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9화 1960년대 (7)
1964년이 지나고 1965년이 되면서 미국의 선두 가전 3사는 피 터지게 경쟁을 시작했다. 벌레가 진두지휘하는 Park E&E-미국 소비자들은 ‘파키’라는 애명으로 불렀다-가 다른 두 회사에 비해 기술적으로는 한 발자국 앞서는 상황이었지만, 시장장악 부분에서 확실한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기술력은 한 발자국만 앞서면 돼. 딱 한 발자국만. 괜히 앞서 나갔다가 소비자들이 방향을 틀면 우리만 새 되는 거니까.”
인수를 비롯한 개발진들에게는 여유를 가지라고 주문하는 벌레였지만, 영업과 광고 담당자들에게는 저승사자였다.
“시장의 변동을 놓치면 안됩니다! 잘 때도 한쪽 눈은 뜨고 자요!”
“어떻게 하면 소비자들을 우리의 손에 넣을까 곰곰이 생각을 해 봐요! 소비자들의 눈을 잡아끌고 걸음을 멈추고, 마침내 지갑을 열게 만들어!”
벌레의 명령에 광고 기획자들과 담당자들은 한숨을 쉬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다.
미국의 가전시장의 경쟁이 치열하면서 미국의 가전 3사는 치열한 광고전을 벌였다. 광고전의 승기를 잡기 위해 다른 2개의 회사들은 벌레가 선택한 방법, 노출을 무기로 선택했다. 그 결과, 가전 3사의 광고들은 점점 살색의 농도가 짙어지기 시작했다.
“이봐요. Mr. 핸드릭.”
“예. 사장님.”
“지금 이게 우리 회사의 광고입니까? 아니면 플레이보이지의 광고입니까?”
“예?”
벌레는 아슬아슬한 비키니를 걸친 금발미녀가 메인으로 나온 광고사진을 손가락으로 두들기며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이게 입은 겁니까? 벗은 겁니까! 욕 처먹으려고 작정했어요!”
“그 정도면…….”
“선을 넘었어요! 선을! 이거 광고 냈다가는 당장 영업정지 먹을 겁니다! 아니면 소송전에 휘말리던가! 당장 다시 만들어 와요!”
“알겠습니다!”
벌레에게 퇴짜를 맞고 사무실을 나온 핸드릭 이사는 작게 욕설을 뱉었다.
“Shit…. 지가 가장 먼저 벗겨 놓고서는…….”
“썅……. 내가 또 나서야 하나?”
5번째로 올라온 기획안을 퇴짜 놓으며 벌레는 욕설을 내뱉었다. 도를 넘은 노출광고를 퇴짜 놓은 다음, 계속해서 올라오는 광고기획안들 가운데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벌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씨발…. 내가 한다! 내가 해!”
* * *
벌레가 작성한 기획안을 받아든 담당자들은 모두가 다 난처한 얼굴을 했다.
“이거 너무 과격한 것 아닐까요?”
“뭐가 과격합니까? 제가 무슨 공산혁명을 외쳤어요?”
“그것은 아닙니다만…….”
“광고는 도발입니다! 시각적으로 도발을 하던가, 아니면 사람들의 당연하다 생각했던 불합리를 지적해 도발을 하던가!”
“확실히 도발적이기는 합니다만…….”
“그렇게 불만이면 더욱 좋은 기획안을 내놓던가!”
결국, 벌레가 만든 기획안을 토대로 광고가 만들어졌고, 곧 공중파를 타기 시작했다.
- 여러 인종의 아이들이 모인 유치원 교실. 유치원 선생이 아이들에게 말한다.
“어린이 여러분~. 살색 크레용을 들어보세요.”
유치원 선생의 명령에 아이들이 크레용을 들어 보인다. 인종에 상관없이 아이들이 들어 보이는 크레용은 한 가지였다.
[여기 살색 크레용이 있습니다.]
[Wrong!]
자막이 사라지자마자 다양한 인종의 아이들 얼굴들이 화면을 스치고 지나간다.
[세상에는 여러 살색들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색들을 보여드리겠습니다.]
[Park E&E]
‘is’와 ‘are’, ‘color’와 ‘colors’, ‘World’ 등의 단어에 흑백과 컬러의 차이를 주면서 강조한 광고는 미국 사회의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단순한 광고로만 볼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암묵적인 편견도 생각을 해 봐야 한다!”
유색인종 단체들이 목소리를 높였고, TV의 토론 프로그램들에서 토론 주제로 삼을 정도로 벌레가 만든 광고는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다행스럽게도 벌레가 만든 광고가 일으킨 센세이션은 부정적인 방향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움직였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
“기획을 사장이 했다고, 사장이 한국인이라고 했던가?”
광고가 긍정적으로 작용하면서 시장에서 파키의 점유율은 다시 상승 곡선을 그려나갔다. 한편, 광고를 기획한 이가 벌레라는 정보를 접한 기자들은 벌레의 대한 정보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한국의 전쟁영웅?”
