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3화 1950년대 (3)
‘채리엇(Chariot, 전차)’이라는 이름이 붙은 스포츠카는 한국 내에서만 히트를 친 것이 아니었다. 매혹적인 몸매와 성능에 반한 주한미군들 상당수가 채리엇을 구입했고, 귀향한 군인들이 몰고 다니는 채리엇을 본 이들은 채리엇을 구하기 위해 움직였다.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채리엇은 ‘잇템(Ittem)’이 되어버렸다. 단정하기는 하지만 커다랗고 보수적인 느낌의 미국 차량들과 달리 작지만 섹시하게 빠진 차체, 거기에 만만치 않은 달리기 성능은 젊은이들이 열광을 하게 만들었다.
거기에 더해 상품상의 이점도 있었는데 트랜지스터 라디오의 최대 수출국답게 차량용라디오가 기본으로 탑재되어 있었고, 에어컨이 선택 옵션으로 되어 있었다.
선택 옵션으로 에어컨이 들어간 것은 채리엇만이 아니었다. 고유모델을 만들면서 자동차 회사들은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선택 옵션으로 차량용 에어컨을 리스트에 넣었다.
에어컨이 선택 옵션이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4계절이 뚜렷한 만큼 한반도의 여름은 ‘지랄맞게’ 더웠다.
여름에 사방이 철로 뒤덮인 차량 안에 앉아 있는 것은 고역 중의 고역이었다. 창문을 열기는 하지만, 달리지 않고 정지한 상태라면 꼼작 없이 찜통에 들어앉은 상황이었다. 돈 냄새를 맡은 몇몇 이들이 차에 달린 시거잭을 전원으로 사용하는 선풍기를 만들어 팔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
한반도에 살던 이들이 차량용 에어컨을 알게 된 것은 21세기 출신들 때문이었다.
고 제독을 비롯한 고급 장교들 가운데 자신만의 자가용을 구입한 이들은 시어즈 백화점의 통신 카탈로그를 이용해 차량용 에어컨을 구입, 단골 정비소에서 에어컨을 장착했다.
‘그 양반들은 에어컨이란 것을 차에 달고 다니더라!’
정비소를 통해서 소문은 확 번졌고, 경제적 능력이 있는 이들은 곧 차량용 에어컨을 구해 자신들의 자가용에 달기 시작했다.
시장의 흐름을 보던 자동차 회사들이 차량용 에어컨을 선택 사양에 넣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한발 빠른 이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미국의 에어컨 제작업체들과 기술제휴 계약을 맺고는 에어컨을 생산하기 시작한 이들이었다.
그들의 제품 리스트에는 곧 차량용 에어컨이 추가되었고, 영업사원들은 자동차 회사들을 상대로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에어컨 제작업체들을 설립한 이들이 처음부터 차량용 에어컨을 목표로 회사를 설립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목표로 삼았던 것은 가정용 에어컨이었다.
군인과 공무원용 관사들이 지어지고, 대상자들이 들어가 살기 시작하면서 특이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9전단과 광복군 출신들-벌레 일당을 비롯한 필코세이프티 출신들도 광복군 출신으로 뭉뚱그려 불려졌다-이 입주한 곳에 에어컨이라는 물건들이 대량으로 들어와 달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필요하다면 창문까지 뜯어고치면서 에어컨을 단다는 소문에 많은 이들이 에어컨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름이 되면서 에어컨이 뭐하는 물건인지 알게 된 이들은 에어컨을 찾기 시작했다.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있듯이, 에어컨을 찾는 수요가 생기자 에어컨을 수입하는 업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거 돈이 되겠다!”
돈 벌 거리가 생겼다는 것을 파악한 이들 가운데 자금력이 있는 이들은 아예 공장을 차릴 것을 결정했다. 그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업체가 금성과 새한이었다.
가정용 에어컨을 생산하기 위한 준비를 하던 금성과 새한은 차량용 에어컨이 잘 팔린다는 소리에 차량용 에어컨의 생산라인까지 만들고는 영업에 들어갔다.
“지금까지는 수입품이었기에 비쌌고, 구매자들이 한정되었습니다! 하지만 국내에서 대량생산을 하게 되었고, 가격을 크게 낮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귀사의 신형차량에 이것을 장착하게 된다면 판매량이 얼마나 증가할지 생각해 보십시오!”
영업사원들의 제안에 고민을 하던 자동차 회사들은 곧 제안을 받아들였다.
차량용 에어컨이 선택 옵션이 되자 구매자들 대부분이 부담을 감수하고 에어컨을 장착했다. 한반도의 여름이 어떠한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특이한 풍속도가 만들어졌는데, 한여름 밤의 더위를 피해 온 가족이 차에 들어가 에어컨을 쐬는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장시간 공회전은 차량에 좋지가 않습니다!”
