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2화 1950년대 (12)
1959년도 후반기로 들어서면서 벌레 일당의 신상에도 몇 가지 변화가 생겼다.
정 수석차관과 빨갱이, 그리고 창기가 학부형(學父兄)이 된 것이었다.
여전히 독신인 벌레를 제외한 세 사람은 각기 1950년대 초반에 화촉(華燭)을 밝혔는데, 그 결혼 스토리들이 다들 드라마틱했다.
* * *
먼저 정 수석차관의 경우는….
“트랜디 드라마의 정석이지.”
정 수석차관의 결혼식에 참석한 빨갱이의 평가에 벌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내게 이런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풋!”
정 수석차관의 부인이 된 여성은 그와 같이 일을 하던 조은숙이었다. 이북지역의 드센 기질을 이어받은 그녀는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는 편이었다.
이런 그녀의 성향은 얌전한 여성을 환영하는 당시 한국 사회에서는 매우 튀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언제나 당당했고,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 때면 정 수석차관을 상대로 들이받는 일도 감행할 정도였다.
이런 조은숙의 행동은 정 수석차관에게 신선함을 안겨 주었고, 그렇게 신선함이 호감으로 바뀌면서 결국 결혼까지 이어진 것이었다.
정 수석차관의 결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빨갱이가 결혼을 했다. 주례의 주례사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내빈석에 앉아서 결혼을 지켜보던 정 수석차관이 입을 열었다.
“이건 아무래도 정치드라마야.”
“동감.”
정 수석차관의 평가에 벌레가 조금은 딱딱한 얼굴로 대답했다.
‘빨갱이’라는 별명답게 빨갱이는 임정과 광복군의 좌익계열과 친분을 쌓아갔다. 그렇게 친분을 쌓아가는 과정에서 좌익인사들의 집에도 찾아가는 일은 흔한 일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인연을 쌓아가는 도중에 좌익계 인사의 여식(女息)과도 친분이 깊어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아는 분의 따님에서 시간이 지나면서 잘 아는 여동생이 되었고, 종국에는 그보다 더욱 진도가 나가게 되었다.
“너 그러다 사고 난다.”
벌레가 계속해서 경고를 주었지만 빨갱이는 별것 아니라는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다.
“야! 나를 뭘로 보고 그러냐? 그냥 여동생이야, 여동생!”
하지만 벌레의 자신만만한 대답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고가 터져버렸다.
-특종! 여당의 중진 A씨의 여식과 전쟁영웅 사이에 분홍빛 기류!
‘선데이 코리아’라는 황색언론에서 대문짝만하게 사진까지 실어가며 특종이라고 실은 것이었다. 태극무공훈장과 미국의 의회명예훈장까지 받은 전쟁영웅이 그보다 20살은 어린 여대생-어린 여대생이라고 해도 늦게 입학했기에 20대 중반이었지만-과 팔짱을 끼고 술집에서 나오는 사진은 스캔들로 비화했다.
해당 여대에서 여대생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며 해당 여학생을 퇴학시켰고, 퇴학을 당한 여학생이 식음을 전폐하고 앓아눕는 상황이 벌어졌다.
야당에서도 슬금슬금 말이 나오기 시작했고, 주변에 기자들이 점점 모이는 것을 본 빨갱이가 결정을 했다.
“씨발! 책임지면 될 것 아냐!”
그리고 결혼식 날, 정 수석차관과 벌레는 그간의 사정을 빗대어 ‘정치드라마’라고 말한 것이었다.
“정말 기사가 터지는 것을 몰랐을까?”
“천만에. 군 내부에 있는 좌익은 물론이고 우익에게까지 친분이 있는 빨갱이를 손에 넣으려고 한 것이겠지. 그냥 친분이 있는 것보다는 혈연이 더 확실하니까.”
그리고 다음 해, 창기가 결혼했다.
주한미군 여의도 캠프에 있는 교회에서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신랑 들러리로 서게 된 정 수석차관과 벌레, 빨갱이는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갔다.
“이 자식의 결혼은 미국식 블랙코미디야.”
“정답.”
“동감.”
창기의 신부는 주한미공군 소속 대령의 딸이었다.
전형적인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s) 계층의 여성이 창기의 신부였다. 제일 앞줄에 앉은 신부의 부모는 애매모호한 표정을 한 채 앉아 있었다.
창기는 190cm에 가까운 키에 매우 서구적인 외모를 한 토종한국인이었다.
“덕분에 우리 부모님의 결혼생활에 커다란 위기가 찾아왔지. 친자확인을 그것도 3번이나 했다니까.”
“친가나 외가 쪽에 서양분이 계셨냐?”
“적어도 3대 이내에는 다 토종분들이시다.”
“유전자란 참 신비해.”
“내 여동생 앞에서는 그 이야기 하지 마라. 걔, 키부터 시작해 100% 토종이야. 덕분에 튜닝비 많이 깨졌다.”
“토종이 어때서?”
