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4화 1950년대 (4)
“경제가 발전한다고 좋아해도 2가지를 못 잡으면 실패다.”
정 수석차관은 21세기에서 같이 온 자신의 부하들은 물론이고 새롭게 뽑힌 공무원들을 상대로 귀에 못이 배길 정도로 반복해서 주의를 주었다.
“하나는 물가고, 다른 하나는 부패다. 부패를 못 잡으면 어떻게 되는지는 가장 최신판으로 청나라가 있으니 잘 알겠고, 물가를 못 잡으면 어떻게 되느냐? 뭐 빠지게 일해서 월급을 받았는데 이런저런 지출 빼면 남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만큼 사람 맥 빠지게 만드는 것도 없다. 물론, 지가 흥청망청 써서 그런 꼴 난 것이면 욕이나 한 바가지 퍼부으면 끝나는 일이다. 하지만, 이게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서 벌어진 상황이라면 문제가 커진다. 최악의 경우, 국민들이 미래에 대한 생각을 접어 버리고 현재만 생각한다. 뭐, 겉으로는 화려하게 포장을 하겠지만 말이지. ‘욜로(YOLO, You Only Live Once)’라던가 뭐, 비슷한 핑계를 대서 말이지. 어쨌거나! 국민이 미래를 포기하는 순간, 바로 당장은 시장이 활발하게 도는 것처럼 보이겠지. 하지만 결국은 망한다. 그렇게 망하지 않으려면 결국은 외부에서 인재를 수입해야 하는데 망해가는 나라에 들어올 인재는 없다! 따라서 이 부분을 유념하도록. 알겠나?”
“알겠습니다!”
“그럼. 물가를 잡기 위해서 가장 먼저 잡아야 하는 것이 무엇이냐? 바로 식량과 연료다.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먹거리가 반드시 필요하고, 산업체가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연료가 필요하다. 식량과 연료 가격이 안정되면 다른 것들도 안정을 잡기 쉬워진다. 이것을 반드시 유념해!”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당부하지만 물가와 부패만 잡으면 나머지도 잡기가 쉬워진다! 부패로 인해 국민들이 정부를 믿지 못하면 국정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물가가 불안해 국민들의 경제가 엉망이 돼도 국가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것을 막는 것이 우리같이 공무원이라고 불리는 나랏밥 먹는 종자들이 할 일이다! 명심해!”
“알겠습니다!”
“공무원들이 나랏밥 먹는 방법에는 2가지가 있다! 하나는 열심히 일하고 받아먹는 것, 다른 하나는 감옥에서 먹는 것. 어느 밥이 몸에 좋을지는 잘 알 거다! 그럼 가서 일 해!”
행정고시에 합격한 신입공무원들이 자신들의 자리를 배정받기 전, 정 수석차관은 그들을 불러 모아놓고 위와 같은 연설을 했다. 그리고 실제 업무에 들어가면 감사원에서 나온 이들이 눈에 불을 켜고 부정을 잡기 위해 감사를 했다.
일반 행정은 물론이고 외교, 사법, 치안, 군무 등에 종사하는 공무원들의 원성을 가장 많이 받는 이들이 감사원의 공무원들이었다. 감사원의 공무원들은 끈질겼고, 감사를 진행하는 해당 부서 업무에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부서에서 제대로 된 해법을 찾지 못하고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지나가던 감사원 소속 공무원이 넌지시 해답을 알려주는 경우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런 농담 같은 일이 생기게 된 경우에는 뒷배경이 있었다. 정부기관 내부의 부정을 고발한 내부고발자들이 대거 감사원으로 자리를 옮겼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등급이 올라서.
내부고발자들인 만큼 자신들이 담당하는 부처의 일을 잘 알고 있었고, 어디에서 부정이 발생할 확률이 높은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모인 이들이 서로 정보를 공유하면서 점점 더 많아지고 변화하는 행정업무에서 부정이 발생할 위험이 가장 높은 곳을 예상해서 사전 감사와 집중감사를 진행했다.
이렇게 일이 진행되면서 정부 기관들과 국회에는 다음과 같은 소문이 돌았다.
‘어떤 정책이나 조직의 개편이 진행될 때, 이것들이 미칠 파장들을 가장 입체적으로 생각해 판단할 수 있는 이들은 딱 2개 부처에 속한 이들이다. 하나는 국무통합조정실, 다른 하나는 감사원.’
‘어떤 법안이나 정책의 밝은 면을 보고 싶으면 국무통합조정실의 보고서를 보고, 어두운 면을 보고 싶으면 감사원의 보고서를 보라.’
‘국무통합조정실의 보고서를 보면 대한민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선진국이 될 것 같고, 감사원의 보고서를 보면 대한민국은 내일이라도 망할 것 같다.’
물론, 이런 소문은 1970년대가 되어서야 나왔지만, 그 시작은 이미 1950년대부터였다.
* * *
부하 공무원들에게 신신당부를 했던 것처럼 정 수석차관이 가장 신경을 쓰고 노력을 기울인 부분들 가운데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 것이 물가안정이었다.
그리고, 그 물가를 안정시키기 위해 가장 많은 심력을 쏟아부은 것이 앞서 언급한 식량과 연료였고.
