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5화 중국 (6)
모택동의 정책이 만들어 낸 악영향은 겨울 동안 많은 아사자를 만들어 냈다. 성과에 목을 맨 공산당 간부들이 수확한 콩을 초반에 너무나 많이 소모했던 탓에 겨울을 지내면서 먹을 식량이 턱도 없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관련 보고서가 올라가자, 모택동은 비난부터 시작했다.
“이는 인민들에게 혁명 정신이 제대로 주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의 혁명 정신이 제대로 주입되었다면 이런 일이 발생할 수는 없어!”
인민들에 대한 비난을 한 모택동은 특유의 문장력을 발휘해 성명문을 작성해 발표했다.
‘공산주의 혁명의 완성을 위한 인민들의 정신 혁명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성명문에 따르면 이번 일은 아직도 자본주의적 구태(舊態)를 버리지 못한 반동으로 발생한 일이었다.
‘공동생산, 공동소비의 범위는 단지 개개의 촌락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는 성을 넘어 전국으로 확대되어야만 한다.’
성명문의 핵심은 바로 저것이었다. 간단히 말해, 한쪽에서 굶고 있는데 다른 한쪽은 굶지 않는 상황이 발생한다는 것은 사유재산만을 중시하는 반동적인 행태라는 것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인민공사’라는 집단 농장이 모택동의 명령으로 전국의 모든 농촌에 만들어졌다. 그리고 농가의 헛간들이 모조리 털려 인민공사의 창고로 옮겨졌다. 그리고 아사자들이 발생한 지역에 곡물들이 수송되기 시작했다.
“이 정도의 물량으로는 답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추가로 공출을 하기에는 충분한 여유를 가진 지역이 얼마 없습니다.”
“차라리 미국에 식량 원조를….”
“이 반동을 끌어내라!”
‘식량 원조’를 언급한 공산당 간부를 축출한 모택동은 공산당 간부들을 노려봤다.
“위대한 공산주의 혁명의 완성이 코앞이다! 조금만 더 참으면 우리는 혁명을 완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역사적인 순간에, 조금의 어려움을 참지 못해 자본주의에 굴복하는 우(愚)를 범해서는 안 될 일이다! 만일 이런 발언을 하는 자가 나온다면 그는 반당분자이자 반혁명분자로 극형에 처할 것이다!”
모택동의 서슬에 눌려 공산당 간부들은 모택동의 명령을 그대로 이행했다.
그 결과는 더욱 안 좋은 것이었다. 처음부터 계획과 달리 한참이나 모자란 양이었다. 이를 나누어 먹어 봤자 100명이 굶을 것을 1000명이 굶는 상황이 되어 버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결국 사람들은 강으로 산으로 먹을 것을 찾아 움직였다. 강과 개천의 얼음을 깨고 물고기들을 잡고, 산에 올라 먹을 수 있는 뿌리들을 캐서 생존을 이어 가야 했다.
우스운 것은 이런 배고픔의 시간이 이어지면서 쥐들의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는 것이었다. 먹을 것이 궁한 사람들이 쥐까지 잡아먹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쥐의 그 가공할 번식력은 바닥까지 떨어졌던 개체수를 순식간에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았다.
1951년 봄과 여름이 지나면서 사태는 최악으로 변해갔다. 춘궁기(春窮期, 보릿고개)를 넘기지 못하고 많은 이들-비공식 집계에 의하면 백만 단위는 가볍게 돌파했고, 천만에 육박하는 상황이었다.-이 죽어 나갔다. 더불어 식량 채취를 위해, 난방을 위한 연료의 목적으로, 토법고로에 들어갈 연료로 사용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산들이 민둥산으로 변했고, 귀중한 표토가 마구잡이로 파내졌다.
그 결과 우기가 찾아오면서 내리는 비들은 수목과 지표에 저장되지 못하고 바로 하천으로 흘러들어갔고, 사방에서 홍수가 나기 시작했다.
