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전단 1941-450화 (450/464)

450화 1960년대 (8)

“도대체 어떻게 만난 거냐?”

“맞아, 육하원칙에 맞춰서 제대로 설명해 봐라. 설마… 너도 그거 한 거냐? 스폰….”

“진짜 그거 아냐? 달러 지폐 슬슬 흔들면서….”

“샤랍!”

빨갱이와 창기, 정 수석차관까지 가세한 농담의 수위가 점점 진해지자 벌레가 세 사람의 입을 막았다.

“노안이는 모르겠지만, 빨갱이나 창은 쟤 얼굴 낯익지 않아?”

“낯이야 익지. 스크린에서 봤으니까.”

“네가 그래서 폭탄전문인 거야. 어떻게 매번 엉뚱한 곳에 조준하는 거냐? 정말 모르겠어?”

벌레의 물음에 눈을 가늘게 뜨고 오드리의 얼굴을 살펴보던 빨갱이가 설마하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그 왕눈이?”

“정답.”

“그 왕눈이라고? 눈이 얼굴의 절반을 차지하던 아이?”

“맞아. 도씨 어르신은 바로 알아보던데 너희들은 왜 그 모양이냐?”

벌레의 대답에 빨갱이와 창기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세상의 인연이란… 아니, 아무리 시간이동하면서 역사가 개판으로 변했다지만 이런 이벤트는 너무한 것 아냐?”

“이 새끼… 진짜 키잡했네.”

빨갱이와 창기가 믿기지 않는 현실에 투덜대고 있을 때, 정 수석차관은 여전히 궁금증을 가시지 못했는지 질문을 던졌다.

“지난 전쟁에서의 인연은 그렇다 쳐도, 할리우드에서는 어떻게 만난 거야? 네가 LA 도착하자마자 쨘 하고 만난 것은 아닐 거 아냐? 역시나 그런 파티?”

“파티는 맞는데 네가 생각하는 그런 파티는 아니야.”

벌레의 설명에 따르면 둘이 인연을 맺게 된 과정은 한 편의 영화였다.

비디오 카트리지 플레이어가 시장에 출시되었을 때 인수가 했던 말처럼, 벌레는 비디오 카트리지와 관련된 장비들을 개발하면서 할리우드의 영화사 사장들과 잦은 접촉을 가졌다. 하지만, 아무리 벌레가 미국 가전업체 3위의 사장이 되었다고는 해도 동양인이었고, 콧대 높은 메이저 영화사 사장들과 만남을 갖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메이저 영화사 사장들과의 만남을 갖기 위해 벌레는 연결 가능한 이들과 인연을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그가 받았던 명예훈장이 톡톡히 그 이름값을 했는데, 할리우드의 메이저급 남자 배우들 가운데 2차 대전 참전자들과 손쉽게 연결하는 것에 도움을 줬기 때문이었다.

먼저 일반 사병으로 시작해 장교로 제대한 오디 머피와 연결이 되었다. LA지역의 재향군인회에서 개최한 상이군인들을 위한 파티에서 같은 명예훈장 서훈자로서 친분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오디 머피를 시작으로 벌레는 제임스 스튜어트, 윌리엄 홀든 같은 참전 경험이 있는 배우들과 친분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한 인맥은 배우 한정이 아니었다.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미국 정부는 국민들이 전쟁을 지지하도록 하기 위해 많은 선전영화를 만들었다. 그런 선전영화들의 상당수는 할리우드의 스튜디오에서 만들어졌지만 의외로 많은 수가 실제 전장에서 촬영되었다. 그런 선전영화들을 촬영하기 위해 유명한 감독들도 전선을 자주 찾았고, 그 와중에 벌레 일당과도 인연이 닿은 감독들도 생겼다.

그렇게 배우, 감독들과의 인연을 살려 벌레는 열심히 할리우드를 드나들었다. 효율을 높이기 위해 벌레는 단순한 방문자가 아니라 ‘군사전문가’로서의 지식을 이용했다.

“진짜 전쟁에서 저렇게 움직이면 바로 표적신세가 될 것 같은데요?”

“그런가?”

“저 같으면 저렇게 안 움직이죠.”

“시범을 좀 보여주게.”

벌레의 조언을 받아 화면의 그림이 좋아지면서 감독들은 또 다른 욕심을 부리기 시작했다.

“Hey, Bug. 자네 도조 나포 작전과 히로히토 생포 작전을 진행했었지?”

“그랬었죠.”

“이야기를 좀 해줄 수 있어? 그걸로 영화를 만들면 히트 칠 것 같은데.”

