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화 중국 (2)
전쟁이 끝나고 복구와 개발의 바람이 불고 있을 때, 가장 큰 이득을 취하고 있는 이는 누가 뭐래도 미국이었다. 무너진 산업 시설과 사회 시설을 복구하는 서유럽과 동유럽의 국가들은 자본이 필요했다.
물론 이런 자본을 대 줄 수 있는 곳은 미국이 유일했다. 그리고 미국은 쾌히 이런 국가들에게 자금을 지원했다.
‘마셜 플랜(Marshall Plan)’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기존의 마셜 플랜과는 많은 점이 달랐는데, 자금 집행을 감독하는 미국의 권한이 더욱 강해졌다.
만약 자국의 전쟁 복구 및 산업 개발 이외의 부분-인도네시아의 독립 세력을 진압하기 위한 네덜란드의 군사적 행동과 같은-에 자금이 흘러 들어가는 것이 발견되면 그 즉시 자금 집행이 중지되었다.
“전쟁 피해를 복구해 인간적인 삶을 다시 누리자는 목적의 자금이다. 그 이외의 부분에는 단 1센트도 들어가는 것을 용납 못한다!”
“내정 간섭이다!”
“그럼 빌리지 마!”
결국, 을(乙)인 쪽에서는 억울해도 어쩔 수 없이 군사적인 부분에 ‘공식적으로’ 자금을 투자할 수 없었다. 이 조치에서 예외인 곳은 단 세 나라뿐이었다. 영국, 폴란드 그리고 한국이었다.
미국의 목적은 독일과 소련의 세력 강화를 막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서유럽 국가들의 피해 복구만이 아니라 동유럽의 피해 복구 및 산업 개발에도 많은 자금이 들어갔다. 그렇게 자금을 집행하면서 미국은 해당 국가들과 자유무역주의에 기반한 협정을 맺었다.
자금 지원과 무역 협정을 통해 미국은 소련과 독일의 세력 팽창을 저지함과 도시의 막대한 시장을 손에 넣었다. 지난 역사에서도 세력권에 넣지 못한 막대한 지역이 세력권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이렇게 들어온 세력권들 가운데 예상하지 못했던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있었는데 그것은 만주 지역이었다.
일본이 중화학공업지대로 키웠을 정도로 각종 지하자원이 상당량 매장되어 있었고, 이 자원들은 시장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지던 미국과 막 경제 개발을 시작하던 한국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채굴한 원석 자체의 광물과 1차 가공된 많은 자원들이 열차를 통해 한국으로 내려가 한국 시장에 풀리거나 부산에서 배에 실려 미국으로 실려 갔다.
거기에 더해 장개석도 모택동도 신경을 쓰지 않고 있던 내몽골 지역도 미국의 제어권에 들어서면서 중국 공산당과 소련의 연결로 상당수를 차단시키고, 산서성의 옌시산을 이용해 장개석을 견제함과 동시에 중앙아시아 지역에 미국의 영향력을 전파시키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이렇게 변한 상황은 미국의 경제 자체를 다시금 급성장시켰다. 전쟁 기간 동안 진행된 배급 경제를 통해 움츠러들었던 미국인들의 소비력이 다시 살아나면서 미국 자체 시장이 급성장을 하기 시작했다.
이런 호경기에 힘입어 많은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얻었고, 취업을 한 이들이 열심히 소비를 하면서 시장은 다시 확대되는 선순환이 이어졌다.
이런 시장의 확대 속에 전통적인 토착 백인 자본가들도 이득을 봤지만, 새롭게 자본 시장에 진입한 흑인 자본 세력과 한국계 자본 세력 역시 세를 키워 가기 시작했다. 가장 규모가 작았던 인디언 자본마저도 인디언 보호구역이 속한 주들에서는 지배자본이 될 정도였다.
‘유색자본(有色資本, Colored Capital)’이라 불리는 이런 자본가들의 부상은 미국의 사회와 문화 등 다방면에 영향을 끼쳤는데, 뿌리 깊었던 백인우월주의가 예상보다 빠르게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물론, 피부색을 막론하고 하나로 뒤섞여 싸워야 했던 전쟁을 통해 젊은 세대들의 인종적 편견이 많이 사라진 것도 한몫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말로만 그런 것이 아닌가?”
보고를 받은 김 대통령의 물음에 정 수석차관은 보고서를 넘겼다.
“코람 캐피탈에서 보낸 미국 사회동향에 관한 보고서를 보시면 ‘캐딜락이 유색인종에게 차량 판매를 시작했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캐딜락이 유색인종에게 차량을 판매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유색인종의 파워가 무시 못 할 정도로 커졌다는 반증입니다.”
