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1화 The last Chapter-7080 (10)
1971년 5월 한국의 중순양함들이 모조리 레일건을 단 채 전력으로 복귀하자, 중화인민공화국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는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해치고, 전쟁을 획책하는 호전광들의 행태다!”
중국공산당의 대변인은 매일 같이 TV에 나와 한국을 비방하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대한민국의 반응은 ‘냉담’ 그 자체였다.
“우리 정부는 국가 방위를 위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중국공산당 대변인의 첫 번째 성명을 발표했을 때, 위와 같은 성명을 발표한 이후 한국 정부는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소국의 소인배들이! 호가호위(狐假虎威)나 하는 녀석들이!”
한국의 무반응에 모택동은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한국 정부는 끝까지 중국공산당의 비난 성명들을 무시했다.
결국, 1971년 하반기로 들어서면서 중국공산당의 항의 성명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박수도 손뼉을 마주쳐야 하듯이, 한쪽이 아예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서 힘을 잃은 것이었다.
“끄응! 두고 보자!”
모택동은 이를 갈며 다음을 기약했지만, 그에게 다음은 없었다.
1972년, 미국이 레일건과 위상배열 레이더를 장착하고, 원자력으로 동력기관을 바꾼 아이오와급 전함 4척을 동시에 재취역시키면서 2척을 북태평양에 배치한 것이었다.
2연장 레일건 포탑을 2기 장착하고, 후방포탑 자리에는 2연장 미사일 발사기가 2기 설치된 아이오와급 전함들은 ‘전함의 부활’을 선언했고, 동시에 미국을 적대하는 국가들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소련 또는 독일이 발사한 탄도 미사일을 최대한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요격한다는 개념에 따라 2척은 대서양 함대에, 다른 2척은 북태평양 함대에 배속되었다.
한국 해군이 사용하는 중순양함보다 덩치가 큰 전함의 이점을 활용해 더욱 탐지거리가 길어진 레이더가 장착된 전함들이 배치되면서 미 해군은 앉아서 소련과 독일의 하늘에서 벌어지는 움직임까지 감시할 수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열이 받을 일이었는데, 아이오와급 전함들의 재개장으로 재미를 본 미국 정부는 사우스다코다급 전함들까지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아이오와까지 저렇게 배치해 버리면 본토가 빈단 말이지?”
“사우스다코타 클래스가 남았잖아?”
“아하!”
형인 존.F.케네디 정권에 이어 정권을 차지한 로버트 케네디 정권은 사우스다코다까지 개장에 들어갔다.
레일건 전함들이 차근차근 전력화되면서 세계의 제해권은 미국의 손에 확실하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미 핵잠수함을 포함한 잠수함 전력과 상대편 잠수함들을 사냥하기 위한 대잠초계 세력, 항공모함으로 상징되는 항공세력만으로도 독일과 소련은 바다로 나올 길이 막혀버린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최고이자 유일한 수단은 핵폭탄이었지만, 레일건이 나타나면서 이 또한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덕분에, 독일과 소련의 지도자들과 군 장성들은 분통을 터뜨려야만 했다.
“이 빌어먹을 양키 새끼들! 외계인이라도 잡은 거냐! 오냐! 두고 봐라!”
* * *
1972년 8월. 대한민국 공군 대변인은 사천에 자리한 한국항공우주산업(KAI, Korea Aerospace Industries, Ltd. ) 건물로 기자들을 불러 모았다.
“순수 국산 제공전투기의 시제기가 출고되었습니다. 이에 기자 여러분들께 소개합니다!”
대변인의 발표와 함께 대변인의 뒤쪽을 가리고 있던 커다란 커튼이 떨어져 내렸고, 대형 쌍발 전투기 2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소개합니다! 국산 제공 전투기인 검독수리의 지상형과 함재형입니다!”
“오오오!”
찰칵! 찰칵!
자리에 모인 기자들 사이에 작은 함성이 터져 나왔고, 요란한 셔터 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한국 공군의 발표에 따르면 검독수리의 성능은 무시무시했다.
-최고속도는 마하 2.5, 순항속도 마하 1.3
-최대 전투반경 2000km
-최대 항속거리 5600km
-공중급유 기능 기본 포함.
-공대공 미사일 최대 12발 장착 가능.
-탐지거리 최대 200km, 12개 목표 동시 추적 및 6개 목표 동시 공격 가능.
공군이 발표한 제원 그대로라면 미국은 물론이고 당대의 그 어떤 나라의 전투기도 검독수리의 상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한편, 소식을 듣고 미국에서 돌아온 조윤하 전 공군소장을 비롯해 21세기 출신 공군들은 시제기를 보고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뭐 이런 혼종이….”
그들의 눈앞에 버티고 선 검독수리는 KF1C와 F-15가 뒤섞인 외향을 가지고 있었다. 함재형은 한술 더 떠서 F-14의 모습까지 뒤섞여 있었다.