“미군의 필리핀 철수 작전 실행자. 도조 히데키 나포 작전의 실행자. 한국의 일본총독부 점령작전 지휘자. 히로히토 생포 작전 실행자. 에펠탑 핵폭탄 탈취 작전 지휘자? 뭐야? 무슨 전투 로봇이야?”
“명예훈장을 받았어? 외국인인데?”
예상치도 못한 정보들이 튀어나오자, 기자들은 더욱 벌레와 Park E&E를 파고 들어갔다. 조사를 하면 할수록 기자들은 더욱 놀라운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장애인도 고용하고 있었네?”
“군에서 장애를 입고 나온 이들도 적극적으로 고용을 하고 있군!”
“여성들도 상당히 적극적으로 고용하고 있어!”
이런저런 정보들을 조합한 기자들은 기사를 내기 시작했다.
‘진보적인 경영자! 김진한!’
‘김진한의 경영에서 보이는 진보주의!’
등등의 제목을 달고 나오는 신문기사를 보는 순간 벌레는 물론이고, 한국에 있던 빨갱이와 창기, 정 수석차관과 그를 알고 있던 모든 이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아하하하! 내가 진보주의자란다!”
“푸핫! 벌레 새끼가 진보주의란다!”
기사가 나오면서 벌레에 대한 미국인들의 관심이 더욱 높아졌다. 결국, 벌레에게는 인터뷰 요청이 밀려들어 왔다. 예상을 넘는 많은 수의 인터뷰 요청이 들어오자, 벌레는 공개 회견을 가지게 되었다.
* * *
공식적인 회견이 벌어지는 날, LA TV방송국에 만들어진 회견장에 수많은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신문사들의 기자들은 물론이고 장소를 제공한 LA TV와 같은 지방 방송국, 그리고 주요 공중파 방송국들의 카메라들이 빽빽하게 자리한 가운데 회견이 시작되었다.
“사장님은 매우 진보적인 진보주의자라고 평가를 받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회자의 질문에 벌레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제가 생각하기로 저는 보수주의자(Conservative)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 평등주의자(Equalityist)에 더 가까울까요?”
예상을 벗어난 대답에 시회자는 다급히 질문을 이었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을 해 주시겠습니까?”
“저는 무조건적으로 개인만을 중시하거나, 사회적 공유와 경제적 평등을 중시하는 사회주의는 지지하지 않습니다. 저는 개인이 개인의 자유의지로 선택을 할 수 있고, 그 책임을 져야 한다는 보수적인 자유주의를 추구합니다.”
“보수적인 자유주의인 것입니까? 그러면 그 자유와 책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개인이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을 할 수 있는 것, 이것이 자유입니다, 스스로 선택을 할 수 있는 만큼, 반드시 그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선택이 같은 사회를 구성하는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고, 그 피해에 대한 보상을 하거나 그런 피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자신의 선택을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평등주의자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또 무슨 의미입니까?”
“개인의 피부색, 성별, 장애 유무가 그 개인의 가치를 가르는 척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기회를 원하는 자들이 준비가 되었다면 모두에게 동등한 기회를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장님은 페미니스트입니까?”
“아닙니다.”
“하지만, 방금 사장님이 말씀하신 평등주의는 많은 여성운동가들이 말하는 것들입니다.”
“비슷한 말을 하는 것 같지만, 다릅니다. 방금 전에 제가 말한 것 가운데 ‘준비가 되었다면’이 바로 그 차이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군인, 경찰, 소방관과 같은 직종은 직종의 특수성 때문에 체력기준이 정해져 있습니다. 만약, 이 체력기준을 통과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여성이 지원을 한다면 그 여성에게도 기회를 줘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준을 통과했다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하지만, 여성이기 때문에 별도의 기준을 마련한다? 이는, 여성은 열등하다는 편견이 만들어 낸 차별이라고 생각합니다.”
벌레의 말에 사회자가 냉큼 반박을 하고 나섰다.
“하지만 말입니다. 여성이 남성보다 체격은 물론이고 체력도 약한 것은 사실 아닙니까?”
“그것은 사실이지요.”
“그런데 같은 능력을 요구한다는 것은 평등에 어긋나는 것 아닌가요?”
“군인이나 경찰, 소방관들이 요구하는 체력기준 보셨습니까?”
“아니요.”
“그 직종의 체력기준들은 일반 남성이라도 훈련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아무나가 아닌 준비가 필요한 것은 남성과 여성 모두 같은 것입니다. 물론, 여성이 남성보다 체력이 약하기 때문에 좀 더 강도가 높은 훈련이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해당 직종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면 그 정도는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매우 엄격한 평등주의로군요.”
“평등은 지키기 쉬운 것이 아니니까요.”
그 뒤로도 사회자와의 대담은 길게 이어졌다. 사회자와의 대담이 끝나고도 참석한 기자들과의 질의응답이 이어졌고, 결국, 회견은 4시간이 넘도록 이어졌다.
회견이 끝났을 때, 기자들은 도저히 알 수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참 애매하군…. 보수주의자라고 하면서 상당히 진보적이고…….”
“진보적 사회주의자라고 하기에는 개인과 기존의 보수성을 강조한단 말이지.”