“그거 아직 한국 정부나 미국 정부에서 기밀 해제가 안 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거 풀리려면 앞으로도 10년은 넘게 기다려야 하는데….”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그거 제가 함부로 입을 열 수도 없는 문제니까요.”

“아쉽군. 그건 그렇고 이번 주말에 시간 나나? 파티가 있는데….”

“참석하죠.”

그렇게 할리우드의 배우, 감독들과의 회동이 잦아지면서 인맥을 구축한 벌레는 드디어 메이저 영화사 사장들과도 만남을 가질 기회를 얻기 시작했다.

메이저 영화사 사장들과의 만남이 잦아지고, 벌레가 경영하는 Park E&E의 위상이 점점 강해지면서 할리우드의 사교계 내에서 벌레의 위치가 점점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자네도 점점 할리우드의 중심에 들어가는군.”

“그렇습니까? 솔직히 실감이 잘 나지가 않는군요.”

벌레가 비디오 카트리지 플레이어를 내놓음과 동시에 시작한 컨텐츠 제공 사업이 성공한 것을 축하하기 위한 파티에 참석한 윌리엄 홀든의 말에 벌레는 고개를 갸웃했다. 벌레의 말에 홀든은 파티에 참석한 여배우들을 턱으로 가리켰다.

“저 여자들. 어지간한 파티에는 참가도 하지 않을 정도로 콧대가 센 여성들이야. 그런데 참가를 했다는 것은 자네가 개최한 파티가 그만큼 대단하다는 거지.”

“그렇군요.”

벌레가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을 때, 파티에 참가한 여배우들의 면면을 살피던 홀든이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휘유~. 저 네덜란드 수녀도 왔네? 어쩐 일이래?”

“누구를 말씀하시는지?”

홀든은 파티장 한쪽에 서 있는 껑충한 키에 바싹 마른 여인을 가리켰다.

“오드리 헵번 알지?”

“아! 영화로 봤습니다. ‘로마의 휴일’에서 멋지게 나왔죠.”

“맞아. 그 아가씨야. 수녀까지 여기에 참석하다니 진짜 자네가 중심에 서기는 섰군.”

“감사합니다. 그런데 왜 수녀라고 불리는 거지요?”

“저 아가씨. 예전에 한 번 약혼까지 갔다가 깨진 이후로 철벽을 치고 있지. 그래서 ‘수녀’라고 불려.”

“그렇군요.”

홀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벌레는 곧 관심을 꺼야 했다. 파티를 주최한 호스트로서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휘유~. 영업 뛰기 힘들다.”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휴게실로 자리를 옮긴 벌레는 한숨을 쉬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무심히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이던 벌레는 욕설을 내뱉었다.

“씨발. 이제는 아주 자동으로 입에 무는군. 담배를 안 피우면 이야기조차 안 되는 시대라니….”

21세기는 물론이고. 사장이 되기 전까지는 금연자였지만, 이제는 익숙하게 담배를 입에 무는 자신을 보며 욕설을 내뱉던 벌레에게 낯선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불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예?”

자신에게 말을 건넨 여성을 돌아본 벌레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을 건 여성은 오드리 헵번이었다.

“불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여기.”

벌레가 불을 붙여준 담배를 살짝 한 모금 빨아들인 오드리 헵번은 벌레를 한참 바라보았다. 30줄에 들었다지만 아직도 미모로 손꼽히는 여배우가 자신을 바라보자 벌레는 좌불안석이 되었다.

“제가 무슨 실례라도?”

“우리 전에 만나 적이 있지 않나요?”

“전에요?”

“전쟁 때 네덜란드에 계시지 않았었나요?”

“있었습니다만….”

“그때 우리 만났었죠.”

헵번의 말에 벌레는 헵번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봤다. 한참 동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벌레의 눈이 크게 떠졌다.

“Eyeball?”

벌레의 말에 오드리 헵번이 미소를 지었다.

“Long time no see. Bug.”

“… 그렇게 해서 여기까지 온 거다. 뭐, 오빠, 오빠 하다가 아빠, 아빠 된 거지.”

벌레의 설명에 빨갱이가 중얼거렸다.

“역시나 무서운 자식. 그때 이미 알아보고 키잡을….”

“샤랍!”

벌레와 빨갱이가 오랜만에 만담(漫談)을 벌이고 있을 때, 옆에서 기억을 더듬던 정 수석차관이 중얼거렸다.

“이것도 시간 이동의 나비효과인가? 내가 알기로는 오드리 헵번은 1950년대에 이미 결혼을 했었는데….”

* * *

벌레의 한국행은 단순한 신혼여행이 아니었다.

떠나기 이틀 전, 벌레는 정 수석차관의 사무실을 찾았다.