자연 파괴로 인해 발생한 재해는 홍수가 다는 아니었다. 나무들과 표토를 상실한 상태에서 내리는 비를 견디지 못하고 산사태를 일으키는 민둥산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그런 산사태에 휩쓸려 피해를 입은 마을들은 부지기수로 튀어나왔고, 아예 마을 전체의 주민들과 가옥 모두가 매몰되면서 하나의 거대한 공동묘지로 변해 버린 마을들도 튀어나왔다.
결국, ‘레닌, 스탈린주의에 입각한 공산주의 혁명의 완성’이라는 목표를 향해 시행한 모든 정책들이 거대한 상승 작용을 일으키면서 양자강 북부를 혼란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사태는 위급하오. 지금 당장 시행하던 모든 정책을 폐기하고, 인민들을 살릴 방도를 찾아야 하오.”
등소평의 말에 주은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감이오. 안 그래도 지금 인민들의 분위기가 매우 나쁘오. 최악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상황이오.”
“주 동지가 그렇다면 사실이겠지.”
주은래의 말에 등소평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도 심한 말은 하지 않는 주은래였다. ‘나쁘다’라는 말도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다.’라는 말로 돌려 쓸 정도인 사람이었다, 그런 이가 ‘나쁘다.’, ‘최악이다.’라는 말을 직설적으로 쓸 정도면 상황은 진짜 안 좋다는 소리였다.
“잘못하면 남쪽의 장개석이 헛된 꿈을 꿀 수도 있는 상황이오.”
“그 작자도 지금 자기 앞가림도 하기 힘든 상황인데도 그렇다는 것이오?”
등소평의 물음에 주은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석을 설득해야겠소.”
* * *
“쓸 데 없는 소리!”
주은래의 말을 듣자마자 모택동은 그의 의견을 일축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주은래도 물러서지 않았다.
“주석 동지! 지금 인민들이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아직 혁명은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잘못하면 혁명은 실패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주은래의 강경한 발언에 모택동이 움찔했다.
“그 정도인가?”
“심각한 상황입니다!”
주은래의 짧고 강렬한 대답에 모택동의 얼굴도 심각해졌다.
굶주림 문제는 아직도 해결을 보지 못한 상태였다. 거기에 홍수와 산사태 등의 재난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다. 인재(人災)와 천재(天災)가 중첩되면서 일반인들의 불만이 점점 고조되어 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모살인민(毛殺人民, 모택동이 인민을 죽이고 있다.)’, ‘공사주의(共死主義)’ 등과 같은 반정부 구호들도 심심치 않게 발견되는 상황이었다.
여기저기서 발견된 위험 신호를 언급하며 위기임을 역설한 주은래는 해법을 내놓았다.
“임시방편이지만 가을 추수기가 올 때까지 대두유(大豆油)의 생산은 최소로 하고 나머지는 식량으로 돌려야 합니다! 탈지대두를 가루로 만드는 시설도 제대로 만들어 배치를 해서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전염병도 막아야 합니다. 지금은 민심의 이반을 최대한 막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식량을 대량 공급해야 하고 인민공사를 해체해야 합니다!”
“인민공사의 해체는 안 돼! 인민공사를 해체하는 순간, 반혁명적 행태가 다시 부활할 것이다!”
“주석!”
“주 동지의 의견에 따라 콩을 보급하겠소. 하나 그 모든 것은 인민공사가 집행을 할 것이오!”
모택동의 단호한 태도를 본 주은래는 한발 물러섰다.
“주석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그로써는 가장 중요한 목적인 ‘식량을 공급한다.’라는 목표를 달성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홍수와 산사태와 같은 자연재해의 기록이 담긴 보고서를 받아든 모택동은 공산당 간부들이 모인 자리에서 새로운 정책을 발표했다.
“댐과 저수지를 만든다! 댐과 저수지를 만들어 가뭄과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로부터 인민들을 해방시킨다!”