“그런가?”
“그렇습니다.”
정 수석차관이 자신하는 것에는 근거가 있었다.
흑인 자본가들의 대규모 출현은 2차 대전이 최초가 아니었다. 최초의 출현이라고 볼 수 있던 시기는 대공황이었다.
수많은 백인 자본가들이 무너져 내리고 있을 때, 역으로 기회를 잡아 부유층으로 진입하는 흑인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 흑인 부유층들은 캐딜락을 선호했다. 하지만 당시 캐딜락의 운영진들은 그런 흑인들에게 차를 팔지 않겠다고 공식적으로 선언을 했고, 그 덕에 백인 자본가들에게 폭발적인 매상을 올리게 되었다.
철저하게 ‘백인의, 백인만을 위한’ 브랜드였던 캐딜락이 유색인종에게 자사의 차량을 판다는 것은 그로 인해 떨어져 나갈 백인 수요층을 충분히 대신할 수 있는 시장이라는 뜻임과 동시에 유색인들에 대한 백인들의 시각도 변했다는 뜻이었다.
정 수석차관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지금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계속해서 영향력을 키워가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미국 주류 사회 계층에 친한파 집단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아니, 친한파 집단을 만들어 내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계 정치인들을 주류로 편입시켜야 합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말입니다. 우선은 LA 시의회에, 그 다음은 캘리포니아 주 의회에, 마지막으로는 연방 상원에 적어도 두 명 정도는 한국계 의원이 자리를 잡게 만들어야 합니다.”
“허허허. 연방 상원이라… 아예 미국 대통령도 나오게 만들지 그러나?”
‘연방 상원’이라는 말에 김 대통령은 헛웃음을 지으며 정 수석차관에게 농담을 했다. 거의 세습에 가까울 정도로 진입이 힘든 곳이 미국의 연방 상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대통령의 농담을 정 수석차관은 진담으로 받아넘겼다.
“한국계 미국인의 수가 너무 적고, 자본력이 딸려서 그건 좀 힘듭니다. 시간과 예산만 충분하다면 노려볼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장기 계획을 세워볼까요?”
“미안하네. 다시는 농담 안 하지.”
바로 고개를 숙여 사과를 한 김 대통령은 화제를 돌렸다.
“LA와 캘리포니아만으로 한정 지었을 때, 가능성은 얼마나 되나?”
“의외로 높습니다. 코람 캐피탈과 박인수 씨의 회사가 LA 지역의 경제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코람 캐피탈이 좀 더 성장하고, 장학 재단의 혜택을 받은 이들이 사회 일선에 나서면 그 영향력은 더욱 크고 확실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이야기로구먼.”
대통령의 말에 정 수석차관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반드시 상상을 현실로 만들 것입니다.”
“노력하세나.”
굳게 다짐을 하는 대통령과 각료들이었다.
“경주 신드롬?”
코람 캐피탈에서 보낸 보고서의 다음 챕터에 적힌 제목을 본 김 대통령은 정 수석차관을 바라봤다.
무언의 질문을 받은 정 수석차관은 바로 설명을 시작했다.
“한반도를 수복하자마자 몰려왔던 학자들 기억하십니까?”
“기억하지. 아직도 경주에 머물고 있고. 교육부 장관과 문화부 장관들은 치를 떨고 있지만 말일세.”
대통령의 말에 문화부 장관과 교육부 장관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문화재 반출만 시도하지 않으면 좋은 사람들이지요.”
“지금 막 인쇄가 끝난 조선왕조실록 국역본을 다 달라고 합니다! 전부요! 훈민정음 해례본은 또 어떻고!”
문화부 장관과 교육부 장관은 이를 박박 갈아 댔다. 그런 모습을 보며 정 수석차관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아~. 직지심체요결 이야기를 했다가는 공개 처형을 당할 분위기로구먼….”
“응? 자네 할 말 있나?”
대통령의 물음에 정신을 차린 정 수석차관은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경주 신드롬’에 대해 보고드리겠습니다!”
경주에서 직접 유물 발굴 작업을 하고, 일본이 노략질해 간 것을 환수한 고문화재들을 연구한 미국의 역사학자들이 완전히 한국에 중독이 되어 버린 것이 일의 시초였다.
20세기 후반과 21세기의 핵물리학자들이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가했던 학자들이 발표한 논문들 가운데 하나를 가지고 일생의 과업을 삼듯이, 이런 유물과 고문화재를 보며 일생의 과업으로 삼아 버린 고고학자들이 속출했다.