“그러면 뭐라고 해야 하지? 진보적 보수? 아니면 보수적 진보?”
벌레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 위해 고심을 하던 기자들은 결국 각자의 취향대로 ‘진보적 보수주의자.’ 또는 ‘보수적 진보주의자’라는 이름을 붙여 기사를 작성했다.
벌레의 생각은 많은 사회학자들과 정치가들에게 논쟁의 불씨를 넘겨주었다. 점점 변화하는 사회와 새롭게 발생하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로 벌레의 생각을 인용하는 이들도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런 일들을 통해, 훗날 벌레의 가치관을 기반으로 ‘신보수주의(Neo-conservatism)’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신보수주의’라는 단어를 접한 빨갱이와 정 수석차관은 짧게 평가했다.
“네오콘? 차라리 ‘벌레주의(Bugism)’라고 해라!”
* * *
그렇게 한바탕의 파란이 지나가고 1964년도 10월에 접어들 무렵, 빨갱이와 창기, 그리고 정 수석차관에게 한 통의 전보가 도착했다.
“벌레 새끼가 웬 전보지?”
“뭔 일 생겼나?”
전보를 받아든 이들은 봉투를 뜯어 안에 적힌 전보문을 꺼냈다. 전보문에는 짧게 적혀 있었다.
나 결혼한다.
“잉?”
“엥?”
“결혼?”
급히 한자리에 모인 셋은 머리를 맞대었다.
“도대체 누구하고?”
의문을 감추지 못한 셋은 바로 벌레에게 전화를 했다.
“그 지지리도 복 없는 여인이 도대체 누구냐?”
-겨우 그걸로 전화했냐? 나 바쁘다.
“그러니까 누구냐고?”
-어차피 며칠 있으면 신문에 나가니까 그때 봐. 끊어!
전화가 끊기고. 정 수석차관은 빨갱이와 창기를 돌아봤다.
“이 자식, 무슨 사고 쳐서 장가가나?”
“설마, 속도위반?”
“누구하고 사고를 쳤기에 신문에 나올 정도지?”
제대로 답을 듣지 못한 세 사람의 의문이 점점 쌓여가고 있을 때, 미국의 신문에 벌레의 결혼이 대서특필(大書特筆)되었다.
-Park E&E의 김진한 사장과 여배우 오드리 헵번 러스틴 결혼하다!
“누구?”
“누구하고 한다고?”
신문기사를 몇 번이고 확인하던 셋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이 새끼. 대형사고 쳤네…….”
* * *
‘벌레와 오드리 헵번의 결혼’이라는 소식은 한국에서도 큰 화젯거리였다.
‘헐리우드의 여우(女優), 한국인 남성과 화촉(華燭)’
위와 같은 제목으로 한국의 유명 일간지와 TV방송에 나올 정도로 큰 화제가 되어 버린 가운데, 기사를 보던 빨갱이와 창기, 정 수석차관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풋! 이 자식. 그냥 듣보잡 취급이야!”
“한국인 남성? 푸하! 그냥 지나가는 행인 A취급이네!”
세 명은 연신 웃고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도 꽤 있었다. 당대의 청순 여배우로 이름이 높았기 때문에 한국에도 많은 팬들이 있었고, 그런 팬들은 웃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21세기 출신들 가운데에도 팬이었던 몇몇은 허탈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화제가 되었던 것과 달리 두 사람의 결혼식은 조용하고 소탈하게 치러졌다. 결혼식이 끝나고 신혼여행을 떠난 두 사람의 행선지는 한국이었다.
벌레 부부가 한국으로 온다는 소리에 부리나케 모인 셋은 상황을 정리했다.
“이 자식, 이거 우리 보라고 오는 거지?”
“아마도?”
* * *
예상과 달리 벌레 부부는 조용히 한국에 들어왔다. 물론, 기자들이 쫓아다녔지만 능숙하게 기자의 추격을 따돌린 벌레 덕에 벌레 부부는 빨갱이, 창기 그리고 정 수석차관 및 21세기의 동료들과 작은 파티를 가지게 되었다.
이런저런 축하의 말이 오가는 가운데 손님으로 참석한 송 대장이 벌레에게 말을 걸었다.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장군님.”
“솔직히 말해, 팬이었네.”
“그러셨습니까?”
“그래서 말하는 건데. 우리 여배우한테 애먼 짓 하지 마.”
송 대장의 말에 벌레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무슨……. 아들 부부 사이에 껴 자고는 자식 못 낳는다고 며느리 소박 놓는 시어미 같은 소리를 하심까? 부부 사이에 애먼 짓 하지. 누구하고 해요?”
“썅!”
“푸핫!”
옆에서 듣고 있던 빨갱이와 창기가 웃음을 터뜨린 가운데, 정 수석차관이 농을 걸었다.
“이야~. 이거 나이차가 몇 살이냐? 이거 헌병 불러야 하는 것 아냐?”
“그러지 마라. 미국의 집에 이미 유모차만 한 다스다.”
“유모차는 왜?”
“미국에서는 ‘유모차 도둑’이라고 부른대.”
“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