“어려서부터 오빠하고 비교당하면서 심리적인 문제까지 생겼었거든.”
“아….”
그렇게 서구적인 외모를 이용해 창기는 금요일 저녁마다 여의도에 있는 미군 클럽에 들러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서구적인 외모 기반에 아시아인 특유의 어려(?)보이는 특성까지, 벌레의 표현처럼 ‘사기성 버프’를 잔뜩 받은 덕에 창기의 인기는 매우 높았다.
그런 창기와 그녀, 엘리자베스의 만남은 운명적이었다.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다 겨울 방학을 맞이해 부모와 함께 크리스마스 휴가를 지내기 위해 한국에 온 엘리자베스는 무료한 시간을 해소하기 위해 클럽에 들렸다.
클럽에서 시간을 보내던 도중 술에 취한 미군 병사의 도를 넘는 추근거림을 받으며 위기에 처한 엘리자베스를 구해준 것이 창기였다.
그렇게 시작된 만남 속에 엘리자베스는 창기에게 확 빠져 버렸다. 창기 역시 아름답지만 21세기의 미국 여성들-드라마 속의 여성들이라는 함정이 있지만-과 달리 여성적인 엘리자베스의 매력에 빠지면서 둘 사이는 점점 가까워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두 사람은 필요 이상으로 진도를 나가버렸다.
“돌아버리겠네….”
딸에게서 ‘결혼할 사람이 생겼다. 그런데 그 사람이 한국인이다.’라는 말을 듣는 순간 로빈슨 대령은 기절할 것만 같았다.
당장이라도 딸을 향해 휘둘러지려는 주먹을 억지로 뒤로 숨기며 로빈슨 대령은 입을 열었다.
“한국인이라고?”
“예.”
“당장 미국으로 돌아가라. 돌아가서 정신을 좀 식혀.”
“돌아갈 수 없어요! 그 사람하고 결혼해야 해요!”
“말 들어!”
“저 임신했어요!”
딸아이의 폭탄선언에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로빈슨 여사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결국, 로빈슨 대령은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좋다. 그 빌어먹을 새끼 얼굴 좀 보자. 데리고 와.”
“예.”
대답을 한 엘리자베스가 퉁퉁 부은 눈을 하고 계단을 올라가자 로빈슨 대령은 의자에서 일어나 한쪽에 놓인 장식장 문을 열었다.
“엽총이 어디 있더라….”
“여보!”
“죽이지는 않아, 죽이지는….”
딸아이가 신랑감을 데리고 온다는 토요일. 로빈슨 대령의 집에는 흉흉한 살기가 감돌았다.
현관을 막듯이 놓인 흔들의자에 앉은 로빈슨 대령의 허벅지 위에는 윈체스터 산탄총이 놓여있었다.
잠시 후, 빨간색 스포츠카가 세워지고 문이 열리면서 창기가 내리자 로빈슨 소령의 표정이 더욱 흉흉해졌다. 하지만 창기가 가까워지면서 로빈슨 대령의 표정이 조금씩 애매모호해졌다.
마침내 현관 앞 계단에 창기가 도착하자 로빈슨 대령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경례를 했다.
“환영합니다!”
“고맙습니다.”
“안쪽으로.”
창기를 안내하는 로빈슨 대령의 눈은 창기의 목에 걸린 리본에 고정되었다. 대한민국 육군정복을 입은 창기의 목에 걸린 옅은 푸른색의 리본과 거기에 걸린 훈장은 분명 명예훈장이었다.
결국, 자식의 고집을 이기지 못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명예훈장이 그 위력을 발휘했는지 모르겠지만 창기와 엘리자베스는 결혼을 허락받게 되었다. 허락을 받고 돌아온 창기는 벌레에게 술을 사며 고마워했다.
“고맙다! 네놈 말대로 하기 잘했어!”
“그럼 잘 살아, 새꺄. 늦게 배운 도둑질에 밤새는 줄 모른다고. 속도위반이 뭐냐, 속도위반이.”
“하하하….”
그렇게 해서 정 수석차관과 벌레, 빨갱이가 ‘미국식 블랙코미디’라 평한 결혼식이 진행된 것이었다.
보수적인 WASP가정의 딸이 속도위반을 하고, 한술 더 떠서 남편은 유색인이라는. ‘블랙코미디’라는 말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결혼식이었다.
* * *
그렇게 벌레 일당들이 계속해서 결혼을 하면서 높으신 분들은 벌레의 거취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도대체 사람이 관심이 없다는데 무슨 놈의 선 자리들이 아프리카 물소 떼처럼 몰려드는지….”
어느 일요일 저녁, 또다시 모인 4인방이 술잔을 나누고 있을 때, 벌레는 빈 잔에 술을 채우며 푸념을 했다.
“너만 남았잖아.”
“왜 나만 남았냐? 해군에는 제독 양반들도 있고, 육군에는 우리 사장하고 영감도 있잖아.”
벌레의 지적에 빨갱이가 말을 받았다.