그런 고고학자들은 관련된 논문을 작성해 바로바로 학회지에 실었고, 이는 미국 역사학계를 시작으로 서양의 역사학계에 돌풍을 일으키게 된 것이었다.
19세기에 ‘페리 제독의 개항’을 통해 불기 시작한 일본풍이 어느새 저 멀리 사라지고 그 자리를 ‘경주’와 ‘한국’이 차지하게 된 것이었다.
학계에서 불기 시작한 ‘경주 신드롬’은 곧 일반인들에게까지 번져 나갔다.
전쟁이 끝나 마음의 여유를 가진 일반인들은 ‘한국’에 관해 강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다수의 ‘의회명예훈장’ 서훈자들을 배출하고, 조금은 낯설었지만 감정을 자극하면서 어느새 중독이 되게 만들어 버린 음악을 하는, 21세기 미래에서 온 이들의 고향이라는 한국에 관한 기사는 일반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거기에 불을 당긴 것은 사진을 중심으로 기사가 나가는 주간 잡지들이었다.
‘아시아의 로마.’, ‘1000년의 왕도(王都)’, ‘조선왕조실록, 500년이 넘게 기록된 아시아 역사의 자료창고’라는 제목을 달린 기사들을 보며 일반인들은 경주와 한국에 중독이 되어 버렸다.
‘신드롬’은 곧 지갑을 열게 만들었다. 18세기에는 ‘중국풍’, 19세기 말, 20세기 초 ‘일본풍’ 문물들이 유행을 한 것처럼 ‘경주풍’, ‘한국풍’ 문물들이 날개 돋친 듯이 팔려 나갔다.
덕분에 자개장이나 도자기 장인, 활을 만드는 장인 등과 같은 전통 문물을 만들던 장인들이 돈을 벌기 시작했다. 그리고 돈 냄새를 맡은 사업가들이 이런 물품들을 수출하는 무역업체들을 만들어 수출을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수입만 잔뜩이던 상황에서 수출의 물꼬를 튼 것이 이런 ‘전통 문물’들이었다.
미국인들의 욕구는 이런 물품들을 구입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았다. 사진을 통해 본 석굴암이나, 불국사의 복구 현장을 직접 보기 위해 배를 타고 한국을 찾아오는 미국 관광객들의 수가 하나둘 늘기 시작했다.
이 수요를 파악한 정 수석차관은 재빨리 경주를 관광 도시로 육성하기 시작했다.
이런 고고학 광풍과 관광 열기에 죽어 나가는 것은 경찰과 군인들이었다.
주요 유물 발굴 단지에는 도굴과 절도를 막기 위해 대규모의 경찰과 군인들이 배치되었다. 특히나, 백제 관련 유물이 대량으로 출토되었던 무령왕릉의 경우 아예 1개 사단이 전담으로 배치될 정도였다.
유서 깊은 사찰의 경우 절도를 막기 위해 아예 자체적으로 자경단이 운영되는 상황까지 벌어지면서, 정부는 도굴 및 유물 밀거래에 관해서는 국가반역죄 수준의 처벌을 하는 법을 만들 정도가 되어 버렸다.
경주와 여러 지역에서 발굴되는 유물들에 고고학자들이 광분했다면 조선왕조실록은 중국을 위시로 한 아시아의 역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을 매료시켰다.
‘언제 어디서 번개가 쳐서 그 마을 강아지가 벼락에 맞아 죽었다.’라는 사소하다고 볼 수 있는 사실까지 기술된 실록에는 중국과 일본, 멀리는 월남이나 타이와 관련된 사안까지도 기록이 된 터라 아시아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는 ‘보고(寶庫)’, 그 자체였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며 환호를 하던 역사학자들은 곧 또 다른 문제에 봉착했다.
“조선왕조실록 그 자체로도 매우 중요한 역사적 유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교차 사료가 너무 부족해요. 중국이나 일본의 관련 자료들은 양과 질 모두 부족한 상황입니다.”
푸른 눈의 역사학자들의 하소연을 들은 문화부 장관이 입을 열었다.
“교차 사료의 문제는 우리도 불가항력입니다. 하지만 1차 사료의 문제라면 답이 있기는 있습니다만….”
“그게 무엇입니까?”
문화부장관은 장서각으로 학자들을 이끌었다.
“승정원일기라고… 미국으로 치면 대통령비서실의 속기록이 있습니다. 이 승정원일기가 조선왕조실록을 만들기 위한 1차 사료 정도가 될 겁니다.”