“근무시간이다. 사적인 이야기는 일 끝나고 하자.”

“공적인 이야기야.”

벌레의 대답에 정 수석차관은 보고서를 옆으로 치웠다.

“무슨 이야기인데?”

“전자 공업단지에 빈 땅 좀 내어줘.”

“땅을? 왜? 공장이라도 지으려고?”

“정답.”

벌레의 대답에 정 수석차관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길게 기댄 정 수석차관은 벌레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벌써 저가 라인이 손익분기점 아래로 떨어진 거냐?”

“아직은 아닌데. 내 예상으로는 5년 이내다. 미리 준비해야 해. 공장 짓는데 들어가는 시간. 고용한 노동자들이 작업에 익숙해지는 시간. 생산품의 불량률이 적정 수준까지 떨어지는데 걸리는 시간을 생각하면 지금부터 준비를 해야 해.”

“흐음… 땅은 내어줄 수 있는데, 나로서는 우리 시장에 끼칠 영향도 생각해야 한다. 이제 막 토종 브랜드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그 시장을 내줄 수는 없어.”

“걱정 마. 한국 시장은 너무 작아.”

“그건 인정.”

“그래서 땅은 내어 줄 거지?”

“절차대로 거쳐서 별다른 결격사유가 없으면, 하지만 국내 시장에 문제가 생길 것 같다면 바로 힘들게 만들어 주마.”

정 수석차관의 경고에 벌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합법적으로만 한다면 나 역시 합법적으로 움직이지.”

“그럼, 공식적으로 요청해.”

“미국 돌아가면 바로 실무진들 보내도록 하지. 그리고, 전자 연구소 좀 구경시켜 줘.”

“거기는 왜!”

벌레의 말에 정 수석차관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정 수석차관의 거친 반응에도 불구하고 벌레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전자 연구소에서 괜찮은 것 있으면 라이센스 계약하려고 그런다. 만약 그렇게 해서 계약한 것이 있다면 한국이 출시하기 전까지는 우리도 출시하지 않기로 계약서에 내용을 추가해 주마.”

“그렇게 해서 한국이 얻는 이득은?”

“네가 세운 ‘Fast follower’전략의 성공이지. 우리가 베타테스터가 되어주겠다는 거야. 예를 들어보자면… 지금의 상황을 보자면 비디오 카트리지가 천하통일을 한 상황이지. 하지만 우리가 회귀 전에는 베타와 VHS가 피 터지게 싸웠었다. 그 과정에서 후발주자들은 이중지출을 해야 했고. 하지만 너와 내가 손잡으면 이런 이중지출을 크게 줄일 수 있어. 어찌 되었든 미국 시장에서는 우리 회사가 시장의 흐름을 주도하는 상황이고, 너와 나, 아니 21세기 출신들은 어떤 물건이 히트를 치면, 그다음은 무엇이 히트 친다는 것은 대략적으로도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너의 회사와 우리 한국이 막후에서 전자 시장을 손에 쥐고 쥐락펴락하자는 소리로군?”

“대충 그런 소리지.”

“과연 그게 우리 한국의 국익에 도움이 될까?”

정 수석차관이 미심적어 하자, 벌레는 한 가지 사실을 지적했다.

“파키의 대주주는 누가 뭐래도 코람 캐피탈이다. 즉, 파키의 이익은 한국에게도 이익이라는 소리야. 괜히 한국을 앞세워 밀고 들어갔다가 일본이나 중국처럼 깨지지 말고, 우리를 앞에 세워라. 이용해 먹을 것은 이용해 먹는 것이 낫지 않겠어?”

벌레의 말에 정 수석차관은 한참 동안 고민을 해야 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정 수석차관은 우선 시간을 벌기로 결정을 했다.

“윗분들에게 이야기를 해보겠다. 나 혼자 결정을 할 일이 아니야.”

“기다리지.”

사흘 뒤, 벌레는 한국의 국립 전자연구소를 방문했다. 연구소를 방문한 벌레는 미국으로 돌아가기 하루 전, 정부를 방문했다.

‘벌레와 대한민국 정부가 무엇인가 계약을 했다.’

자세한 내용이 밝혀지지 않은 채 소문이 무성해졌고, 미국 정부와 경쟁업체들은 감시의 눈을 번뜩였다.

“21세기에서 온 놈들끼리 무엇을 한 거지?”

* * *

소문과 궁금증이 무성한 가운데 1965년 중반, 파키에서 새로운 상품이 출시되었다. ENG카메라를 여기저기 도려내 크기를 줄인 것과 같은 모습을 한, 세계 최초의 캠코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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