“그 양반들은 다들 한 번씩 갔다가 데인 사람들이잖냐.”
빨갱이의 말처럼 고 제독을 위시해 해군의 제독들과 원 중장, 송 중장은 이혼남들이었다. 그들 모두 진급 과정에서 물을 먹고, 외지를 전전하는 과정에서 이를 견디지 못한 부인들에게 이혼을 당해야 했다.
회귀 이후, 임정의 높으신 분들이 재혼을 권유했지만, 그들은 고개를 모두 저었다.
“결혼은 한 번으로 족합니다.”
그렇게 되면서 높으신 분들의 관심이 벌레에게 집중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 * *
넓게 보면 한미 외교관계, 좁게 보면 한미 군사관계에서 벌레가 차지하는 부분은 상당히 컸다.
단순하게 보자면 대한민국 육군 주임원사였지만, 지난 전쟁에서 그가 입안(立案)한 작전들 대부분이 지상전의 커다란 분수령(分水嶺)이 되었었다. 그 덕에 지금까지도 벌레는 정기적으로 미국을 방문해서 특수전 교리와 같은 여러 부분에서 미군들과 의견을 교환했다.
물론, 벌레만이 아니라 원 중장과 같은 한국군 장성들과 한국 육군의 다음을 책임질 젊은 장교들도 같이 움직였지만 큰 틀이 아닌 작은 부분에서의 전술은 벌레와 함께 의견을 나누며 만들어지는 것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그 덕에 한국군들 사이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이 떠돌 정도였다.
-한국군 장군이 펜타곤을 찾으면 대위가 맞이하지만, 벌레가 펜타곤을 찾으면 별이 튀어나온다.
물론 이런 말이 돌 때마다 벌레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지난 전쟁에서 같이 뛴 장교들이 다들 별을 달았으니까 그런 겁니다. 친분이에요, 친분.”
어쨌거나 한국군 내부에서도 방사청이나 전략연구소에서 근무하는, 미래가 촉망받는 장교들에게 있어서 벌레는 반드시 가까워야 할 대상이었다.
새로운 무기체계나 전략, 전술을 연구할 때 벌레에게 이야기를 하면 괜찮은 의견이 튀어나왔다. 만약, 좀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해 미국에 갔을 때에도 벌레의 동행 유무에 따라 처리시간이 달라질 정도였다.
벌레의 가치가 이 정도였기 때문에 군부는 물론이고 정치권의 많은 이들이 벌레와 좀 더 가까운 관계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런 관계에서 최고는 혈연이었다.
덕분에 벌레에게 계속해서 선이라던가 이런저런 소개가 밀려들었지만, 벌레는 처음 몇 번의 만남 이후로 이런 만남들을 모조리 거부하고 있었다.
* * *
“도대체 뭐가 문제야? 혹시 너, 여자가 아니라 남자 좋아하냐? 숨겨왔던 나의~?”
정 수석차관의 말에 술안주로 쓰기 위해 소시지 팩을 꺼내던 벌레가 식칼을 들어 보이며 으르렁거렸다.
“소시지 대신에 네놈 손가락 삶아 먹으면 맛있겠지? 그지?”
“거 참, 대답 한 번 살벌하네….”
정 수석차관이 툴툴거리자 벌레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가! 내일모레면 50인데 무슨 놈의 선 자리야!”
“나이가 무슨 상관인데? 혹시… 아재, 안 서요?”
창기의 물음에 벌레가 으르렁거렸다.
“아직도 아침마다 빨딱빨딱 잘 서서 문제다. 새꺄.”
“그럼 도대체 왜?”
창기의 물음에 벌레는 한숨을 쉬었다.
“후우~. 다시 말하지만 내 나이 내일모레면 쉰이다. 쉰. 이미 머리는 딱딱하게 굳어서 남의 생각을 받아들이기 힘들고, 혼자 사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서 남이 내 영역에 들어오면 적응이 쉽지가 않아.”
“그거야 시간이 좀 지나면 다 익숙해져.”
정 수석차관의 말에 벌레의 목소리가 다시 사나워졌다.
“그렇게 익숙해진 녀석들이 왜 일요일만 되면 몰려와서 술을 퍼마시는 건데? 내 집이 무슨 술집이냐? 내가 왜 제수씨들한테 욕을 먹어야 하냐? 나도 좀 편하게 주말의 여유를 즐기면 안 되겠냐?”
벌레의 말에 창기가 말을 받았다.
“우리도 좀 쉬자! 주6일을 시달렸으면 하루라도 좀 쉬어야지!”
“지랄.”
짧게 욕설을 뱉은 벌레는 몸을 돌려 소시지를 냄비에 넣고 데치기 시작했다.
옆에서 그 촌극(寸劇)을 보던 빨갱이가 작게 입을 열었다.
“저 녀석, 여성혐오증이야. 정확히 말하자면 한국 여성 한정 여성혐오증.”
“잉?”
“엥?”
“저 녀석, 과거에 아픈 기억이 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