“그렇습니까!”
문화부장관의 말에 역사학자들은 반색을 했다.
“이곳입니다.”
“이곳?”
문화부장관은 손을 들어 장서각의 내부를 가리켰다.
“수량으로는 3000권이 좀 넘습니다. 전란과 반란을 통해 조선전기의 기록을 불타 없어졌지만 조선 후기 약 280년, 매일의 기록이 여기 있습니다.”
문화부 장관의 설명을 들으며 장서각의 내부를 바라보던 학자들은 넋이 나가 버렸다. 멍하니 장서각의 서책들을 보던 학자들 가운데 한 명이 문화부장관에게 물었다.
“매일이라고 하셨습니까?”
“예. 매일입니다.”
“국, 국역본은?”
“작업에 들어가고 있습니다만...”
문화부 장관은 말을 흐렸다. 그 모습에 학자들이 다급히 대답했다.
“번역 작업이 필수입니다!”
“자금이 필요하다면 제가 있는 학교의 이사회와 재단을 설득해 얻어내겠습니다! 이것은 인류 모두의 보화입니다!”
“협조를 해주신다니 고맙습니다.”
대답을 하는 문화부 장관의 얼굴에는 희비가 잔뜩 섞여 있었다.
‘자금으로만 해결된다면 다행이지만….’
조선왕조실록의 국역본은 프린트되자마자 바로 인쇄에 들어갔다. 그렇게 인쇄된 국역본은 같이 인쇄된 원본과 함께 여러 전문 학원-독립 이후 대학으로 바뀐-의 도서관에 배치되었는데, 소문을 듣고 찾아온 유림과 지방 양반들이 국역본과 원본을 보고는 곧바로 상소(?)를 올리기 시작했다.
-국역본 어디어디 부분의 해석은 잘못되었다. 언문을 해석하면 이러이러하다고 된 것인데 국역본은 이러저러하다고 되어있다.
비슷한 상소가 계속해서 올라오자 김 대통령과 각료들은 정 수석차관을 호출했다. 내용을 들은 정 수석차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성은 높습니다. 우리 시대에 한학 전문가들의 수는 적은 편이었으니까요. 오차가 발생할 확률은 큽니다. 차라리 지금 조선왕조실록 국역본의 수정 작업과 승정원일기의 국역 작업을 시행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다른 일도 할 것이 많네만?”
“효율을 생각한다면 지금이 적기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한학에 정통한 이들은 점점 적어질 테니 말입니다.”
정 수석차관의 말이 합당하다 생각한 대통령과 각료들은 바로 신문에 광고를 냈다.
-승정원일기를 풀어쓰고, 풀어 쓴 조선왕조실록의 잘못된 부분을 고칠 사람들을 모집합니다.
광고를 본 수많은 지방 양반들이 앞다퉈 지원서를 접수했다.
“이는 우리 가문에 영광이 될 일이로다!”
“유서 깊은 우리 가문의 선조들이 했던 바를 직접 볼 수 있는 일이니 어찌 영광이 아닐쏘냐!”
그에 따라 수많은 지원자들이 몰려들었고, 일은 수월하게 진행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는 심각한 착각이었다.
“이 문장은 그 뜻이 아니오!”
“어째서 문장을 거기서부터 끊는단 말이오!”
띄어쓰기나 맞춤법 같은 것은 전혀 없던 한자의 특징으로 인해 문장의 시작과 끝을 어디로 설정하느냐에 따라 문장의 뜻이 완전히 반대로 나오는 경우가 왕왕 벌어졌고, 그때마다 번역에 참석한 이들은 목에 핏대를 올려가며 설전을 벌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동인과 서인, 남인과 북인,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었던 파벌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었고 그에 따라 문장을 놓고 해석하는 것도 완전히 달라 분쟁이 발생하는 일도 벌어졌다.
‘지고하신 대통령님과 여러 각료 분들의 면면부절한 노력에 하늘도 감읍해서 나라를 다시 찾은 지 어언 몇 년….’으로 시작해 ‘저 아무개는 졸렬한 성품으로 아전인수(我田引水)와 곡학아세(曲學阿世)를 일삼으니 이에 사약을 내려 일벌백계(一罰百戒)의 본을 삼으시어, 후세가 제대로 된 실록과 일기를 보게 하시옵소서.’와 같은 상소문들이 빗발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이건 무슨 사극 찍는 것도 아니고….”
줄지어 밀려오는 상소문을 본 문화부장관과 정 수석차관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