모택동의 명령에 따라 많은 전문가들이 댐과 저수지를 건설하기 좋은 지점을 찾아 양자강 이북 지역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상황을 보고받은 등소평은 주은래를 보고 입을 열었다.
“댐과 저수지라… 그나마 남쪽으로 진군한다는 말이 안 나온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오?”
“그나마 다행인 일입니다. 군대도 전염병에서 안전한 상황이 아니었으니 말입니다. 남과 북 모두 군사적인 모험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상황이 서글프지만 말입니다.”
* * *
양자강 북쪽의 중국 공산당이 저런 난리를 겪는 것을 보며 장개석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지금이 기회다!”
장개석은 당장이라도 양자강을 넘어가고 싶었지만, 상황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첫 번째 사건은 군대의 ‘유류부정사건(油類不正事件)’이었다. 국민당군 장교들과 부사관들이 부대에 저장된 각종 기름들을 몰래 팔아먹고 물로 채운 것이 적발된 사건이었다. 한두 명의 소수가 벌인 사건이 아니었고, 적어도 12개 사단 이상의 군 장교들과 부사관들이 조직적으로 움직인 사건-유조차 단위로 움직인 것까지 적발되었다.-이었기에 장개석은 군을 움직일 수 없었다. 사건이 벌어진 부대들 가운데에는 양자강에서 공산당과 마주한 부대들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장교들과 부사관들이 처형대에 오르거나 수감되면서 사건을 정리한 장개석은 다시 북벌(北伐)을 시도하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자연에 의해 발이 묶여 버렸다.
전염병의 발호였다.
장개석이 점령한 남중국 지역은 아열대에 속하면서 전염병의 출현이 잦은 지역 가운데 하나였다.
1950년 여름, 운남성에서 대규모의 콜레라 환자가 발생했다. 이의 치료를 위해 의료진이 급파되었고, 대량의 치료약과 예방 백신이 필요해졌다. 하지만, 온갖 부정부패가 뚫어놓은 구멍으로 예산이 줄줄 새던 장개석 정부의 상황으로는 초기에 발견된 환자들을 치료할 의료진들을 운영하고 초기분의 치료약을 구한 것이 최선이었다.
결국 운남성에서 시작해 점점 번지는 콜레라의 전염을 막을 약품을 구하기 위해 국민당 정부는 미국과 접촉을 했다. 백신 구매 비용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 도중에 국민당 정부의 관료 하나가 장개석에게 아이디어를 제출했다.
“상인들에게 판매 권한을 파는 겁니다! 일정 단위로 지역을 나누고 그 지역에서는 그 상인들이 우리 대신 백신과 치료약을 구해다가 판매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예산을 줄일 수 있고, 추가의 자금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확보한 추가자금으로 전비(戰費)를 충당하면 됩니다!”
이야기를 들은 장개석은 혹하는 표정을 지었다. 한편, 미국 정부가 파견한 경제 고문들은 이야기를 듣고는 펄쩍 뛰었다.
“그 제안을 한 관료를 당장 죽여버리십시오! 득보다 실이 많은 계획입니다!”
“독점적인 권한을 얻은 상인들은 폭리를 취할 것입니다. 결국 백신과 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게 될 것입니다!”
“그런가?”
경제고문들의 격렬한 반대에 장개석은 원래의 방법을 채택하려 할 때, 다른 관료 하나가 보완책을 내놓았다.
“상인들에게 일정 수준 이상의 이윤을 취하지 못하도록 계약서에 명시를 하면 됩니다! 그러면 외채(外債)를 빌리지 않아도 됩니다! 총통 각하! 이는 우리 중국의 내정(內政)입니다. 외국인들이 함부로 왈가왈부할 일이 아닙니다! 외채와 외세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결국, ‘독자적인 국정’이라는 말과 뒤에서 전해진 정치자금에 장개석은 국민당 관료의 손을 들어주었다.
