 쏠렸다.
한반도가 드디어 퇴역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동 이후, 40년이 넘도록 활동을 하면서 몇 차례 보강을 했지만 선체 주요부분이 세월을 이기지 못하면서 퇴역이 결정되었다. 한반도의 퇴역이 결정되면서 중국과 소련, 그리고 독일의 해군 장성들이 모두 축배를 들었다는 소문이 퍼지는 가운데 미국 해군 장성들과 정치인들이 한국의 청와대로 몰려들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 작전통제컴퓨터는 파십쇼!”
“안 판다니까요!”
“많이 낡았잖아요! 그냥 우리에게 넘기고 새것을 구하는 것이…”
“지금 그것보다 성능 좋은 신품 있습니까?”
“....”
수많은 외교적 협상과 강짜, 줄다리기가 이어졌지만, 결국 한반도의 그 유명한 컴퓨터는 새롭게 건조되는 원자력 항공모함에 실리는 것으로 결정이 되었다.
문제는 새롭게 건조되는 것이 항공모함이 아니라 항공모함‘들’이라는 것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0만 톤급 핵 항공모함을 2척 순차건조에 들어간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고, 소식을 들은 중국과 소련, 독일의 해군 지휘관들 가운데 상당수는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진짜로’ 드러누웠다.
“좋은 소식이기는 한데… 야. 우리나라가 핵 항공모함을 동시 2척 건조가 가능하겠냐? 아니 유지가 가능하냐?”
‘항공모함 2척 동시 건조.’ 소식을 들은 대한민국 국민들 대부분은 좋아하면서도 유지가 가능한지의 여부가 궁금해졌다. 비슷한 질문을 받은 정 수석차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해.”
“정말?”
“과거 역사에서 일본이 평화헌법의 제약을 받지 않고 국방예산을 집행했다면 충분히 가능할 정도였어. 그렇다면 지금 우리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겠냐?”
“그렇군. 그럼 퇴역식에서 보자.”
“그래.”
1982년 10월. 한반도의 퇴역식이 진행되었다. 한반도와 같이 넘어온 이들 가운데 그때까지 살아남았던 이들은 겨우 98명이었다.
벌레 일당과 정 수석차관 등, 행사에 참여한 생존자들은 감회가 가득한 눈으로 거대한 항공모함을 바라보았다. 행사는 끝났고 저 선체에서 원자로와 컴퓨터 시스템을 들어내는 것을 시작으로 주요 부분을 제거한 한반도는 수상박물관으로 보존될 예정이었다.
98명의 생존자들 가운데 군 출신은 동시에 경례를 했고, 민간인들은 목례를 했다.
“그동안 수고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그들만의 작별인사를 끝으로 격변의 역사가 끝이 났다.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