식량 수급의 안정을 위해 정 수석차관이 실행한 방안은 전에 말한 것처럼 쌀에 대한 의존도를 줄여나가는 것이었다. 북해도의 광대한 농업지역을 이용해 대량으로 밀과 감자, 고구마를 재배했고, 대규모로 축산업 단지를 조성했다.
그 결과, 1950년대로 들어가면서 ‘보릿고개’라는 단어가 사라졌다. 식량부족을 겁내지 않게 되고, 육류의 대량 공급, 미국을 시작으로 서양식 요리법이 대중화되면서 쌀에 대한 의존도는 물론이고, 국민들의 개인당 식량 소비 자체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 말이 무엇이냐 하면 국민들이 이제는 고봉밥을 안 먹는다는 것입니다.”
대통령과 각료들에게 보고를 하는 자리에서 정 수석차관은 말을 이어갔다.
“다르게 말하자면 국민들이 이제는 양보다 맛을 더 따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미각이 날카로워지는 것을 시작으로 다른 감각들도 날카로워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산업 전반에 걸쳐 상품성이 더욱 강화될 것입니다. 디자인은 물론이고 성능을 평가할 때에도 감각은 중요한 법이니 말입니다.”
“그렇겠군,”
고개를 끄덕거리는 각료들을 보며 정 수석차관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렇게 까다로워진 감각으로 정치권을 갈궈댈 것이고 말입니다.’
쌀에 대한 의존도는 줄어들고 있었지만, 농민들은 쌀농사를 쉽게 포기하지 못했다. 누렇게 익은 벼가 물결치는 논과 하얀 백미는 농사꾼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만주와 중앙아시아의 척박한 기후 속에서도 조선인들은 개간한 땅에 벼를 재배했었다.
즉, 쌀은 한국인들의 정서를 구성하는 가장 큰 요소 가운데 하나였다.
그 결과, 1955년, 북해도에 자리한 ‘국립 육종 연구소’에서 새로운 벼 품종이 개발되었다. 1946년 연구소가 설립되고 9년 만의 일이었다.
연구소 소장이었던 우장춘(禹長春)박사의 진두지휘(陣頭指揮)아래 벌어진 대규모 실험 끝에 탄생한 새로운 품종의 벼인 ‘백설(白雪)1호’는 추위에 강했고, 생육기간(生育其間)도 짧았다. 단위당 산출량이 적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미질(米質)이 매우 훌륭하다는 점이 부각되면서 시장의 반응도 매우 좋은 품종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북해도 기후에 걸맞고 맛도 좋은 품종의 볍씨가 보급되자 북해도의 많은 농부들-일본 출신, 한국 출신 따지지 않고-은 환호를 했다. 그들의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 북해도 각지의 농민단체들이 돈을 모아 우장춘 박사의 송덕비(頌德碑, 공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가 세워질 정도였다.
정부 역시 우장춘 박사의 공을 인정했다. ‘국립 육종 연구소’의 예산지원이 확장되었고, 우장춘 박사에게는 서훈(敍勳)과 포상(褒賞)이 진행되었다.
한발 더 나아가 정부는 우장춘 박사가 1935년 발표했던 ‘배춧속 식물에 관한 게놈분석’이라는 논문과 이번 업적을 통합해 노벨상을 획득할 수 있도록 움직였다.
“노벨상에 관련된 분야가 있던가?”
“생리의학상이 있잖아.”
정 수석차관은 대통령과 정부각료들, 그리고 정치인들에게 수상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 논문은 21세기에도 그 가치를 인정받은 논문입니다! 충분히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저는 이 논문이 노벨상을 받지 못했던 이유가 동양인이기 때문에! 그리고 식민지의 피지배민이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정 수석차관이 기획하고 추진한 ‘노벨상 추진 기획’이 언론에 알려지자마자 국민들은 열화와 같은 지지를 하기 시작했다.
결국, 1958년 노벨상 위원회는 ‘다윈의 진화론을 수정한 업적’을 기려 우장춘 박사에게 노벨 생리, 의학부문상을 수여했다.
노벨상 수상 소식이 전해지자 대한민국 전역은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물론 일본은 관련 기사를 내보내며 ‘일본에서 나고 자라, 학문을 배웠다.’라는 것을 엄청나게 강조했지만.
여담으로. 새로운 품종의 개발로 우장춘 박사의 이름이 높아지자, 야당은 우장춘 박사의 출신을 들먹이며 ‘친일파의 복권(復權)과 기용(起用)’을 주장했다.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킨 주범들 가운데 하나인 우범선은 우장춘 박사의 부친이었다! 이를 보더라도 얼마나 많은 인재들이 친일파, 또는 친일파의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묻혀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이들에게도 기회를 주는 것이 옳다!”
시간이 흐른 덕에 야당의 발언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도 늘었지만, 여당의 반응은 강경했다.