장개석의 뜻이 전해지자 많은 상인들이 입찰에 뛰어들었다. 폭력이 동원된 정보전과 대량의 뒷돈이 움직이면서 상인들이 정해졌고, 곧 상인들은 운남성을 비롯해 국민당이 장악한 지역 전역-옌시산이 장악한 지역은 제외. 옌시산은 병이 돈다는 소문이 돌자마자 바로 백신과 치료약을 구입, 자신이 직접 팔아먹었다-에서 백신과 치료약을 팔기 시작했다.
상인들이 권한을 대행하면서 곧 경제고문들이 우려한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정부와 작성한 계약서에는 최대 수입비용의 5할을 넘지 못하도록 명시(明示)되어 있었지만, 상인들은 다음과 같은 핑계를 대며 가격을 올렸다.
“수송 도중에 파손된 물량이 많다!”
국민당에서 파견한 관리들 가운데 청렴한 이들에게는 위와 같은 핑계를 대며 눈을 속였고, 부패한 이들에게는 뒷돈을 먹여 상황을 정리했다.
그렇게 벌어진 일의 모든 피해는 고스란히 일반 중국인들에게 넘어갔다. 가족들이 맞을 백신들을 구입하기 위해 두 달 치 급료를 통째로 지불하는 정도는 가벼운 축에 속할 정도였다.
구매, 보관, 수송 등에 소모된 비용 외에 단 1푼의 이익만을 얹어 판매를 한 홍콩의 상인 같은 경우에는 ‘성자(聖者)’라 불리며 칭송을 받을 정도였다.
결국, 상황을 보고받은 장개석은 강제적으로 모든 백신과 치료약의 가격을 성자라 불린 상인이 판매하는 가격과 동일하게 하나로 통일했다.
그러자 상인들은 다른 수를 쓰기 시작했다.
약에 물을 타거나 가짜 약을 만들어 판매를 시작한 것이었다.
제대로 증류한 증류수를 섞어 1명분을 4명분으로 만드는 것은 오히려 양심적인 축에 속할 정도였다. 우물물이나 개울물을 퍼다가 백신에 섞어 1인분으로 20인분의 백신을 만드는 것이 보통이었다.
결국, 백신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가자 약은 백신만이 아니었다. 가장 흔한 전염병 가운데 하나인 말라리아의 경우 치료약인 키니네(퀴닌, quinine)를 가루로 만든 다음 밀가루나 석회가루를 섞어 만든 알약을 조잡하게 인쇄된 포장지로 재포장해 판매하는 경우도 흔한 일이었다.
이런 불량 약품으로 인해 국민당 정권은 중국인들의 큰 비난을 받게 되었다. 거기에 더해 베트남으로부터도 심각한 항의를 받는 일까지 벌어졌다. 베트남의 화교 상인들이 이 위조약품을 밀수해 베트남에 판매를 하면서 희생자들이 속출했기 때문이었다.
국민들의 피해가 속출하자 베트남 정부는 밀수조직을 끈질기게 추적해서 처형대에 세웠다. 이 일로 인해 베트남 내의 화상(華商)세력이 크게 줄어들었고, 베트남 국민들 사이에 반중감정이 솟구쳤다.
국민당이 장악한 남중국에서는 상황이 점점 심각해져 갔는데 대규모 ‘반장운동(反蔣運動)’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북민아사(北民餓死)남민병사(南民病死)’
‘동아병부(東亞病夫)동아치부(東亞恥部)’
‘장정권축출(蔣政權逐出)’
온갖 반정부 구호들이 도시와 촌락의 담벼락을 물들였고, 시위가 일어나면서 위기를 감지한 장개석은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사건에 관련된 모든 이들을 체포했고, 그 가운데 주범격인 상인들과 관료들을 모조리 공개처형에 처해 버렸다. 그렇게 처형된 이들 가운데에는 장개석의 친족도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대규모로 군과 경찰을 동원 시위를 무력진압하고 공포 정치를 이어갔다.
결국, 남과 북 모두 상대방이 혼란에 빠지면서 기회를 잡았지만 그 혼란으로 인해 자신도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