검독수리의 가장 기본적인 동체형태는 KF1C를 확대한 모습과 비슷했다. 동체 형상을 갖고 21세기 출신들이 따지고 들자 항공연구소의 강도현 소장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뭐, 당연한 수순이었다고 할까요? 빙 돌아갈 필요 없잖아요? 제한도 없고요. KFX의 경우도 시장성을 이유로 F-16레벨로 맞춘 거니까요. 미래의 확장성과 지금의 기술 수준을 기반으로 저 성능을 내려면 대형기는 필수에요. 그나마 탄소섬유를 롤 단위로 가지고 있던 덕에 복합소재 개발이 많이 빨라져서 덕 좀 봤지요.”
“그런데 함재형은 왜 저렇게 생긴 겁니까? 기수부분은 완전히 톰캣인데?”
“레이더 때문에요. 미 해군용으로 개발한 레이더인데 탐지거리가 지상용보다 더 좋습니다.”
“그럼 지상발진형도 같은 레이더를 쓰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탐지거리가 긴 대신 분해 능력이 좀 떨어집니다. 산 많고 숲 많은 지상에서는 분석 효율이 좀 떨어집니다.”
“아아….”
“거기에 최대고객으로 예상되는 쪽의 초장거리 미사일과 궁합을 맞춰야 해서….”
“최대고객?”
“미군입니다.”
“아아….”
강도현 소장의 대답에 공군들은 모조리 고개를 끄덕였다.
* * *
1964년, ‘한국 공군과 해군(?)용으로 대형쌍발 전투기기가 개발되고 있다.’라는 소문을 듣자마자 미국의 항공기 제작사인 그루먼의 관계자들이 전용기를 타고 날아왔다. 설계도와 예상 성능, 목업 등을 보고 검토를 끝낸 미국 관계자들은 본사로 극비전문을 날렸다. 미국 본토와 한국 사이에 극비전문들이 하루에도 몇 차례씩 오가고, 수십여 명의 관계자들이 한국과 미국을 오간 끝에 그루먼의 최고 임원진들이 한국을 찾았다.
“미국 공군과 해군의 차기 방공전투기 사업을 같이 하고 싶습니다.”
“예? 잠시만요.”
그루먼의 제안을 들은 한국 관계자들은 머리를 맞대었다.
“잘못하면 일본의 F-2의 꼴이 날 수 있습니다.”
“항전장비는 물론이고 엔진들을 미제를 써야 합니다. 잘못해서 미국과 틀어지면 부품 수급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경제문제도 생각을 해야 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미국은 우리의 큰 시장입니다. 잘못하면 미국이라는 시장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저런 의견들이 나오고 있을 때, 설계팀의 수장인 강도현 소장이 의견을 내놨다.
“F-2꼴이 날 수 있다고 하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가 가진 것 가운데 설계기술 빼고는 다 3류도 못 되는 수준입니다. 미끼를 던져 주고 빼먹을 것은 빼먹어야 합니다.”
결국, 한국과 그루먼은 손을 잡고 한국과 미국의 차기 방공전투기 사업에 뛰어들었다.
21세기 출신들이 노력을 한 덕에 동체의 설계는 일찌감치 끝났고, 한국과 미국의 엔지니어들은 새로운 기체에 어울리는 최고성능의 장비들을 찾아 미국과 한국을 뒤집어엎었다.
그렇게 개발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 쪽의 상황은 크게 변하고 있었다. 전쟁 이전과 전쟁 동안 탄생했던 수많은 항공기 제작사들이 M&A를 하거나 문을 닫으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경쟁자들이 줄면서 차기 방공전투기의 채용을 노리는 경쟁은 더욱 치열해져 갔다.
그루먼 역시 마찬가지였다 원래의 역사와 달리 그루먼은 록히드와 합병이 되어버렸다. 록히드의 그 유명한 ‘스컹크 웍스’가 합류하면서 이들은 경쟁자들보다 더욱 멀리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검독수리는 절묘한 외형을 가지게 되었다.
-중간에 공간을 두고 자리한 쌍발엔진,
-공기 저항을 줄이고 보조양력을 발생시키는 블랜디드윙 바디(Blended-Wing Body).
-해군형과 공군형으로 설계한 기수와 랜딩기어를 제외한 부분의 설계단일화.
-레이더 반사율을 줄이기 위해 3차원 커브를 그린 공기흡입통로.
-플라이 바이 와이어(Fly by Wire)와 호타스(Hands On Throttle-And-Stick, HOTAS, 다기능 조종간) 시스템을 채용한 인체공학적인 조종석.
-V자 형태를 취하며 밖으로 기울어진 ‘수직’미익.