“경우가 다르다! 우장춘 박사는 식민지 세월 속에서도 자신이 조선임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조국이 다시 서자, 자신의 발로 찾아와 부친과 자신의 죄를 말하며 속죄의 길을 요청했다! 하지만 저 친일파들은 어떠했나! 조선인임에도 불구하고 앞서서 일본인 행세를 했고, 동포를 착취함에 거리낌이 없었다! 죄를 물었을 때는 핑계를 대기에만 바빴고 말이다! 야당은 아전인수(我田引水, 내 밭에 물 대기, 자기에게만 이롭게 이야기함.)를 그만하라! 정부는 친일파들에게 연좌제를 적용하지 않았다! 친일파의 자손들이 빛을 발하지 못함은 그들의 능력이 뛰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당 대표인 김원봉의 이름으로 발표된 이 성명은 라디오 방송은 물론이고 신문 제1면에 대서특필(大書特筆)되었다. 여론은 여당의 손을 들어주었고, 동시에 야당의 지지율은 급격히 하락했다.
결국, 야당은 자신들이 판 함정에 자신들이 빠진 격이 되었다.
또 다른 여담으로 ‘백설1호’의 종자는 북해도에서 일본 본토로 밀수되는 밀수품 가운데 가장 인기 높은 상품이 되었다.
일본 본토 농민들 사이에서 ‘이치고(1號)’나 ‘시로유키(白雪)’로 불리는 백설1호는 그 훌륭한 미질 덕에 일본의 부자들이 애호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밀수꾼들과 경찰, 해경, 해군들 사이에서는 끈질긴 추격전이 벌어지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 * *
식량 수급의 안정만큼이나 연료 수금의 안정을 위해 정 수석차관은 바쁘게 세계를 돌아다녔다.
덕분에 1950년대 중반부터 서방 정치권과 경제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떠돌았다.
‘서방권의 유전에는 3개의 깃발이 펄럭인다. 하나는 해당 국가의 국기, 다음은 성조기, 마지막 하나는 태극기.’
소련의 시베리아 유전으로부터 송유관이 한반도로 들어오고 있었지만, 정 수석차관은 원유의 공급선을 다양화했다.
우선 중동 지역에 고정적인 공급선을 만들었다.
사우디아라비아 국왕과 협의하여 ‘아람코(ARAMKOR.Co. ARab+AMerica+KORea)’가 세워졌다. 뒤이어 쿠르드 부족 연방 공화국에 ‘쿠람코(KURAMKOR)’가, 이란 지역에는 ‘페르시안 석유회사(Persian Oil.Co.)’가 세워졌다. 뒤이어 시리아 지역에도 합자회사가 만들어지면서 중동지역의 주요 산유국에 확고한 수입선을 만들어냈다.
이런 석유회사의 자본 비율을 보면 해당 국가 : 미국 : 한국의 비율이 51 : 29 : 20이었다.
“산유국이 지분의 51%를 가지고 가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자본과 시설 모두 우리 미국이 대는데 왜 한국에 20%의 지분을 줘야 하는 것인가?”
계약서를 본 미국의 정치인들이 항의를 하자 미국 정부의 대표가 차분하게 그 이유를 설명했다.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외하고 다른 국가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 다음의 산유량을 가진 쿠르드 연방과 시리아는 우리보다 한국이 더욱 친하다. 쉽게 말해서 그들은 우리 미국을 아직도 제국주의자로 보지만 한국은 형제의 국가로 여기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20%의 지분은 너무 많다. 한국은 단돈 1달러도 지불하지 않았다!”
“아니, 한국은 충분한 대가를 지불했다.”
“무슨 소리인가?”
“한국은 유전이 있는 곳의 정확한 위치를 제공했다. 평균 오차 100m의 매우 정확한 위치를 제공함으로 인해 우리는 막대한 금액과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응?”
한반도에 있는 슈퍼컴에 저장되어 있는 미군의 지리 정보 데이터베이스가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유전은 그 특성으로 인해 가장 마지막까지 폭격을 가하지 않던가 가장 먼저 폭격을 가해야 할 곳이었다.
20세기 후반부터 벌어진 전쟁의 특징인 ‘불필요한 희생을 만들지 않는 외과수술 같은 폭격’을 위해서 유전들의 좌표는 대단히 정확하게 기록이 되어있었다. 그 결과 유전을 찾을 때 평균 오차 100m의 범위를 기록한 것이었다.
21세기 기술이라면 10m까지 줄일 수 있었지만 이 시대의 기술로는 100m가 최선이었고,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혁신이었다.
이런 유전들의 좌표를 손에 쥔 한국 정부가 미국 정부를 상대로 딜(Deal)을 했고, 성공한 것이었다.
미국 정부에 있어서도 이번 투자는 나쁜 것이 아니었다. 합자 회사에 들어간 자금은 ‘미국 정부’의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합자 회사들에서 들어오는 이익배당금은 고스란히 미국 정부의 것이었다.
덕분에 미국 정부는 돈이 많이 들어가는 교육과 의료분야의 복지 정책에 들어갈 자금 운용에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이 배당금이 없었다면 미국 정부는 연방 준비 위원회를 통한 차입과 세금에만 의지하는 갑갑한 상황이 되었을 것이 확실했다.
‘자본주의의 상징’인 미국의 정부가 ‘국영 기업’의 단맛을 보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