자동차 회사들은 공개적으로 경고를 했지만 많은 이들이 그것을 무시했다. 설마 하는 방심과 더위 때문이었다.
결국, 적지 않은 차량들의 엔진이 고장이 나 버렸고, 최악의 경우 화재가 발생해 차량이 전소(全燒)되어버리는 일까지 발생해 기사가 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렇게 한차례 소동을 겪은 이들은 곧바로 행동에 들어갔는데 그것은 가정용 에어컨을 구입하는 것이었다.
금성과 새한 모두 ‘할부 제도’를 도입해 할부 판매에 열을 올렸고, 영수증철과 장부를 들고 가정집을 방문해 수금을 하는 이들이 주택단지를 돌아다니는 모습이 일상이 되었다.
* * *
1956년, 재선을 포함해 10년의 임기를 무사히 끝낸 김백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수많은 국민들의 박수를 받으며 김백이 물러나고 빈자리에는 김기식이 제3대 대통령으로 자리를 하게 되었다.
10년의 임기를 채우고 물러나는 김백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신생 대한민국의 초석(礎石)을 닦은 이.’라는 것이 지배적인 평가였다.
우파였음에도 불구하고 10년의 집권기간 내내 여당 내부의 좌파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외교적으로 주요 동맹국인 미국과도 원활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국가경제개발계획’을 순조롭게 진행했기에 국민들은 그를 칭송했다.
“… 모든 것이 다 나의 공이라고 하는데, 내가 한 일은 그저 사인만 한 것뿐이지. 아쉽지 않나? 원래라면 그 모든 칭송은 자네가 받아야 할 것 아닌가?”
임기 마지막 날 저녁, 청와대로 정 수석차관을 부른 김 대통령은 위와 같이 물었다. 김 대통령의 물음에 정 수석차관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오히려 이렇게 잘 드러나지 않는 편이 일하기 수월합니다.”
“서운하지 않겠나?”
“월급도 충분히 잘 받고 있고, 나름 미국에서 투자했던 것도 잘 굴러가고 있습니다. 서운한 것 없습니다.”
그 말에 조용히 정 수석차관을 바라보던 김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자네, 대통령 할 생각 없나?”
“저요. 무병장수하고 싶습니다. 지금도 스트레스로 죽겠는데 강도를 높일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단호한 대답에 김 대통령은 미소를 지으며 정 수석차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동안 고마웠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두 사람은 악수를 교환했다.
* * *
제3대 대통령 취임식이 끝나자마자 김기식 신임대통령은 정 수석차관을 따로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내가 불렀소. 그동안 잊고 있었던 것이 있어서 말이지.”
“말씀하십시오.”
메모지를 꺼내드는 정 수석차관의 모습을 보면서 김기식 대통령은 입을 열었다.
“수석차관. 지금 자네 직위가 어떻게 되지?”
“수석차관입니다만?”
“정확히 말하자면 ‘전시 정부 통합 정무 수석 차관’일세. 전쟁이 끝나고 독립이 되면서 ‘전시(戰時)’라는 이름이 떨어져 나갔지만, 소속이 애매해. 야당이 슬금슬금 꼬투리를 잡으려 들고 있네.”
“파악하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상신을 할까 했습니다. 그럼 어느 부서 소속으로 옮기는 것이 제일 좋겠습니까?”
정 수석차관의 담백한 대답에 김기식 대통령은 자신의 생각을 대답했다.
“국무총리 산하 국무통합조정실을 신설할 생각일세. 생각 같아서는 대통령 직속으로 놓고 싶지만, 임정의 동지들이 언제까지 정권을 잡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황 아닌가? 당장 다음 4대 대통령이 야당에서 나오면 자네부터 목이 달아날 것이고, 그러면 대계(大計)가 위험해지네. 해서 국무총리 밑으로 놓겠네. 국무총리 밑에 행정직 공무원으로 만들어버리면 마음대로 자르지 못하게 되니까. 어떻게 생각하나?”
“대통령님의 제안이 제일 적합할 듯합니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후우~.”
큰 고비를 넘겼다는 듯 길게 한숨을 내쉰 김기식 대통령은 정 수석차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보게. 정 수석차관.”
“예, 대통령님.”
“나라는 인간은 그리 담이 크지가 못해. 생각 같아서는 예전에 만든 장학재단에 들어앉아 동지들한테서 수금이나 하면서 음풍농월(吟風弄月)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큰 자리에 앉고 말았네. 달리 말하자면 인덕(人德)도 없고 소극적이고 쩨쩨한 내가 이 자리에 앉은 것은 이 나라가 계속해서 성장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세. 좌익계 동지들은 좀 더 분배에 신경을 써야 한다고 그러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라(時機尙早)라 생각했기에 그들에게 이 자리를 넘기지 않은 걸세. 그런 생각을 했기에 소극적이고 소심한 나도 노력을 할 걸세. 적어도 ‘치세(治世)의 능신(能臣)’이 될 자신은 있으니까. 그러하니 자네에게 거는 기대가 크네. 부디 치세가 이어지도록 해주게.”