경쟁의 끝이 다가오면서 한국과 록히드 그루먼의 합작품이 가장 유력한 후보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지상형은 ‘검독수리’, 함재형은 ‘바다독수리’로 일찌감치 이름을 정한 한국과 달리 미국에서는 약간의 진통이 있었는데 해상형 전투기의 이름을 ‘톰캣’으로 짓겠다는 그루먼의 의견에 한국 쪽 엔지니어들이 ‘씨캣’이라는 이름을 내밀면서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변익도 아닌데 톰캣이라는 이름을 붙이기가….”
“예?”
그런 작은 소동 끝에 미 공군과 해군의 차기 방공전투기로 한국과 록히드 그루먼의 합작품이 선택되었다. 기체명은 각기 ‘이글’과 ‘씨캣’으로 정해졌고.
* * *
“이런 젠장!”
한국의 차세대 방공전투기와 미국의 차세대 방공전투기의 개발 소식, 그리고 그와 관련해서 소련이 보낸 보고서를 받아 든 모택동은 붉게 변한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그가 가장 분노한 것은 한국과 미국의 소식이 아닌 소련이 보낸 소식이었다.
-미국의 신예 전투기를 제압할 수 있는 성능의 전투기 없음. 개발을 진행하고 있지만 약 10년의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사료 됨.
“10년이라니! 이 무능력자들!”
보고서를 받아 든 모택동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소련은 항상 중국에게 1.5선급 전투기들을 공급했다. 그런 수준의 전투기들을 새로 만든 것이 아니라 소련이 사용하다가 서서히 성능의 한계가 오는 기체들을 공급한 것이었다. 그런 소련의 행태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택동은 역설계를 통해 관련 기술을 습득하고 자신들만의 전투기들을 만들기 시작했지만, 소련과의 기술 격차는 아직도 상당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소련도 10년의 시간이 걸린다는 소식을 전해오자 화를 참지 못한 것이었다.
“이런 밥버러지들! 무능력자들! 당장 죽여 버려도 시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모택동은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순간적으로 뻣뻣하게 굳어버린 모택동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털썩!
“주석!”
“주석 각하!”
바닥에 쓰러진 모택동에게 가장 먼저 달려간 이는 모안영이었다. 모택동의 의식이 없는 것을 확인한 모안영은 다급히 위병에게 소리를 질렀다.
“의료진 불러!”
회의실에서 졸도한 지 1주일 후, 중국공산당 대변인이 TV로 성명을 발표했다. 눈물을 펑펑 흘리며 대변인은 비보를 알렸다.
“1972년 8월 23일 오후 5시. 우리 중화인민공화국의 위대한 주석이신 모택동 주석께서 사망하셨음을 알립니다.”
20세기 대륙의 역사를 쥐고 흔들었던 주연 가운데 한 명이 드디어 사라진 것이었다.
모택동의 사망이 알려지면서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 촉한자치령과 한국의 군부대는 동시에 비상이 걸렸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장개석이 일을 벌일까 봐, 중화민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일을 벌일까 봐, 촉한 자치령과 한국은 두 나라가 미친 짓을 벌이지는 않을지 겁이 나서였다.
하지만 별다른 일 없이 모택동의 장례가 치러졌다. 소련과 몽고, 그리고 아직도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국가들에서 조문 사절이 방문했고, 독일과 미국, 한국 등도 조문사절을 보냈다.
가장 의외인 것은 중화민국이 조문 사절을 보낸 것이었다.
“어쨌거나 조문을 보내는 것이 인지상정이니까.”
장개석의 결단에 따라 중화민국의 조문사절들이 북경을 찾았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애도 속에 모택동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자금성의 폐허 위에 만들어진 모택동 기념관에 관이 안치되는 것으로 장례식은 끝이 났지만, 그때부터 또 다른 시작이 있었다.
‘모택동의 후계자는 누구인가?’였다.
* * *
중화인민공화국이 모택동의 후계를 놓고 크고 작은 암투가 벌어지는 동안, 중화민국에서도 변고가 발생했다.
모택동이 죽고 석 달도 지나지 않은 1972년 11월5일. 장개석이 사망한 것이었다.
장개석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동북아시아 국가들 사이에 군사적 긴장이 최고조에 도달했다.
“썅! 죽으려면 같은 날에 같이 죽던가!”
또다시 걸린 비상령에 한국 군인들은 욕설을 내뱉는 동안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의 병사들, 그리고 촉한 자치령의 병사들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침을 삼키며 국경선을 노려봐야만 했다.
하지만 장개석의 장례 역시 모택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큰 혼란 없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북경과 마찬가지로 후계자 문제가 불거지면서 사회가 점점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후계자 자리를 놓고 벌어진 암투 끝에 북경과 남경의 주인이 정해졌다. 북경의 승자는 모안영이었고, 남경의 승자는 장경국이었다. 모택동과 장개석의 장자가 권력을 계승하면서 혼란은 일단 가라앉았다.
역사학자들이 흔히 말하는 ‘신남북조(新南北朝)시대’ 또는 ‘2+2 China’라고 불리는 시대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