김기식 대통령의 부탁에 정 수석차관은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 *
다음 날, 김기식 대통령은 전격적으로 행정 구조를 개편했다. 홀로 떨어진 섬 마냥 따로 있던 ‘국무통합조정실’을 국무총리 밑으로 집어넣은 것이었다.
그동안 ‘정부 안의 정부’, ‘대통령의 그림자 정부’라 불리며 야당의 성토대상이었던지라 야당 정치인들은 김기식 대통령의 직할이 아닌 국무총리 밑으로 들어간 이번 조치는 국무통합조정실의 권한을 줄이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업무 영역이 밝혀졌을 때, 야당 의원들은 기함을 했다.
“감찰권까지 가지고 있다니 이것은 초법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 아닌가!”
“국무에는 감사도 포함되어 있다.”
야당이 들고 일어났지만 김기식 대통령은 그들의 반발을 무시하고 그대로 추진을 했다.
국회는 여전히 여당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덕에 야당의 반발은 그대로 찻잔 속의 태풍이 되어버렸다.
결국, 야당은 절치부심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총선을 목표로 모든 역량을 모읍시다!”
“드디어 4번째 총선입니다! 물갈이의 때가 온 거예요!”
야당의원들은 다짐을 굳혔지만 표정은 그다지 자신감이 없어 보였다. 여당을 향한 국민의 지지가 워낙에 굳건했기 때문이었다.
* * *
여당과 정부에 대한 국민의 지지가 굳건했던 것에는 정 수석차관의 지대한 노력이 숨어 있었다.
독립 이후 10년이 넘어가는 시간 동안 정 수석차관은 물가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를 위해 가장 많이 신경을 쓴 것은 식량과 연료였다.
식량 사정을 보자면 1956년경의 한반도의 식내 사정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지금까지 이렇게 고기가 흔했던 적이 없었다.’
정 수석차관은 농업과 어업은 물론이고 축산업에도 많은 자금을 지원했고, 그 결과가 위와 같은 것이었다.
이런 결과가 나오기까지 일등 공신은 북해도였다. 일본에게 온갖 강짜를 부려가며 북해도를 손에 넣은 다음 정부는 북해도에 엄청난 규모의 축산단지를 건설했다.
북해도 전역에 5개의 대형 목축단지를 만들어 육우는 물론이고, 젖소와 돼지, 가금류(家禽類)들을 키움과 동시에 미국에서 퇴역하는 리버티쉽들을 구매해 냉동수송선으로 개장을 한 다음 북해도와 한반도 사이에 정기 운송편을 만들었다.
정 수석차관의 이런 노력은 1948년부터 서서히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엄청난 양의 육류는 물론이고 버터와 치즈, 햄과 소시지 같은 가공식품들이 수송선을 타고 한반도로 들어와 싼값으로 시장에 풀리기 시작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급식 시간에는 우유와 치즈가 공짜로 학생들에게 나눠졌고, 21세기와 비교해도 엄청나게 싼 가격에 버터와 치즈 같은 상품들이 시장에 뿌려졌다.
“내가 가장 열 받았던 것이 비쌀 이유가 없던 것들이 비싸게 팔리는 거였어!”
정 수석차관의 말에 벌레 일당은 고개를 끄덕였다. 21세기 당시에도 육류와 육가공품들은 필요 이상으로 비싼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장에 대량의 육류와 육가공품들이 풀리면서 국민들의 식생활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고기값이 싸지면서 고기를 주재료로 파는 식당들이 우후죽순 생기기 시작했다. 하루 일과를 끝낸 노동자들이나 회사원들이 퇴근길에 술집에 들러 고기를 구워 먹으며 술잔을 나누거나 주말마다 가족들이 모여 고기 요리를 해 먹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런 가운데 몇몇 유서 깊은 양반 가문의 며느리들이 가문의 비법 레시피를 가지고 식당을 열어 번성하는 일도 왕왕 벌어지기 시작했다.
도시화와 더불어 자가용이 대량으로 공급되면서 신문들은 전국 각지의 명승지나 맛있는 식당들을 소개하는 기사들을 주말판으로 내기 시작했고, 휴일이나 휴가를 이용해 그런 식당을 방문하는 것도 유행이 되기 시작했다.
그런 영향들이 서로 상호작용을 벌이면서 한국인들의 곡물 소비량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식량부족사태가 조금씩 줄어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 주는 곳이 북해도였다. 북해도에서 거주하는 일본 출신 한국인이건 한반도에서 건너간 한국인이건 농업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쌀이 없어서 굶어 죽는 일은 남의 나라 일이었다.
‘쌀이 없어? 그럼 고기를 먹어!’라는 말이 우스개가 아닌 곳이 북해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